티스토리 뷰
전체주의 기원(267-318p)
제2부 제국주의
제5장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해방
(267)1884년에서 1914년에 이르는 30년은 아프리카 쟁탈과 범운동의 탄생으로 끝난 19세기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시작된 20세기를 갈라놓는 분기점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유럽 내부의 핵심 사건은 정치적 지배에 대한 포부 없이 먼저 경제력에서 두드러진 역량을 발휘한 역사상 최초의 계급인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해방이었다.
(268) 독일 부르주아 계급이 히틀러의 운동에 모든 것을 걸고 폭민의 도움으로 통치하겠다는 열망을 가졌을 때 변했지만, 그것은 너무 늦은 시도였음이 곧 증명된다. 부르주아 계급은 국민국가의 파괴에 성공했지만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러 승리라 할 수 없는 승리였다. 폭민은 혼자 힘으로도 정치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입증했고 다른 모든 계급 및 기관과 협력하여 부르주아 계급을 타파했던 것이다.
1. 팽창과 국민국가
269. 독일의 오이겐 리히터, 영국의 글래드스턴, 프랑스의 클레망소처럼 제국주의에 반대하거나 이를 무시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현실감각을 상실하여 무역과 경제가 이미 모든 국가를 세계 정치 속으로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독일의 오이겐 리히터, 영국의 글래드스턴, 프랑스의 클레망소처럼 제국주의에 반대하거나 이를 무시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현실감각을 상실하여 무역과 경제가 이미 모든 국가를 세계 정치 속으로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국가의 원칙은 편협한 지역적 무지에 이르렀고 제정신으로 치르는 전투는 패배하기 십상이었다.
270 그들은 통찰에 의해서라기보다 본능적으로 이 새로운 팽창 운동, 즉 “애국주의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은…… 돈벌이이고”(휴엡-슐라이덴) 국기는 ‘상업적 자산’(로즈)이 되는 팽창 운동이 국민국가라는 정치 제도를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국민국가는 정부에 대한 동질적인 주민의 능동적 동의에 (“매일의 인민투표”)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통일적인 원칙이 없었다. 따라서 정복할 경우에 통합보다 동화시켜야 하고 정의보다 동의를 강요해야 했다. 다시 말하면 독재로 변질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정치의 영원한 최상 목적인 팽창은 제국주의의 중심적인 정치 이념이다. 팽창은 일시적 약탈 행위도 정복을 통한 지속적 동화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정치사상과 행위의 유구한 역사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개념이다. 이 개념이 이렇게 놀라운 독창성을 가지는 이유는 이 개념이 실제로 정치 개념이 아니라 사업 투기의 영역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이 영역에서 팽창은 19세기의 특징인 산업 생산과 경제 거래의 영속적인 확장을 의미한다.
272영국의 초기 ‘제국 건설자’는 정복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영구적인 지배 방법이라 말했지만, 가장 가까운 이웃인 아일랜드 사람들을 대영 제국이나 영연방의 광범위한 구조 안에 병합시킬 수 없었다.
“아일랜드를 멸하는 데 실패한”(체스터턴) 이후 영구적인 정복에 의한 지배는 아일랜드의 국민적 저항 정신만 일깨웠을 뿐 “영국의 잠자는 제국주의 정신”은8)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274이후 정복이 공식적으로 비난받고 국경 분쟁을 조정하는 데에 미미한 역할만을 해온 것은 인도주의적 고려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런 실패의 경험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국기 아래 유럽을 통합하고자 했던 나폴레옹의 실패는 한 국가에 의한 정복은 피정복 민족의 민족의식을 일깨워 정복자에 대한 반란을 유발하거나 전제정치를 낳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전제정치는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이민족의 지배에는 성공할지 모르지만, 자국민의 국가 제도를 파괴해야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274 프랑스인은 “프랑스는 프랑스 문명의 이기를 확산하고자 행진한다”고 믿으면서, 단독으로 국가 체제를 제국적 정치 구조로 발전시키고자 시도했다. 그들은 피정복 민족은 한편으로 프랑스 문명의 동호인이라는 점에서 형제로, 다른 한편으로 프랑스의 빛을 따르고 지도를 받는다는 점에서 속국민으로 취급함으로써 해외의 점령국들을 국가 조직에 병합하고자 했다.
이런 야심 찬 기획은 모국을 위해 해외 점령국을 야만적으로 착취하는 결과를 낳았다. 모든 이론과는 정반대로 프랑스 제국은 실제로 국가 방위의 관점에서 평가되었으며, 식민지는 프랑스의 주민을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흑인 부대를 만들 수 있는 군인의 나라로 간주되었다.
275 위임 통치 체제로 타협한 영국의 제국주의자는 민족 자결의 수호신처럼 보였다. 그들이 곧 ‘간접 통치’에 의한 위임 체계, 즉 행정관이 이 민족을 “직접 통치하지 않고 그들의 종족이나 지방 당국을 중간에 내세워” 통치하는 위임 체계를 오용하기 시작했다
276 이들은 “영국의 행정, 정치 체계를 후진국 주민의 통치에 적용하기를 꺼렸으며,” 영국 왕실의 광범위한 속령들을 영국에 종속시키는 것을 원치 않았다.
276 모국의 제도가 다양한 방식으로 전체 제국에 통합되어 있던 고대의 제국 구조와 달리, 제국주의의 특징은 국가 제도가 식민지를 통제할 수는 있었지만 그 행정부와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276 식민지 관청은 ‘경험 없는 다수’인 국민의 개입에 항상 저항했는데, 국민은 ‘경험 많은 소수’인 이 제국주의 행정관들에게 모국에서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정의와 자유의 수준에 따라 통치하라고, 다시 말해 모국을 “모방하라고” 강요했다
277 팽창을 위한 팽창 운동이 국민국가에서, 즉 어떤 다른 정치 체제보다 국경을 그리고 정복 가능성의 제한을 특징으로 하는 국민국가에서 성장했다
*국민국가; 프랑스 시민혁명이후 국가모델, 국민통합, 국가공동체 일치
278 제국주의에 대한 무성의한 반대의 비극은 새로운 제국주의 사업가들이 많은 국회의원을 매수할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니다. 청렴결백한 사람들이 제국주의가 세계 정치를 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은 사실이 부정부패보다 더 나빴다. 클레망소의 경우도 그랬다. 그는 프랑스 국가의 미래를 너무 걱정했기 때문에 식민지의 인력은 침략자에 대항하여 프랑스 시민을 보호할 것이라는 희망에서 ‘제국주의자’가 되었다.
278 영국에서는 의회가 통제하던 런던의 제국주의 정부와 식민지 행정관을 구분하기 위해 이 세력을 “제국의 대리인”이라 불렀다.
“제국의 대리인”(오히려 국가의 대리인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과 식민지 행정관 사이의 갈등은 영국 제국주의 역사의 주요한 실마리다.
279 독일에서도 국회의원과 아프리카의 식민지 행정관 사이에 비슷한 적대감이 팽배해 있었다.
280 프랑스의 통치도 마찬가지였다. 파리 정부가 임명한 총독들은 알제리에서처럼 식민지 주민들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았거나, 아니면 원주민을 통치하는 기존 방식을 개혁하기를 거부했다.
280 법령이나 자의적 관료에 의한 통치에 반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국가의 위대한 영광을 위해 속령을 영구 보존하려는 사람들보다 제국주의자들이 피지배 민족을 현대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조건을 더 잘 알고 있었다.
2. 권력과 부르주아 계급
280 제국주의자는 국가를 실제로 수립하지 않고도 정치권력을 확대하기를 원했다. 제국주의 팽창은 기이한 경제 위기 때문에 촉발되었다. 즉 과잉 저축의 결과로 자본이 과잉 생산되고 ‘남아도는’ 돈이 발생했는데, 이 돈이 국민국가의 경계 안에서는 생산적 투자처를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권력의 투자가 돈의 투자를 위한 길을 열어주지 않는 대신 권력의 수출이 수출된 돈의 뒤를 온순하게 따르는 일이 처음으로 발생했다. ... 제국주의 시대가 등장하기 바로 직전의 10년, 즉 1870년대는 사기와 금융 스캔들, 주식 투기가 유례없이 증가한 시기였다.
281 제국주의 이전의 발전을 주도한 개척자들은 유대계 금융업자였다. 이들은 자본주의 체계 밖에서 재산을 얻었는데, 국제적으로 보증된 차관을 얻기 위해 성장하는 국민국가는 이들을 필요로 했다.
281 유대계 국제 금융업자들은 근본적으로 국제적인 사업 운용에 안성맞춤이었다.
281 수수료를 챙기는 금융업자도, 심지어 국가가 지원한다 해도 이 주주들에게 위험을 보장해줄 충분한 권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오로지 국가의 물질 권력만이 그렇게 할 수 있었다.
281 돈의 수출에 이어 통치권력도 수출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면서, 일반적으로 금융업자들, 특수하게는 유대인 금융업자의 입지는 상당히 약화되었다. 제국주의적 무역과 기업의 지도권은 점차 자국 부르주아 계급의 구성원들이 넘겨받게 된다.
282 유대인에게 실질적 권력의 양도를 꺼렸던 정부와 정치적 함의를 지닌 사업에 참여하기를 꺼렸던 유대인의 주저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유대인 집단의 막강한 부에도 불구하고 초기 단계의 투기와 수수료 벌이가 끝난 후에 진정한 권력 투쟁이 전개되지 못했다.
282 각국 정부는 사업이 점차 정치적 이슈로 전환되고 비교적 소규모 집단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국가적 이해 자체와 동일시되는 경향이 증가하는 현상을 염려의 눈초리로 관망했다.
282 공권력을 확대 적용해야만 외국 투자 운동을 합리적으로 조정할 수 있었고 모든 저축을 도박에 걸도록 조장한 잉여 자본의 투기 현상을 다시 국가의 경제 시스템 안으로 통합할 수 있었다. 국가는 권력을 확대했다.
282 경찰과 군대 같은 공권력은 국가의 틀 안에서는 다른 국가 제도와 나란히 그리고 이 제도에 의해 통제되었지만, 미개하거나 약한 국가에서는 이 제도와 분리되어 국가를 대표하는 지위로 올라갔는데, 이것이 권력의 수출로 나타난 결과다. 산업도 정치 조직도 존재하지 않으며 폭력이 어떤 서구 국가에서보다 더욱 허용되는 이 후진 지역에서는 이른바 자본주의의 법칙이 실제로 현실을 창조할 수 있었다.
283 돈은 결국 돈을 낳을 수 있었다. 그것은 권력이 경제법이든 윤리법이든 모든 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부를 독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출된 돈이 권력의 수출을 자극하는 데 성공할 때에만 소유주의 계획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무제한적 권력 축적만이 무제한적 자본 축적을 가져올 수 있었다.
283 응급조치로 출발했던 해외 투자와 자본 수출은 수출된 권력의 보호를 받으면서 곧 모든 경제 체제가 영구적 특징이 되었다. 제국주의적 팽창 개념에 따르면 팽창은 그 자체 목적이지 잠정적 수단이 아니다. 이런 팽창 개념은 국민국가의 가장 중요한 영구적 기능 가운데 하나가 권력의 팽창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지면서 정치사상에 등장했다. 국가가 고용한 통치자들은 곧 국가 안에 새로운 계급을 형성했으며, 활동 영역은 모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모국의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283 이 제국주의 정치 철학이 새로운 까닭은 폭력에 우월한 지위를 부여했기 때문도 아니고 권력이 근본적인 정치 현실이라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도 아니다. 폭력은 정치 행위에서 언제나 최후의 논쟁 수단이었으며, 권력은 늘 통치와 지배의 가시적인 표현이었다. 권력을 그대로 내버려둘 경우에 늘 더 많은 권력만을 성취할 것이며, (법을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을 위해 관리되는 폭력은 파괴적 원칙으로 변하여 위반할 것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84 무제한적 팽창이란 개념은 자본의 무제한적 축적에 대한 희망을 유일하게 실현할 수 있으며, 목표도 없이 권력을 끝없이 축적하게 한다. 그런데 이 개념은 새로운 정치 체제의 설립—제국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항상 정복의 궁극적 결과였던—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무제한적 팽창의 논리적 결과는 피정복 민족의 것이든 모국민의 것이든 모든 생활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새롭든 오래되었든 모든 정치 구조는 그대로 내버려두면 안정적 힘을 발전시키고 이 힘은 영원한 변화와 팽창을 저지하기 때문이다.
284 19세기 제국주의자는 자민족과 다른 민족이 소유한 안정된 정치 구조를 해체하고 파괴했다. 단순한 폭력의 수출은 하인을 주인으로 만들었지만,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주인의 특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모국에 폭력이 독점적으로 집중되고 엄청나게 축적됨으로써 하인은 파괴의 적극적 대리인이 되었다. 그래서 결국 총체적 팽창은 국가와 민족을 파괴하는 힘으로 변했던 것이다.
285 부르주아 계급은 국민국가에 의해 또 공무에 대한 관심 부족 때문에 오랫동안 통치에서 배제되었지만, 이제 제국주의 덕분에 정치적으로 해방되었던 것이다.
285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라기보다 부르주아 계급이 정치 지배를 실현하는 첫 단계로 이해해야 한다. 유산계급이 통치하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재산권을 확실하게 보호해줄 것 같은 국가라면 어떤 유형이든 만족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국가는 그들에게 잘 조직된 경찰력일 뿐이었다. 이런 그릇된 조심성이 전체 부르주아 계급을 정치 체제의 권외에 머무르게 했다. 왕정 체제의 백성이나 공화국의 시민이기 이전에 그들은 본질적으로 사적 개인이었다. 이런 사적 특성과 돈벌이에 대한 일차적 관심은 일련의 행동 유형을 발달시켰다. 이 행동 유형은 경쟁 사회에서의 경험에서 유래하는 속담, “어떤 것도 성공처럼 성공하지 못한다” “권력은 옳다” “정의는 편의다” 등의 속담에서 표현된다.
285 제국주의 시대에 사업가는 정치가가 되고 정치인으로서 갈채를 받는 반면, 정치인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그들이 성공한 사업가의 언어로 말하고 ‘대륙적으로 사고할’ 때뿐이다. 이 사적인 관행과 책략은 점차 공무의 운영 규칙과 원칙이 된다. ...
286 공익을 사적 이해관계에서 도출하려 시도했고 사적 이익을 위해 국가 공동체를 생각하고 그 윤곽을 그렸던 위대한 사상가의 철학에 현대의 권력 신봉자들이 완전히 동의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286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나타나는 정치 이론에 따르면 국가는 공무와 관련하여 개인의 이익이 옳은가 아니면 그른가를 결정하는 구성법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이익 자체에 근거하므로 “사적 이익은 공적 이익과 같다.”
286 홉스의 논리는 300년이 흐른 지금도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탁월성에서 추월당하지 않은 분석을 제공한다. “이성은…… 계산일 뿐이다.” “자유로운 주체, 자유 의지…… 의미 없는…… 말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불합리하다.” 인간은 이성도 없고 진리를 위한 능력도 없고 자유 의지도 없는—다시 말해 책임질 능력이 없는—존재이며,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의 기능일 뿐이다.
287 국가의 존재 이유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위협을 느끼는 개인의 안전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287 홉스의 인간은 국가가 패배해도 국가에 대한 충성 의무가 없으며, 포로로 붙잡혔을 경우에는 국가를 배반해도 용서받을 것이다.
288 홉스의 인간관은 국가 공동체에 토대를 제공하려는 그의 목적과 맞지 않으며, 대신 모든 진정한 공동체를 쉽게 파괴할 수 있는 일관된 행동 유형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홉스가 고안한 국가 공동체의 내재적이고 공인된 불안정성으로 귀결된다.
289 이 새로운 국가 체제는 17세기에 발생한 새로운 부르주아 사회를 위해 고안되었으며, 이 인간관은 그 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유형의 인간을 위한 스케치다. 국가 공동체의 토대는 권리의 위임이 아니라 권력의 위임이다.
289 국가 공동체는 살해에 대한 독점권을 요구하고 그 대가로 죽지 않을 수 있는 조건부 보장을 제공한다. 이 법은 절대권력으로부터 직접 흘러나오기 때문에, 그 지배를 받는 개인의 눈에 법은 절대적 필요성을 대변한다. 국가의 법에 관해서는 옳고 그름의 문제는 없으며, 단지 절대적인 복종, 부르주아 사회의 맹목적 순응주의가 있을 뿐이다.
289 개인은 정치 권리를 박탈당하고 점차 자신의 사생활과 개인적 운명에 새로운 관심을 가지게 된다. 개인은 모든 시민이 연관된 공적인 일을 관리할 수 있는 기회로부터 배제되었기 때문에, 사회 내의 적법한 자기 자리를 잃고 또 동료와의 자연적 관계를 상실한다. 사회 안에서 동료와의 관계는 경쟁의 형태를 띠게 된다
290 개인은 국가에 자신의 정치 권리를 넘기면서 사회 책임도 위임한다. 즉 그는 범죄자로부터 보호해달라고 국가에 요구하는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야 하는 짐으로부터도 면제해달라고 요구한다.
291 홉스의 국가 공동체는 동요하는 불안정한 구조이며 항상 외부로부터의 새로운 지주를 공급받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 공동체는 하룻밤 사이 붕괴하고, 자신의 기원인 사적 이해관계의 목적 없고 무분별한 혼란으로 빠질 것이다. 홉스는 자연 상태의 이론, 즉 만인의 만인에 대한 “영원한 전쟁의 조건”에 관한 이론에서 권력 축적의 필연성을 구체화한다.
291 홉스는 정치 구조에 혁명적인 변화를 제안했을 때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행동 유형에서 필수적인 결론을 도출했다. 그는 새로운 계급의 새로운 욕구와 이해관계에 상응할 수 있던 새로운 체제의 윤곽을 그렸다. 그가 실제로 달성한 업적은 어떤 사람이 도래하는 부르주아 사회와 조화를 이루기를 원한다면 그가 되어야 하고 행동해야만 할 그런 인간상이었다.
291-292 인간적이고 신적인 모든 일의 원동력이 권력이라는 홉스의 주장은 재산의 무한한 축적은 권력의 무한한 축적에 근거한다는 확고한 이론적 전제조건에서 유래한다. 즉 권력의 끝없는 성장과 일치하기 위해 개인들, 민족들과 결국 모든 인류를 끌어들이는 역사의 무한한 과정 말이다. 자본 축적의 무제한적 과정은 증가하는 재산을 부단히 성장하는 권력으로 보호할 수 있는 ‘무제한적 권력’을 가진 정치 구조를 필요로 한다. 새로운 사회 계급의 근본적인 역동성을 인정한다면, “더 많은 권력과 수단을 획득하지 않고 현재 가진 것으로 잘살 수 있는 권력과 수단을 그는 확실하게 보장할 수 없다”는 말은 전적으로 맞다.
292 자본의 무한한 축적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권력의 무한한 축적 과정은 19세기 후반의 ‘진보적’ 이데올로기를 결정했으며 제국주의 부상의 전조가 되었다. 재산의 무제한적 성장이라는 소박한 환상이 아니라 권력 축적은 이른바 안정적인 경제 법칙을 보장할 유일한 방책이라는 깨달음이 진보를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293 제국주의 시대에 권력의 철학은 엘리트의 철학이 되었다. 엘리트는 권력에 대한 갈증을 오로지 파괴를 통해서만 가라앉힐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인정할 자세가 되어 있던 사람들이었다.
294 홉스는 철학자였기 때문에 발전의 절정에 이르기까지 300년이 걸렸던 부르주아 계급의 발생 과정에서 새로운 계급의 반전통적 특성을 탐지해낼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새로운 계급의 발생에서 도출되는 ‘결과의 계산’인데, 이 계급의 실존은 본질적으로 동력으로서의 재산, 새로운 재산 생산 장치에 묶여 있다. 부르주아 계급을 탄생시킨 이른바 자본 축적은 재산과 부의 개념 자체를 변화시켰다. 재산과 부는 이제 축적과 획득의 결과가 아니라 시작으로 간주된다. 부르주아 계급을 소유 계급으로 분류하는 것은 단지 피상적으로 정확할 뿐이다. 왜냐하면 삶을 영원히 부유해지는 과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나 돈을 단순히 소비를 위해 유용한 물건이 아니라 어떤 신성한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속할 수 있다는 것이 이 계급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295 모든 개인 욕구와 소비 가능성의 범위를 넘어 자동적이고 부단한 부의 성장을 계획하며 인간 삶의 한계를 초월함으로써 개인의 재산은 공적 사안이 되고 단순한 사생활의 영역을 벗어나게 된다. 본질상 일시적이며 인간의 자연 일생에 의해 제한을 받는 사적 이익은 이제 공적 사안의 영역으로 달아나고, 끊임없는 축적을 위해 필요한 무한한 시간을 이 영역에서 빌려온다. 이 사회는 개미와 벌의 것과 유사한 사회를 창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개미와 벌의 사회에서 “공적 재산은 사유 재산과 구분되지 않는다. 천성적으로 자신들의 사적 이익에 마음을 쓰지만,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공익을 산출한다.”
296 홉스는 제대로 인정받은 적은 없었지만 진정한 부르주아 계급의 철학자였다. 끝없는 과정으로 사유된 부의 획득은 축적 과정이 조만간에 존재하는 모든 지역 경계를 개방하라고 강요할 것이므로 정치권력의 점유에 의해서만 보장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무한한 획득의 길로 들어선 사회는 이에 상응하는 권력 생산의 무한한 과정에 적합한 역동적인 정치 조직을 설계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미리 내다보았다. 심지어 그는 순전히 상상의 힘으로 그런 사회와 그 전제적인 정치 체제에 꼭 들어맞을 새로운 인간 유형의 주요한 심리적 특성의 윤곽을 그릴 수 있었다. 홉스는 이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필연적으로 권력 자체를 숭배할 것임을 예견했다.
개개의 구성원이 축적하고 독점한 권력에 기반을 둔 국가는 필연적으로 각 개인을 무력하게 만들고 그의 자연적·인간적 능력을 박탈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을 권력 축적 기계의 한 부품으로 강등시키고, 이 기계의 궁극적 운명에 대해 장엄한 사유를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도록 내버려둔다. 이 기계의 구조는 내재적 법칙을 단순히 따름으로써 지구를 멸망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297 이 국가 공동체의 궁극적인 파괴 목적이 드러나는 곳은 인간의 평등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의 평등’으로 해석한 철학적 논리다. ‘영구 전쟁의 조건하에서’ 다른 국가들과 공존하면서, 무장한 국경 지대와 주변의 이웃을 향해 설치된 대포가 전쟁터에 있기 때문에, 국가 공동체는 “이익에 가장 이바지하는” 것 외에 다른 행동 법칙을 따르지 않으며, 서서히 약한 국가들을 멸망시켜 결국 “모든 사람에게 승리, 아니면 죽음을 제공하는” 최후의 전쟁에 이르게 될 것이다.
297 권력 축적 기계장치가 없다면 지속적 팽창은 가능하지 않은데, 이 기계는 자신의 무한한 과정 속으로 삼켜버릴 수 있는 재료들을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된다. 마지막 승자로 남은 국가가 ‘혹성을 합병하는’ 길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권력 생산의 무한한 과정을 새로 시작하기 위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폭민과 자본의 동맹
298 제국주의가 1880년대 아프리카 쟁탈전과 함께 정치 무대로 들어섰을 때, 사업가는 이를 장려했고 권력을 잡고 있던 정권은 이에 열렬히 반대했으며 놀랍게도 광범위한 교육 계층이 이를 환영했다. 제국주의는 이 교육 계층에 신이 내린 선물 같았고 모든 악의 치유책이며 모든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용이한 만병통치약 같았다. 제국주의가 어떤 점에서는 이런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제국주의는 새로운 사회, 정치 세력으로부터 위협받던 정치, 사회 구조에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유예 기간을 주었던 것이다.
299 처음에 팽창은 자본의 과잉 생산의 출구로서 무해하게 보였으며, 자본 수출이라는 치료책을 제공했다. 불평등한 분배에 기초한 사회 체계에서 자본가의 생산으로 인한 부의 엄청난 증가는 ‘과잉 저축’으로 귀결된다. ...제국주의 시대가 시작되기 전 몇십 년 동안에 발생한 위기와 불황은 자본주의자에게 그들의 경제 생산 체계가 이제부터 “자본주의자 사회의 외부”에서 오는 수요와 공급에 좌우된다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자본주의가 경제 구조 전체에 깊이 침투하여 모든 사회 계층이 그 생산과 소비 시스템의 궤도 안에 들어오면, ...아직 자본주의의 지배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비자본주의적 수요와 공급을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국가들로 침투해 들어가든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299-300 제국주의 시대를 열었던 1860년대와 1870년대의 불황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실은 부르주아 계급이 처음으로 이 불황 때문에, 수세기 전 “자본의 원초적 축적”(마르크스)을 가능하게 했고 이후의 모든 축적을 작동시켰던 단순한 강탈의 원죄가 결국 반복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
300 포화상태에 이른 자국 시장과 원자재의 부족, 위기의 증가에 대한 최초의 반응은 자본 수출이었다. 이는 사기와 금융스캔들, 주식 시장 투기와 같은 전대미문의 난장판으로 끝났고, 외국 투자가 국내 투자보다 더욱 급속하게 증가한 이후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엄청난 손실은 엄청난 이윤의 약속에서 비롯되었다. 작은 돈의 소유주들은 그만큼 더 빨리 돈을 잃었고, 큰 잉여 자본의 소유주들은 갑자기 전쟁터라 할 수 있는 곳에 자신들만 남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300 돈의 수출과 외국 투자 자체는 제국주의가 아니며 또 반드시 팽창이라는 정치적 책략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 그들이 투자에 대한 정부의 보호를 요구했을 때 그들은 국가의 삶에 재진입할 수 있었다. 이렇게 호소를 하면서 그들은 부르주아 사회의 기존 전통, 즉 항상 정치 제도를 개인 재산의 보호 도구로만 간주하라는 전통을 따랐던 것이다. 새로운 자산가 계급의 발생과 산업 혁명의 다행스러운 시기적 일치가 부르주아 계급을 생산자이며 생산을 자극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301 팽창은 잉여 자본에만 하나의 도피처가 된 것은 아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팽창이 잉여 자본의 소유자들을 쓸모없고 기생적인 존재로 남을지도 모를 위협적 전망으로부터 보호해주었다는 것이다. 팽창은 불평등한 분배의 결과로부터 부르주아 계급을 구해주었으며, 부가 더 이상 국가의 틀 안에서 생산 요소로 사용되지 못하고 전체 공동체의 이상인 생산과 충돌하게 된 시기에 소유의 개념을 다시 활성화했다.
301 잉여 재산보다 더 오래된 것은 자본주의 생산의 다른 부산물이다. .. 할 일이 없어 늘 한가한 사람들은 잉여 재산의 소유자만큼이나 공동체에 무용지물이었다. 이들이 사회에 실질적 위협이 된다는 사실은 19세기 내내 인식되었고 이들의 수출은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영토뿐만 아니라 미국 영토에 사람들을 거주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제국주의 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사실은 남아도는 이 두 세력, 잉여 자본과 잉여 인력이 손을 잡고 함께 나라를 떠났다는 것이다. 통치권력을 수출하고 또 국가가 재산과 노동을 투자한 지역을 합병하는 팽창은 부와 인구의 측면에서 증가하는 손실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처럼 보였다. 제국주의와 무제한적 팽창 개념은 영구적인 해악에 대해 영구적인 치료제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302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잉여 자본과 잉여 인력이 함께 묶여 수출된 최초의 국가가 그 자체로 무용지물이 되었다. ...모든 유럽 국가가 인도에 있는 재산이나 상업적 이해관계가 없어질 때마다 그렇게 했듯이 영국은 아프리카에서 철수할 가능성이 높았다.
302 남아프리카가 예기치 않게 ... 1870년대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고 1880년대 거대한 금광이 발견된 것이다. .. 금광 채굴자, 모험가와 대도시의 인간쓰레기가 산업 국가의 자본과 함께 암흑 대륙으로 이주한다. ...이들은 함께 최초의 기생충 천국을 건설했다. 이 기생충의 생명의 근거는 금이었다. 남아도는 돈과 남아도는 사람의 산물인 제국주의는 가장 쓸모없고 비현실적인 상품을 생산하는 일로 놀라운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303 “노동자들은 미국인들이 자신들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자신들과 가장 깊은 연대감을 나누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상품을 국내로 들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노동자들은 또한 러시아, 프랑스와 독일도 지역적으로 같은 짓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자신들이 주의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무역을 할 장소는 아무데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제국주의자가 되었고 노동당은 이를 따른 것이다.”
303 마르크스주의자의 관점에서 폭민과 자본의 동맹이라는 새로운 현상은 너무나 부자연스럽고 계급 투쟁의 교리와도 명백하게 배치되기 때문에 제국주의적 시도의 실질적 위험
304 제국주의에 대한 대중의 저항은 기이하게도 미약했고 자유주의 정치인이 저지른 수많은 모순 행위와 지키지 못한 약속 등은 종종 기회주의나 뇌물 탓으로 돌려졌다. 그런데 여기에는 더 깊은 다른 원인이 있다.
304 국가 자체가 계급으로 심각하게 분열되었고 계급 투쟁은 너무나 보편적으로 현대 정치 생활의 특징이 되었으며 국가의 결집력 자체가 위험에 처해 있다고 확신했는데, 이 점에서 국민들도 생각이 같았다. 팽창이 국가 전체에 공동의 이익을 제공한다면, 그리고 제공하는 한 팽창은 구원자로 보였다. 주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제국주의자들은 “애국주의에 붙어 사는 기생충”이 되었다.
305 팽창은 무제한적이라고 가정했기 때문에, 제국주의적 팽창의 모험은 영원한 해결책으로 보였다. 더 나아가 제국주의는 민족주의 슬로건보다는 견고한 경제적 이해관계의 토대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익이 개인 이익의 총계와 동일시되는 이해 충돌의 사회에서 팽창 자체는 다시금 국가 전체의 공동 이익처럼 보였다. 유산 계급과 통치 계급은 모든 사람에게 경제 이익과 소유에 대한 열정이 국가의 심오한 토대라는 사실을 납득시켰기 때문에, 심지어 비제국주의 정치인조차 공동의 경제 이익이 지평에 나타나면 쉽게 설득당하여 양보했다.
305 두 원칙의 내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왜 민족주의가 그토록 분명하게 제국주의적 경향을 발전시켰는가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민국가가 이민족 통합에 부적합하면 할수록 이들을 더욱 탄압했다....처음부터 각국의 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은 ‘정당들을 초월해’ 있다고 또 국가 전체를 대변하는 유일한 사람들이라고 역설했고 자랑했다.
305 제국주의 정치가들은 어디에서나 경멸과 무관심으로 국내 문제를 대했다.
..단합을 위한 외침은 국민을 전쟁으로 유도하는 전장의 구호를 정확하게 닮아 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보편적이고 영구적인 단합의 도구에서 보편적이고 영구적인 전쟁의 세균을 감지하지 못했다.
306 정부 관료는 어떤 다른 집단보다 제국주의가 민족주의적 형태를 갖추는 데 적극적으로 관여했으며,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혼동에 주된 책임을 져야 한다. 국민국가는 영원한 관료 체제로서 공무원 집단을 만들었고 그들에게 의존했다. 이들은 계급 이해와 정권의 변동에 상관없이 봉사했다. ... 국가의 몰락은 국가의 영구적인 행정 부패 그리고 공무원은 국가가 아니라 유산계급에 고용되어 있다는 일반의 확신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식민지는 .. “상류 계급을 구제하는 거대한 외부 시스템”이 아니었다. 식민지는 멀리 떨어진 국가를 지배하고 낯선 민족을 통치하면서도 바로 영국의 이익에 종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발견한 영국 민족주의의 중추가 되었다.
307 영국, 독일 또는 프랑스의 시민은 ... 본국에서 그는 경제적 이해관계나 사회적 의무의 그물망에 너무나 깊이 얽혀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계급 구성원에게보다 자기 계급에 속한 외국인에게 더 친밀감을 느낄 정도였다. 팽창은 민족주의에 새로운 유예 기간을 주었고 그래서 국가 정치의 도구로 받아들여졌다. 새로운 식민지 사회와 제국주의자 연맹의 구성원들은 “정당 투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을 가졌으며, 더 멀리 가면 갈수록 자신들이 “오로지 국가의 목적을 대변한다”는 믿음은 더욱 강해졌다.
307 자본과 폭민의 동맹은 시종일관 제국주의적이었던 모든 정책의 출발점에서 발견된다. 몇몇 국가, 특히 영국에서 너무 부자인 사람들과 너무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새로운 동맹은 해외 재산에만 국한되었다. ..다른 국가, 특히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자본가와 폭민의 동맹은 범운동의 형태로 본국에 영향을 미쳤고, 좀더 작은 범위지만 프랑스에서는 이른바 식민지 정책으로 본국에 영향을 미쳤다. 이 ‘운동들’의 목표는, 전체 국가를 (국가의 ‘잉여’ 부분만이 아니라) 제국주의화하는 것이었고 또 외국 영토를 강탈하고 이방 민족을 영구히 억압하기 위해 국가를 조직하는 방식으로 국내와 국외 정책을 결합하는 것이었다.
308 자본주의 조직에서 폭민이 발생하는 현상은 이미 일찍이 관찰되었고 ...그러나 사실은 폭민이 성장하는 산업 노동자와도 또 더욱 분명하게는 국민 전체와도 동일시될 수 없으며, 실제로 모든 계급의 폐물들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폭민은 이렇게 구성되었기 때문에 폭민과 그 대표자들이 계급 차이를 폐지한 것처럼 보였고, 또 계급 국가 밖에 있는 그들은 왜곡된 형태 또는 희화화된 형태의 국민이라기보다 국민 자체(나치가 말하듯이 국가 공동체)처럼 보였다.
309 당시 새로이 폭민과 그 지도자들이 제안한 도덕 수준의 혁명적 변화를 상류 사회가 결국 수용할 자세를 보인 것은 주로 제국주의에 앞서 발생한 위기와 경기 침체 시기에 부르주아 계급이 획득한 통찰력 덕분이었다....결국 독일 부르주아 계급은 위선의 가면을 벗어던졌고 공개적으로 폭민과의 관계를 고백했으며, 자신의 소유권과 이익을 옹호하라고 명시적으로 그들에게 위임했다.
310 상류 사회와 폭민의 유사성은 프랑스에서는 혁명적 전통과 비교적 약한 산업화로 인해 규모가 작은 폭민이 나타남으로써 프랑스의 부르주아 계급은 결국 국경 너머에서 도움을 찾게 되고 히틀러 독일과 동맹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310 부르주아 계급의 장구한 역사적 진화의 성격이 유럽 국가마다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든지 간에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와 전체주의 운동에서 볼 수 있는 폭민의 정치 원칙은 부르주아 사회의 정치 태도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310 달리 말하면 제국주의의 탄생을 특징짓는 원인과 결과의 불일치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어떤 계기가 항상 부르주아 사회의 근본 구조 안에 들어 있는 힘을 작동시켰다. ... 제국주의 정치가들만이 이 폭민을 이용할 수 있었고 또 인종 교의만이 그들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제국주의는 현대의 심각한 국내, 사회, 경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보였다.
311 우리가 홉스의 끝없는 권력 축적 과정에 갇혀 있다는 것이 사실로 입증되었다면, 폭민 조직은 불가피하게 국가를 종족으로 전환하는 형태를 취할 것이다. 왜냐하면 권력 축적과 팽창 과정에서 다른 인간과의 자연적 관계를 모두 상실한 개인들을 통합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끈이 축적 사회의 조건에서는 달리 없기 때문이다.
312 인종주의는 실제로 서구 세계와 전체 인간 문명의 운명을 완성할지도 모른다. .. 학식 있는 과학자들이 무슨 말을 하건 간에 인종은, 정치적으로 말해서, 인류의 시작이 아니라 종말이고 민족의 기원이 아니라 쇠퇴이며, 인간의 자연적 탄생이 아니라 그의 부자연스러운 죽음이기 때문이다.
The End.
------------------------------------
[참고1]
민주주의는 각자 자기 스스로 벌어서 먹고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폭민주의는 자기 스스로 힘들게 일해서 벌어먹고 살아가기보다는 폭력, 집단행동, 전쟁 등을 통해서, 남의 것을 강탈해서 먹고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폭민주의는 고대 아테네 플라톤이 한 말이다.
아테네식 직접 민주주의라는 폭민주의 정치제도를 강제로 도입했던 많은 델로스 동맹국가들은 극심한 폭동과 폭란, 암살, 살인, 강간 등 혼란이 극심했다.
상류층 보존법칙에 의하면, 모두(100%)가 다 같이 잘 사는(10%)것은 있을 수 없다.
아고라에 쳐 앉아서 부자들 것을 빼앗아서 나눠 가지면 잘 살 수 있다고 떠들어대면 누가 일하지?
반대로 강력한 군국주의 국가체제인 스파르타를 이상적인 국가라고 인정했다. 현명한 철인들이 정치해야 한다.
비슷한 폭민주의 혼란을 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도 비슷한 결론을 내린다.
하류층 다 없애고 중산층 이상이 모여서 정치를 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이상국가를 꿈꾼 것이 틀렸다.
이상국가는 없다.
최선의 국가만 존재한다.
인간은 동물적 본성이 강하기에
혼란없는 이상국가는 불가능하다.
다만 쟁투를 벌이는 사람이 많을수록 혼란이 심해지고 적을수록 혼란이 작아진다.
정치인들이 개판이어서 국민삶이 힘들다 말하는 인간들은 폭민주의자들이다.
히틀러를 뽑은 것은 폭민주의자들이었다.
(by https://blog.naver.com/park7005/222268782835)
-----------------------------------
[참고2]
경리단길 홍석천 가게 이야기에서...
손석희, 앵커 브리핑, 인용됨.
"그저 시키는 일을 성실하게 수행했을 뿐이라던, 그러나, 결코 의문을 달지 않았던 영혼을 상실한 사람들.
그들이 어떻게 세상을 망쳐왔는지는 굳이 이 자리에서 다시 되풀이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한나 아렌트의 말 가운데 주목하고 싶은 다른 개념이 있습니다.
바로 ...폭민.
아렌트는 절망과 증오로 가득한 시민에게는 증오대상을 앞장서 만들어주는 누군가가 있게 마련이고 그들의 조작에 의해 시민은 바로 폭민이 된다고 한다. 폭민은 목적을 가진 누군가가 대중을 조작해 만들어내는 변질된 시민의 다른 름이다.
민주주의는 적을 품고 가야하는 제도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지만, 끊임없이 선동하고, 시민을 폭민으로 조장하기 위해 앞장서는 사람들." (by https://cafe.daum.net/essaypark/GLtX/364?q=%ED%8F%AD%EB%AF%BC&re=1)
------------------------------
'세미나 발제문 > 한나 아렌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체주의의 기원 8장 / 대륙의 제국주의 / 마포대교 / 22.05.24 (0) | 2022.05.25 |
---|---|
전체주의의 기원 6장 인종주의 이전의 인종사상 / 22.04.26 / 화니짱 (0) | 2022.04.20 |
전체주의의 기원 - 한나 아렌트 / 4장 드레퓌스 사건 / 화니짱 /22.03.29 (0) | 2022.03.29 |
전체주의의 기원 1부 1,2장 / 220308 / 통통 (0) | 2022.03.08 |
한나 아렌트 / 전체주의의 기원 / 서론 / 18.01.03 세미나 / 화니짱 (0) | 2018.01.12 |
- Total
- Today
- Yesterday
- 프롤레타리아 독재
- 루이알튀세르
- 야생의사고
- 스피노자
- 그람시
- 무엇을할것인가
- 신학정치론
- virtù
- 브루스커밍스
- 공화국
- 옥중수고
- 이데올로기
- 집단심리
- 계급투쟁
- 레비스트로스
- 헤게모니
- 옥중수고이전
- 생산관계
- 생산양식
- 한국전쟁의기원
- 딘애치슨
- 로마사논고
- 마키아벨리
- 개인심리
- 의식과사회
- 검은 소
- 루이 알튀세르
- 이탈리아공산당
- 알튀세르
- 안토니오그람시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