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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론 (아렌트)

6. 혁명 전통과 상실된 보고 발제 바다사자

 

3. 제퍼슨이 보기에 공화국은 구() 체계를 갖지 않은 채로 건국되면 안전하지 못했다.(382) 순수한 혁명에서 출현했던 평의회, 소비에트, 레테는 모든 혁명 정당 외부에 존재하는 자발적 인민 기구로서 정치인, 역사가, 정치이론가, 가장 중요하게는 혁명 전통 자체에 의해 무시되었다.(383) 평의회 체계가 새로운 공공 영역이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384) 읍은 아주 명백히 기초 자치체의 독창적인 모델이었으나 제퍼슨에게 구체계라는 이념은 추후적 사유의 결과였다. 이 제도는 혁명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그의 초기 생각을 구체화한 비폭력적 대안이었다. ‘공화국의 구원이 실제로 공화국에 흐르는 혁명 정신의 구원이었다. 시민들이 혁명 기간 중에 자진해서 행동하고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공공 업무에 참여하는 것을 각 구들이 허용하기를 기대했다.(385) 그러나 주 정부, 심지어 카운티 행정 기구조차도 너무나 규모가 크고 버거웠기 때문에 직접 참여를 허용치 않았다. 실제로 발생한 것은 대표 기구의 부패와 변질이었다. 부패와 변질은 평등주의적 공화정에서 발생할 개연성이 더 높다. 사적 이익이 아래에서부터 발생할 때 나타난다.(386) 이에 대한 오래된 해결방안은 프라이버시 권리를 공적으로 보장하고 공과 사의 경계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법체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미국 헌법에서 권리장전은 공권력으로부터 사적 영역을 보호하는 가장 철저한 법률적 보루를 형성한다. 그러나 지속적인 경제성장 아래 부패와 남용의 위험은 사적 이익에서 발생할 개연성이 더 높았다. 사적 개인에 의해 공권력이 악용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안은 공공 영역이 자신의 영역에 진입한 모든 사람들을 노출시키는 가시성에 있다.(387) 국가의 모든 구성원들이 공동 정부의 행동하는 구성원이 될 수 있었으며 자신의 능력 범위 내에 있는 권리와 의무의 상당 부분을 인격으로 처리할 수 있는 소규모 공화국은 대규모 공화국의 원동력이 되었다.(388) 구 체계는 능력 범위 내에서 모든 사람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389) 혁명의 궁극적 목적이 자유였고 자유가 출현할 수 있는 공적 공간의 구성, 자유의 확립이라면, 모든 사람이 자유로울 수 있는 가시적인 공간인 구 단위의 기초 자치체가 실제로 대규모 공화국의 주요 목적이다. 국내 문제에서 공화국의 주요 목적이 인민들에게 그러한 자유의 공간을 제공하고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어야 했기 때문이다.(390)

 

4. 혁명 과정 중에 새로운 정부 형태가 정규적으로 출현했다. 이 정부 형태는 제퍼슨의 구 체계와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1789년 프랑스 전역에 확산되었던 혁명적 결사와 지역 평의회를 반복하는 것 같았다.(391) 마르크스와 레닌은 파리코뮌의 섹션을 새로운 정부 형태에서 실현 가능한 핵심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혁명이 종결되면 해체되어야 할 단순한 도구로 간주했다. 국민국가의 전통에 확고한 뿌리를 두고 있던 이들은 혁명을 권력 장악의 수단으로 생각했고 권력을 폭력 수단의 독점과 동일시했다. 그러나 실제는 폭력 수단에 대한 갑작스런 통제력 상실이었으며 국민 자신의 조직화 충동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새로운 권력 구조의 형성이었다. 마르크스는 1871년 파리코뮌의 공동 헌법이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위한 최종적인 정치적 형태가 될 수 있다고 이해했으나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모든 개념과 어느 정도로 대립되는가를 의식했으며 혁명 평의회는 혁명의 임시 기구임을 결론 내렸다.(392) 레닌 또한 1905년 혁명의 와중에 완전히 새로운 권력 구조를 자발적으로 확립한 인민의 혁명적 창조성을 진심으로 찬양할 수 있었기 때문에 12년 후 10월 혁명에서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조직을 여러 가지 당 강령에 수용할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393) 새로운 평의회와 정당 체계가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지자 레닌은 볼셰비키 당의 권력 독점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평의회를 해체했다. 혁명 이후 소비에트 연방은 내내 기만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당 때문에 무기력해졌던 소비에트 체제를 수용하는 입장이 포함되어 있었다.(394) 프랑스 혁명은 정치무대에 직업 혁명가를 부상시켰다. 그들은 혁명을 유일한 대상으로 하는 연구와 사유, 이론과 논쟁 속에서 일생을 보냈다. 예술가와 작가들은 혁명가들과 하나가 되었다. 직업혁명가는 특정한 작업을 요구하지 않는 생활방식 때문에 특권을 향유할 수 있었다. 그들의 역할은 혁명을 준비하는 데 있지는 않다. 붕괴를 촉진시키고 인도하기 위해 거의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다. 러시아 1차 혁명 당시 파업의 물결은 전적으로 자발적이었으며 어떤 정치 단체나 노조 단체의 지원을 받지도 않았다. 직업 혁명가의 역할은 발발 이후 집권에 있으며 최대 장점은 그들의 이론과 정신적 또는 조직적 대비가 아니라 이름이 공개적으로 알려진 유일한 이름이라는 사실에 있다.(396) 비밀 결사들은 아주 비밀리에 활동하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들릴 수 없다. 집권자의 권위 상실은 공개적이고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비밀이 아니다. 그러나 혁명의 실제 과정에 미친 직업혁명가의 영향은 상당이 크다. 지나간 혁명에 부합하는 행동의 관점에서만 영향력을 계속 행사할 것이다. 혁명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것이 바로 그의 임무이기 때문이다.(398)

혁명의 과정에 나타난 평의회들의 공통된 특징은 형성되는 과정의 자발성이다. 혁명이 좌절되지 않고 일종의 복구를 수반하지 않는 곳에서는 일당 독재, 즉 직업적인 혁명 모델이 궁극적으로 확산되었으나 그것은 혁명 자체의 기구 및 제도와 치열한 투쟁을 치른 후의 일이다. 평의회는 활동 조직이며 질서 조직이었다.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려는 열망 때문에 직업 혁명가 집단과 대립했다. 국가의 공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모든 시민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기를 의식적이고 명료하게 원했다.(400) 평의회는 어느 정당에도 귀속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유일한 정치조직이었다. 따라서 모든 의회와 불가피하게 충돌했다.(402) 혁명의 와중에서 당 강령이 평의회와 정당을 분리시켰다. 행동이 아니라 집행을 요구하는 기성의(ready-made)’ 공식이었기 때문이다. 혁명 정당의 정신이 확산되면, 평의회는 잉여적인 것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식과 행동이 분리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자유의 공간이 상실된다. 평의회는 분명히 자유의 공간이었고(402) 평의회는 임시적이 아닌 스스로 항구적인 정부 조직으로 확립하려고 모든 노력을 다했다. 침략과 내란의 시대를 영원히 종결 짓는 유일한 진정한 공화국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국가의 변혁에 대한 현대 평등주의적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공적 문제의 참여자가 되는 것을 허용하는 새로운 정부 형태에 대한 희망은 20세기 혁명의 재앙 속에 묻혀버렸다. 20세기 혁명의 역사는 오히려 나약함, 즉 패배의 빈도, 혁명의 완화, 히틀러 치하 유럽의 붕괴 이후 대부분 유럽 정부들의 권위 부족과 불안정이다. 직업혁명가들과 혁명 정당들이 수행했던 역할은 중요했으며 결정적인 것이었다.(403) 레닌의 소비에트 공화국 주장은 국가 기구를 당 기구로 대체하려는 볼셰비키 당의 목표와 대립했다. 볼셰비키 당의 무기력은 소비에트 의회의 특징이다. 의회 위원은 투표자들의 박수만으로 인정된다. 평의회가 도전했던 것은 모든 형태의 당 체제 자체였으며 당에 등을 돌릴 때 마다 강조되었다. 볼셰비키 당은 어떤 정당보다 훨씬 위험했으며 반동적이었다. 모든 지역의 평의회는 혁명 정당과 달리 혁명의 사회적 측면보다 정치적 측면에 더 관심을 가졌다. 일당 독재는 일반적으로 국민국가, 다당 체계의 발전 과정에서 마지막 단계일 뿐이다.(404)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 1956년 헝가리 혁명은 모두 평의회 체계의 원리 위에 형성되었다.(405) 질적으로 다른 각각의 집단에서 평의회의 구성은 우연하게 정치 제도로 바뀌었다. 북아메리카 공동 협회및 연합의 공동 목표는 기초 자치제들에 기초를 두고 있는 새로운 정치체, 새로운 유형의 공화주의 정부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양당 체제는 다양한 정부 부서 간의 권력 분리에 기반을 두고 있는 헌법과 일치하며, 그 안정의 주요 원인은 반대파를 정부 제도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정은(406) 권력 분리가 권력을 창출하고 안정시킨다는 가정 아래서만 가능하다. 양당 체제가 성취했던 가장 훌륭한 결실은 피치자가 치자를 어느 정도 통제하게 되었다는 점이다.(407) 오늘날 민주주의는 소수가 적어도 가정상으로 다수를 위해 지배하는 정부 형태다.(408) 대중적 복지와 사적 행복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는 민주적이지만 공적 행복과 자유가 다시 소수의 특권이 되었다는 점에서는 과두적이라고 할 수 있다.(409) 인민의 정치적 능력에 대한 좌절은 평의회의 실재를 무시하고 현재의 제도에 대한 대안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전에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당연하게 인정하는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결정에 확고하게 기반을 두고 있다.

중요한 역사적 진실은 당과 평의회 체제가 거의 동시대에 등장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근대 혁명적 교의의 산물이다. 평의회는 언제나 혁명 기간 중에 등장했으며, 행동과 질서의 자발적인 기관인 인민으로부터 발생했다.(410) 20세기 정당들은 혁명 전에 등장했거나 보통선거권의 확장과 더불어 발전했다. 정당은 인민이 투표를 통해 지지를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행동은 정부의 특권이라고 이해했다. 행위 및 공적 문제에 참여하는 활동, 평의회의 열망은 대표성을 항상 일차적인 기능으로 삼았던 제도의 쇠퇴 및 전도의 징표다.(411) 통치가 실제로 관리가 되었을 때 정당 체제는 단지 무기력과 낭비만을 초래할 뿐이다.(412) 정당과 평의회 간의 갈등은 20세기의 모든 혁명에서 표면화되었다. 대표성 대 행위 및 참여 사이의 갈등이었다. 평의회는 행위 기구였으며 혁명 정당은 대표 기구였다. 혁명 정당들은 정부의 목적이 인민의 복지이며, 정치의 실체가 행위가 아닌 관리라는 것에 동의했다.(413) 평의회의 숙명적인 오류는 항상 공적 문제에 참여하는 것과 공적 관심을 끄는 사물들은 관리 또는 경영하는 것을 명백히 구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414) 평의회가 국가의 경제 제도를 조직화하거나 재건설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평의회가 실패하게 된 주요 이유는 그들의 정치적 자질이었다. 한편 정당 기구들이 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평의회가 실패했던 곳에서 궁극적으로 성공하게 된 이유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그들을 신뢰할 수 없게 만들었던, 본래부터 과두적이고 심지어 독재적인 구조에 있다.(415) 적극적 의미의 자유는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며, 평등 자체는 결코 보편적으로 정당한 원리가 아니라 한계 내에서만, 심지어 공간적 한계 내에서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정치적 삶의 방식은 결코 다수의 삶의 방식이었던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엘리트라는 용어는 과두적 정부 형태, 소수의 통치에 의한 다수의 복종을 함의하고 있다.(416) 정치 엘리트가 항상 다수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해왔으며 다수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해왔다. 대표자와 유권자, 국민과 의회 사이에 의사소통이 존재하더라도 결코 동등한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이 아니라 지배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지배받기로 동의한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이다. ‘인민에서 배출된 엘리트에 의한 인민의 정부라는 공식은 정당 체제의 본질에 속한다.(417) 인민 대다수가 명백히 정치 문제 자체를 다룰 능력도, 그에 대한 관심도 부족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혁명 정신이 아니라 평등주의적 사회의 민주적 정신 상태다. 문제는 엘리트가 자신을 선출할 수 있는 공적 공간이 부족하다는데 있다. 정치가 직업과 경력이 되었다는 점, 엘리트가 심각하게 비정치적인 기준과 범주에 따라 선정된다는 점이 문제다.(418) ‘기초 자치제정부 형태가 완전히 발전했다면 분명히 다시 피라미드 형태를 띠었을 것이다. 이 경우 권위는 상층이나 하층에서 발생하지 않고 피라미드 각 층에서 발생했을 것이다. 이것은 평등과 권위를 조화시키는 방법이 될 수 있었다.(419)

평의회는 정치적임을 가장한 대중 운동을 형성하려는 위험한 성향을 지닌 대중 사회를 해체하는 최선의 도구다. 어느 누구에 의해 선택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구성한 엘리트를 민초 차원의 대중 사회에 분산 배치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이다. 공공에 대한 책임은 사회 모든 분야의 소수의 몫이 된다. 평의회는 최선의 도구이며 그들에게 공공 영역에 적절한 위치를 보장해주는 것은 선한 정부의 임무이자 질서 잡힌 공화국의 징표다. 그러한 귀족주의적 정부 형태는 보통 선거권에 종말을 가져왔을 것이다. ‘기초 자치체의 자발적 구성원으로서 사적 행복 이상의 것을 배려하고 세계 상태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던 사람들만이 공화국의 업무를 수행하는데 의견을 제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할 것이다.(420) 정치 엘리트는 사회·문화·학계 엘리트와 똑같지 않다. 이러한 배제는 외곽 조직에 의존하지 않는다. 임의적 차별이 아닌 이러한 자기 배제는 정치로부터의 자유에 실체와 실재를 부여하고 있다. 혁명 정신이 적절한 제도를 발견하는데 실패했을 때, 이러한 자기 배제가 사라졌다. 이러한 오류를 보상하고 그 종말을 막아줄 수 있는 것은 없다.(421)

아렌트의 혁명론6장 혁명전통과 상실된 보고(3-4).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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