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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론 (아렌트)

3. 행복의 추구 발제 바다사자

 

폭력은 필연성을 위해 행사되기 때문에 이것을 정당화하고 미화한다. 필연성과 폭력은 모든 혁명적 사건들의 두드러진 특징이다.(205) 혁명은 초기 단계에서 용이하게 성공하는 것 같이 보인다. 혁명은 정치적 권위 몰락의 결과이지 결코 원인은 아니다. 폐물이 된 정치체가 오래 지속되기도 한다. 서구 정치체의 권위 상실은 17세기 이후 유럽과 식민지에서 이미 잘 알려진 현상이었다.(206) 정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쉽게 전복될 것이라는 점은 예측될 수 있었다. 18세기 이 현상은 명료하게 파악되었다. 이러한 정치발전은 근대의 더 일반적인 발전의 일부임이 확실했다. 전통적 종교적 권위의 감소는 정치적 권위를 침식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파멸의 전조가 되었다.(208) 종교적 제재의 소멸로 인해 새로운 권위가 확립될 때 혁명 참가자들이 혁명 전에 무시했던 신념들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점은 나중에 논의해야 할 것이다.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혁명에 대비했던 사람들이 혁명에 앞서 어떤 것을 공유했다면 공적 자유에 대한 열정적 관심이었다.(209) 둘은 정신에 있어 거의 동일한 전통에 의해 형성되고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프랑스인의 정념과 취미는 미국에서는 하나의 경험이었다. 미국인들은 공적 자유가 공공업무에 참여하는데 있음을 알았으며 이 활동들은 공개적으로 수행한 사람들에게 다른 곳에서 얻을 수 없는 행복감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210) 존 애덤스는 정념의 미덕을 경쟁’,‘다른 사람을 능가하려는 욕망으로 표현했고 차이의 수단인 권력을 목표로 하는 야망을 정념의 악덕으로 표현했다. 이것이 실제로 정치인의 주요 미덕과 악덕이다. 전제군주는 우월해지려는 욕망을 갖고 있지 않으며 모든 사람들의 무리보다 우월해지는 것이 기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차이에 대한 정념이 없다. 사람들은 우월해지려는 욕망 때문에 세계를 사랑하게 되고 동등한 사람들의 무리를 수용하게 되며 공공업무에 참여하게 된다.

반면 프랑스 문필가들의 준비 작업은 극도로 이론적이었다. 의지해야 할 경험을 갖고 있지 못했고 실재에 의해 검증되지 않은 이념과 원리만을 지니고(211) 있었을 뿐이다. 그들은 고대의 기억에 의존했으며 경험과 구체적 관찰보다 고대 로마의 용어들로 채웠다. ‘공적인 것이라는 용어 자체는 군주지배 하의 공공업무가 존재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혁명 초기, 용어 및 그 이면의 꿈들이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 그 명료화는 심의, 논의, 결정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도취였고 주요 요소는 군중이었다. 로베스피에르의 혁명독재론은 로마 공화주의 제도에서 정당성을 찾았다.(212) 이것을 제외하면 18세기 사상 체계에 첨가된 새로운 이론은 없다.(213) 문필가와 지식인의 차이는 18세기 이후 그들이 사회에 보였던 근본적으로 상이한 태도에 있다. 사회란 근대에 들어와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던 다소 혼성된 영역이다. 지식인들은 사회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지식인들은 사회 덕택에 자신들의 존재와 탁월성을 부각시켰다. 혁명 이전의 유럽 정부들은 정부 운영과 일련의 전문적인 지식과 절차를 구축하기 위해 지식인을 이용했다. 반면 문필가는 공공업무의 비밀에 대해 분노했다. 통치 업무에 봉사하기를 거부하고 사회에서 물러나 자신들의 삶을 시작했다.(214) 문필가는 빈곤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웠고 여가를 부담으로 느꼈다. 철학자들이 스스로 주장했던 정치로부터의 자유라기보다는 오히려 진정한 자유 영역에서 강요된 추방이었다. 그들이 목격했던 정치제도에 대해 배우고자 그리스와 로마에 눈을 돌리고 정치적 자유에 대한 모색을 통해 고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이 공적 자유가 개별시민에게(215) 무엇을 의미했는지 실제 경험에서 터득했다면 미국동료들과 같은 견해를 가졌을 것이며 공적 행복을 언급했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원리를 공식화한 사람들은 계몽주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철학자라는 명칭은 다소 잘못되었다. 그러나 혁명의 맥락에서 그들의 중요성은 엄청나다. 그들은 새로운 개념의 공적 자유를 강조하면서 자유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공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자유였다. 가시적이고 세계적인 실재였다. 연민을 표출하기도 전에 문필가들은 빈민과 내밀함을 공유했으며 이는 그들이 공공영역을 목격하지 못했으며 공적 공간도 갖지 못했음을 의미한다.(217)

자유 자체에 대한 정념-말하고 행동하며 숨쉴 수 있는 유일한 즐거움(토크빌)에 대한 정념은 사람들이 주인을 모시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이미 자유로운 곳에서만 발생할 수 있다. 근대의 조건에서 건국행위는 헌법의 기초 작업과 동일하다. 독립선언서는 연맹헌법을 촉진했고 제헌의회 소집은 혁명의 이정표가 되었다. 미국의 전례는 테니스코트 선언을 앞당겼다. 그러나 1791년 헌법은 왕에 의해 수용되지도 않았고 국민에 의해 비준되지도 못한 채 발효되기도 전에 권위는 붕괴되었다. 해체될 때까지 연이어 교체되어 계속되었다.(218) 프랑스 의회 대표자들은 자신들의 헌법제정권을 포기했으며 건국 선조가 되지 못하고 정치인이나 전문가 세대의 선조들에 불과했다. 권력을 보유하거나 사건 형성을 공유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헌법제정행위는 그 의미를 상실했고 법률주의나 형식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와 연계되었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혁명, 다른 한편으로는 헌법과 건국이 상관관계를 갖고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게 되었다. 18세기 사람들은 공적 자유에 대한 정념이나 공적 행복의 추구가 미래 세대를 위한 새로운 정치공간을 당연히 구축해야만 했다. 그러나 미국조차 혁명의 두 번째 임무는 애초부터 좌절되었다. 이는 행복추구라는 용어에 암시되어 있다.(219) 공적 행복은 왕의 칙령에 나타나는 관례적 문구의 중대한 미국적 변형이었다. 영국인들은 자유로운 주민들이 향유하지 못했던 어떤 형태의 자유를 추구했기 때문에 미국 이주를 결심했다.(220) 그들은 자유를 맛보았을 때 공적 행복이라 표현했고 이 자유는 시민이 공공영역에 접근하는 권리이며 공권력을 공유하는 것, 통치업무의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행복이라는 용어가 공권력을 공유한다는 주장은 혁명이전에 공적행복과 같은 실재가 미국에 존재했다는 점을 암시한다.

독립선언서사례는 사적권리와 공적 행복의 차이를 희석했다.(221) 18세기 이후의 각각의 세대들은 제멋대로 하는 것을 행복으로 이해했다. 이 두 가지는 혼동되었으며 당시에는 차이를 자각하지 못했다.(222) 독립선언서의 위대성은 자연법 철학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의견에 대한 존경과 군주정과 왕정 일반의 원리에 대한 거부로 점차 발전하게 되었을 때이다.(224) 이러한 거부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이론들은 법치 정부와 전제정을 구별해 왔다. 전제정은 통치자가 자신의 의지대로 이익을 추구하며 통치하고 결국 피치자의 사적 복지와 합법적·시민적 권리를 침해하는 정부형태로 이해되었으며 일인 지배인 군주정과 동일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혁명은 둘을 정확히 동일하게 취급하게 했다. 전제정은 사적 복지를 반드시 박탈하지는 않더라도 공적 행복은 박탈했다. 공화정은 모든 시민들에게 국정운영의 참여자가 될 권리를 인정했다. 비공화주의적 정부들은 모두 혁명 후에야 전제정으로 인지되었다.(225) 독립선언서의 장엄함은 행위를 옹호하는 주장이 아니라 말로 드러나는 행위를 위한 완벽한 길이라는 사실에 있다. 글로 씌어진 언어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행위의 힘이 증대했던 귀중한 계기였다. 공적 행복에 직접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사례는 제퍼슨의 희망이다. 그에게 의정생활, 토론하고 입법활동을 하며 업무를 처리하고 설득하고 설득되는 과정에서 누리는 기쁨이 결론적으로 다가 올 영원한 축복의 전조였다. 자기 동료들의 동아리를 확장함으로써만 자신의 생애 중 가장 훌륭하고 행복한 순간들을 누릴 수 있었다.(227)

프랑스 혁명 참가자들은 필연성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랐던 사람들은 공적 자유를 위한 공간을 확립하고자 바랐던 사람들을 성급하게 지원했다. 그 결과 헌법의 기초에는 점차 소홀해진 것이다.(228) 프랑스와 미국 혁명의 갈등은 동일했다. 미국의 경우 정부가 시민들의 공적 행복을 위해 자체의 영역을 구성하려고 하는가, 과거 정부보다 사적 행복의 추구에 기여했는가의 문제였다.(229) 프랑스의 경우 공적 행복의 우세를 중단시키는 입헌정부의 성립이냐 아니면 공적 자유를 위해 영원히 천명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였다.(230) 미국 혁명은 시민권을 심각하게 손상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건국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미국의 건국자들이 통치자가 된 결과 혁명의 종말이 공적 행복의 종말을 가져오지 않게 되었다. 공적 자유에서 사적 자유로, 공적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공공업무 분담에서 사적 행복의 추구가 공권력에 의한 보장으로 이동했다.(231)

혁명의 모호한 성격은 혁명 주도자들의 다의성에서 유래한다. 로베스피에르는 입헌정부의 목적을 혁명정부가 공적 자유를 확립할 목적으로 창설한 공화국을 보존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가 입헌적 지배 아래서는 공권력의 남용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것만으로도 거의 충분하다고 정정했다. 권력은 여전히 공적이며 정부의 수중에 있지만 개인은 무기력해지고 정부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한다. 한편 자유의 위치가 바뀌었다.(234) 자유는 더 이상 공공 영역에 존재하지 않고 시민들의 사적 영역에 존재하게 되어 권력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자유와 권력이 분리된 결과 권력과 폭력은 같은 것이 되었다.

미국은 결코 빈곤에 압도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건국선조들을 방해한 것은 필연성보다 일확천금을 향한 숙명적 열정이었다. 공적 행복과 정치적 자유라는 개념들이 미국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 유럽과 반대되는 결과였다. 이것들은 공화국이라는 정치체의 구조의 일부가 되었다.(235) 자유를 확립하기 전에 이미 미국은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성취했다. 혁명 전 초기 미국의 번영은 빈곤해방을 위한 집중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반영구적인 것으로 보이는 빈곤을 극복한 초기의 결정은 인류역사상 최대의 성과였다. 그러나 유럽으로부터의 지속적인 적빈 계급의 대량 이민은 자유의 형성을 촉진했던 원리와는 다른 빈곤에서 벗어나려는 이상 아래 놓이게 되었다.(236) 일확천금을 향한 숙명적 열정은 결코 속물적인 사람들의 악이 아니라 빈자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대량 이민의 충격 속에서 18,19세기 미국인들의 꿈은 불행하게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대한 꿈이었다.(237) 혁명에 참여한 시민이 19세기 사회의 사적 개인으로 바뀌었고 정치적 자유에 대한 취미는 소멸되었으며 개인의 내면적 의식 영역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 과정은 19세기 지형 및 부분적으로 20세기 지형까지 결정했다.(238)

아렌트의 혁명론 3부 행복의 추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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