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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연 170920 () / 혁명론 - 한나 아렌트 / 2/ 마스터한

 

2장 사회의 문제

 

프랑스 혁명 이전의 혁명 개념에서 역사과정의 필연성은 순환적이고, 합법칙적이며, 필연적인 천체 운동이라는 천문학적 은유를 통해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신체의 필요에 찌든가난한 자들이 프랑스 혁명의 무대에 뛰어들자, 여기에 생물학적 이미지가 도입되었다. 이런 유기체적, 사회적 역사 이론은 대체로 민족, 인민, 사회라는 다수를 초자연적이고 거역할 수 없는 일반의지에 의해 촉진되는 초자연적 물체의 이미지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빈곤은 사람들을 신체의 절대 명령, 필연성의 절대 명령에 굴복하게 한다. 아렌트는 이런 원리에 따라 진행된 혁명은 테러와 파멸로 이어졌으며, 구체제의 권력이 무기력해지는 동시에, 새로운 공화국은 사산(死産)되었다고 보았다. 사람들이 필연성, 생존의 절박성 때문에 자유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혁명의 목표는 자유가 아니라 인민의 행복으로 바뀌었다.

인간의 권리가 상퀼로트의 권리로, 필연성의 명령 앞에서 자유의 폐기가 정당화되는 이론이 마르크스에게서 나타났다. 청년 마르크스는 프랑스 혁명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자유를 확립할 수 없었고, 자유와 빈곤은 양립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빈곤은 최상의 정치적 힘이 될 수 있었다. 사회 문제를 정치적 추동력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빈곤이 희소성의 결과라기보다는 폭력과 침해의 결과라고 봄으로써, 이를 자연적 현상이 아닌 정치적 현상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침해를 받는 것에 대한 반항의 정신이 혁명의 추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초기 저서에는 사회 문제(빈곤)를 정치 용어(억압, 착취)로 해석했다. 그러나 공산당 선언이후의 저서들에서는 경제 용어를 통해 폭력과 침해 배후에 있는 역사적 필연성을 다루었다. 그러나 아렌트는 마르크스가 자유보다 풍요를 혁명의 목적으로 만들어 버리면서 자유를 필연성에 복종시켜 버렸다고 비판한다. 이것은 이전시대의 로베스피에르, 후대의 레닌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적 자유 하에서는 빈곤을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가난한 자는 잃을 것이 사슬뿐이기 때문에 빈곤이 억압의 족쇄를 끊을 수 있는 힘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인민의 해방을 주장했던 이들에게 있어 인민은 빈민이 아니었으며, 모든 혁명이 사회적이라는 것은 19세기 이후의 편견이었다. 아렌트는 미국 혁명은 성공했으며, 프랑스 혁명은 실패했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미국에는 빈곤이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미국 혁명은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 사회질서보다는 정부 형태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에 사회문제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인식 자체는 기만적인 것이었다. 이런 논의에서 노예노동과 흑인노동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빈곤을 봤을 때 늘 연민(pity)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루소 등 18세기에 이르러서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compassion)이 혁명에 있어 행위자들의 동기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 혁명에서는 동정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 노예제도는 미국과 유럽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또한 여기에서 다루는 사회 문제는 오늘날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기회의 평등이나 사회적 지위, 신분 상승을 위한 경쟁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사회 이동은 혁명을 포기한 이후에야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혁명과 사회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아렌트에게 중요한 것은 빈곤이 동정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혁명에서 동정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프랑스 혁명의 참가자들은 착취와 빈곤이 아니라 참주정과 억압에 대항하면서 인민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실제 혁명이 성취된 이후에는 인민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적 조건의 차이가 드러났다. 따라서 소수만이 자유에 관심을 가졌고, 여전히 빈곤에 처해 있는 다수는 이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혁명의 대표자들은 혁명 주도자들과 인민 사이의 새로운 유대를 위해서 노력해야 했다. 그 유대는 미덕이라고 불리었는데, 이것은 개인의 의지와 인민의 의지를 동일시하며 인민의 복지를 최우선 과제로 삼는 일이었다. , 자유가 아니라 행복이 목표가 되었다. 혁명 정부에서 인민이라는 용어에는 정부에 참여하는 시민만이 아니라 하층민들도 포함하게 되었는데, 이 정의는 동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렌트는 동정이 혁명가들의 추동력이 된 것은 헌법을 만들고 공화정을 수립하려 했던 온건공화파인 지롱드 당이 몰락하고, 자코뱅 당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라고 본다. 자코뱅은 정부 형태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공화정보다 인민을, 제도와 헌법보다 계급의 자연적 선을 더 신뢰했다. 이들은 고대 이래의 정치적 합의 방식인 동의대신 인민 전체의 의지를 중시하였다. 일반의지는 다수를 하나로 만드는 것, 즉 하나의 분리 불가능한 국민을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루소 등에 의하면 하나의 일반의지, 하나의 국민이란 공동의 적이 있을 때에만 나타난다. 그러나 대외 정치가 아닌 국내 정치에서도 민족 내의 통합 원리가 작동할 수 있다. 사람들이 가진 특수한 의지와 이익을 하나로 합치면 숨어 있는 공동의 적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동의 의지와 이익의 적은 각자가 가진 특수한 의지와 이익이다. 전체의 이익은 시민의 특수이익에 적대적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성은 18세기의 혁명가들에게 있어 의외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성은 인간을 이기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고통 받는 불행한 자들과 연대하지 못하게 한다. 이런 노선에 선 혁명가들은 부자들의 이기심을 악덕으로 보았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동정을 절대적인 선으로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역사상 최초로 빈자들을 공공 영역으로 진입시켰다. 그러나 아렌트는 동정이 인간들 사이의 거리들, 정치적 문제들을 해소해 버리기 때문에 부적절하고 중요하지 않다고 평가한다. 동정은 인간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세계의 조건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동정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설득, 협상, 타협을 거치기보다 폭력적인 수단을 택할 것이다. 아렌트는 멜빌의 빌리 버드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종교재판소장에 대한 분석을 통해, 사회 밖에 있는 절대적 선, 동정은 설득이나 논증을 모른다는 점을 지적한다.

 

동정이라는 정념에 상응하는 감정은 연민이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는 유대가 있다. 사람들은 유대에 입각해 피억압자와 피착취자에 대한 관심의 공동체를 구성한다. 유대는 이성처럼 일반성을 지니기 때문에 모든 인류, 부자와 강자들까지를 포괄한다. 유대는 연민의 감정보다 추상적이고 냉담하며 감성적인 거리를 유지한다. 따라서 유대는 사랑보다는 위대함, 영광, 존엄 같은 이념에 집착한다. 연민은 불행이 없는 곳에는 존재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의 고통을 미화시킨다. 따라서 유대는 행위를 촉진하고 인도할 수 있는 원리이며, 동정은 정념 중의 하나이고, 연민은 감정이다.” 아렌트는 이런 비교를 통해 로베스피에르가 가난한 자를 미화하고 고통을 찬양한 것을 감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런 연민은 때로는 잔인하고 위험할 수 있다. 감정(연민)은 정념(동정)이나 원리(유대)와는 달리 제약을 받지 않는다. 이런 무제한성은 사람들이라는 실재에 둔감해지게 하고, 결과적으로 혁명가들이 혁명 과정에서 특정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데 있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빈민들이 정치 영역에 쏟아져 들어오면서, 정치 영역은 사회 영역이 되었고 원래 가정 영역에 속했던 감정에 잠식당했다. 근심, 걱정과 같은 감정은 설득과 결정과 같은 정치적 수단을 통해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은 자유를 확립하고 지속적인 제도를 수립하려고 했던 미국 혁명과는 달리 궁핍으로부터 해방이라는 절박성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리고 감정의 무제약성은 무제한적인 폭력으로 이어졌다.

이런 차이 때문에 미국과 프랑스의 인민 개념에는 차이가 있었다. 미국의 인민이 다양성과 다원성에 의해서 규정된다면, 프랑스식의 인민 개념은 하나의 의지에 의해 이끌리는 대중이었다. 빈곤 상태의 하층민들은 실제로 이렇게 행동했기 때문에 이 개념은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설득력을 가졌다. 이 경우 다수에 대한 연민은 한 사람에 대한 동정과 혼동된다. 그리고 민족에 대한 이런 이미지는 자유의 기초를 무너트리는 것이었다. 또한 일반의지라는 개념은 루소의 분열된 영혼이라는 개념을 정치 영역으로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혁명은 위선과의 전쟁이 되었다.

 

로베스피에르는 위선과의 전쟁을 위해 독재를 공포정치(Reign of Terror), 즉 테러통치로 바꿨다. 혁명의 동기를 가속화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의 집권정당 내 테러와 숙청은 러시아 혁명 당시 볼셰비키 당이 했던 일이지만, 이들 또한 18세기의 테러를 모델로 삼았다. 볼셰비키 당의 숙청이 주로 이데올로기적 차이 때문에 이루어졌다면, 18세기의 테러는 선의에 의해, 위선자들에 대해서 이루어졌다. 이 두 가지 유형의 숙청은 모두 운동과 반운동, 혁명과 반혁명이라는 역사적 필연성의 개념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런데 볼셰비키의 숙청과 인민재판에서는 중요했던 객관적 적개념이나 역사적 필연성개념은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로베스피에르의 미덕의 테러는 위장한 모반자, 즉 숨겨진 적과 악덕을 대상으로 했다.

여기에서 아렌트는 과연 위선이 그렇게까지 엄청난 악덕인지에 대해 묻는다. 이것은 현상과 존재에 대한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사상 전통의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기 원하는 대로 존재하라고 가르쳤고, 기독교 사상 전통의 마키아벨리는 존재하고 싶은 대로 나타나라고 가르쳤다. 고대에는 거짓이나 가장이 의도적인 기만이나 거짓 증언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면 범죄로 여겨지지 않았다. 마키아벨리 또한 정치에는 존재가 아닌 현상만이 중요시되므로 위선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고대의 폴리스는 인위적인 현상 공간이었다. 여기에서 위선은 기만이 아니고, 위선자는 거짓말쟁이나 사기꾼과는 다르다. 마키아벨리 또한 기독교의 가르침과 현상 영역의 규칙을 분리하였다. 그런데 18세기에 위선은 궁정 귀족들의 음모와 부패, 악덕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하층민은 폭력과 잔인성을 통해 그 세계에 전쟁을 선포해야 한다고 믿었다. 프랑스 혁명 참가자들은 프랑스 사회에서 위선의 가면을 벗기고 오염되지 않은 인민의 진실한 얼굴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 참가자들이 페르소나, 즉 법적 인격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본다. 이는 원래 고대의 배우들이 무대에서 쓰는 가면을 뜻하는 말이었고, 로마에서 법률 용어가 되었다. 로마의 사적 개인과 시민 사이의 차이는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였다. 가면(법적 인격)을 착용하지 않은 개인은 자연적 나(Ego)이고, 권리와 의무를 지니지 않았으며, 정치적으로 무관한 존재다. 반면 법적, 정치적 존재는 법에 의해 창조되고 권리와 의무를 지닌 인물이다. 자연적 인간을 가리키는 호모(homo)는 원래 법적 영역과 시민 정치체 밖에 있는 사람, 즉 노예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결국 법적 인격을 존중하지 않고 가면을 벗기는 일은 자연적 인간을 해방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자연적 인간은 자신이 속한 정치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출생을 통해 인권을 얻는다. 그런데 위선을 제거한다며 극중 인물의 가면을 벗기는 공포정치는 모든 주민을 법적 인격의 보호가 없는 상태로 노출시킴으로써 균등화하는 일이었다. 아렌트는 이것이 진정한 해방과 평등의 정반대라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 인권선언은 미국의 권리장전과는 달리, 인간의 정치적 위상과 구분되는 인간 본연에 내재된 권리를 설명함으로써 정치를 자연으로 환원하고자 했다. 이런 관점에서 앙시앵 레짐은 자유와 시민권의 권리를 박탈해 온 것이 아니라, 생존과 자연의 권리를 박탈해 온 것으로 이해되었다.

 

파리 거리에 출현한 가난한 사람들은 루소의 자연인과 같은 이들이었다. ‘실질적 욕구가 혁명의 과정을 지배하게 되었다. 적나라한 욕구만이 위선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확신이 생기자 가난한 사람들은 광신자들로 바뀌었다. 위선의 가면이 벗겨지고 고통이 드러나자 한편으로는 부패에 대한 분노, 다른 한편으로는 불행에 대한 분노가 드러났다. 인민 대중은 더 이상 자신들의 조직자, 대변인이었던 혁명가들의 제어를 받지 않았다. 혁명가들은 개별 시민이 아닌 가난한 사람들로서의 인민을 해방시켰는데, 이들은 분노한 사람들이 되었다. 혁명이 자유의 확립이 아니라 고통 받는 인간의 해방으로 방향을 전환하자 불행과 고통의 파괴력이 해방된 것이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의 혁명들이 전제나 억압에 대한 투쟁에서 불행과 빈곤의 위력을 이용하게 되는 전례가 되었다. 테러가 혁명을 파멸로 이끈다는 것이 입증되었음에도 혁명이 대량 빈곤의 조건 아래에서 발생했을 때 이런 오류는 피할 수 없었다. 부자들에 대한 빈자들의 봉기가 억압자들에 대한 피억압자들의 반란보다 더 커다란 계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렌트는 이런 봉기의 끝은 무기력이며, 그 원리는 분노이고, 그 목적은 자유가 아니라 생존과 행복이라고 비판한다. 로베스피에르는 자유롭게 흐르는 조류가 인간적 미덕에 의해 인도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실제 프랑스 혁명에서는 저항할 수 없는 익명적 폭력의 조류가 인간들의 자유롭고 신중한 행위를 대체했다. 프랑스 혁명은 빈민 대중을 가난한 사람으로 명명하면서 이들을 분노한 사람으로 변화시켰지만, 이들을 다시 비참한 사람들이 되도록 내버려두었다. 이들은 필연성에 예속되어 있었고, 인류가 필연성을 극복하기 위해 항상 사용되어 왔던 폭력을 담지하고 있었다. 필연성과 폭력이 그들을 불가항력적으로 보기에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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