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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한나 아렌트 혁명론 서론-1장.hwp


전사연 170913 () / 혁명론 - 한나 아렌트 / 서론 - 1/ 마스터한

 

서론: 전쟁과 혁명

 

20세기의 흐름을 결정해 온 것이 전쟁과 혁명이었다. 19세기의 이데올로기들은 세계의 실재들과의 접점을 잃었지만, 전쟁과 혁명은 여전히 핵심적인 정치적 쟁점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20세기 이후 혁명과 전쟁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던 교의들은 힘을 잃었지만 자유(freedom)와 전제정의 대립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자유는 혁명의 중요한 목적이자 동기였지만, 지금까지의 혁명 이론에서는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렌트 당시에 자유는 전쟁과 폭력의 정당한 사용에 대한 논의에 포함되었다.

그런데 전쟁과 혁명은 상호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핵무기와 같은 파괴 무기의 발달로 전쟁은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군비경쟁이나 핵실험과 같은 가상의 전쟁으로 대체되고 있다. 아렌트는 전쟁의 종결이 혁명이고, 이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원인이 자유라는 점에서 “20세기는 혁명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그런데 전쟁과 혁명의 공통요소는 폭력이다. 그러나 혁명과 전쟁이 폭력으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아렌트의 중요한 전제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며 언어 능력을 지닌 존재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이다. 그러나 폭력은 말이 없다. 그래서 정치이론은 인간 영역폭력 현상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으며, 전쟁론과 혁명론은 폭력의 정당화(, 그 정치적 한계)를 취급해 왔다. 그러나 이것이 폭력 자체의 정당화나 미화에 도달한다면, 그것은 반정치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전쟁과 혁명에서 폭력이 지배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는 일반적으로 정치 영역 밖에서 이루어지는 일로 취급된다. 그래서 17세기 사상가들은 정치 이전의 상태인 자연 상태에 대한 가정에 도달했다. 인간들이 사는 곳에 정치 영역이 자동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면, 자연 상태 이론은 자연 상태 이후에 나타나는 시작의 존재를 함의하게 된다. 그리고 시작은 혁명 현상, 즉 폭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폭력은 시작이었고, 태초에는 범죄가 있었다.

 

1. 혁명의 의미

 

자연 상태 이론은 인간사에 근원적 악이 내재한다는 근거를 가지고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해 왔다. 그러나 혁명은 우리가 시작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정치적 사건이다. 아렌트는 근대 혁명이 정치적 변동에 대한 고대의 관점들과 명백히 다르다고 주장한다. 고대의 정치 변동론(플라톤의 metablai, 폴리비우스의 politeion anakyklosis) 등은 역사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의 본질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는 순환의 다른 단계로 복귀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근대 혁명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우선 사회 문제(부의 분배, 이익 등과 관련된 경제적 문제)가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경제적 동기가 정치적 문제에서 최상의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부터였다. 근대 혁명의 특징은 빈곤이 인간 조건에 내재되어 있는 필연적인 것이라는 말에 대해 의심하게 되었다. 독특한 점은 미국은 혁명 이전에도 빈곤 없는 사회의 상징이었고, 그래서 미국 혁명은 사회적 문제보다는 정치체 내의 권력분리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신대륙에서 자연스럽게 성장한 멋진 평등은 유럽인들에게 희망을 주었으나 유럽에서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폭력과 혁명의 유혈 사태가 필요했다.

이와 관련하여 아렌트는 근대 역사학에서 혁명에 대해 제기되어 온 몇 가지 주장들에 대한 반론을 전재한다. 첫째, 지금까지 미국에서 혁명이란 발생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에 의해서 반박될 수 있는데, 혁명이 없었다면 지금 미국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모든 근대 혁명들은 기원상 본질적으로 기독교적인 주장이다. , 초기 기독교 분파의 저항적 성격, 모든 공권력에 대한 멸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 등이 종교개혁을 통해 세속화된 형태로 근대 혁명으로 연계되었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종교와 정치의 분리, 자체의 권위를 지닌 세속적 영역의 발생, 즉 세속화가 혁명 현상에서 중요한 요인이라는 점을 인정하는데, 그렇다면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닌 세속화 자체가 혁명의 기원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속화의 첫 번째 단계는 종교개혁이 아니라 절대주의의 등장이다. 기독교의 가르침 자체가 혁명적이라는 이론도 사실을 통해 반박된다. 근대 이전 혁명은 단 한 번도 기독교 정신의 이름으로 발발한 적이 없다.

마지막 하나의 주장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직선적으로 발전하는 역사라는 개념이 기독교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기독교 철학이 세속적 역사를 단절시키는 시작의 사건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사건(십자가 사건)은 예외적이며 종말에 이르기까지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 , 기독교적 관점에서도 세속적 역사는 여전히 영구적인 순환 주기에 얽매여 있다는 것이다. 사실 새로움과 변화 가능성에 대한 관념은 특별히 기독교적인 개념이 아니라 후기 고대에 유행했던 분위기였다.

근대 혁명 개념은 역사적 과정이 새로 시작되며, 지금까지는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전개될 것이라는 개념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개념은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자유의 출현이었다. 아렌트는 여기에서 해방과 자유를 구분하는데, 해방은 자유의 조건이지만, 자동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정치 현상으로서의 자유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형성되던 당시에 나타났다. 그것은 지배받지 않는 조건 아래서 시민들이 함께 생활하는 정치 조직,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구분하지 않는 정치 조직의 한 형태였다. 비지배는 이소노미(isonomy)라는 용어로 표현되었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을 대립시키는 관점에 익숙하지만. 원래 자유는 평등과 동일시되었다. 그런데 이 평등은 인간이 본래 평등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아니라 법을 통해 자신들을 평등하게 만들어주는 인위적인 제도, 즉 폴리스를 통해 가능한 것이었다. , 자유는 정치적 공간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만 나타난다. 이를테면 지배자 자신은 자유롭지 않은데, 그가 정치적 공간 자체를 파괴했기 때문에 피지배자에게도 그 자신에게도 자유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의 시민적 권리들(생명, 자유, 재산)을 혁명적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시민적 자유는 부당한 제약으로부터의 자유(구체적으로는 이동의 자유) 정도를 의미했다. 중요한 정치적 자유인 집회의 권리도 미국의 권리장전에서는 청원하기 위해 집회할 권리정도였다. 그러나 아렌트는 이런 자유가 본질적으로 소극적 자유이며, 공공 문제 참여나 공공 영역 진입과 같은 자유의 실재적인 내용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러나 해방은 자유의 조건이다. 왜냐하면 제약을 받지 않고 움직일 수 없다면, 자유가 작동하는 장소에 다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억압에서 자유로워지려는 욕구는 군주정 아래에서도 충족될 수 있었지만, 정치적 삶의 방식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욕구는 공화국의 수립을 필요로 했다.

혁명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자유가 출현할 공간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특히 새로웠던 경험은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즉 참신성을 발휘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경험이었다. 아렌트는 참신성의 파토스가 존재하고, 참신성의 자유의 이념과 연계된 곳에서만, 우리는 혁명에 대해 언급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쿠데타, 내란, 폭동은 혁명과는 다르다. 이들은 모두 폭력에 의해 야기된다는 점에서 혁명과 비슷하지만, 혁명은 오직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변동이 발생하는 곳, 완전히 다른 정부 형태를 구성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곳, 즉 새로운 정치체를 형성하고자 폭력을 사용하는 곳,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궁극적읜 목적을 자유의 확립으로 상정하는 곳에서만 언급될 수 있다.

다음으로 다루어지는 문제는 혁명이라는 용어가 언제부터 등장했으며, 지금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와 같은 르네상스 시기의 정치이론에서조차 혁명이란 용어는 나타나지 않는다. 마키벨리는 정치체제의 변천, 변화, 교체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치에 있어 세속적 영역의 등장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혁명사의 선구자였다. 그러나 마키아벨리 당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야 할 만큼 급진적이지는 않았다. 당시의 하층민 출신이었던 용병대장들이 공공영역으로 진출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일어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역량에 의한 것이었고, 인민들 스스로가 통치자가 될 수 있을 정도의 급진적 변동은 언급지지 않앗던 것이다.

서구 언어에서 혁명(revolution)이라는 용어는 자연과학에서 천체 궤도의 운행을 다루는 천문학 용어였다. 이것은 규칙적이고, 반복적이고, 순환적인 운동이라는 의미에서 정치 영역에서 사용하는 의미와는 정반대였다. 실제로 17세기까지 혁명이라는 말은 정치적인 의미에서 사용될 때에도 이미 정해진 질서로 다시 복귀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심지어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에서조차 전제군주정이나 식민 정부의 권력 남용으로 교란된 구질서를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 이르러서야 이데올로기로서의 보수주의가 따로 분리되었다.

아렌트는 새로움’, ‘참신성에 대한 개념(자기 발견이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 주장한 갈릴레오, 자신이 정치철학을 처음 만든 것이라 주장한 홉스, 이전 철학자들은 아무도 철학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주장한 데카르트)이 혁명 이전에도 존재했으나 혁명의 시작 과정에서는 이런 것들이 드러나지 않았다. 새로운 정치 질서는 행동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조금씩 구성되었다.

천문학 용어로서의 혁명이 가지는 또 다른 의미는 별의 순환이 인간 능력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으며 정해진 길을 따른다는 불가항력성이다. 이것은 순환하는 운동이라는 의미가 사라진 이후에도 오래 살아남았다. 역사적 필연성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등장한 헤겔 철학이 탄생시킨 근대의 역사 개념이었다. 헤겔 이전의 철학자들은 인간적 경험의 영역이 절대적인 것과는 관련이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헤겔은 인간 역사가 전개되는 영역에서 절대자를 도출했다.

그러나 아렌트는 헤겔 철학에는 오류가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행위자와 수행자의 관점이 아니라 관찰자의 관점에서 인간 행위의 영역을 기술하려는 데 있었다. 인간들이 시작하고 수행한 이야기는 종말에 도달해서야 진정한 의미를 드러낸다(미네르바의 부엉이, 이성의 간지)는 것은 진실이지만, 그것이 행위자가 아닌 관찰자에게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은 오류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에 대한 헤겔의 이해는 필연성이 자유를 대신해 정치 사상과 혁명 사상의 주요 범주가 되게 만들었다. 헤겔의 영향을 받은 마르크스와 19, 20세기의 혁명가들 또한 이 모델에 따라서 혁명을 이해했다. 아렌트는 이들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그들은 역사로 인해 바보가 되었고, 역사의 바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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