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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국가(김한규) 제 4장 티베트 역사 공동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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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티베트 역사 공동체

 

 

티베트, 토번, 서장, 시장, 시짱

 

티베트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를 받고 있는 역사 공동체들 가운데서 그 정체성을 가장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역사 공동체의 하나이다(p. 632).

 

활동 공간

티베트 고원: , , , 아리, 암도 등으로 구별됨.

 

장남: 농사가능, 인구와 도시 밀집. 위짱(우창)이 티베트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

장북: 농경 거의 불가능, 목축 가능, 창탕

장동: 임업과 목축업, 농업 고산 협곡,

 

티베트 고원은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가 높고, 연 평균 기온이 현저히 낮으며, 강우량과 공기량이 말할 수 없이 적어서, 중국인이나 인도인, 몽고인등이 이처럼 높고 춥고 건조한 숨찬 곳에서는 살아가기 어렵기 때문에, 티베트 고원의 특수한 자연 환경은 티베트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결정적인 보호막으로 작용해왔다(p. 633).

 

2. 생활

티베트 인은 춥고 건조한 초원에서 가축을 양육하여, 그 산물로써 옷을 지어 입고 음식을 만들었으며 집을 지어 살았다. 물론 목축 지역과 농경 지역에 거주하는 티베트 인의 생활 습속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p. 634).

 

티베트 인의 의식주 생활을 가장 특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이 야크이다.

 

10대 벤첸 라마 야크가 없으면 티베트족이 없다.“

 

3. 풍속

티베트의 결혼 풍속 가운데서 가장 특이한 것은 일처다부의 혼인 형식이다(p. 635).

 

티베트 가정에서는 일반적으로 여성의 역할과 권한이 대단히 커서, 결혼한 남자들은 여자의 일을 거들면서 여성의 경제력에 의존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티베트 여성의 권한은 중국 등 다른 곳의 그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장례: 천장/조장

 

티베트 인은 중국인과 달리 성씨가 없고 넉자로 구성된 이름만 사용하며, 친인척에 대한 칭호도 중국인과 구별된다.

 

4. 언어와 문자

티베트어는 일반적으로 중국-티베트 어계, 티베트-버마 어족, 티베트 어지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된다. 이는 발생학적으로 볼 때, 티베트어가 매우 독립적인 기원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p. 636).

 

티베트 문자는 티베트 최초의 통일 왕조를 건립한 송짼감포 시기에 인도 산스크리트어를 모방하여 창제한 것으로 알려져있다(p. 637)

 

티베트인은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로써 고유한 문학을 발전시키고, 티베트 고원에 불교를 토착화시켜, 이웃 중국과는 분별되는 티베트 역사 공동체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

 

5. 티베트 불교

티베트 고유의 문화 가운데서도 티베트 역사 공동체의 정체성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주는 요소는 티베트 특유의 불교다.

티베트: 소서천(小西天), 소천축(小天竺) / 인도: 서천(西天), 대천축(大天竺)

서천이란 부처와 보살이 사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의 침공을 받기 전에는 가가호호 불교를 독신하지 않는 집이 없었고, 각 가정에서 출가하는 이가 적어도 한 명씩은 있었다.

 

불교가 1,300여년 전에 티베트 고원으로 유입되기 전에는 뵌교라는 샤머니즘이 유행했다. 티베트가 불국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토착 민간신앙인 뵌교와 외래 종교인 불교의 오랜 투쟁과 융합의 과정이었다.

 

티베트 불교는 그 지리적 환경이나 문화적 배경, 사회적 기초 등의 특수성으로 인해, 인도의 원시 불교나 동남아의 소승 불교, 동북아의 대승 불교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흔히 라마교 혹은 장전불교라고 불리는 티베트 불교는 인도의 지리적 근접성으로 인해 중국 불교보다는 일도 불교의 영향을 훨씬 더 많이 받았다(p. 639).

 

정치와 종교를 함께 장악한 고승 라마가 죽었을 때, 전생영동을 찾아 대를 잇게 함으로써, 왕조 형식의 국가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독특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6. 역사적 경험

티베트 인의 혈통적 기원은 위짱의 얄루장푸강 유역에서 발원한 토착인들이 점차 발전하면서 창탕과 청해 등지의 강인과 융합하여 티베트인을 형성하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p. 640).

 

짠포: 영무한 군주

 

송짼감포는 수비와 상슝 등 다른 소국 연맹체를 병합하여 티베트 고원의 통일을 완성하고, 구 귀족의 도전을 제압하여 국가체제를 확립했으며, 라싸로 천도하여 포탈라 궁을 건립했다(p. 641).

 

당시 세계 최강의 당과 당당히 힐항하고 문화적으로는 독특한 불교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웠던 토번 왕국 시기는 티베트 인이라면 누구나 잊을 수 없는 화려한 역사적 경험이었다.

 

10세기 토번 왕국이 당과 함께 멸망 후, 티베트 고원은 수다한 지방 세력에 의해 분점되었는데, 이들 지방 세력들은 그 지방의 유력한 불교 교파와 연계하여 정교 일체의 정권을 수립했다.

 

몽고가 중국과 요동을 석권하고 티베트까지 위협하자, 사캬파 불교의 영수였던 팍빠가 몽고의 대칸 쿠비라이를 만나 최왼 관계 즉 공시 관계를 성립시켰다. 최왼 관계란 원래 승려와 신도 사이에 교환되는 시주와 복전의 종교적인 관계로서, 승려는 신도를 위해 기도하고 신도는 승려를 위해 물질적인 도움을 제공했다(p. 642).

 

몽원 제국이 붕괴됨과 동시에, 티베트에도 사캬파의 통일 정권이 무너지고, 티베트 고원은 이른바 5대 법왕과 5왕 등 수다한 지방 정권에 의해 분점되었다.

 

중국에서 출현한 송과 명이 중국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중국은 티베트의 역사 전개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p. 643).

 

티베트 고원이 정치적으로 다시 통일된 것은 5세 달라이 라마 때부터였다(p. 644).

 

5세 달라이 라마와 순치제가 북경에서 만나 서로 맺은 관계는 빡파와 쿠빌라이가 맺은 관계와 다를 바 없는 최윈관계였다.

 

티베트와 만청의 관계를 오랜 기간 규정해온 최왼 관계는 20세기 초에 이르러 단절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제국주의 영국이 식민지 인도를 발판으로 점차 티베트 고원으로 세력을 확장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만청이 스스로 제국주의 세력으로 변모하여 티베트를 침공했기 때문이다.

 

신해혁명으로 만청이 멸망하자, 라싸로 돌아온 13세 달라이 라마는 중국을 지배하는 국가와의 일체의 관계가 청산되었음을 선언하고, 티베트에 주재하고 있던 주장대신 등 만주인 혹은 중국인 관원과 군인들을 모두 중국으로 축출했는데, 이를 두고 흔히 구한사건이라고 부른다.

 

14세 달라이 라마가 즉위할 때 중화민국 정부는 조문 치제 특사와 좌상 특사를 파견하여 전통적 최왼 관계의 회복을 도모했을 때도, 티베트의 카샤 정부는 독립국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국민당 정부와 최왼 관계를 맺는 것을 거부했다(p. 646).

 

오랜 기간 정교일치의 독자적 정부를 구성하여 티베트 고원을 스스로 다스려온 티베트 역사 공동체의 독특한 역사 경험은 1950년에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 해방군의 침공을 받음으로써 순식간에 종결되었다.

 

195914세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고원을 떠나 인도 북부의 달람살라에 망명 정부를 수립하게 되었고, 중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가 부재한 티베트를 공식적으로 접수하여 1965년 서장자치구를 건립했다(p. 647).

 

1969년부터 티베트 고원에까지 불어닥친 문화대혁명의 십년광풍은 티베트의 전통적 문화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1949년부터 1979년까지 사망한 티베트 인들이 총 126만 명으로, 티베트인 6명 가운데 한 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역사 공동체란 특정한 정치적 사건에 의해 발생하거나 소멸되는 실체가 아니다. 비록 국가가 멸망했다 하더라도, 그 국가를 산생한 역사 공동체는 상당 기간 존속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티베트 인들은 오래 전부터 중국을 가리켜 갸나라 하고 중국인은 갸미라 했는데, 이 말의 개념에는 티베트 혹은 티베트인의 의미가 포함되지 않았다(p. 648).

 

티베트 인들은 중국의 황제는 갸개라 하고 티베트의 통치자는 뵈걔라 하여 황제의 지배 영역과 티베트 군주의 통치 영역을 엄격히 구별했다.

 

전통 시대에 티베트 인과 중국인이 사용해온 말의 개념을 통해 본다면, 전통시대에는 티베트 인이나 중국인이나 구별 없이 모두 티베트와 중국을 서로 염격하게 분별되는 별개의 역사 공동체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p. 649).

 

티베트 인은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샴발라라는 이샹향을 품고 살아 왔다.

 

샴발라는 특정한 경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한 마음으로 티베트 불교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티베트인의 나라, 불국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티베트, 토번, 서장, 시장, 시짱

 

티베트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를 받고 있는 역사 공동체들 가운데서 그 정체성을 가장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역사 공동체의 하나이다(p. 632).

 

활동 공간

티베트 고원: , , , 아리, 암도 등으로 구별됨.

 

장남: 농사가능, 인구와 도시 밀집. 위짱(우창)이 티베트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

장북: 농경 거의 불가능, 목축 가능, 창탕

장동: 임업과 목축업, 농업 고산 협곡,

 

티베트 고원은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가 높고, 연 평균 기온이 현저히 낮으며, 강우량과 공기량이 말할 수 없이 적어서, 중국인이나 인도인, 몽고인등이 이처럼 높고 춥고 건조한 숨찬 곳에서는 살아가기 어렵기 때문에, 티베트 고원의 특수한 자연 환경은 티베트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결정적인 보호막으로 작용해왔다(p. 633).

 

2. 생활

티베트 인은 춥고 건조한 초원에서 가축을 양육하여, 그 산물로써 옷을 지어 입고 음식을 만들었으며 집을 지어 살았다. 물론 목축 지역과 농경 지역에 거주하는 티베트 인의 생활 습속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p. 634).

 

티베트 인의 의식주 생활을 가장 특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이 야크이다.

 

10대 벤첸 라마 야크가 없으면 티베트족이 없다.“

 

3. 풍속

티베트의 결혼 풍속 가운데서 가장 특이한 것은 일처다부의 혼인 형식이다(p. 635).

 

티베트 가정에서는 일반적으로 여성의 역할과 권한이 대단히 커서, 결혼한 남자들은 여자의 일을 거들면서 여성의 경제력에 의존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티베트 여성의 권한은 중국 등 다른 곳의 그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장례: 천장/조장

 

티베트 인은 중국인과 달리 성씨가 없고 넉자로 구성된 이름만 사용하며, 친인척에 대한 칭호도 중국인과 구별된다.

 

4. 언어와 문자

티베트어는 일반적으로 중국-티베트 어계, 티베트-버마 어족, 티베트 어지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된다. 이는 발생학적으로 볼 때, 티베트어가 매우 독립적인 기원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p. 636).

 

티베트 문자는 티베트 최초의 통일 왕조를 건립한 송짼감포 시기에 인도 산스크리트어를 모방하여 창제한 것으로 알려져있다(p. 637)

 

티베트인은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로써 고유한 문학을 발전시키고, 티베트 고원에 불교를 토착화시켜, 이웃 중국과는 분별되는 티베트 역사 공동체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

 

5. 티베트 불교

티베트 고유의 문화 가운데서도 티베트 역사 공동체의 정체성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주는 요소는 티베트 특유의 불교다.

티베트: 소서천(小西天), 소천축(小天竺) / 인도: 서천(西天), 대천축(大天竺)

서천이란 부처와 보살이 사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의 침공을 받기 전에는 가가호호 불교를 독신하지 않는 집이 없었고, 각 가정에서 출가하는 이가 적어도 한 명씩은 있었다.

 

불교가 1,300여년 전에 티베트 고원으로 유입되기 전에는 뵌교라는 샤머니즘이 유행했다. 티베트가 불국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토착 민간신앙인 뵌교와 외래 종교인 불교의 오랜 투쟁과 융합의 과정이었다.

 

티베트 불교는 그 지리적 환경이나 문화적 배경, 사회적 기초 등의 특수성으로 인해, 인도의 원시 불교나 동남아의 소승 불교, 동북아의 대승 불교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흔히 라마교 혹은 장전불교라고 불리는 티베트 불교는 인도의 지리적 근접성으로 인해 중국 불교보다는 일도 불교의 영향을 훨씬 더 많이 받았다(p. 639).

 

정치와 종교를 함께 장악한 고승 라마가 죽었을 때, 전생영동을 찾아 대를 잇게 함으로써, 왕조 형식의 국가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독특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6. 역사적 경험

티베트 인의 혈통적 기원은 위짱의 얄루장푸강 유역에서 발원한 토착인들이 점차 발전하면서 창탕과 청해 등지의 강인과 융합하여 티베트인을 형성하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p. 640).

 

짠포: 영무한 군주

 

송짼감포는 수비와 상슝 등 다른 소국 연맹체를 병합하여 티베트 고원의 통일을 완성하고, 구 귀족의 도전을 제압하여 국가체제를 확립했으며, 라싸로 천도하여 포탈라 궁을 건립했다(p. 641).

 

당시 세계 최강의 당과 당당히 힐항하고 문화적으로는 독특한 불교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웠던 토번 왕국 시기는 티베트 인이라면 누구나 잊을 수 없는 화려한 역사적 경험이었다.

 

10세기 토번 왕국이 당과 함께 멸망 후, 티베트 고원은 수다한 지방 세력에 의해 분점되었는데, 이들 지방 세력들은 그 지방의 유력한 불교 교파와 연계하여 정교 일체의 정권을 수립했다.

 

몽고가 중국과 요동을 석권하고 티베트까지 위협하자, 사캬파 불교의 영수였던 팍빠가 몽고의 대칸 쿠비라이를 만나 최왼 관계 즉 공시 관계를 성립시켰다. 최왼 관계란 원래 승려와 신도 사이에 교환되는 시주와 복전의 종교적인 관계로서, 승려는 신도를 위해 기도하고 신도는 승려를 위해 물질적인 도움을 제공했다(p. 642).

 

몽원 제국이 붕괴됨과 동시에, 티베트에도 사캬파의 통일 정권이 무너지고, 티베트 고원은 이른바 5대 법왕과 5왕 등 수다한 지방 정권에 의해 분점되었다.

 

중국에서 출현한 송과 명이 중국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중국은 티베트의 역사 전개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p. 643).

 

티베트 고원이 정치적으로 다시 통일된 것은 5세 달라이 라마 때부터였다(p. 644).

 

5세 달라이 라마와 순치제가 북경에서 만나 서로 맺은 관계는 빡파와 쿠빌라이가 맺은 관계와 다를 바 없는 최윈관계였다.

 

티베트와 만청의 관계를 오랜 기간 규정해온 최왼 관계는 20세기 초에 이르러 단절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제국주의 영국이 식민지 인도를 발판으로 점차 티베트 고원으로 세력을 확장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만청이 스스로 제국주의 세력으로 변모하여 티베트를 침공했기 때문이다.

 

신해혁명으로 만청이 멸망하자, 라싸로 돌아온 13세 달라이 라마는 중국을 지배하는 국가와의 일체의 관계가 청산되었음을 선언하고, 티베트에 주재하고 있던 주장대신 등 만주인 혹은 중국인 관원과 군인들을 모두 중국으로 축출했는데, 이를 두고 흔히 구한사건이라고 부른다.

 

14세 달라이 라마가 즉위할 때 중화민국 정부는 조문 치제 특사와 좌상 특사를 파견하여 전통적 최왼 관계의 회복을 도모했을 때도, 티베트의 카샤 정부는 독립국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국민당 정부와 최왼 관계를 맺는 것을 거부했다(p. 646).

 

오랜 기간 정교일치의 독자적 정부를 구성하여 티베트 고원을 스스로 다스려온 티베트 역사 공동체의 독특한 역사 경험은 1950년에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 해방군의 침공을 받음으로써 순식간에 종결되었다.

 

195914세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고원을 떠나 인도 북부의 달람살라에 망명 정부를 수립하게 되었고, 중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가 부재한 티베트를 공식적으로 접수하여 1965년 서장자치구를 건립했다(p. 647).

 

1969년부터 티베트 고원에까지 불어닥친 문화대혁명의 십년광풍은 티베트의 전통적 문화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1949년부터 1979년까지 사망한 티베트 인들이 총 126만 명으로, 티베트인 6명 가운데 한 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역사 공동체란 특정한 정치적 사건에 의해 발생하거나 소멸되는 실체가 아니다. 비록 국가가 멸망했다 하더라도, 그 국가를 산생한 역사 공동체는 상당 기간 존속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티베트 인들은 오래 전부터 중국을 가리켜 갸나라 하고 중국인은 갸미라 했는데, 이 말의 개념에는 티베트 혹은 티베트인의 의미가 포함되지 않았다(p. 648).

 

티베트 인들은 중국의 황제는 갸개라 하고 티베트의 통치자는 뵈걔라 하여 황제의 지배 영역과 티베트 군주의 통치 영역을 엄격히 구별했다.

 

전통 시대에 티베트 인과 중국인이 사용해온 말의 개념을 통해 본다면, 전통시대에는 티베트 인이나 중국인이나 구별 없이 모두 티베트와 중국을 서로 염격하게 분별되는 별개의 역사 공동체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p. 649).

 

티베트 인은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샴발라라는 이샹향을 품고 살아 왔다.

 

샴발라는 특정한 경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한 마음으로 티베트 불교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티베트인의 나라, 불국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티베트, 토번, 서장, 시장, 시짱

 

티베트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를 받고 있는 역사 공동체들 가운데서 그 정체성을 가장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역사 공동체의 하나이다(p. 632).

 

활동 공간

티베트 고원: , , , 아리, 암도 등으로 구별됨.

 

장남: 농사가능, 인구와 도시 밀집. 위짱(우창)이 티베트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

장북: 농경 거의 불가능, 목축 가능, 창탕

장동: 임업과 목축업, 농업 고산 협곡,

 

티베트 고원은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가 높고, 연 평균 기온이 현저히 낮으며, 강우량과 공기량이 말할 수 없이 적어서, 중국인이나 인도인, 몽고인등이 이처럼 높고 춥고 건조한 숨찬 곳에서는 살아가기 어렵기 때문에, 티베트 고원의 특수한 자연 환경은 티베트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결정적인 보호막으로 작용해왔다(p. 633).

 

2. 생활

티베트 인은 춥고 건조한 초원에서 가축을 양육하여, 그 산물로써 옷을 지어 입고 음식을 만들었으며 집을 지어 살았다. 물론 목축 지역과 농경 지역에 거주하는 티베트 인의 생활 습속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p. 634).

 

티베트 인의 의식주 생활을 가장 특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이 야크이다.

 

10대 벤첸 라마 야크가 없으면 티베트족이 없다.“

 

3. 풍속

티베트의 결혼 풍속 가운데서 가장 특이한 것은 일처다부의 혼인 형식이다(p. 635).

 

티베트 가정에서는 일반적으로 여성의 역할과 권한이 대단히 커서, 결혼한 남자들은 여자의 일을 거들면서 여성의 경제력에 의존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티베트 여성의 권한은 중국 등 다른 곳의 그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장례: 천장/조장

 

티베트 인은 중국인과 달리 성씨가 없고 넉자로 구성된 이름만 사용하며, 친인척에 대한 칭호도 중국인과 구별된다.

 

4. 언어와 문자

티베트어는 일반적으로 중국-티베트 어계, 티베트-버마 어족, 티베트 어지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된다. 이는 발생학적으로 볼 때, 티베트어가 매우 독립적인 기원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p. 636).

 

티베트 문자는 티베트 최초의 통일 왕조를 건립한 송짼감포 시기에 인도 산스크리트어를 모방하여 창제한 것으로 알려져있다(p. 637)

 

티베트인은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로써 고유한 문학을 발전시키고, 티베트 고원에 불교를 토착화시켜, 이웃 중국과는 분별되는 티베트 역사 공동체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

 

5. 티베트 불교

티베트 고유의 문화 가운데서도 티베트 역사 공동체의 정체성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주는 요소는 티베트 특유의 불교다.

티베트: 소서천(小西天), 소천축(小天竺) / 인도: 서천(西天), 대천축(大天竺)

서천이란 부처와 보살이 사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의 침공을 받기 전에는 가가호호 불교를 독신하지 않는 집이 없었고, 각 가정에서 출가하는 이가 적어도 한 명씩은 있었다.

 

불교가 1,300여년 전에 티베트 고원으로 유입되기 전에는 뵌교라는 샤머니즘이 유행했다. 티베트가 불국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토착 민간신앙인 뵌교와 외래 종교인 불교의 오랜 투쟁과 융합의 과정이었다.

 

티베트 불교는 그 지리적 환경이나 문화적 배경, 사회적 기초 등의 특수성으로 인해, 인도의 원시 불교나 동남아의 소승 불교, 동북아의 대승 불교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흔히 라마교 혹은 장전불교라고 불리는 티베트 불교는 인도의 지리적 근접성으로 인해 중국 불교보다는 일도 불교의 영향을 훨씬 더 많이 받았다(p. 639).

 

정치와 종교를 함께 장악한 고승 라마가 죽었을 때, 전생영동을 찾아 대를 잇게 함으로써, 왕조 형식의 국가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독특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6. 역사적 경험

티베트 인의 혈통적 기원은 위짱의 얄루장푸강 유역에서 발원한 토착인들이 점차 발전하면서 창탕과 청해 등지의 강인과 융합하여 티베트인을 형성하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p. 640).

 

짠포: 영무한 군주

 

송짼감포는 수비와 상슝 등 다른 소국 연맹체를 병합하여 티베트 고원의 통일을 완성하고, 구 귀족의 도전을 제압하여 국가체제를 확립했으며, 라싸로 천도하여 포탈라 궁을 건립했다(p. 641).

 

당시 세계 최강의 당과 당당히 힐항하고 문화적으로는 독특한 불교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웠던 토번 왕국 시기는 티베트 인이라면 누구나 잊을 수 없는 화려한 역사적 경험이었다.

 

10세기 토번 왕국이 당과 함께 멸망 후, 티베트 고원은 수다한 지방 세력에 의해 분점되었는데, 이들 지방 세력들은 그 지방의 유력한 불교 교파와 연계하여 정교 일체의 정권을 수립했다.

 

몽고가 중국과 요동을 석권하고 티베트까지 위협하자, 사캬파 불교의 영수였던 팍빠가 몽고의 대칸 쿠비라이를 만나 최왼 관계 즉 공시 관계를 성립시켰다. 최왼 관계란 원래 승려와 신도 사이에 교환되는 시주와 복전의 종교적인 관계로서, 승려는 신도를 위해 기도하고 신도는 승려를 위해 물질적인 도움을 제공했다(p. 642).

 

몽원 제국이 붕괴됨과 동시에, 티베트에도 사캬파의 통일 정권이 무너지고, 티베트 고원은 이른바 5대 법왕과 5왕 등 수다한 지방 정권에 의해 분점되었다.

 

중국에서 출현한 송과 명이 중국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중국은 티베트의 역사 전개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p. 643).

 

티베트 고원이 정치적으로 다시 통일된 것은 5세 달라이 라마 때부터였다(p. 644).

 

5세 달라이 라마와 순치제가 북경에서 만나 서로 맺은 관계는 빡파와 쿠빌라이가 맺은 관계와 다를 바 없는 최윈관계였다.

 

티베트와 만청의 관계를 오랜 기간 규정해온 최왼 관계는 20세기 초에 이르러 단절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제국주의 영국이 식민지 인도를 발판으로 점차 티베트 고원으로 세력을 확장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만청이 스스로 제국주의 세력으로 변모하여 티베트를 침공했기 때문이다.

 

신해혁명으로 만청이 멸망하자, 라싸로 돌아온 13세 달라이 라마는 중국을 지배하는 국가와의 일체의 관계가 청산되었음을 선언하고, 티베트에 주재하고 있던 주장대신 등 만주인 혹은 중국인 관원과 군인들을 모두 중국으로 축출했는데, 이를 두고 흔히 구한사건이라고 부른다.

 

14세 달라이 라마가 즉위할 때 중화민국 정부는 조문 치제 특사와 좌상 특사를 파견하여 전통적 최왼 관계의 회복을 도모했을 때도, 티베트의 카샤 정부는 독립국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국민당 정부와 최왼 관계를 맺는 것을 거부했다(p. 646).

 

오랜 기간 정교일치의 독자적 정부를 구성하여 티베트 고원을 스스로 다스려온 티베트 역사 공동체의 독특한 역사 경험은 1950년에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 해방군의 침공을 받음으로써 순식간에 종결되었다.

 

195914세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고원을 떠나 인도 북부의 달람살라에 망명 정부를 수립하게 되었고, 중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가 부재한 티베트를 공식적으로 접수하여 1965년 서장자치구를 건립했다(p. 647).

 

1969년부터 티베트 고원에까지 불어닥친 문화대혁명의 십년광풍은 티베트의 전통적 문화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1949년부터 1979년까지 사망한 티베트 인들이 총 126만 명으로, 티베트인 6명 가운데 한 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역사 공동체란 특정한 정치적 사건에 의해 발생하거나 소멸되는 실체가 아니다. 비록 국가가 멸망했다 하더라도, 그 국가를 산생한 역사 공동체는 상당 기간 존속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티베트 인들은 오래 전부터 중국을 가리켜 갸나라 하고 중국인은 갸미라 했는데, 이 말의 개념에는 티베트 혹은 티베트인의 의미가 포함되지 않았다(p. 648).

 

티베트 인들은 중국의 황제는 갸개라 하고 티베트의 통치자는 뵈걔라 하여 황제의 지배 영역과 티베트 군주의 통치 영역을 엄격히 구별했다.

 

전통 시대에 티베트 인과 중국인이 사용해온 말의 개념을 통해 본다면, 전통시대에는 티베트 인이나 중국인이나 구별 없이 모두 티베트와 중국을 서로 염격하게 분별되는 별개의 역사 공동체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p. 649).

 

티베트 인은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샴발라라는 이샹향을 품고 살아 왔다.

 

샴발라는 특정한 경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한 마음으로 티베트 불교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티베트인의 나라, 불국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티베트, 토번, 서장, 시장, 시짱

 

티베트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를 받고 있는 역사 공동체들 가운데서 그 정체성을 가장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역사 공동체의 하나이다(p. 632).

 

활동 공간

티베트 고원: , , , 아리, 암도 등으로 구별됨.

 

장남: 농사가능, 인구와 도시 밀집. 위짱(우창)이 티베트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

장북: 농경 거의 불가능, 목축 가능, 창탕

장동: 임업과 목축업, 농업 고산 협곡,

 

티베트 고원은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가 높고, 연 평균 기온이 현저히 낮으며, 강우량과 공기량이 말할 수 없이 적어서, 중국인이나 인도인, 몽고인등이 이처럼 높고 춥고 건조한 숨찬 곳에서는 살아가기 어렵기 때문에, 티베트 고원의 특수한 자연 환경은 티베트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결정적인 보호막으로 작용해왔다(p. 633).

 

2. 생활

티베트 인은 춥고 건조한 초원에서 가축을 양육하여, 그 산물로써 옷을 지어 입고 음식을 만들었으며 집을 지어 살았다. 물론 목축 지역과 농경 지역에 거주하는 티베트 인의 생활 습속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p. 634).

 

티베트 인의 의식주 생활을 가장 특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이 야크이다.

 

10대 벤첸 라마 야크가 없으면 티베트족이 없다.“

 

3. 풍속

티베트의 결혼 풍속 가운데서 가장 특이한 것은 일처다부의 혼인 형식이다(p. 635).

 

티베트 가정에서는 일반적으로 여성의 역할과 권한이 대단히 커서, 결혼한 남자들은 여자의 일을 거들면서 여성의 경제력에 의존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티베트 여성의 권한은 중국 등 다른 곳의 그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장례: 천장/조장

 

티베트 인은 중국인과 달리 성씨가 없고 넉자로 구성된 이름만 사용하며, 친인척에 대한 칭호도 중국인과 구별된다.

 

4. 언어와 문자

티베트어는 일반적으로 중국-티베트 어계, 티베트-버마 어족, 티베트 어지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된다. 이는 발생학적으로 볼 때, 티베트어가 매우 독립적인 기원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p. 636).

 

티베트 문자는 티베트 최초의 통일 왕조를 건립한 송짼감포 시기에 인도 산스크리트어를 모방하여 창제한 것으로 알려져있다(p. 637)

 

티베트인은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로써 고유한 문학을 발전시키고, 티베트 고원에 불교를 토착화시켜, 이웃 중국과는 분별되는 티베트 역사 공동체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

 

5. 티베트 불교

티베트 고유의 문화 가운데서도 티베트 역사 공동체의 정체성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주는 요소는 티베트 특유의 불교다.

티베트: 소서천(小西天), 소천축(小天竺) / 인도: 서천(西天), 대천축(大天竺)

서천이란 부처와 보살이 사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의 침공을 받기 전에는 가가호호 불교를 독신하지 않는 집이 없었고, 각 가정에서 출가하는 이가 적어도 한 명씩은 있었다.

 

불교가 1,300여년 전에 티베트 고원으로 유입되기 전에는 뵌교라는 샤머니즘이 유행했다. 티베트가 불국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토착 민간신앙인 뵌교와 외래 종교인 불교의 오랜 투쟁과 융합의 과정이었다.

 

티베트 불교는 그 지리적 환경이나 문화적 배경, 사회적 기초 등의 특수성으로 인해, 인도의 원시 불교나 동남아의 소승 불교, 동북아의 대승 불교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흔히 라마교 혹은 장전불교라고 불리는 티베트 불교는 인도의 지리적 근접성으로 인해 중국 불교보다는 일도 불교의 영향을 훨씬 더 많이 받았다(p. 639).

 

정치와 종교를 함께 장악한 고승 라마가 죽었을 때, 전생영동을 찾아 대를 잇게 함으로써, 왕조 형식의 국가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독특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6. 역사적 경험

티베트 인의 혈통적 기원은 위짱의 얄루장푸강 유역에서 발원한 토착인들이 점차 발전하면서 창탕과 청해 등지의 강인과 융합하여 티베트인을 형성하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p. 640).

 

짠포: 영무한 군주

 

송짼감포는 수비와 상슝 등 다른 소국 연맹체를 병합하여 티베트 고원의 통일을 완성하고, 구 귀족의 도전을 제압하여 국가체제를 확립했으며, 라싸로 천도하여 포탈라 궁을 건립했다(p. 641).

 

당시 세계 최강의 당과 당당히 힐항하고 문화적으로는 독특한 불교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웠던 토번 왕국 시기는 티베트 인이라면 누구나 잊을 수 없는 화려한 역사적 경험이었다.

 

10세기 토번 왕국이 당과 함께 멸망 후, 티베트 고원은 수다한 지방 세력에 의해 분점되었는데, 이들 지방 세력들은 그 지방의 유력한 불교 교파와 연계하여 정교 일체의 정권을 수립했다.

 

몽고가 중국과 요동을 석권하고 티베트까지 위협하자, 사캬파 불교의 영수였던 팍빠가 몽고의 대칸 쿠비라이를 만나 최왼 관계 즉 공시 관계를 성립시켰다. 최왼 관계란 원래 승려와 신도 사이에 교환되는 시주와 복전의 종교적인 관계로서, 승려는 신도를 위해 기도하고 신도는 승려를 위해 물질적인 도움을 제공했다(p. 642).

 

몽원 제국이 붕괴됨과 동시에, 티베트에도 사캬파의 통일 정권이 무너지고, 티베트 고원은 이른바 5대 법왕과 5왕 등 수다한 지방 정권에 의해 분점되었다.

 

중국에서 출현한 송과 명이 중국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중국은 티베트의 역사 전개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p. 643).

 

티베트 고원이 정치적으로 다시 통일된 것은 5세 달라이 라마 때부터였다(p. 644).

 

5세 달라이 라마와 순치제가 북경에서 만나 서로 맺은 관계는 빡파와 쿠빌라이가 맺은 관계와 다를 바 없는 최윈관계였다.

 

티베트와 만청의 관계를 오랜 기간 규정해온 최왼 관계는 20세기 초에 이르러 단절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제국주의 영국이 식민지 인도를 발판으로 점차 티베트 고원으로 세력을 확장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만청이 스스로 제국주의 세력으로 변모하여 티베트를 침공했기 때문이다.

 

신해혁명으로 만청이 멸망하자, 라싸로 돌아온 13세 달라이 라마는 중국을 지배하는 국가와의 일체의 관계가 청산되었음을 선언하고, 티베트에 주재하고 있던 주장대신 등 만주인 혹은 중국인 관원과 군인들을 모두 중국으로 축출했는데, 이를 두고 흔히 구한사건이라고 부른다.

 

14세 달라이 라마가 즉위할 때 중화민국 정부는 조문 치제 특사와 좌상 특사를 파견하여 전통적 최왼 관계의 회복을 도모했을 때도, 티베트의 카샤 정부는 독립국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국민당 정부와 최왼 관계를 맺는 것을 거부했다(p. 646).

 

오랜 기간 정교일치의 독자적 정부를 구성하여 티베트 고원을 스스로 다스려온 티베트 역사 공동체의 독특한 역사 경험은 1950년에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 해방군의 침공을 받음으로써 순식간에 종결되었다.

 

195914세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고원을 떠나 인도 북부의 달람살라에 망명 정부를 수립하게 되었고, 중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가 부재한 티베트를 공식적으로 접수하여 1965년 서장자치구를 건립했다(p. 647).

 

1969년부터 티베트 고원에까지 불어닥친 문화대혁명의 십년광풍은 티베트의 전통적 문화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1949년부터 1979년까지 사망한 티베트 인들이 총 126만 명으로, 티베트인 6명 가운데 한 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역사 공동체란 특정한 정치적 사건에 의해 발생하거나 소멸되는 실체가 아니다. 비록 국가가 멸망했다 하더라도, 그 국가를 산생한 역사 공동체는 상당 기간 존속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티베트 인들은 오래 전부터 중국을 가리켜 갸나라 하고 중국인은 갸미라 했는데, 이 말의 개념에는 티베트 혹은 티베트인의 의미가 포함되지 않았다(p. 648).

 

티베트 인들은 중국의 황제는 갸개라 하고 티베트의 통치자는 뵈걔라 하여 황제의 지배 영역과 티베트 군주의 통치 영역을 엄격히 구별했다.

 

전통 시대에 티베트 인과 중국인이 사용해온 말의 개념을 통해 본다면, 전통시대에는 티베트 인이나 중국인이나 구별 없이 모두 티베트와 중국을 서로 염격하게 분별되는 별개의 역사 공동체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p. 649).

 

티베트 인은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샴발라라는 이샹향을 품고 살아 왔다.

 

샴발라는 특정한 경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한 마음으로 티베트 불교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티베트인의 나라, 불국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티베트, 토번, 서장, 시장, 시짱

 

티베트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를 받고 있는 역사 공동체들 가운데서 그 정체성을 가장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역사 공동체의 하나이다(p. 632).

 

활동 공간

티베트 고원: , , , 아리, 암도 등으로 구별됨.

 

장남: 농사가능, 인구와 도시 밀집. 위짱(우창)이 티베트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

장북: 농경 거의 불가능, 목축 가능, 창탕

장동: 임업과 목축업, 농업 고산 협곡,

 

티베트 고원은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가 높고, 연 평균 기온이 현저히 낮으며, 강우량과 공기량이 말할 수 없이 적어서, 중국인이나 인도인, 몽고인등이 이처럼 높고 춥고 건조한 숨찬 곳에서는 살아가기 어렵기 때문에, 티베트 고원의 특수한 자연 환경은 티베트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결정적인 보호막으로 작용해왔다(p. 633).

 

2. 생활

티베트 인은 춥고 건조한 초원에서 가축을 양육하여, 그 산물로써 옷을 지어 입고 음식을 만들었으며 집을 지어 살았다. 물론 목축 지역과 농경 지역에 거주하는 티베트 인의 생활 습속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p. 634).

 

티베트 인의 의식주 생활을 가장 특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이 야크이다.

 

10대 벤첸 라마 야크가 없으면 티베트족이 없다.“

 

3. 풍속

티베트의 결혼 풍속 가운데서 가장 특이한 것은 일처다부의 혼인 형식이다(p. 635).

 

티베트 가정에서는 일반적으로 여성의 역할과 권한이 대단히 커서, 결혼한 남자들은 여자의 일을 거들면서 여성의 경제력에 의존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티베트 여성의 권한은 중국 등 다른 곳의 그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장례: 천장/조장

 

티베트 인은 중국인과 달리 성씨가 없고 넉자로 구성된 이름만 사용하며, 친인척에 대한 칭호도 중국인과 구별된다.

 

4. 언어와 문자

티베트어는 일반적으로 중국-티베트 어계, 티베트-버마 어족, 티베트 어지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된다. 이는 발생학적으로 볼 때, 티베트어가 매우 독립적인 기원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p. 636).

 

티베트 문자는 티베트 최초의 통일 왕조를 건립한 송짼감포 시기에 인도 산스크리트어를 모방하여 창제한 것으로 알려져있다(p. 637)

 

티베트인은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로써 고유한 문학을 발전시키고, 티베트 고원에 불교를 토착화시켜, 이웃 중국과는 분별되는 티베트 역사 공동체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

 

5. 티베트 불교

티베트 고유의 문화 가운데서도 티베트 역사 공동체의 정체성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주는 요소는 티베트 특유의 불교다.

티베트: 소서천(小西天), 소천축(小天竺) / 인도: 서천(西天), 대천축(大天竺)

서천이란 부처와 보살이 사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의 침공을 받기 전에는 가가호호 불교를 독신하지 않는 집이 없었고, 각 가정에서 출가하는 이가 적어도 한 명씩은 있었다.

 

불교가 1,300여년 전에 티베트 고원으로 유입되기 전에는 뵌교라는 샤머니즘이 유행했다. 티베트가 불국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토착 민간신앙인 뵌교와 외래 종교인 불교의 오랜 투쟁과 융합의 과정이었다.

 

티베트 불교는 그 지리적 환경이나 문화적 배경, 사회적 기초 등의 특수성으로 인해, 인도의 원시 불교나 동남아의 소승 불교, 동북아의 대승 불교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흔히 라마교 혹은 장전불교라고 불리는 티베트 불교는 인도의 지리적 근접성으로 인해 중국 불교보다는 일도 불교의 영향을 훨씬 더 많이 받았다(p. 639).

 

정치와 종교를 함께 장악한 고승 라마가 죽었을 때, 전생영동을 찾아 대를 잇게 함으로써, 왕조 형식의 국가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독특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6. 역사적 경험

티베트 인의 혈통적 기원은 위짱의 얄루장푸강 유역에서 발원한 토착인들이 점차 발전하면서 창탕과 청해 등지의 강인과 융합하여 티베트인을 형성하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p. 640).

 

짠포: 영무한 군주

 

송짼감포는 수비와 상슝 등 다른 소국 연맹체를 병합하여 티베트 고원의 통일을 완성하고, 구 귀족의 도전을 제압하여 국가체제를 확립했으며, 라싸로 천도하여 포탈라 궁을 건립했다(p. 641).

 

당시 세계 최강의 당과 당당히 힐항하고 문화적으로는 독특한 불교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웠던 토번 왕국 시기는 티베트 인이라면 누구나 잊을 수 없는 화려한 역사적 경험이었다.

 

10세기 토번 왕국이 당과 함께 멸망 후, 티베트 고원은 수다한 지방 세력에 의해 분점되었는데, 이들 지방 세력들은 그 지방의 유력한 불교 교파와 연계하여 정교 일체의 정권을 수립했다.

 

몽고가 중국과 요동을 석권하고 티베트까지 위협하자, 사캬파 불교의 영수였던 팍빠가 몽고의 대칸 쿠비라이를 만나 최왼 관계 즉 공시 관계를 성립시켰다. 최왼 관계란 원래 승려와 신도 사이에 교환되는 시주와 복전의 종교적인 관계로서, 승려는 신도를 위해 기도하고 신도는 승려를 위해 물질적인 도움을 제공했다(p. 642).

 

몽원 제국이 붕괴됨과 동시에, 티베트에도 사캬파의 통일 정권이 무너지고, 티베트 고원은 이른바 5대 법왕과 5왕 등 수다한 지방 정권에 의해 분점되었다.

 

중국에서 출현한 송과 명이 중국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중국은 티베트의 역사 전개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p. 643).

 

티베트 고원이 정치적으로 다시 통일된 것은 5세 달라이 라마 때부터였다(p. 644).

 

5세 달라이 라마와 순치제가 북경에서 만나 서로 맺은 관계는 빡파와 쿠빌라이가 맺은 관계와 다를 바 없는 최윈관계였다.

 

티베트와 만청의 관계를 오랜 기간 규정해온 최왼 관계는 20세기 초에 이르러 단절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제국주의 영국이 식민지 인도를 발판으로 점차 티베트 고원으로 세력을 확장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만청이 스스로 제국주의 세력으로 변모하여 티베트를 침공했기 때문이다.

 

신해혁명으로 만청이 멸망하자, 라싸로 돌아온 13세 달라이 라마는 중국을 지배하는 국가와의 일체의 관계가 청산되었음을 선언하고, 티베트에 주재하고 있던 주장대신 등 만주인 혹은 중국인 관원과 군인들을 모두 중국으로 축출했는데, 이를 두고 흔히 구한사건이라고 부른다.

 

14세 달라이 라마가 즉위할 때 중화민국 정부는 조문 치제 특사와 좌상 특사를 파견하여 전통적 최왼 관계의 회복을 도모했을 때도, 티베트의 카샤 정부는 독립국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국민당 정부와 최왼 관계를 맺는 것을 거부했다(p. 646).

 

오랜 기간 정교일치의 독자적 정부를 구성하여 티베트 고원을 스스로 다스려온 티베트 역사 공동체의 독특한 역사 경험은 1950년에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 해방군의 침공을 받음으로써 순식간에 종결되었다.

 

195914세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고원을 떠나 인도 북부의 달람살라에 망명 정부를 수립하게 되었고, 중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가 부재한 티베트를 공식적으로 접수하여 1965년 서장자치구를 건립했다(p. 647).

 

1969년부터 티베트 고원에까지 불어닥친 문화대혁명의 십년광풍은 티베트의 전통적 문화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1949년부터 1979년까지 사망한 티베트 인들이 총 126만 명으로, 티베트인 6명 가운데 한 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역사 공동체란 특정한 정치적 사건에 의해 발생하거나 소멸되는 실체가 아니다. 비록 국가가 멸망했다 하더라도, 그 국가를 산생한 역사 공동체는 상당 기간 존속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티베트 인들은 오래 전부터 중국을 가리켜 갸나라 하고 중국인은 갸미라 했는데, 이 말의 개념에는 티베트 혹은 티베트인의 의미가 포함되지 않았다(p. 648).

 

티베트 인들은 중국의 황제는 갸개라 하고 티베트의 통치자는 뵈걔라 하여 황제의 지배 영역과 티베트 군주의 통치 영역을 엄격히 구별했다.

 

전통 시대에 티베트 인과 중국인이 사용해온 말의 개념을 통해 본다면, 전통시대에는 티베트 인이나 중국인이나 구별 없이 모두 티베트와 중국을 서로 염격하게 분별되는 별개의 역사 공동체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p. 649).

 

티베트 인은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샴발라라는 이샹향을 품고 살아 왔다.

 

샴발라는 특정한 경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한 마음으로 티베트 불교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티베트인의 나라, 불국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티베트, 토번, 서장, 시장, 시짱

 

티베트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를 받고 있는 역사 공동체들 가운데서 그 정체성을 가장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역사 공동체의 하나이다(p. 632).

 

활동 공간

티베트 고원: , , , 아리, 암도 등으로 구별됨.

 

장남: 농사가능, 인구와 도시 밀집. 위짱(우창)이 티베트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

장북: 농경 거의 불가능, 목축 가능, 창탕

장동: 임업과 목축업, 농업 고산 협곡,

 

티베트 고원은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가 높고, 연 평균 기온이 현저히 낮으며, 강우량과 공기량이 말할 수 없이 적어서, 중국인이나 인도인, 몽고인등이 이처럼 높고 춥고 건조한 숨찬 곳에서는 살아가기 어렵기 때문에, 티베트 고원의 특수한 자연 환경은 티베트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결정적인 보호막으로 작용해왔다(p. 633).

 

2. 생활

티베트 인은 춥고 건조한 초원에서 가축을 양육하여, 그 산물로써 옷을 지어 입고 음식을 만들었으며 집을 지어 살았다. 물론 목축 지역과 농경 지역에 거주하는 티베트 인의 생활 습속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p. 634).

 

티베트 인의 의식주 생활을 가장 특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이 야크이다.

 

10대 벤첸 라마 야크가 없으면 티베트족이 없다.“

 

3. 풍속

티베트의 결혼 풍속 가운데서 가장 특이한 것은 일처다부의 혼인 형식이다(p. 635).

 

티베트 가정에서는 일반적으로 여성의 역할과 권한이 대단히 커서, 결혼한 남자들은 여자의 일을 거들면서 여성의 경제력에 의존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티베트 여성의 권한은 중국 등 다른 곳의 그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장례: 천장/조장

 

티베트 인은 중국인과 달리 성씨가 없고 넉자로 구성된 이름만 사용하며, 친인척에 대한 칭호도 중국인과 구별된다.

 

4. 언어와 문자

티베트어는 일반적으로 중국-티베트 어계, 티베트-버마 어족, 티베트 어지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된다. 이는 발생학적으로 볼 때, 티베트어가 매우 독립적인 기원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p. 636).

 

티베트 문자는 티베트 최초의 통일 왕조를 건립한 송짼감포 시기에 인도 산스크리트어를 모방하여 창제한 것으로 알려져있다(p. 637)

 

티베트인은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로써 고유한 문학을 발전시키고, 티베트 고원에 불교를 토착화시켜, 이웃 중국과는 분별되는 티베트 역사 공동체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

 

5. 티베트 불교

티베트 고유의 문화 가운데서도 티베트 역사 공동체의 정체성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주는 요소는 티베트 특유의 불교다.

티베트: 소서천(小西天), 소천축(小天竺) / 인도: 서천(西天), 대천축(大天竺)

서천이란 부처와 보살이 사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의 침공을 받기 전에는 가가호호 불교를 독신하지 않는 집이 없었고, 각 가정에서 출가하는 이가 적어도 한 명씩은 있었다.

 

불교가 1,300여년 전에 티베트 고원으로 유입되기 전에는 뵌교라는 샤머니즘이 유행했다. 티베트가 불국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토착 민간신앙인 뵌교와 외래 종교인 불교의 오랜 투쟁과 융합의 과정이었다.

 

티베트 불교는 그 지리적 환경이나 문화적 배경, 사회적 기초 등의 특수성으로 인해, 인도의 원시 불교나 동남아의 소승 불교, 동북아의 대승 불교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흔히 라마교 혹은 장전불교라고 불리는 티베트 불교는 인도의 지리적 근접성으로 인해 중국 불교보다는 일도 불교의 영향을 훨씬 더 많이 받았다(p. 639).

 

정치와 종교를 함께 장악한 고승 라마가 죽었을 때, 전생영동을 찾아 대를 잇게 함으로써, 왕조 형식의 국가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독특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6. 역사적 경험

티베트 인의 혈통적 기원은 위짱의 얄루장푸강 유역에서 발원한 토착인들이 점차 발전하면서 창탕과 청해 등지의 강인과 융합하여 티베트인을 형성하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p. 640).

 

짠포: 영무한 군주

 

송짼감포는 수비와 상슝 등 다른 소국 연맹체를 병합하여 티베트 고원의 통일을 완성하고, 구 귀족의 도전을 제압하여 국가체제를 확립했으며, 라싸로 천도하여 포탈라 궁을 건립했다(p. 641).

 

당시 세계 최강의 당과 당당히 힐항하고 문화적으로는 독특한 불교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웠던 토번 왕국 시기는 티베트 인이라면 누구나 잊을 수 없는 화려한 역사적 경험이었다.

 

10세기 토번 왕국이 당과 함께 멸망 후, 티베트 고원은 수다한 지방 세력에 의해 분점되었는데, 이들 지방 세력들은 그 지방의 유력한 불교 교파와 연계하여 정교 일체의 정권을 수립했다.

 

몽고가 중국과 요동을 석권하고 티베트까지 위협하자, 사캬파 불교의 영수였던 팍빠가 몽고의 대칸 쿠비라이를 만나 최왼 관계 즉 공시 관계를 성립시켰다. 최왼 관계란 원래 승려와 신도 사이에 교환되는 시주와 복전의 종교적인 관계로서, 승려는 신도를 위해 기도하고 신도는 승려를 위해 물질적인 도움을 제공했다(p. 642).

 

몽원 제국이 붕괴됨과 동시에, 티베트에도 사캬파의 통일 정권이 무너지고, 티베트 고원은 이른바 5대 법왕과 5왕 등 수다한 지방 정권에 의해 분점되었다.

 

중국에서 출현한 송과 명이 중국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중국은 티베트의 역사 전개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p. 643).

 

티베트 고원이 정치적으로 다시 통일된 것은 5세 달라이 라마 때부터였다(p. 644).

 

5세 달라이 라마와 순치제가 북경에서 만나 서로 맺은 관계는 빡파와 쿠빌라이가 맺은 관계와 다를 바 없는 최윈관계였다.

 

티베트와 만청의 관계를 오랜 기간 규정해온 최왼 관계는 20세기 초에 이르러 단절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제국주의 영국이 식민지 인도를 발판으로 점차 티베트 고원으로 세력을 확장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만청이 스스로 제국주의 세력으로 변모하여 티베트를 침공했기 때문이다.

 

신해혁명으로 만청이 멸망하자, 라싸로 돌아온 13세 달라이 라마는 중국을 지배하는 국가와의 일체의 관계가 청산되었음을 선언하고, 티베트에 주재하고 있던 주장대신 등 만주인 혹은 중국인 관원과 군인들을 모두 중국으로 축출했는데, 이를 두고 흔히 구한사건이라고 부른다.

 

14세 달라이 라마가 즉위할 때 중화민국 정부는 조문 치제 특사와 좌상 특사를 파견하여 전통적 최왼 관계의 회복을 도모했을 때도, 티베트의 카샤 정부는 독립국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국민당 정부와 최왼 관계를 맺는 것을 거부했다(p. 646).

 

오랜 기간 정교일치의 독자적 정부를 구성하여 티베트 고원을 스스로 다스려온 티베트 역사 공동체의 독특한 역사 경험은 1950년에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 해방군의 침공을 받음으로써 순식간에 종결되었다.

 

195914세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고원을 떠나 인도 북부의 달람살라에 망명 정부를 수립하게 되었고, 중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가 부재한 티베트를 공식적으로 접수하여 1965년 서장자치구를 건립했다(p. 647).

 

1969년부터 티베트 고원에까지 불어닥친 문화대혁명의 십년광풍은 티베트의 전통적 문화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1949년부터 1979년까지 사망한 티베트 인들이 총 126만 명으로, 티베트인 6명 가운데 한 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역사 공동체란 특정한 정치적 사건에 의해 발생하거나 소멸되는 실체가 아니다. 비록 국가가 멸망했다 하더라도, 그 국가를 산생한 역사 공동체는 상당 기간 존속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티베트 인들은 오래 전부터 중국을 가리켜 갸나라 하고 중국인은 갸미라 했는데, 이 말의 개념에는 티베트 혹은 티베트인의 의미가 포함되지 않았다(p. 648).

 

티베트 인들은 중국의 황제는 갸개라 하고 티베트의 통치자는 뵈걔라 하여 황제의 지배 영역과 티베트 군주의 통치 영역을 엄격히 구별했다.

 

전통 시대에 티베트 인과 중국인이 사용해온 말의 개념을 통해 본다면, 전통시대에는 티베트 인이나 중국인이나 구별 없이 모두 티베트와 중국을 서로 염격하게 분별되는 별개의 역사 공동체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p. 649).

 

티베트 인은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샴발라라는 이샹향을 품고 살아 왔다.

 

샴발라는 특정한 경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한 마음으로 티베트 불교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티베트인의 나라, 불국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티베트, 토번, 서장, 시장, 시짱

 

티베트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를 받고 있는 역사 공동체들 가운데서 그 정체성을 가장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역사 공동체의 하나이다(p. 632).

 

활동 공간

티베트 고원: , , , 아리, 암도 등으로 구별됨.

 

장남: 농사가능, 인구와 도시 밀집. 위짱(우창)이 티베트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

장북: 농경 거의 불가능, 목축 가능, 창탕

장동: 임업과 목축업, 농업 고산 협곡,

 

티베트 고원은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가 높고, 연 평균 기온이 현저히 낮으며, 강우량과 공기량이 말할 수 없이 적어서, 중국인이나 인도인, 몽고인등이 이처럼 높고 춥고 건조한 숨찬 곳에서는 살아가기 어렵기 때문에, 티베트 고원의 특수한 자연 환경은 티베트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결정적인 보호막으로 작용해왔다(p. 633).

 

2. 생활

티베트 인은 춥고 건조한 초원에서 가축을 양육하여, 그 산물로써 옷을 지어 입고 음식을 만들었으며 집을 지어 살았다. 물론 목축 지역과 농경 지역에 거주하는 티베트 인의 생활 습속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p. 634).

 

티베트 인의 의식주 생활을 가장 특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이 야크이다.

 

10대 벤첸 라마 야크가 없으면 티베트족이 없다.“

 

3. 풍속

티베트의 결혼 풍속 가운데서 가장 특이한 것은 일처다부의 혼인 형식이다(p. 635).

 

티베트 가정에서는 일반적으로 여성의 역할과 권한이 대단히 커서, 결혼한 남자들은 여자의 일을 거들면서 여성의 경제력에 의존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티베트 여성의 권한은 중국 등 다른 곳의 그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장례: 천장/조장

 

티베트 인은 중국인과 달리 성씨가 없고 넉자로 구성된 이름만 사용하며, 친인척에 대한 칭호도 중국인과 구별된다.

 

4. 언어와 문자

티베트어는 일반적으로 중국-티베트 어계, 티베트-버마 어족, 티베트 어지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된다. 이는 발생학적으로 볼 때, 티베트어가 매우 독립적인 기원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p. 636).

 

티베트 문자는 티베트 최초의 통일 왕조를 건립한 송짼감포 시기에 인도 산스크리트어를 모방하여 창제한 것으로 알려져있다(p. 637)

 

티베트인은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로써 고유한 문학을 발전시키고, 티베트 고원에 불교를 토착화시켜, 이웃 중국과는 분별되는 티베트 역사 공동체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

 

5. 티베트 불교

티베트 고유의 문화 가운데서도 티베트 역사 공동체의 정체성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주는 요소는 티베트 특유의 불교다.

티베트: 소서천(小西天), 소천축(小天竺) / 인도: 서천(西天), 대천축(大天竺)

서천이란 부처와 보살이 사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의 침공을 받기 전에는 가가호호 불교를 독신하지 않는 집이 없었고, 각 가정에서 출가하는 이가 적어도 한 명씩은 있었다.

 

불교가 1,300여년 전에 티베트 고원으로 유입되기 전에는 뵌교라는 샤머니즘이 유행했다. 티베트가 불국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토착 민간신앙인 뵌교와 외래 종교인 불교의 오랜 투쟁과 융합의 과정이었다.

 

티베트 불교는 그 지리적 환경이나 문화적 배경, 사회적 기초 등의 특수성으로 인해, 인도의 원시 불교나 동남아의 소승 불교, 동북아의 대승 불교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흔히 라마교 혹은 장전불교라고 불리는 티베트 불교는 인도의 지리적 근접성으로 인해 중국 불교보다는 일도 불교의 영향을 훨씬 더 많이 받았다(p. 639).

 

정치와 종교를 함께 장악한 고승 라마가 죽었을 때, 전생영동을 찾아 대를 잇게 함으로써, 왕조 형식의 국가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독특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6. 역사적 경험

티베트 인의 혈통적 기원은 위짱의 얄루장푸강 유역에서 발원한 토착인들이 점차 발전하면서 창탕과 청해 등지의 강인과 융합하여 티베트인을 형성하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p. 640).

 

짠포: 영무한 군주

 

송짼감포는 수비와 상슝 등 다른 소국 연맹체를 병합하여 티베트 고원의 통일을 완성하고, 구 귀족의 도전을 제압하여 국가체제를 확립했으며, 라싸로 천도하여 포탈라 궁을 건립했다(p. 641).

 

당시 세계 최강의 당과 당당히 힐항하고 문화적으로는 독특한 불교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웠던 토번 왕국 시기는 티베트 인이라면 누구나 잊을 수 없는 화려한 역사적 경험이었다.

 

10세기 토번 왕국이 당과 함께 멸망 후, 티베트 고원은 수다한 지방 세력에 의해 분점되었는데, 이들 지방 세력들은 그 지방의 유력한 불교 교파와 연계하여 정교 일체의 정권을 수립했다.

 

몽고가 중국과 요동을 석권하고 티베트까지 위협하자, 사캬파 불교의 영수였던 팍빠가 몽고의 대칸 쿠비라이를 만나 최왼 관계 즉 공시 관계를 성립시켰다. 최왼 관계란 원래 승려와 신도 사이에 교환되는 시주와 복전의 종교적인 관계로서, 승려는 신도를 위해 기도하고 신도는 승려를 위해 물질적인 도움을 제공했다(p. 642).

 

몽원 제국이 붕괴됨과 동시에, 티베트에도 사캬파의 통일 정권이 무너지고, 티베트 고원은 이른바 5대 법왕과 5왕 등 수다한 지방 정권에 의해 분점되었다.

 

중국에서 출현한 송과 명이 중국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중국은 티베트의 역사 전개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p. 643).

 

티베트 고원이 정치적으로 다시 통일된 것은 5세 달라이 라마 때부터였다(p. 644).

 

5세 달라이 라마와 순치제가 북경에서 만나 서로 맺은 관계는 빡파와 쿠빌라이가 맺은 관계와 다를 바 없는 최윈관계였다.

 

티베트와 만청의 관계를 오랜 기간 규정해온 최왼 관계는 20세기 초에 이르러 단절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제국주의 영국이 식민지 인도를 발판으로 점차 티베트 고원으로 세력을 확장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만청이 스스로 제국주의 세력으로 변모하여 티베트를 침공했기 때문이다.

 

신해혁명으로 만청이 멸망하자, 라싸로 돌아온 13세 달라이 라마는 중국을 지배하는 국가와의 일체의 관계가 청산되었음을 선언하고, 티베트에 주재하고 있던 주장대신 등 만주인 혹은 중국인 관원과 군인들을 모두 중국으로 축출했는데, 이를 두고 흔히 구한사건이라고 부른다.

 

14세 달라이 라마가 즉위할 때 중화민국 정부는 조문 치제 특사와 좌상 특사를 파견하여 전통적 최왼 관계의 회복을 도모했을 때도, 티베트의 카샤 정부는 독립국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국민당 정부와 최왼 관계를 맺는 것을 거부했다(p. 646).

 

오랜 기간 정교일치의 독자적 정부를 구성하여 티베트 고원을 스스로 다스려온 티베트 역사 공동체의 독특한 역사 경험은 1950년에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 해방군의 침공을 받음으로써 순식간에 종결되었다.

 

195914세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고원을 떠나 인도 북부의 달람살라에 망명 정부를 수립하게 되었고, 중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가 부재한 티베트를 공식적으로 접수하여 1965년 서장자치구를 건립했다(p. 647).

 

1969년부터 티베트 고원에까지 불어닥친 문화대혁명의 십년광풍은 티베트의 전통적 문화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1949년부터 1979년까지 사망한 티베트 인들이 총 126만 명으로, 티베트인 6명 가운데 한 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역사 공동체란 특정한 정치적 사건에 의해 발생하거나 소멸되는 실체가 아니다. 비록 국가가 멸망했다 하더라도, 그 국가를 산생한 역사 공동체는 상당 기간 존속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티베트 인들은 오래 전부터 중국을 가리켜 갸나라 하고 중국인은 갸미라 했는데, 이 말의 개념에는 티베트 혹은 티베트인의 의미가 포함되지 않았다(p. 648).

 

티베트 인들은 중국의 황제는 갸개라 하고 티베트의 통치자는 뵈걔라 하여 황제의 지배 영역과 티베트 군주의 통치 영역을 엄격히 구별했다.

 

전통 시대에 티베트 인과 중국인이 사용해온 말의 개념을 통해 본다면, 전통시대에는 티베트 인이나 중국인이나 구별 없이 모두 티베트와 중국을 서로 염격하게 분별되는 별개의 역사 공동체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p. 649).

 

티베트 인은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샴발라라는 이샹향을 품고 살아 왔다.

 

샴발라는 특정한 경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한 마음으로 티베트 불교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티베트인의 나라, 불국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티베트, 토번, 서장, 시장, 시짱

 

티베트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를 받고 있는 역사 공동체들 가운데서 그 정체성을 가장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역사 공동체의 하나이다(p. 632).

 

활동 공간

티베트 고원: , , , 아리, 암도 등으로 구별됨.

 

장남: 농사가능, 인구와 도시 밀집. 위짱(우창)이 티베트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

장북: 농경 거의 불가능, 목축 가능, 창탕

장동: 임업과 목축업, 농업 고산 협곡,

 

티베트 고원은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가 높고, 연 평균 기온이 현저히 낮으며, 강우량과 공기량이 말할 수 없이 적어서, 중국인이나 인도인, 몽고인등이 이처럼 높고 춥고 건조한 숨찬 곳에서는 살아가기 어렵기 때문에, 티베트 고원의 특수한 자연 환경은 티베트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결정적인 보호막으로 작용해왔다(p. 633).

 

2. 생활

티베트 인은 춥고 건조한 초원에서 가축을 양육하여, 그 산물로써 옷을 지어 입고 음식을 만들었으며 집을 지어 살았다. 물론 목축 지역과 농경 지역에 거주하는 티베트 인의 생활 습속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p. 634).

 

티베트 인의 의식주 생활을 가장 특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이 야크이다.

 

10대 벤첸 라마 야크가 없으면 티베트족이 없다.“

 

3. 풍속

티베트의 결혼 풍속 가운데서 가장 특이한 것은 일처다부의 혼인 형식이다(p. 635).

 

티베트 가정에서는 일반적으로 여성의 역할과 권한이 대단히 커서, 결혼한 남자들은 여자의 일을 거들면서 여성의 경제력에 의존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티베트 여성의 권한은 중국 등 다른 곳의 그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장례: 천장/조장

 

티베트 인은 중국인과 달리 성씨가 없고 넉자로 구성된 이름만 사용하며, 친인척에 대한 칭호도 중국인과 구별된다.

 

4. 언어와 문자

티베트어는 일반적으로 중국-티베트 어계, 티베트-버마 어족, 티베트 어지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된다. 이는 발생학적으로 볼 때, 티베트어가 매우 독립적인 기원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p. 636).

 

티베트 문자는 티베트 최초의 통일 왕조를 건립한 송짼감포 시기에 인도 산스크리트어를 모방하여 창제한 것으로 알려져있다(p. 637)

 

티베트인은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로써 고유한 문학을 발전시키고, 티베트 고원에 불교를 토착화시켜, 이웃 중국과는 분별되는 티베트 역사 공동체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

 

5. 티베트 불교

티베트 고유의 문화 가운데서도 티베트 역사 공동체의 정체성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주는 요소는 티베트 특유의 불교다.

티베트: 소서천(小西天), 소천축(小天竺) / 인도: 서천(西天), 대천축(大天竺)

서천이란 부처와 보살이 사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의 침공을 받기 전에는 가가호호 불교를 독신하지 않는 집이 없었고, 각 가정에서 출가하는 이가 적어도 한 명씩은 있었다.

 

불교가 1,300여년 전에 티베트 고원으로 유입되기 전에는 뵌교라는 샤머니즘이 유행했다. 티베트가 불국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토착 민간신앙인 뵌교와 외래 종교인 불교의 오랜 투쟁과 융합의 과정이었다.

 

티베트 불교는 그 지리적 환경이나 문화적 배경, 사회적 기초 등의 특수성으로 인해, 인도의 원시 불교나 동남아의 소승 불교, 동북아의 대승 불교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흔히 라마교 혹은 장전불교라고 불리는 티베트 불교는 인도의 지리적 근접성으로 인해 중국 불교보다는 일도 불교의 영향을 훨씬 더 많이 받았다(p. 639).

 

정치와 종교를 함께 장악한 고승 라마가 죽었을 때, 전생영동을 찾아 대를 잇게 함으로써, 왕조 형식의 국가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독특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6. 역사적 경험

티베트 인의 혈통적 기원은 위짱의 얄루장푸강 유역에서 발원한 토착인들이 점차 발전하면서 창탕과 청해 등지의 강인과 융합하여 티베트인을 형성하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p. 640).

 

짠포: 영무한 군주

 

송짼감포는 수비와 상슝 등 다른 소국 연맹체를 병합하여 티베트 고원의 통일을 완성하고, 구 귀족의 도전을 제압하여 국가체제를 확립했으며, 라싸로 천도하여 포탈라 궁을 건립했다(p. 641).

 

당시 세계 최강의 당과 당당히 힐항하고 문화적으로는 독특한 불교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웠던 토번 왕국 시기는 티베트 인이라면 누구나 잊을 수 없는 화려한 역사적 경험이었다.

 

10세기 토번 왕국이 당과 함께 멸망 후, 티베트 고원은 수다한 지방 세력에 의해 분점되었는데, 이들 지방 세력들은 그 지방의 유력한 불교 교파와 연계하여 정교 일체의 정권을 수립했다.

 

몽고가 중국과 요동을 석권하고 티베트까지 위협하자, 사캬파 불교의 영수였던 팍빠가 몽고의 대칸 쿠비라이를 만나 최왼 관계 즉 공시 관계를 성립시켰다. 최왼 관계란 원래 승려와 신도 사이에 교환되는 시주와 복전의 종교적인 관계로서, 승려는 신도를 위해 기도하고 신도는 승려를 위해 물질적인 도움을 제공했다(p. 642).

 

몽원 제국이 붕괴됨과 동시에, 티베트에도 사캬파의 통일 정권이 무너지고, 티베트 고원은 이른바 5대 법왕과 5왕 등 수다한 지방 정권에 의해 분점되었다.

 

중국에서 출현한 송과 명이 중국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중국은 티베트의 역사 전개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p. 643).

 

티베트 고원이 정치적으로 다시 통일된 것은 5세 달라이 라마 때부터였다(p. 644).

 

5세 달라이 라마와 순치제가 북경에서 만나 서로 맺은 관계는 빡파와 쿠빌라이가 맺은 관계와 다를 바 없는 최윈관계였다.

 

티베트와 만청의 관계를 오랜 기간 규정해온 최왼 관계는 20세기 초에 이르러 단절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제국주의 영국이 식민지 인도를 발판으로 점차 티베트 고원으로 세력을 확장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만청이 스스로 제국주의 세력으로 변모하여 티베트를 침공했기 때문이다.

 

신해혁명으로 만청이 멸망하자, 라싸로 돌아온 13세 달라이 라마는 중국을 지배하는 국가와의 일체의 관계가 청산되었음을 선언하고, 티베트에 주재하고 있던 주장대신 등 만주인 혹은 중국인 관원과 군인들을 모두 중국으로 축출했는데, 이를 두고 흔히 구한사건이라고 부른다.

 

14세 달라이 라마가 즉위할 때 중화민국 정부는 조문 치제 특사와 좌상 특사를 파견하여 전통적 최왼 관계의 회복을 도모했을 때도, 티베트의 카샤 정부는 독립국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국민당 정부와 최왼 관계를 맺는 것을 거부했다(p. 646).

 

오랜 기간 정교일치의 독자적 정부를 구성하여 티베트 고원을 스스로 다스려온 티베트 역사 공동체의 독특한 역사 경험은 1950년에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 해방군의 침공을 받음으로써 순식간에 종결되었다.

 

195914세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고원을 떠나 인도 북부의 달람살라에 망명 정부를 수립하게 되었고, 중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가 부재한 티베트를 공식적으로 접수하여 1965년 서장자치구를 건립했다(p. 647).

 

1969년부터 티베트 고원에까지 불어닥친 문화대혁명의 십년광풍은 티베트의 전통적 문화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1949년부터 1979년까지 사망한 티베트 인들이 총 126만 명으로, 티베트인 6명 가운데 한 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역사 공동체란 특정한 정치적 사건에 의해 발생하거나 소멸되는 실체가 아니다. 비록 국가가 멸망했다 하더라도, 그 국가를 산생한 역사 공동체는 상당 기간 존속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티베트 인들은 오래 전부터 중국을 가리켜 갸나라 하고 중국인은 갸미라 했는데, 이 말의 개념에는 티베트 혹은 티베트인의 의미가 포함되지 않았다(p. 648).

 

티베트 인들은 중국의 황제는 갸개라 하고 티베트의 통치자는 뵈걔라 하여 황제의 지배 영역과 티베트 군주의 통치 영역을 엄격히 구별했다.

 

전통 시대에 티베트 인과 중국인이 사용해온 말의 개념을 통해 본다면, 전통시대에는 티베트 인이나 중국인이나 구별 없이 모두 티베트와 중국을 서로 염격하게 분별되는 별개의 역사 공동체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p. 649).

 

티베트 인은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샴발라라는 이샹향을 품고 살아 왔다.

 

샴발라는 특정한 경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한 마음으로 티베트 불교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티베트인의 나라, 불국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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