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머리말」

1953년 한반도는 잿더미의 폐허였다. 게다가 세 강대국의 군대가 한반도를 덮쳐 세계대전에 가까울 정도로 충돌하면서 핵전쟁의 불안을 고조시켰다. 그러나 1953년까지 이어진 전쟁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고, 이전 상태로 돌아갔을 뿐이다. 30년이 흐른(출간시점) 지금도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

 

1945에 끝난 또 다른 전쟁으로 1945년은 해방과 구원의 해 였으며, 1953년 전쟁으로 서로를 적대했던 나라들은 동맹자였다. 1945년은 어떤 과정을 거쳐 1953년이 되었는가? 한국전쟁의 기원을 찾는 작업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가?

 

그동안은 1950625일 이전 모스크바나 워싱턴, 평양이나 서울에서 일어난 사건에 맞춰졌다. 기존 연구들은 전쟁을 일으킨 책임이 어느 쪽에 있는지를 추적하려고 했다. 미국의 공식발표 또한 북한의 기습공격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으며, 대답은 1950년에 국한해 찾아야 한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대체로 전쟁 관련 문헌은 1950년부터 아직까지 남아 있는 주제-소련의 책임과 관련된 판단부터 38도선에서 일어난 소규모 군사작전 계획, 고위층의 결정에 대한 분석, 끝으로 시각은 정반대지만 상대편이 음모를 꾸몄다고 서로 주장하는 입장까지-를 계속 다루고 있다.

 

이 연구는 다른 전제에서 출발할 것이다. 한국전쟁의 기원은 1차적으로 1945년부터 1950년까지 일어난 사건에서 찾아야 하며, 2차적으로는 일제 강점기에 형성돼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부터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한국에 특별한 흔적을 남겨놓은 세력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막간-식민 지배로부터의 해방에서 시작해 분단 국가 수립을 거쳐 1950년 대포의 포성으로 끝난-의 특징은 혁명적 성격이 짙은 시기였다는 것이다. 19458월 한반도 전역에서 정치. 경제. 사회의 전면적 변화를 요구하는 주장이 터져나왔다. 정치 변화의 요구는 정당, 인민우원회, 노동조합, 농민, 청년, 여성의 대중조직 같은 여러 단체를 스스로 결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제 강점기 이후 대부분의 농민이 지주가 지배하는 소작제 아래 놓여 있던 토지 상황에 초점을 맞춘, 사회. 경제적 변화의 요구가 이런 폭발적 정치 참여를 불러왔다. 1945년 격변기에 전개된 한국 정치를 연구하려면 그때까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던 근본 문제인 지주와 농민의 관계를 다뤄야 한다. 이것은 일본 지배에서 벗어났을 때 한국 사회가 지닌 본질적 특징이었다.

 

30) 일제강점기에 나타난 변화들은 일본이 힘을 잃었지만 연합군이 완전히 점령하기 전인 해방 직후에 가장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 시간은 한국인이 주도한 격렬한 변화의 무대였다. 건국준비위원회. 인민 위원회, 노동조합. 청년단체와 지방의 농민조합 같은 새롭게 결성된 좌익 정치단체들이 지배했다. 이 기간에 한국인에게 새로운 인민공화국이라는 개념과 자치 조직의 실체가 나타났다. 이는 1950년까지 한국 정치의 중심 쟁점이 됐다. 이후 한국적이고 내전적인 전쟁의 기원을 따질 때 핵심적 요소였다. 당시 상황은 한국이 미국과 소련의 대립 구도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했다기보다는 미국과 소련이 당시 한국에 존재하는 균열들을 둘러싸고 서로 침해하면서 대립했다는 것이 좀더 사실에 가깝다.

 

자료에 의하면 미국이 진주만 기습을 당한 뒤, 한국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오랜 정책을 뒤집고 자국의 안보와 관련해 한반도를 중요하게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한국 문제를 다룰 전형적인 국제적 방식인 4대 열강의 다국적 신탁통치를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31) 그런 생각은 한국 전쟁에 대한 유엔군 사령부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러나 소련인이 아니라 한국인 혁명가와 맞닥뜨리면서, 미국에서는 국제협력주의자가 물러나고 자국중심주의에 입각한 정책이 나타났으며, 공산주의와 맞서는 방벽을 한국에 세우려는 일방적인 조치가 추진됐다. 이런 흐름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해결책을 추구했다. 이것은 세계 규모의 냉전이 진행됐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다. 19459~12월 미군정은 일본이 만든 총독부와 경찰 제도 그리고 거기 소속된 한국인을 그대로 유지하고 남한에서만 국방경비대를 출범시켜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은 한국인의 염원과 상충되는 것으로 해방체제는 싸워 지킬 가치가 있었다.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아 인구 변화와 농업 분쟁이 함께 일어난 지역과 지리적으로 조직이 뿌리내릴 시간이 충분했던 지역에서 소요가 가장 심했다.

 

반면 북한은 고요한 섬이었다. 소련의 정책은 좌익 한국인의 전면적 참여와 지휘 아래 철저하지만 지나치게 폭력적이지 않은 사회혁명을 지원했다. 규율이 잡히지 않는 광란의 첫 시기가 지난 뒤 소련은 한국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배후로 물러났다. 북한의 정치형태는 남한에 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남한의 좌익 정치를 파악하면 북한의 상황도 이해할 수 있다.

 

33)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미국은 이 취약한 정부와 지도자 이승만으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했다. 군대는 철수했고 관계는 서먹했다. 남한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에 의문이 제기됐으며, 남한 정부를 길들이는 데 이용했다. 그러나 이 정부는 미국이 추진한 정책의 결과이자, 전후 아시아에서 수립된 다른 어떤 정부보다 더 미국다운 작품이었다.

남한에는 강력한 우익 대중 정치가 나타났고, 북한에서는 좌익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평화통일의 가능성은 물거품이 됐다. 1947년 소란스러운 여름이 지난 뒤 남한에서 좌익은 거의 소멸되었고, 인민위원회가 영향력을 행사한 지역을 거점으로 자생적인 유격전이 산악지역과 제주도에서 전개됐다. 권력을 장악한 이승만은 일본군에서 복무한 북한 출신 장교들에게 주요 군사지휘권을 넘겨주었다. 유격전은 1949년 말까지 계속되다가 남부 빨치산의 패배와 함께 끝났다.

 

권에서는 냉전의 기원이 한국 문제 안에 잉태되어 있었다는 여러 증거를 검토할 것이다. 소의 전형적인 냉전관계는 종전 뒤 한국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봉쇄(containment:견제.억제.봉쇄)정책은 워싱턴의 승인을 얻지 못했지만 추진되었고, 이후 선견지명이 있는 통찰로 평가됐다. 1950년에 감지된 소련의 한국침략에 맞서 워싱턴의 대응이 전 세계적 규모로 전환되면서 한국은 전면과 중심으로 이동했고 긴박감이 뚜렷해졌다.

34) 진후 한국 정치의 특징은 폭력. 분열. 무질서. 변화 같은 갈등이었다. 우리 시대의 거대한 충돌-두 세계관과 두 강대국 사이에 발생한-은 기이할 정도로 강렬하게 일어났다. 이 한국이 충돌은 두 개의 한국이 역사를 지우고 상대를 마구 비방하면서 되풀이됐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