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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26. 제2부. 제5장 5-12 발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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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강저 역사 공동체 발제

 

5. 갈호. 노수호. 계호

강저의 거주 지역에 다른 공동체의 성원들이 이동해 와서 강저와 융합하여 새로운 제3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갈호와 노수호, 계호 등이 그것이다.

 

갈은 하북(河北) 여러 군현으로 옮겨와서 산간에 산 사람들을 가리켜 갈호라고 부른다. 갈호는 새(-성채)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흉노에 예속해 있어 흉노별부로 알려져 있었다. 또한 서역에 성씨가 많은 것으로 보아 갈호는 서역호와 흉노 등 기타 잡호가 혼합하여 형성되었던 것으로 간주된다.

석륵은 오호의 동란을 일으킨 흉노 수령 유연의 진영에서 성장하여, 동진 대흥 2년에 조왕 겸 대선우를 자칭하며 하내 등 24개 군을 조국으로 삼았고, 330년 천왕을 자칭, 개원하고 업에 도읍했다. 조카 석호는 천왕을 자칭하고 양국에 도읍을 정했다. 350년 석민이 석호의 손자 38명을 모두 죽이고, 황제로 자립, 국호를 대위라 하고 원래의 성씨인 염씨로 회복, 2년 후 선비 모용부에 멸망했다.

 

노수호는 월지의 한 가지라 하기도 하고, 흉노의 한 가지로 이해되기도 했다. 그 선조는 대대로 흉노 좌저거였기 때문에, 관명으로 성씨를 삼았다. ()안으로 들어 간 뒤에 황중에서 살면서 강인과 섞여 소월지라 불렸다. 한군을 따라 전투에 투입되어 의종호라 불렸다. 대대로 노수 가에 살았기에 노수호라 불렸다. 흉노, 월지, 강인 등이 섞여 융합하여 형성된 잡호였다. 오호십육국 후기에 북량(北涼)을 세웠다. 420년 서량을 빼앗아 서역 제국의 칭신 조공을 받았고, 유송(劉宋)으로부터 도독양진하사사주제군사 표기대장군 영호흉노중랑장 서이교위 양주목 하서왕으로 책봉받았다.

북량은 중국과 서역의 교통 요로에 있었기에 중서문화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량약은 북위(北魏)의 궁정악에 영향을 미쳤고, 불교의 동전 과정에서도 천축의 승려들을 우대하여 고장에서 불경을 번역하게 했다.

 

계호는 보락호, 보락견, 부락계, 산호 등으로 불렸다. 서안 여량 산지의 호인으로 계호라는 이름은 북위 말부터 보였다. 흉노, 산융, 적적의 후예로 잡호였다. 북위는 계호의 군사력을 활용, 당대에도 용맹한 정예기병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중국에 동화되거나 돌궐이나 당항강, 토욕혼 등으로 들어가 그 정체성을 상실했다.

 

6. 저인의 전진, 후량, 구지국

저인의 ()’는 중국인이나 다른 공동체의 성원들이 부른 칭호였는데, , 진 이래로 저가 점차 자칭이 되었다. 농경 위주의 정착 생활을 영위했으며, 왕을 가진 기원이 오래되었고, 중국으로부터 책봉 혹은 임명받았고, 위와 진에 내속한 저인들은 관작을 받아 기미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장안에 설치된 호서융교위의 관리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오호십육국 중의 전진은 저인 부씨가 세운 국가로 부진(苻秦)이라고도 했다. 부견이 전연과 구지저 양씨, 전량 등을 멸하고 강북을 통일하니, 그 영토가 동으로는 창해까지 북으로는 사막까지 다다랐다. 또한 동이와 서역 62국이 모두 방물을 바쳤다.

516국의 후량도 약양 저인 여광이 세운 국가였다. 여광은 전진 태위의 아들이었다. 부견이 여광으로 하여금 서역을 정벌케 했다. 부견이 죽고 고장에 도읍하고 후량을 세운 것이다. 402년 후진에 의해 18년 만에 멸망했다.

 

약양 청수의 저인 양씨가 구지를 중심으로 전구지국과 후구지국, 무도국, 무흥국 등을 차례로 건립했다. 거주민 저와 강인 등은 농업을 위주로 수렵과 목축을 겸했다. 혹은 남조에 항복하여 북조에 저항하고, 혹은 북조에 항복하여 남조에 저항했으며, 때로는 독립하고, 때로는 남북조에 항복하기도 했다.

 

7. 강인의 후진, 탕창국, 동녀국

삼국 시대에 중국의 국가들은 변경 밖의 강인들을 강제로 중국안으로 옮기게 하여, 혹은 병역을 징발하고 혹은 요역을 부과했다.

조조의 군단에 적지 않은 수의 강인이 포함되어 있었고, 제갈량의 부대에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서진 시대에 강인이 관중에 광범하게 분포되어 있었다. 노예로 만들어 매매, 능욕, 도살하기도 했다. 이러한 착취와 지배에 강인들은 격렬하게 반항했다.

516국 시기에 강인이 건립한 국가로는 요씨의 후진이 있었다. 요양대에 이르러, 장사(長史) 사마(司馬) 참군(參軍) 등 막료직에 한인을 기용하고, 군사직책에는 진(), ()의 강인을 기용하여, 화이(華夷)병축 정책을 폈다. 요장시기에 만년진왕을 자칭하면서 384년 정식으로 국가를 건립, 385년에 부견을 죽이고, 황제를 자칭 장안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대진이라 했는데, 역사에서는 후진이라 불렀다. 요흥대에 전진 왕 부등을 죽이고, 구지의 양성 등의 항복을 받았다. 417년 유유에 의해 멸망되었다.

감청지역에 있던 강인은 전량, 후량, 서진, 남량, 북량 등의 통치를 받았다. 남북조 시기에 농서 강수 일대의 탕창강, 백수강 유역에서 발흥하여 위()에 예속되기도 하고 남조와 통하기도 했다. 나라에 법령이 없고, 요역과 부세도 없었다. 전쟁할 때만 모일 뿐 각자 생업에 종사,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564년에 북주에 의해 멸망되어 탕주에 편입되었다.

 

서강은 유목을 위주로 생활해, 거처가 일정치 않았다. 무익원검은 그들에게 밭갈고 가축을 기르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강인의 부락은 분산되어 서로 약탈하거나 복수하는 풍습이 성행했으나 전쟁이 필요할 때는 해구결맹하여 잠시 연합했다. 가옥은 토옥과 장막 두 가지가 있었다. 장례는 주로 화장을 했다.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무술을 믿어 무사와 부락 수령은 일치된 경우가 많았다.

 

8. 남중의 대성, 성한

한말, 서진 초에 서남이 지역을 남중이라 했다. 호적은 이()와 한()의 구별이 있었다. 촉한의 승상 제갈량이 남중을 평정한 뒤에야 파촉을 견고하게 할 수 있고, 파촉을 견고한 후에서 관중을 도모할 수 있다며, 남중 4군을 평정했다. 제갈량은 고속으로 통치하는 전통을 계승하여, 이수나 대성을 통해 남중을 간접 통치했다. 그러나 부세를 공출학 병력을 착취당하여 근심과 원한이 쌓인 남중의 이인은 촉한의 지배에 저항해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다. 마침내 이인이 주성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종인 이특이 일으킨 유민의 기의가 겹쳐졌다. 이특은 6개 군의 유민 7천여 인을 모아 성도를 공격, 맹주로 추대되었다. 이특의 아들 이응이 303년 성도왕을 자칭하고, 약법삼장(約法三章)했다. 338년 이수가 황제를 장칭하여 국호를 한()이라 했는데, 역사에서는 후촉이라 불렀다. 347년 동진에 멸망당했다.

찬씨는 중국인으로 조상은 소호, 전욱의 후예다. 한 말에 남중 대성이 되어, 촉한 때 남중의 4성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서찬은 백만이고 동찬은 오만이라 했다. 오만은 강대한 부락이 6개가 있어 육조라 했다. 수대에도 책봉은 받았지만 독립적 형세를 유지하다, 당 천보 연간에 남조에 의해 소멸되었다.

 

9. 남조

운남의 서남이는 변군 체제 안에 포섭되어 있었다. 당 중기에 독립된 국가 남조를 수립했다. 원래 오만의 별종으로 성은 몽씨인데, 스스로 애뢰의 후예라 했다. 운남 이해 지역에는 많은 부락이 흩어져 있다가 서로 겸병하여, 당 초에 이르러 6개의 강대한 나라 육조를 형성했다. 몽사조도 그 하나로 가장 남쪽이었기에 남조라 했다.

테베트의 토번 세력이 팽창하여 운남까지 위협하자, 당은 중건다봉 정책을 포기하고 토번을 억제할 강력한 장벽을 운남에 구축하려했기에, 운남 전역을 통일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738년 남조가 나머지 5조를 통합, 당은 운남왕으로 책봉했다. 이후 당은 남조가 날로 강대해지자, 견제하자 토번과 연합하여 당군을 대패시켰으며, 토번에 귀명, 토번과 형제국의 관계를 맺었다. 당은 남조에 참패하여 국력이 소모되고, 안록산의 난을 초래, 안사의 난으로 낙양 사방 주현이 모두 폐허가 되었다.

남조는 토번의 착취가 가중되자, 토번을 버리고 당과 맹약하여, 토번을 습격하여 항복시켰다. 그러나 남조와 당은 다시 전쟁관계로 돌입, 50여년이나 계속된 전쟁에 정변이 일어나 멸망하고, 나라 이름은 대장화국으로 바뀌었다.

남조는 이웃나라들과 구별되는 정치 제도로 최고위직인 6인의 청평관과 정책 결정 기관에는 12명의 대장군이있다. 당의 육부와 같은 육조가 있고, 삼탁이 더해져 구상으로 발전했다. 당의 주와 같은 검이 10기 있었고 대군장이 관장한 8절도와 2도독구가 있었다.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하였고, 삼마를 심어 마포를 짜입고, 면화로 포를 짰으며, 면양이 생산되어 모직물이 많았다. 종교는 다원적이어서 무교, 도교, 불교, 본주, 토주 숭배 등이 유행했다. 불교는 토번에서 전입된 밀교로, 관음은 남조의 보호신이 되었다. 국가의 적극적인 보호정책으로 사찰들은 운남 경내에 두루 분포, 가가호호 부처 섬기는 일을 으뜸으로 삼았다.

 

10. 당항 서하

당항은 당항강으로 서강(西羌)의 한 가지였다. 토번인은 미약이라 불렀고, 돌궐인은 미약이라 불렀고 돌궐인은 당고특이라 불렀다. ‘당항은 티베트어로 광활한 초원혹은 야만인의 넓은 들이라는 뜻이다. 선비 탁발부가 강인들이 사는 하서로 들어가 융합한 결과 나타난 것이 당항강이다.

당항강은 수말, 당 초에 동으로는 송주, 서로는 엽호, 남으로는 용상, 미상과 섞이고 북으로는 토욕혼에 이어졌다. 산곡 사이에 흩어져 살았는데, 야크의 털로 가옥 안에 거처하고, 가축의 젖을 마시고, 야크와 말, , 돼지 등 가축을 기르며 살았다. 수와 당시기에 내속하였고, 이씨성을 주었다. 토번이 강성해지자 당은 이들을 경주 방면으로 옮겼으나, 토번이 토욕혼, 당항, , 강 등 20여만 무리를 이끌고 장안을 침공, 당항강은 동산부, 평하부로 발전했다. 당 말, 오대에 이르러 황하로 이동 위수 상류와 황수 유역까지 확장되었다.

오대에 이르러서는 칭신하면서 독립된 왕국을 이루었으나 송과 화친하였고, 무역을 허락했다. 1032년에 즉위한 원호는 송에 칭신하지 않고 왕패를 지향해 탁발씨에게 내려준 이()혹은 조()등의 성은 폐기했다. 그리고 올졸이라 자칭했다. 또한 전국에 탁발령을 내렸으며 당, 송의 예악을 폐기하고 9배의 예를 3배로 악의 5음을 1음으로 바꾸게 했다. 새 문자를 창제하고, 궁성을 크게 짓고, 관제를 건립했고, 군사조직을 정돈하고 정규군을 두었다. 1038년 대하국을 선포했다.

1044년 송과 화친했으나 1115년 여진의 아골타가 대금국을 건립하자 금에 칭신했다. 1124년에 몽고의 징기스칸이 일어나 서하를 정벌하여 1227년에 패망했다. 10190년 만에 멸망한 것이다.

당항강은 목축업을 위주로 한 유목민이었으나, 은하 일대로 옮겨간 뒤로 정착, 혹은 반정착 생활을 영위했다. 목축업과 관련된 각종 수공업, 제염업, 야련, 병기제조업, 방직업, 도지기 조지업 등도 발달했다. 스스로 화폐를 만들어 유통했다.

 

11. 대리국

운남의 남조 왕조를 멸망시키고 902년에 정권을 탈취한 정매사는 스스로 왕을 자칭, 국호를 대장화국으로 바꾸었다. 927년 검천절도사 양간정이 멸망시키고 청평관 조선정을 왕으로 옹립, 대천흥국이라 칭했다. 다음해 양간정이 왕으로 자립하고 대의녕국을 세웠다. 937년 통해절도사 단사평이 기병하여 대리국을 건립하였다.

단사평은 대리의 백인 출신으로 남조를 계승하여 봉건제도를 실시했다.

1080년 이해의 봉건영주 양의정이 왕을 살해하고 광안황제라 자칭했고, 이를 평정한 청평관 고승태도 1094년 국호를 대승국으로 고치고, 왕이 되었다. 죽으면서 단씨에게 정권을 돌려줌으로 후리국이 이어졌다. 여전히 고씨가 정권은 장악했다. 1252년 몽고에 의해 멸망했다.

대리국 건국시 송 태조는 대리 왕을 운남 팔국 도왕으로 책봉했고, 대리국은 말과 사향, 우황, 옥석, 군마 등을 조공했다.

 

12.토사

남조와 대리국이 와해된 뒤, 여러 군소 공동체들은 각각 자치 체제를 갖추어 독립했다. 이들은 명과 청의 토사(土司) 체제에 참여, 독자적인 공동체를 유지했다.

청의 옹정은 남방에 개토귀류(改土歸流)’를 단행, 운남, 귀주, 사천 등지의 각 공동체가 내속하기를 원했기에 강저 공동체는 역사상 가장 심각한 변화를 맞이했다.

대리에는 원. 명 이래로 대규모의 중국인이 진입하여 군둔, 민둔, 상둔이 실행되었다. 청대에는 순치 4(1647)에 대서 농민군의 잔여군이 운남 전성을 장악, 농민정권을 수립했다가 진압되었다. 그 뒤에도 반청 투쟁이 뒤를 이었고, 가경 14(1809)에 백련교에 의해 반청 운동이 일어났으며, 도광 20(1840)에는 회민 반란에 백인이 참여했다.

 

이인은 당송시대에는 오만, 동찬이라 했지만, 명대부터 나라란 이름이 사용되었고, 청대에는 나라로 불려졌다. 명은 태조 홍무 31(1388)에 거주 지역에 건창위지휘사사를 설치하고 그 땅의 수령에게 세습하게 하였다. 사회경제가 발전한 곳에는 규관을 설치했다. 유관은 정직으로 삼아 대사를 결정하게 하고 토관은 부직으로 삼아 징발과 민정을 담당케 했다. 토사에는 무직과 문직이 있었다.

청 초에도 유관과 토사 제도를 그대로 실시, 옹정 4(1726)에 개토귀류를 실시, 무력으로 토병을 와해시키고 강제로 유관으로 교체했다.

 

운남의 납서인은 몽고가 대리를 침공할 때 항복하여 차한장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명태조 홍무 16년에 목씨성을 받으며 토관이 시작되었다. 동파교를 믿으면서 동시에 티벳 불교의 홍교, 대승불교, 도교, 천지산천의 다신교 등을 믿었다.

운남의 강인, 합니인, 율률인, 납고인, 차사인, 토인 등이 독립된 공동체를 운영, 혹은 다른 공동체와 잡거하면서 광범한 지역에 흩어져 있었다.

강인은 청해에서 민강 상류로 계속 이동, 옹정 4년에 민호로 편입되었으나 먼 산악지역은 토사와 두인의 통치가 이뤄졌다.

합니인은 토사체제에 편입되어 있었지만 청 순치 3(1646)에 대서 농민정권이 청군에 격멸되자 남명 영력 정관과 연합하여 반청 기지를 건립, 항쟁했다. 이 저항이 진압되어 토사 제도가 시행되었다.

율률인은 사천과 운남 접경 지역과 금사강 유역에서 거주하다가 청대에 반청 투쟁에 참여한 까닭에 서남으로 이동, 운남 노강, 대리 등지로 분산되어 토사로부터 통치, 사역되었다. 개토귀류로 청의 직접 지배를 받았으나, 먼 변방 지역은 여전히 토사의 지배를 받았다.

납고인은 난창강 양안에 살았다. 옹정 4년 개토귀류하여 유관의 관리를 받았다.

차사인은 야인. 산두인으로 불렸다. , 청대에 토사 제도가 시행되었지만 독립적 정치체인 산관제가 유지되었다.

아창인은 청 초에 오삼계가 평서왕이 되어 운남에 진수하자, 오삼계 개인 영지로 편입되어 훈장이라 불려졌다. 강희 30(1691)에 삼번의 난이 평정되어 훈장이 폐지되고, 아창인 두목이 그 땅을 계승, 세습되었다. 태인의 토사에 사역되어 태인의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고, 논농사를 경영했다.

토인은 토곤, 몽고이라 자칭했다. 토인의 토사는 군사적으로 청조에 유용하였다. 동치연간에 토사 세력이 쇠락하여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신해혁명이후에는 토사가 8개 남았다가, 민국 시대에 토사 제도가 완전히 폐지되고 보갑제가 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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