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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식민지 한국의 계급과 지배 기구
1950년 미국의 한국 인식은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지속된 농업적 관료국가였고 국민은 계급과 국가, 지주와 농민, 토지와 생산물, 세련된 지식과 야만적 무지가 혼재해있었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변화의 첫 중개자는 일본이었다. 19세기 중반 일본은 중국과 가까웠고 한국과 비슷했다(46).
서양은 주로 중국에 관심을 집중했고 일본은 제국주의 세력의 관심이 적었던 것을 발전의 호기로 이용했다. 경쟁을 위해 원자재와 노동력이 있는 주변 지역을 찾기 시작했다 이런 개혁의 결과 강력한 국가가 탄생했으며 산업화의 핵심 동맹국이 됐다. 국가가 발달한 자본가 계급이 주로 맡은 ‘고전적’ 기업가 역할을 스스로 대신했다(47).
메이지 정부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국내의 관료 기구를 만들었고 일본 정치의 강력한 도구가 됐다. 관료 제도는 소작농에게서 잉여 농산물을 착취하는 효과적 수단이 됐는데 그런 정책의 결과 중소 자작농은 줄고 토지는 지주에게 집중됐다. 한국에 수립된 식민 지배 기구는 강력한 권력과 자치권으로 한국인을 착취·조정했는데 한국인의 희생은 한국, 만주, 중국 본토까지 고통스럽게 했다.
한국 합병은 1905년이 결정적이었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의 어떤 측면은 독특했다(48). 일본은 영국과 미국에서 반제국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민족주의가 태동하고 있던 시기에 근대로 진입했다. 처음부터 영국의 사회주의자와 미국 자유주의자의 비난에 시달렸고 윌슨의 이상주의와 식민지 국민을 지원한 볼셰비키와 맞닥뜨렸다. 일본의 식민지 경영은 시대착오적이었으나 이는 근대 세계에 참여한 시간적 차이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국내에 자원이 부족한 일본은 영토 획득에 집중했다.
서구의 선진 산업국이 19세기 후반 세계의 중심부를 형성하고 나머지가 주변부나 준주변부를 구성했다. 이런 구조는 세계적 규모의 분업이 이뤄지고 중심부 이익이 주변주의 불이익으로 이어지는 불균등한 발전에서 형성됐다. 중심부의 주변부의 잉여 생산물을 착취해 도시가 발달하고 직업의 특화와 분화가 나타나며 상업·노동계급이 해방되면서 작은 차이는 나중에 거대한 격차로 변모시켰다. 중심부-주변부 구조는 본질적으로 국경을 초월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국경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19세기 후반 일본은 준주변부였다(49). 일본이 동북아시아에서 자기 영역을 넓힐 수 있었다면 자신이 중심부가 되는 대안적 중심-주변 구조를 창출했을 것이다. 이런 구상은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꾸준히 추진됐다. 한국은 국경을 초월한 이런 체제에서 통합이 가장 잘된 지역이었고 다른 주변부와 어우러질 특징이 많았다. 한국 식민지를 중심으로 만주를 합병해 한국을 준주변부로 격상시켰다. 일본이 독특한 측면은 유럽적 방식을 선택했다는 것이 아니라 시점과 맥락에 있다. 중심부가 되려던 일본의 시도이다.
두 번째 특징은 자국과 식민지의 인접성이었다. 식민지를 관리해야 하는 제국들보다 상대적으로 유리했다(50). 자국민을 본토에서 이주시키기 쉬웠던 것은 일본처럼 배타적 단일민족에게는 특히 중요했다. 철도를 사용할 수 있어서 본국과 식민지 교역 시간을 크게 단축시켰다.
세 번째 특징은 정도의 독특성인데 식민지 경영이 본질적으로 의도적, 조직적이며 결과를 예상할 수 있게 추진됐다는 점이다. 급속하게 식민지를 건설해 구조적이고 조직적으로 경영하는 특징을 보였다. 관념적 식민 정책이었다. 서양의 위협에 맞서면서 팽창을 통해 자립을 추구한 정책은 일본인의 마음을 하나로 단결시켰다.
1000년 넘게 독립적이며 자치적인 나라로 존속해온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일본은 오랫동안 일본보다 우월하다고 여겨온 왕조의 통치자들을 회유하고 퇴위시키거나 파멸시켰다(52). 일본의 식민 정책으로 인해 한국인은 언제나 자신이 일본인과 구별된다는 분명한 의식을 지녔고 3·1운동, 1920~30년대 소작쟁의, 노동자·농민조합, 망명운동에서 한국인의 저항을 고무했다.
일제강점기 한국인은 다른 식민지 국민보다 식민 지배의 합법화를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이것은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기 시작하고 유지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뜻이다. 일본의 한국 지배는 조선 체제를 식민적 관료 제도로, 한국인 지배층을 일본인 지배층으로, 한국어를 일본어로, 한국인 지주를 일본인 지주로 대체했다. 창출보다 대체 작업으로 민족 분열은 매우 격렬하고 전형적으로 나타났다. 대체의 형태는 농업적 관료 제도에서 나타났다. 이것이 한국과 일본의 근본적 차이였으며 한국의 19세기 저항이 실패한 이유다(52).
조선은 겉으로 보기에 중앙이 강력했지만 지방과의 고리는 허약했다. 양반 지주는 국가를 이용해 자신을 존속시키고 농민을 지배했다. 그러나 지배는 완전하지 않았다 관계는 끊어질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농민반란은 거듭됐다. 19세기 말 조선은 새로 일어난 산업 세력의 침탈에 전혀 대항할 수 없었다. 양반 지주가 국가를 이용해 자신의 지배를 유지하는데 큰 성공을(53) 거둔 결과 외부 압력에 저항할 수 있는 조선의 능력을 치명적으로 약화시켰다.
식민지 통치 기구
한국 지배층 안에 교묘하게 긴장을 조성하고, 옛 관료 제도에서 중요한 협력자를 찾아내며 그 밖의 인물을 일진회 같은 친일 조직에 참여시킨 것이었다. 초기 식민 통치 기구는 군인 출신이 주로 임명되었다. 총독은 제약 없이 한국을 통치할 수 있었으며 1919년까지는 일왕에게만 보고했다(54).
통치 기구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국가로 기능했고 민간을 대신해 산업화를 추진하고 그 과정에서 극심한 왜곡이 일어났다. 식민지 통치 기구는 권위적이고 강제적으로 통제하면서 군림했다. 한국에서 권력 균형을 이동시키고 전례 없는 규모로 자원을 동원·수탈하려는 목적에서 중앙 권력을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샅샅이 침투한 강제적 명령 체계가 만들어졌다. 일본은 육중하고 지나치게 거대한 중앙집권적 통치 기구를 지향해 한국의 관료 제도를 크게 왜곡시켰다. 그 결과 가공할만한 관료 제도의 무기를 전후 한국에 물려주었다(55).
철도망의 발달
철도가 한국과 만주로 확장되면서 식민지들은 일본의 발전에 이용됐는데, 이웃 지역을 식민화했기 때문에 가능한 독특한 상황이었다. 식민지에 건설된 철도는 진보적 근대 국가로서 일본의 인상을 좋게 만들었고 일본 국력의 상징을 제공했다(56). 한국과 만주의 철도는 모든 지역을 통합하는 효과를 불러왔다. 철도·도로·해운이라는 “강력한 세 가지 수단”을 갖게 됐다. 한국이 분단되기 전 1945년에는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파리까지 여행할 수 있었다. 철도는 지속과 통합을 상징했다. 무엇보다 농업의 상업화를 촉진하고 두 지역을 세계적 시장 관계 안으로 편입시켰다. 일본은 철도를 이용해 전통적인 한국의 고립을 깨뜨리고 세계 경제와 통합했다(57).
아시아 내륙 지역에서 일본이 건설한 철도는 식민 정책의 선봉이었고 1930년대 식민지의 산업화를 이끌었다. 1906년 일본은 아시아 대륙과 일본의 경제·정치적 이익을 위해 최초의 거대한 반관적 기업인 만철을 만들었다. 만철은 사실상 국가기관이었고 일본의 거대은행과 산업·상업 기업이 그 자본을 댔다. 1933년 한국의 철도는 만철의 관할 아래 들어갔다. 만철은 항구와 도로도 건설했는데 육지, 바다의 모든 근대적 운송수단의 종합적 관리권을 가졌다는 의미였다. 1940년대 민주는 일본과 한국 북부의 공업지대와 통합됐다. 만철은 한국인을 만주로 실언 나르고 한국인이 사는 촌락을 세웠다. 철도는 만주 침투의 수단이 됐고 한국인은 언제라도 이동시킬 수 있는 인적 자원이 됐다(58).
발전은 총체적으로 전개됐다. 철도는 한국의 모든 주요 도시를 달리는 노선이 있었고 도로망도 비슷했다. 중국의 철도는 해안선을 따라 집중됐고 베트남은 하노이에서 후에를 거쳐 사이공까지 구불구불하게 내려오는 철도노선 하나만 있었다. 이런 차이는 전후 한국의 지방, 특히 도로와 철도가 가장 많이 놓인 한국 남부의 농촌에서 일어난 정치 운동의 운명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60).
상업
근대화 계획의 성공으로 열기가 고조된 강국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그들보다 기업 활동의 동력이 현저히 약했던 것이 한국의 불행이었다. 조선총독부의 묵인이나 도움으로 자본가계급이 등장했기 때문에 상업에 관심이 없던 대중이 처음부터 그들을 부패집단으로 바라봤다는 점은 중요하다.
20세기 초반 한국의 계급 구조는 농업적 관료 제도가 근대화하는 과정과 비슷한 경로를 따라 형성됐다. 상업적 농업으로 전환한 양반 지주계급 대신 유한계급은 중앙 관료 기구에 의지에 농업의 잉여 생산을 짜냈다. 사업계급이 급증하는 대신 조선에는 행상과 소매상 소규모 은행 같은 곳에 투자하는 등 이전과 다른 양반이 나타났다. 그러나 일본 독일처럼 상업계급이 지주계급과 동맹을 맺을 정도로 강력하지는 않았다. 내부적 발전이 자연스럽게 전개됐다면 농민혁명이 일어났어야 했다. 일본의 침략은 조선의 발전을 중단시켰고 그 결과는 지배가 끝난 19*45년에 더욱 심각하게 나타났다.
한국 역사학계는 상업을 비롯한 다른 발전의 상당 부분을 자본주의가 자생적으로 시작된 첫 징후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서막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속편도 없었고 지속되지도 않았다. 1876년 조선이 개항한 뒤, 개성, 수원 상인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 결과 그들은 법칙(61)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대립적 예외로서만 흥미로운 존재였다. 대외 경제 교류의 중심은 1408년 설치돼 1609년 이후 일본과 접촉하는 유일한 거점이 초량의 왜관이었다. 19세기 조선의 상업은 폐쇄적이었다.
1880~1890년대에도 조선의 상인은 소수였고 세력이 약했다. 해외와 경쟁하다가 대부분 무너졌다. “지배층에게 사회적으로 무시받고 자신의 독점판매권 유지를 늘 걱정하며 백성에게 불신받는 특별할 것 없는 다수였다.”
토지로 축적한 부를 상업 자산으로 전환한 소수의 한국인이 존재했다. 김종한은 1877년 문과 급제해 관원이 됐다. 1890년대 한국 토착 은행 중 하나를 세웠다. 박기종은 외국과 연계해 재산을 불렸다. 일본어를 배워 일본 상인의 통역이 됐고 한국의 첫 토착 철도회사 설립을 도왔다. 합병 이전 기업가 재능 부류는 대부분 해외에서 왔으며 1910년 일본은 토착 한국 회사 설립을 금지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일본인이 소유한 회사는 70%였고 일본(62) 한국인 합작회사는 10%, 한국인 소유 회사는 17%에 지나지 않았다. 1920년대 상업 활동 규제를 완화하면서 조금 달라졌으나(63) 여전히 미미했다.
1930~1940년대 한반도 산업화는 동척·만철 같은 국립 공기업을 포함한 조선총독부, 조선은행·식산은행 등 중앙은행, 미쓰비시, 미쓰이, 스미토모 같은 일본 대기업으로 구성된 세 거대 기관이 주로 맡았다. 변화의 동력은 한국 계급 구조 밖에서 발생했다. 식민 통치 기구와 은행은 일본인에게 다양한 보조금과 일정 수준 이상의 이윤을 보장했다. 한국인 소유 기업은 여전히 미미했다.
잉여자본을 가진 한국인은 토지와 그 생산물에 투자하는 것이 좀 더 이득임을 깨달았다(64). 대부분 곡물 거래에 종사했고 군산·목포·부산 같은 새 항구도시에서 급속히 커졌다(이훈구). 한국인 지주는 곡물 해외 판매와 수출로 전환했으나 수익을 산업에 투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국 연구는 식민 시기에 민족자본가가 생겨났다고 했다. 이는 ‘문화 정책’의 맥락 속에서 발생했다. 그런 개인의 출현과 일본이 한국인 사이에 야기한 분열은 매우 중요했다. 해방정국 속 지배층을 분열시킨 틈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바로 1920년대 이후다. 민족자본가로 상찬된 인물들은 이런 변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인 자본가는 두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토지 자본을 상업·산업 활동에 투자한 부류로 신·구 지주적 배경을 가진 인물이다. 다른 하나는 평민이나 천민 출신으로 순수한 기업가적 재능을 지닌 부류로 꾸준히 성장했다. 슘페터의 기업가 미덕 예지력·대담성·창조성을 찾을 수 있는 부류다. 그들은 한국 지배층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에 매달린 부류이기도 하다. 그들의 민족적 또는 애국적 특징은 대체로 의심(65)스러웠다. 일본 지배층에게 접근하는 데 볼썽사납게 저항할 필요가 있었던 쪽은 한국 사회에서 안정적이고 안전하게 뿌리 내린 사람들이었다.
호남 지방은 지주기업가의 중요한 발상지였으며 대표자가 김성수였다. 전후 한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호남 출신 세력의 핵심 인물이다. 동아일보사, 고부학원, 보성전문학교(고려대), 경성방직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일본 유학 때 송진우·윤상은·김병로·현준호·장덕수·이광수 등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김성수, 현준호, 김병로, 윤상은이 함께 세운 호남은행과 경성방직주식회사는 토착적·자립적 한국 자본을 세우려는 노력으로 전라도 일대의 주요 한국인 지주에게서 투자를 이끌어냈다(66).
1920년대 박흥식은 평민 출신으로 화신백화점, 일본군 비행기 부품회사 등 설립에 관여해 1945년 한국 부자 중 한 사람으로 오늘날에도 남한에서 중요한 기업가로 남아 있다. 방의석도 평민 출신인데 박흥식과 협력했다. 둘 다 민족주의 의식은 없었다. 해방 뒤 친일파로 널리 인정됐다. 김성수 등의 집단도 일제강점기 마지막 기간에는 의심스러우며 그들이 선택한 길은 재력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1937년 이후 일본은 가장 명망 있는 한국인들에게 통치와 전쟁에 공개적으로 지지하도록 강요했다. 그 결과 온건한 민족주의자의 위상이 무너졌다.
1945년 이후 한국의 발전은 중단됐고, 그 흔적은 모든 한국(67)인 계급에 남겨졌다. 불안한 처지에서 특권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민족자본가에게는 ‘민족적’ 모습과 반대의 모습이 섞여 있었다. 어쨌든 그들은 자본가가 아니었으며 그런 목표로 나아가기 시작한 이들일 뿐이었다. 자본주의 미덕에 매우 저항적인 태도를 보인 사회에 그들의 길이 놓여 있었다.
자본주의 이전의 모든 사회는 다양한 혐오의 척도로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자를 바라봤다. 한국의 기업가 계급은 1960년대 이전에는 자본주의적 신념을 갖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와 그 뒤에도 대체로 한국인은 상업과 산업을 종사해야 하거나 거기서 이윤을 얻어야 하는 활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일제 자본주의 시대라는 용어는 획기적인 시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낯선 제도가 35년에 결여 도입됐(68)다는 의미였다.
한국인 자본가는 “침략적 제국주의와 국내의 외국인 자본가와 긴밀히 협력해 스스로 민족을 저버렸지만, 대부분의 한국인은 이런 자본가 세력의 착취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유일한 구원으로 생각했다”(갈홍기).
1965년 국제학술회의는 자본주의 미덕에 대한 한국인과 미국인의 태도 차이가 드러났다. 한국의 경제학자, 철학자들은 모두 한국인 자본가를 폭리를 취하는 사기꾼으로 봤지만, 미국은 모두 기업가의 열정을 근대성의 상징으로 이해했다(69). 미국인 학자들은 “자본을 축적하라! 그것을 산업에 투자하라! 양심의 가책을 갖지 마라”라고 주장한 반면 한국인 학자들은 “자본 축적은 속임수를 쓴 도둑질일 뿐이고 이익은 수치스러운 것이며 그런 행동은 조금도 합법화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70).
한국은 활동적인 상인계급을 배출하지 못했고 유교 윤리가 너무 널리 퍼져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활동을 거의 지지하지 않았으며, 식민지 시대에 외부에서 낯선 자본주의가 이식됐고, 강력한 외세의 침략으로 “자연스러운” 발전이 가로막혔다는 인식이 퍼져있었다. 현실과 이념 모두에서 한국은 거대한 근대 권력이 벌거벗은 모습으로 충돌한 거친 전쟁터였다(71).
노동력의 동원
일제강점기 노동자였던 농민은 다시 농민이 될 수밖에 없었고 하층 계급이 훨씬 급격하게 바뀌었다. 1910년 84%가 농업에 종사했으나 1936년 중공업이 전체 산업 생산의 28%를 차지했고 50만 명 이상이 산업 분야에서 일했다. 한국의 산업혁명은 여느 식민지와는 전혀 다르게 일제강점기 마지막 15년 동안 본격적으로 시작됐다(72).
1945년 한국에서는 노동계급이 막 형성되기 시작했으나 노동계급은 외형만 갖추었다. 대부분 남부 지방 출신으로 완전한 노동자가 아니었지만 어 이상 농민도 아니었다. 신분이나 본질이 완전히 바뀌지 않은 혼합적 존재였다. 1937년 중일전쟁 뒤 전쟁 지원에 따라 한국인 노동자는 인적 자본이 됐다. 국가총동원법의 적용을 받아 다양한 징용·강제 노동과 근로보국대 등에 동원됐다(73).
진주만 공격 이후 한국에서의 동원은 전체적으로 강화됐다. 414만6098명이 강제 노동에 징발됐다고 추산했다. 노동력 동원 조직은 집요했다. 한국인 노동자 10명을 보도반으로 편성하고 4개 보도반은 자강대 분대, 분대3개는 하나의 자강대를 조직했다. 재일 한국인은 모두 협화회에 등록되었고 노동력 동원과 한국인끼리의 감시 목적이었다(74).
1945년 초반 13만6000명 정도의 한국인이 일본 탄광에서 일했다. 다른 식민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다. 전쟁 기간에 일본에서는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안이 폐기됐다. 군사적 명령 체계가 노동계약을 대체하면서 자본과 노동은 “진정한 하나가 돼” 전쟁에 봉사했다. 전쟁 동안 한국인은 채탄 노동력의 60~70%를 차지했다. 노동력을 동원하는 과정은 가혹했고 한국인을 분열시켰다. 인구에 따라 도별 할당량을 세웠다. 노동사무소는 대부분 지방 경찰서에 있었는데 직원과 경찰은 제 할당량을 채우면 후하게 보상받았다. 그런 한국인은 현지에서 가장 큰 증오의 대상이었다(75). 총독부 한국인 착취는 식민지보다 오래 지속된 한국인 내부의 증오와 경쟁을 자극했다
1931년부터 일본은 분할통치의 유용함을 깨달았다. 더 많은 한국인 노동자를 동원하면서 한국인이 한국인에 대항시키는 책략이 확산됐다. 관청이 늘어나고 관료 제도가 퍼지면서 그 자리는 한국인에 보다 더 개방됐다. 한국인 관료들은 자국민에게서 멀어질수록 식민 권력으로부터 보상받았다(76).
국적과 지위의 불일치가 가장 심각한 곳은 경찰조직이었다. 전국 조직은 국민 통합을 강제하는 데 특히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경찰은 절반 정도가 한국인이었기에 한국인 내부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한국인 장교는 만주국에서 유격대 토벌 작전으로 첫 군사훈련을 받았다. 태평양전쟁 동안 연합군 포로수용소 간부로 한국인을 근무시켰는데 오명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진주만 공격 이후 한국에서의 동원은 전체적으로 강화됐다. 414만6098명이 강제 노동에 징발됐다고 추산했다. 노동력 동원 조직은 집요했다. 한국인 노동자 10명을 보도반으로 편성하고 4개 보도반은 자강대 분대, 분대3개는 하나의 자강대를 조직했다. 재일 한국인은 모두 협화회에 등록되었고 노동력 동원과 한국인끼리의 감시 목적이었다(74).
식민지 분할통치 전략은 모든 곳에 쓰린 유산을 남겨놓았다. 한국인 경찰은 식민 지배의 특히 탁월한 협력자였으며 한국인 경찰의 운명은 해방된 한국의 정치를 결정하는 데까지 오래 지속됐다. 일제가 추진한 정책의 궁극적 결과는 한국인 지배층에게서 합법성을 박탈한 것이었다. 이는 한국인의 민족적 정체성을 계속 물어뜯었다. 식민 지배가 덜 급작스럽게 끝났다면 1930~40년대 지배층은 오늘날(77) 좀 더 자신감을 지닌 지도자들이 됐을지도 모른다.
저항운동
한국과 만주국의 국경 지대에서 일어난 항일투쟁은 1930년대 후반 국경 너머에서 마지막으로 나타난 저항이었다.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중국 북부를 중심으로 항일 투쟁을 전개했으며 좌익 사상과 공산주의는 ‘반일’과 동의어가 됐다. 저항운동은 민족적·애국적 분위기를 띠었다(78). 1945~50년 내내 많은 한국인이 좌익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에 공감하게 만든 것 또한 일본이 남긴 유산이었다.
한국의 민족주의의 시작은 3·1운동 이후이며 공산주의자가 처음 나타난 것도 이 시기였다. 무장투쟁을 옹호하는 세력과 문화·교육·사회·정치 활동을 전개하면서 점진적으로 독립을 준비하자는 부류로 나뉘었다. 후자는 특히 일제의 조종에 취약했다. 식민 당국은 온건주의자를 양성하고 그들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언젠가는 한국의 독립이 이뤄질 것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한국인 내부의 대립은 해방 뒤까지 이어졌다.
1930년대 한국인 수천 명이 투옥됐는데 대부분 좌익 부류와 공산주의자였다. 그들의 투쟁으로 좌익은 1925년 이후 항일 투쟁에서 우월한 지위를 얻었다. 한국 공산주의 운동은 국내파(79), 소련 활동가 집단, 예안파, 한·중 국경 지역의 빨치산이었다. 일본 경찰의 탄압과 통제 때문에 분열되고 끊임없이 재조직됐다. 한국 공산주의의 파벌주의와 당파성, 미숙함은 정확한 근거도 없이 지나친 비판을 받아왔다. 식민 지배에서 한국인의 활동은 가장 활발했으며 많은 성공을 거뒀다. 1930년대 소작인과 농촌 문제로 운동의 방향을 전환하는 데 성공하고 적색농민조합을 조직해 농민의 불만을 고조시켰으며 일본군과 국지전을 벌여 승리하는 성과를 거뒀다. 항일 빨치산의 “집요한 저항”은 중국 본토의 전쟁을 교착상태에 빠뜨렸고, 일본의 계획을 무효로 만들었으며 그 좌절감은 진주만에 대한 자멸적 공격으로 이어졌다(80).
동변도와 인접한 지역은 중국과 한국 만주 유격대의 핵심 거점이었는데 일본의 침략에 격렬히 저항했다. 동변도는 “오래 지속된 강력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은” 한국인 이주민으로 가득했다. 만주국 설립과 유혈 진압 작전 이후 유격대의 숫자는 1936년 2천명 정도로 줄었다. 그 무렵 중국인 유격대원 양징위는 다양한 중국인과 한국인 유격대로 구성된 상부 군사 조직인 동북항일연군에 편입시켰다. 현재 김일성이 확고한 빨치산 전사로 떠오른 것은 이런 환경에서였다(81).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에서 수 백명의 한국인 빨치산으로 구성된 부대를 지휘했다. 1937년 보천보전투가 잘 알려졌다. 전후 김일성이 갖게 된 이점은 40년에 걸친 긴 저항 투쟁의 마지막 10년 동안 유명해졌다는 것이다. 스스로 명성을 세우고 세력을 보존한 그는 해방이 다가오면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김일성은 전사였지만 자기 보존에 능하고 적절한 시기를 본능적으로 기민하게 파악한 생존자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통일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 그는 파벌주의를 반대하고 통일전선전술을 신봉했으며 민족주의와 혁명을 능숙하게 융합했다. 중국·소련의 공산주의 모두 협력했지만 애국적 이미지가 강했고 동지들로부터의 충성을 계속 확보하고 있었다(82).
김일성이 성공할 수 있었던 또 다른 핵심 요소는 일본에 체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34년 한국에서 풀려난 정치범 934명 가운데 375명은 공산주의를 포기했다. 투옥된 사람 대부분 서로 믿을 수 없게 만들었고 체포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의심이 제기되지 않았다. 1945년 무렵 김일성을 비롯한 소수의 한국인 저항 세력에게 중요한 자산이 됐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전후 한국 정치를 이끈 모든 주요 세력의 관심을 받았다는 것이다(83).
김일성은 태평양전쟁의 마지막 투쟁 시점에서 중요하고 널리 알려진 항일 투사였다. 북한에서 만주 항일투쟁의 공로를 인정받은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과 그를 제외한 나머지 수천 명의 생명과 건강, 의지, 역사적 위상은 간과되고 있다는 점은 슬픈 역설이다.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이 자주 성공하면서 아주 작은 성공이라도 전후 한국에서 지도자로 떠오를 수 있는 지위를 보장했는데 김일성 부대의 성공은 작지 않았다. 그들은 한국과 가까운 지역이나 한국 안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미국이나 서구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만주는 항일투쟁의 중심지였지만 서구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84). 북한이 김일성의 항일운동을 민족적 신화로 만들고 그 밖의 사항은 모두 무시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서양인에게 북한의 권력을 장악한 역사가 만주에서 형성됐다는 사실은 전혀 이해되지 않고 있다. 일본은 보병과 하급 장교, 소수의 고위 군인 등 수백 명의 한국인이 유격대 진압 작전에 참여했다.(간도특설대) 군인 장교 김석원은 1937년 김일성 부대를 토벌한 공훈이 있었는데 한국전쟁 무렵 그 대결은 다시 시작됐다. 이것이 전쟁의 내전적 기원을 모호하게 해서는 안된다. 충돌의 기원은 식민지 시대 속으로 깊이 들어가 있다(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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