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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치학을 위한 서론
7.
장치는 ‘분리’를 통해 작동한다. 이것은 이중의 분리이다. 첫째, 생명체로부터 역량을 분리해 낸다. 현대 자본주의는 무엇보다 ‘언어활동’에 대한 수용이다. 대중매체는 대중의 언어능력을 수용,(138) 즉 대중으로부터 거둬들여 사용한다. 여론조사의 경우 그것은 어떤 여론이 있어야 하는지를 규정한다. 여론이란 제조된 ‘대중의 의견’이며 대중의 현시/시위할 수 있는 잠재력을 박탈하는 것이다. 오늘날 스펙터클은 ‘정서’에 대한 수용이다. 신문 포털은 우리의 ‘분노’를 미리 기사화한다. 둘째, 장치는 삶으로부터 형태를 분리해낸다. 아감벤에게 장치란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를 매개(139)하는 모든 것이다. 세속의 극단은 성스러움의 극단과 맞닿는다. 모든 것은 소비가능하지만 그 어떤 것도 사용 가능하지 않고 접촉할 수 없다. 이것은 ‘경험의 상실’로 이어진다. 이 세계와 구체적인 사건을 경험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의 세계가 아니게 된다. 국민의 반이 수도권에서 살고 있는(140) 우리는 공동체를 상실한 채 ‘고독한 군중’으로 살고 있다.
아감벤은 근대 국가를 탈주체화시키는 기계의 일종으로 간주한다. ‘탈주체화’란 “고전적인 모든 정체성을 흐트러뜨리는 동시에 해소된 정체성을 특히 법적으로 재코드화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탈주체화를 명확히 하기 위해 하이데거의 게슈텔을 성찰한다. 게슈텔을 미셸 아는 ‘콩-소마시옹’으로 번역한다(142). 프레데릭 네라는 이를 첫째 경제적이다.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무언가를 이용하는 것, 둘째 ‘소진‘과 공명한다. 셋째 존재론적이다. 존재의 모든 가능성의 최종 수집이자 완수되는 순간, 장소로 설명한다(143). 우리말의 소비는 ’써서 없앤다‘는 뜻으로 첫째, 둘째는 내포하지만 셋째는 보여줄 수 없다. ’소비‘는 장치가 존재의 모든 가능성 또는 에너지를 닦달해 모음으로써 존재를 완수한다는 것,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기제임을 보여준다. 소비-장치는 모든 존재를 ’소비할 수 있는 존재자‘로서 불러세운다. 소비할 수 있는 존재자는 탈주체화를 가리킨다.
소비-장치 작동에서 소비할 수 있는 대상이란 완전한 현실태로서 다르게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박탈된 것이다(144). 그저 ’신상‘이 나오면 대체될 운명인 것이다.
소비- 장치 작동에서 소비할 수 있는 인간이 필요하다. 현대 자본주의는 ’결핍‘과 ’충족‘에 대한 강박을 심어준다. 또 소비를 이끌어 내기 위해 ’도덕‘의 탈을 쓰기도 한다(145). 윤리적 소비는 기업에 ’선‘을 행해야 할 의무를 강제하기 위한 명령인 한에서 ’도덕적‘ 행위이다. 그것은 ’윤리‘와는 무관하다. 소비-장치는 윤리(’할 수 있음‘,’역량‘,’존재 방식‘ 등의 계열로 이뤄짐)라는 개념을 탈취함으로써 도덕과 윤리를 구분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렸다.
’탈주체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비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146). 비정규직은 ’애초부터 대체되기 위해 고용된‘ 사람이다. 절대적으로 탈주체화된 존재가 되어야 한다(147).
8.
아감벤은 장치, 상품자본주의, 스펙터클의 사회의 붕괴 이후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장치로부터 물러나서 장치의 시선에 의해 방치된 채 머물러 있을 것을 주장한다. 장치를 통해 얻는 주체성이나 특성에서도 물러서는 것을 뜻한다. 대신 장치의 보호와 혜택도 포기해야 한다(150). 장치는 이의제기나 비판에 열려 있으며 심지어 항의하는 주체도 관용한다. 아감벤은 장치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전략을 택한다. 우리가 자본을 망각하는 것이며 자본은 우리의 망각 앞에 무력해진다. ’벌거벗은 생명‘의 ’주체화‘ 없이는 인간학적 기계(151)나 온갖 장치들이 순전히 형식적인 원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간의 삶은 장치와 깊숙이 얽혀 있으므로 장치의 달콤한 유혹을 거부하는 것만으로도 장치는 헛돌게 될 것이다.
9.
벌거벗은 생명은 장치의 보호를 받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노출된 존재다(152). 동물의 생명(조에)도 아니고 인간의 삶(비오스)도 아닌 그저 그 자체로부터 분리되고 배제된, 자신의 형태/속성을 박탈당한 순수한 생명이다. 아감벤은 벌거벗은 생명에 기초한 정치를 주장하지 않는다. 정치의 목표는 장치에 의해 우리의 삶으로부터 분리된 형태를 되찾아 삶-의-형태를 만드는 데 있다(153). 비인간으로 간주된 자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시민이 아닌 인간이 갖고 있는 인권이라는 개념을 텅 빈 것으로 생각한다. 비인간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도 없다.
장치는 생명체를 주체화한다. 하지만 주체화는 생명체 자체의 ’있는 그(154)대로‘의 존재 방식을 전제하되 그것을 삭제하는 한에서만 이뤄진다. 아감벤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 방식을 되찾아야 한다고 본다.
장치에 의해 현실화되는 이런저런 특성이나 주체화도(155) 아니고, 순수 생명체의 신성함을 주장하는 것도 아닌 장치에 의해 포함/포획되면서 배제된 우리의 ’가능성 정체‘, 순수 잠재성을 드러내는 것이 열쇠이다.
현대 철학에서 개체는 처음부터 주어진 것 또는 눈앞에 현상되는 개별자들이 아니라 개체화를 거쳐 구성된다. 아감벤에게 이 과정은 생명체가 장치에 의해 불러 세워지는 것으로 묘사된다(156). ’장치‘는 개체들이 집단을 형성할 때도 작동한다. 근대 인민국가는 벌거벗은 생명체로서의 인민이 정치적 실존으로서의 인민으로 주체화되는 과정을 통해서만 성립될 수 있었다. 개체가 집단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특수성을 제거해야 한다. 집단을 유지하기 위한 규칙에 맞게 개인의 특수성을 제한하며 예속된다. 자신의 특성을 제거하면서 모이는 전-개체적인 수준에서는 개체의 특성을 제거함으로써 잠재력으로서의 독특성을 획득할 뿐 아니라 공통적인 것에로 스스로를 열게 된다.
가능성은 현실성에 의해 사후적으로 소급해 만들어진 것이(157)다. 가능성은 현실태가 되거나 되지 않거나 하지만 둘 중 어느 하나가 되어야 하는 필연성을 지닌다. 잠재성은 생명체가 자체로 가지고 있는 역량이다. 잠재성은 가능성이 현실태가 될 때도 사라지지 않고 지속한다(158).
아감벤에게 동시대인이 된다는 것은 필연이 아니라 우연적인 것이며 사건적이다. 잠재성에는 생명체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역량이다. 유적 존재의 생물학적 역량이다. 잠재성은 ’내가 말하다‘가 아니라 ’사람들이 말하다‘, ’내가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지각한다‘ 등으로 표현된다. 가능성은 ’누구‘의 가능성, 무엇에 대한 가능성으로 규정되지만 잠재성은 누구도, 무엇도 갖지 않는다(159).
엄밀한 의미의 벌거벗은 생명은 인간적·사회적 삶(비오스)으로부터 온갖 특성을 배제한 뒤 소급해 만들어낸, 비인간(성)을 가리키기 위한 범주이다. 이를 위해서는 순수 잠재성에서 역량을 떼어냄으로써 능력 없는 순수 존재를 만들고, 삶-의-형태에서 형태를 떼어냄으로써 한낱 생명을 만들어내야 한다. 아감벤이 장치로부터 물러서는 ’탈주(160)체화‘를 정의할 때 이 비인칭적 역량, 즉 순수 잠재성과 관계 맺음에 바탕을 둔다.
탈주체화를 기존의 모든 주체성의 파괴라는 한 축과 비인격적/비인칭적 역량과의 관계 맺음이라는 한 축 사이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을 푸코의 ’자기배려‘를 통해 설명한다. 푸코에게 자기배려는 자기(162)를 배려하는 것인 동시에 자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음을 지적한다. 주체화 과정으로서의 자기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자기실천의 열쇠이다. 이 실천은 재주체화/재정체화되지 않고 탈주체화의 문턱에 매달려 있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10.
아감벤이 말하는 탈주체화 전략의 난점 몇가지이다(163). ’마치 … 아닌 것처럼‘은 푸코의 ’자기로부터 벗어남‘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정식이다. ’권리 없는 사용‘을 말하고 있다(164). 이 전략은 양가적이다. 아감벤은 『남은 시간: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관한 주석』에서 유대인과 비유대인으로 나누는 ’분할‘ 자체를 ’분할‘하고자 한다. 분할에서 남고, 분할에 저항하는 어떤 ’너머지‘가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165). 분할의 분할은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 또는 비유대인 자신의 탈주체화에서 온다(166).
인간과 비인간의 분할은 인간학적 장치에 의해 스스로 재분할되어 있다. 이것은 근대에 와서야 확립된 것이다. 정치란 배제를 통해서만 포함됐던 자들, 즉 노예, 여성, 이방인 등이 자신이 가지지 않았던 권리를 요구하거나 그들의 역량을 전시하면서 확장되어 왔다. 이는 ’잠재성‘이나 ’역량‘ 범주를 ’인간‘ 존재자에게 한정할 수 없고 생명체 또는 유적 존재에 위치시켜야 함을 보여준다(168).
현 자본주의의 소비-장치에 의해 전통적인 노동자 정체성이 해체되고 비정규직이 양산될 때 ’쓰다 버릴 수 있는 인간‘은 인간-비인간의 범례가 된다. 정치의 요원한 과제는 인간-비인간과 비인간-인간이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가이다. 두 범주가 서로 교통할 때에만 비로서 인간/비인간 분할의 경계는 지워질 것이다(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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