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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오티> / 2022.06.17. / 화니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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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이해를 위한 당대의 이탈리아 역사 개관

 

p5 : 중세 유럽 권력의 두 축이었던 황제권과 교황권은 이처럼 권력 공백의 상태에 있었던 이탈리아에서 맞부딪히게 되었다. 신성로마 제국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 2세의 개입에 대하여 이탈리아 도시들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와 4세의 지원하에서 저항했다. (6) 이 와중에서도 도시 경제의 융성과 도시들 간의 경쟁을 바탕으로 하여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재발견하고 새로운 시민 문화가 자리를 잡게되는 르네상스 시대가 전개되었다. 1454년에는 로디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당대의 이탈리아 5대 세력이었던 교황령, 나폴리 왕국, 밀라노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간의 이탈리아 동맹이 구축되었다.

 

p7 : 마키아벨리는 통치 역량과 군사력을 겸비한 체사레에게서 외세의 각축장이 된 조국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부분적으로는 그를 모델로 삼아 <군주론>을 썼다. (8) 이탈리아의 구출과 통일을 기원하는 마키아벨리가 그러한 수명을 수행하는 중심이라고 생각한 피레체에는 여러 정권들이 등장한다. 선조가 의사였다는 연유로 메디치라는 씨성을 얻게 된, 세 가계로 이루어진 메디치 가문도 그 중 한 주역이다.

 

3판 개역본 해제

 

1) 마키아벨리의 생애시기로 나눠본 이탈리아 정세

 

p231 : 군주론을 저술하기 전까지 마키아벨리의 삶을 크게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시기는 [1469-1494] 마키아벨리가 아직 공직에 진출하기 전이었으며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지배한 시기이다. 그중 국부라고 불린 코시모 데 메디치는 피렌체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음에도 군주제를 무리하게 도입하려고 하지 않았다. (232) 경거망동하는 자기편의 귀족들을 제어할 줄 아는 시민적 중요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째 시기는 친프랑스 정책을 취함으로써 시민들의 원한을 산 메디치 가문이 추방되고 나서 사보나롤라가 집권한 1494년에서 그가 화형에 처해진 1498년에 이르는 시기이다. 당시 메디치 가문은 형식적인 공화정을 유지하면서 시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축제와 향연을 자주 베풀었다. 사치와 오락이 만연하는 분위기 속에서 시민들은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현실에 안주하고, 나태한 삶을 누리려고 했다. 이러한 피렌체의 타락상을 비판한 사제가 사보나롤라이다. 사보나롤라는 메디치 가문이 추방된 후 권력의 공백상태가 된 피렌체의 권력자로 등장했다. 그러나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견제와 피렌체 반대파의 공격으로 1498년 화형장의 재로 사라지게 된다.

 

셋째 시기는 (233) 1498년 마키아벨리의 공직진출과 더불어 시작된다. 외교와 군사 부문에서 일했던 마키아벨리는 능력을 인정받게 되어 정의의 기수로 선임된 피에로 소데리니의 제2서기관 직을 수행했다. 마키아벨리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인 체사레 보르자를 관찰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는 교황국의 군대를 지휘하면서 로마냐 지방을 평정하고 피렌체를 위협했다. 그는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는 용병대장을 속임수로 꾀어낸 다음 매복시켜둔 부하들을 시켜 제거한 시니갈리아 사건과 자신의 신복인 (234) 레미로를 참수한 사건을 통해 마키아벨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된다.

음모와 단호함을 적절히 사용할 줄 알았던 보르자는 힘이 미비하여 원군과 용병을 사용해야만 했던 한계 상황에서 벗어나서 인민의 지지와 자기 군대를 통하여 이탈리아 도시들을 위협하는 인물로 성장하게 되었다.

 

2) <군주론>의 요지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설파한 것은 위기의 정치학이라고 할 수 있다. (235) 무조건적인 개입만이 능사가 아니다. 마키아벨리가 속전속결을 단행했던 로마인들이나 행도잉 단호했던 체사레 보르자를 칭송하면서도 신중한 정책을 펼친 코시모 데 메디치를 높이 평가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반대로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상관이었던 소데리나를 비판했던 이유는 필요한 경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행동해야 할 시기를 놓쳤기 때문이다.

복잡한 힘의 관계들 속에서 행동을 취해야 할 정확한 시기와 지점을 잡아내는 것이 정치적 지혜의 핵심이라면,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역량이 비르투(virtu)이다.

 

p236 : 결정적인 승리 없이 지속되는 전투와 전쟁의 반복은 용병제하에서는 필연적인 것이었고, 이 모순이 바로 이탈리아 국가들의 통일을 방해했던 것이다.

인민들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공동테를 지키기 위해서 무기를 들지 않고 군대를 돈을 주고 사는 것은 돈 많은 상인 자본가들이 지배하는 과두제하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이탈리아를 노예화시키고 수모를 겪게 만든 것은 용병제이지만, 그 용병제를 낳는 것은 사실상 자국 군대의 육성을 가로막고 있었던 정치체제에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군주론>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귀족과 인민 간의 대립과 긴장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237) 귀족들은 인민들이 무기를 소유하는 것을 항상 두려워했다. 그 때문에 용병을 쓰게 되었고, 그 결과로 조국이 외세에 유린당하게 되었다.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공동체의 몰락이라는 정치적 비용을 기꺼이 지불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군주는 귀족이 아니라 인민에 의지해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인민들을 귀족들의 억압으로부터 보호하고, 인민들의 환심을 사며 지지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p238 : 정치는 귀족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수단이 되었고, 인민들은 귀족들이 나누어주는 떡고물에 취해 배가 불러 꼭두각시가 되어버렸다. 공은 사리자고 사만 풍미하게 된 것이다. 부패와 무질서의 상황을 극복하고 질서를 세우는 것, 공동체의 영역에서 사의 전횡을 물리치고 공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군주의 임무였던 것이다.

 

p242 :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16세기 말에 널리 쓰이기 시작하는 이익(interests), 국가의 이성(reason of the state)이라는 개념의 원초적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익의 개념을 두가지 함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 하나는 마키아벨리 이전 시대에 만연되어 있던 도덕적 원리나 규범으로부터 정치행위의 독립성을 선언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원리들이 군주에게 명료하고 건전한 지침을 제시하는 동시에, 정념이나 일시적인 충동에 의해서 오염되지 않는 계산적이고 합리적인 의지를 표상하는 것이었다.

정치행위의 원리로서 도덕적인 원리를 추방한 것은 정치행위의 비도덕성을 암시하는 것이었지만, 또한 정념에 따른 행위를 배제하고 합리(243)적이며 계산적인 이익의 개념을 도입한 것은 정치행위가 일정한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폭력마저도 계산적인 이익에 종속시킬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익 정치는 정치영역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정치행위의 역동성을 포착할 수 있겠지만, 정치결사 특유의 공동체적성격을 확보할 수 없다는 데에 마키아벨리 특유의 고민이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이익정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군주론> 마지막 장에서 돌발적으로 민족주의라는 공동체 지향적인 감정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p244 : 대부분의 기독교 사상가들은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문필가들은 군주의 덕으로 기독교적인 의미의 덕 겸손함, 자선, 경건함, 정직함 등 을 요구했다. 하지만 마키아베리는 이러한 기독교적인 덕의 개념에 반기를 들고 군주에게 요구되는 덕으로서 고대로마 공화정 당시의 비르투에 해당하는 남성다움, 용맹스러움, 단호함을 요구했다. 즉 마키아벨리는 초기 로마 공화정의 정신으로 돌아가서 군주에게 전사의 덕을 요구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 사상에 나타난 덕에 대한 이러한 개념상의 혁신은 정치적인 행위자에게 요구되는 정치적인 덕이 일반 사적인 생활에서 요구되는 윤리적 덕과 구별된다는(245)점을, 곧 정치영역의 독자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246) 마키아밸리는 대부분의 정치적 상황이 불안정하고 유동적이기 때문에 국가 공동체와 인민은 사적인 개인과는 다른 방법으로 통치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p247 : 마키아벨리는 정치가 본질의 영역이 아니라 외양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플라톤과 다르게 마키아벨리는 정치는 변전무상한 생성과 현상의 영역이기 때문에 종교나 철학적 진리의 적용을 거부한다. 군주나 정치적 행위자들이 권력을 통해 추구하는 것은 영혼의 완성이나 진리의 실현이 아니라 영광과 명예로, 이 역시 외양의 속성에 불과하다.

 

p248 : 그러나 항상 정직하게 행동하지는 않더라도 정직하게 보이는, 신의를 지키는 것처럼 보이는것 등 통상적인 윤리적 규범을 준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중요하다. 이러한 외양의 조작을 통해 사적인 윤리에 기반한 비난의 화살을 피하고, 인민대중의 지지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비록 외양의 조작을 통한 것이지만, 군주에게 대중의 지지가 필수 불가결한 것을 은영중에 역설함으로써, 공화주의적 사상을 드러내고 있으며, 멀리는 근대의 인민주권론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p252 : 정치세계의 역동성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비교적 안정된 이론 틀을 제시하는 정치 형이상학으로 마키아벨리는 역사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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