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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문제와 정치적 사유(한나 아렌트)

2023.3.4. (21매)시온주의를 재고하자 (703-751).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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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주의를 재고하자 (703-751)

 

2023. 3.4.

 

 

 

#1

시온주의를 재고하자

 

1 시온주의 정치의 당면 과제

 

미국의 시온주의자들은 좌파에서 우파에 이르기까지 194410에틸렌틱 시티에서 개최된 지난 정리 회의에서 분할되지 않고 축소되지 않은 팔레스타인 전체를 포괄해야 한다는 자유롭고 민주적 유대 공동체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한 재택은 시온주의 역사의 전환점이다.

유대인 소수파는 빌트 모어 강령에서 아랍인 대다수에게 소수 민족의 권리를 인정했다.

이 결의안은 분명히 아랍인들에게 자발적 이민이나 이등 시민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다.

 

 

결의안은 아랍 민족과 유대 민족 사이의 이해의 필요성을 끊임없이 설교했던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정당에는 치명타이다.

한편, 결의안은 팔레스타인에서 발생하는 많은 불법 행위의 압박과 과 유럽에서 진행되는 끔찍한 재앙으로 민족주의 성향을 이전보다 더 많이 띠며 벤구리온의 지도 아래에 있는 다수파를 상당히 강화시킬 것이다.

일반 시온주의자들은 강대국의 지원에 희망을 걸지만 시온주의자들은 약간은 더 과단성 있게 문제를 스스로 다루려는 입장을 취하는 것 같아 후자의 입장은 우매하고 비현실적일 수도 있지만 가장 정직하고 이상적인 유대인들 가운데 많은 새로운 추정자들은 이 때문에 수정주의를 지지할 것이다.

 

 

어쨌든 모든 시온주의 정당이 궁극적 목적을 만장일치로 고수하는 것은 중대한 발전이다.

시온주의자들은 자신들에게 적절한 것 같이 보이는 순간에 이 목적을 아주 무례하게 진술함으로써 앞으로 오랫동안 아랍인들과 어떤 예비 교섭 기회도 상실했다.

분할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둘러싼 영국 내부의 의견 차이를 해결하는 것 같다

유대 민족주의와 제한된 유대 국가는 불가피하게 알았고 국가들과 민족들에 포위되어 있는 이 상황에서 위태로운 운명에 놓여 있다.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인 다수파 상황을 실질적으로 바꾸지 못할 것이다.

 

 

유대인은 이 상황에서 자신들의 이웃으로부터 외부 세력의 보호 요구하거나 자신들의 이웃과 실질적 합의에 도달해야 한다.

자신들의 존재를 보장할 수 있는 지중해 유혹의 어떤 강대국도 받아들일 필요성과 의지로 인해 유대인의 이해관계가 지중해 유협 모든 민족의 이해관계 관계와 충돌할 위험성은 금방이라도 나타난다

다른 한편, 시온주의자들이 계속 지중해 유역의 민족들을 무시하고 먼 곳에 있는 강대국들만 주시한다면, 그 강대국의 도구, 즉 적대적 왜국 세력의 대리인 역으로만 나타날 것이다.

자신의 역사를 아는 유대인은 그러한 사태가 불가피하게 새로운 유대인 증오의 파도로 이어진다는 것을 의식해야 한다.

 

2. 수정주의와 일반 시온주의; 공통점과 차이점

 

시온주의 기구에서 나타난 수정주의 사태는 지난 10년 정치적 갈등의 첨예화로 야기됐다.

시온주의 기구는 대외 문제의 경우 바이츠만의 지도 아래 부분적으로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중대한 성과 때문에 정치적으로 모든 의문에 대답하지 않는 또는 모호하게 대답하는 특별한 재능을 발휘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방식대로 쉬운 주의를 자유롭고 해석했다.

 

 

특별히 유럽 국가들 내에서 순전히 이데올로기적인 요소가 강조됐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이 어떤 형태의 정치 조직을 형성할 수 있을까의 질문은 이런 쟁점들 가운데 가장 중요했다

수정주의자는 한낮 민족의 조국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국민국가를 강조했다.

이들의 주장은 결과적으로 성공적이었다.

다른 국가들의 경계 내에서 살면서 이곳에서 시민적 정치적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한 민족의 모든 민족 운동이 지닌 불가피한 문제인 이중 충성의 갈등은 여기에도 나타난다

미국의 유대민족 팔레스타인과 유럽의 히브리 국민을 구별하는 것은 실제로 적어도 이론에서 미국계 유대인의 이중 충성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었다.

 

 

유대인이 반유대주의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항상 열려있는 질문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헤르츨 시대 이후 철저한 체념 하나의 사실로서 반유대주의의 공개적 수용이고 유대 민족의 적들과 거래할 뿐 아니라 반유대적 적대감의 선전 효과도 이용하려는 현실주의적 자발적 열의였다.

마지막으로 당시 가장 중요한 쟁점은 팔레스타인에서 발생한 유대인 아랍인 갈등이다.

수정주의자들의 비타협적 태도는 잘 알려져 있다.

 

 

 

미국 시온주의 기구의 최근 결의안은 팔레스타인에서 소수민족의 지위나 자발적 이민 이외에 어떤 선택에도 아랍인들에게 남기지 않기에 수정주의 원칙은 수정주의 방법이 아니더라도 이 문제에서 역시 결정적 승리를 이루었다

수정주의자들과 일반 시온주의자 사이에 오로지 독특한 차이는 영국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있다.

#2

 

3 시온주의 운동의 이념적 원조

 

19세기 유럽의 전형적 두 가지 정치 이데올로기는 시온주의 운동의 원조가 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두 교의의 결합은 유럽의 소규모 민족들의 모든 민족 혁명 운동에서 이루어졌다

이 운동은 처음부터 동유럽 대중에서 발언한 사회적 혁명 세력 동유럽의 헤르츨과 그 추종자들이 공식화한 민족 해방에 대한 열망 사이에서 분열됐다.

 

 

그들 가운데 마르크스 주의자들은 개토의 존재 때문에 유대인 대중을 배제시켰던 중대한 계급 투쟁에 유대인을 참여시킬 적절한 조건을 확립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은 유대인 생활의 사회적 측면을 정상화하는 이상적 장소로 믿었다

팔레스타인은 미래의 세계 혁명과 계급 없고 민족 없는 미래 사회를 위한 전략적 기반을 그들에게 제공할 수 있었다.

사회주의적 시온주의자들의 민족적 목적은 그들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했을 때 실현됐다. 그들은 아랍인들의 존재 자체에 대해 결코 곰곰이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세상에 사악함이 없는 지역, 즉 달로 도피하기를 희망하듯이 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도피했다.

할루츠 운동과 키부츠 운동은 이런 사회적 이상에서 성장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 유대인 사회에서 규모 부모가 크지 않은 소수파이다.

그런데 그들은 새로이 확립된 가치를 지니고 새로운 유형의 유대인 심지어 새로운 형태의 귀족제를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새로운 가치란 물질적 부 착취, 부르주와 삶에 대한 진정한 멸시, 문화와 노동의 독특한 결합, 소규모 사회 내에서 사회적 정의의 엄격한 시련, 비옥한 토양, 손을 이용한 노동에 대한 애정 어린 자긍심, 개인적 소유물에 대한 어떤 요구도 완전히 놀랄 정도로 갖지 않는 태도이다.

 

 

개척자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던 소규모 모임 내에서 완전히 흡족해했다.

그들은 유대인 정치나 팔레스타인 정치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고 사실 종종 그것을 싫어했으며 자기 민족의 운명을 의식했다

그들은 또한 새로운 유대인 이민자 수천 명을 정착시키지 않는 팔레스타인 외부에서 발생하는 유대인 삶에 어떤 사건에도 완전히 무심했다.

그들은 장래의 이민자가 아닌 어떤 유대인도 지겨워했다.

 

 

그들은 금전으로 도움을 받고 자신들의 사회 단체에 오로지 맡겨지고 청년 교육에 미치는 영향력을 보장받았다는 조건으로 정치를 기꺼이 정치인에게 맡겼다

자신들이 현재와 미래의 이슈브 유대인 정착촌에만 관심을 가졌으며 전 세계 민족 운동의 주창자가 되기를 매우 꺼린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나치 시온주의자 이송협정에 대한 이런 동의는 팔레스타인 유대인 귀족들이 저지른 수많은 정치적 실수들 가운데 두드러진 하나의 사례이다.

그들은 노동을 통해 직접 생산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모두 업신여겼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업신여겼던 조직에 여전히 복종했다.

 

그들은 정치적 반유대주의에 대해 상이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고 모든 일이 마치 자신들과 관계가 없는 듯이 최근 사회주의에 진부한 말이나 새로이 등장한 민족주의의 진부한 말을 그저 반복하는 것에 만족했다.

특별 임무로 다른 나라에 파견됐을 때 시온주의 기구를 통해 배운 자선단체의 모금 활동 방식에 적용했다.

대부분 그들은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갈등 소요 속에서 바이츠만과 반대로 실제로 자신들 단체 구성원 출신인 벤구리온에 충실한 지지자가 됐다.

1935년 팔레스타인 노동계는 벤구리온의 수정주의 편향을 여전히 격렬하게 비난했다.

사회 혁명적 유대 민족운동은 민족적 요구뿐만 아니라 국수주의적 요구를 명백히 지지하는 것으로 끝났다

4 동화주의와 시온주의

 

유대민족의 선구자들이 이끄는 정치 지도부의 시온주의는 자신들의 여행 가방에 이데올로기 세계관 역사의 열쇠를 담은 19세기 정치 운동에 속한다.

시온주의는 한때 당대 더 잘 알려진 사회주의나 민족주의만큼이나 순수한 정치적 열정이라는 생명소에서 성장했다.

 

 

민족주의에 대해 말하자면, 각 민족의 국가 조직을 구성하는 한때 위대했고 혁명적이었던 이 원리가 더 이상 국경선 내에서 민족의 진정한 주권을 보장하거나 국경선을 넘어 상이한 민족들 사이에 정당한 관계를 확립할 수 없다는 게 명백해진 이래로 민족주의는 결코 더 나쁘게 또는 더 격렬하게 옹호되지 않았다.

반유대주의는 어떤 의미에서 동화주의와 시온주의 모두의 선조였다. 민족과 영토와 국가 사이에서 국민국가의 근본적 정체성은 형태가 어떻든 자체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하는 다른 국민의 존재로 깨질 수밖에 없었다

국민국가의 틀 내에서 민족 갈등의 두 가지 해결책이 있다.

즉 완전 동화 아니면 이민이었다.

 

 

소위 동화주의자들 대부분은 결코 완전한 동화와 민족의 자멸을 원하지 않았다.

시온주의자들이 동화를 통한 유대인 문제의 해결이 자멸을 의미했다고 비난했을 때에만 그 길은 정치적 중점이 언급된 투쟁이었다.

동화주의자인 자신들이 역시 유대인의 생존을 원했으며 유대인 정치에 실제로 관여했음을 자각하지 못했다.

 

5 서유럽과 동유럽 시온주의의 차이

 

시온주의 정치사가 유대인 대중에서 발생한 순수한 민족혁명 운동을 쉽게 무시할 수 있었다.

시온주의 정치사는 헤르츨처럼 국민에 의한 정치를 거의 믿지 않았던 사람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시온주의는 정치적 성공의 기초로서 팔레스타인에서 이룬 실천적 성과를 주장했다.

실천적 시온주의자들은 일반 시온주의자들이 됐다.

이 용어는 동화의 철학에 대립되는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적 신조를 지칭한다.

일반 시온주의자들은 시온주의 운동과 강대국 사이의 관계 소수 탁월한 인사들 사이에서의 선전 효과에 것 관심을 가졌다

두 집단은 전적으로 상이한 자신들의 견해 때문에 오히려 유연하게 공동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국내적으로는 급진적인 접근법과 혁명적인 사회 개혁 대외 정치 분야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완전히 반동적인 정치 노선이 결합됐다.

 

 

 

#3

 

이제 시온주의 지도부를 맡은 사람들은 동유럽 유대인의 키부츠 운동과 할로츠 운동의 설립자들 못지않게 서유럽 유대인의 도덕적 귀족이었다.

이 나라들은 자국에 사는 유대인을 경제적 진공 상태는 아니더라도 사회적 진공 상태에 내버려 두었다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개인화하는 바로 이런 요소 때문에 서유럽 시온주의는 동유럽의 할로지우스라는 이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서유럽 시온주의자들은 자식들을 대학에 보낼 여유가 있는 유대계 부르주와 가정의 후예들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유대인 계급은 유대인 대중과 마찬가지로 가정과 사업 연계의 끝이 없는 고리로 연계되어 사회적으로 단결했다.

그러한 관계는 자전 단체를 통해 더욱 견고해졌으며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은 평생 회당에 결코 다니지 않았더라도 이 단체에 자신의 적절한 몫을 제공했다.

한때 자율적인 공동체의 이 잔재인 자선단체는 충분히 강력히 200년 내내 전 세계 유대 민족의 상호 관계의 파괴를 방지한 것으로 판명됐다.

 

 

가족과 사업의 연계가 각 나라의 유대인 빈틈없이 짜인 조직으로 충분히 유지했기에 유대인 자선 단체는 세계 유대인을 일종의 기묘한 정치체로 조직화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작가와 언론인 예술가나 합장 선생이나 국가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선택한 사람들의 경우 유대인의 사회적 연계가 필요하지 않았으며 유대인의 삶은 그러한 지식인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그들은 범위 밖에 있었다.

이렇듯 지식인들은 유일하 이 신 실천적 방식에서 배제됐으며, 서유럽 유대인은 이런 방식에서 유대 민족과의 연대를 증명했다.

지식인들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소속되지 않았다.

 

 

아버지들의 집에는 그들을 위한 장소가 없었다

그들은 전적으로 유대인으로 남기 위해 새로운 집을 지어야 했다.

그들은 근대 국민국가의 구조를 충분히 이해할 만큼 동화되었다.

시온주의와 동화주의 사이의 투쟁이라는 공허한 말은 시온주의자들이 어떤 의미에서 동화, 즉 민족의 정상화를 진지하게 원했던 유일한 사람들이며 반면에 동화주의자들은 유대 민족이 자신들의 특별한 지위를 유지하기를 원했다는 단순한 사실을 완전히 왜곡시켰다

서유럽 시온주의자들은 자기 시대의 사회적 정치적 조건을 비판하거나 이에 저항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은 오로지 자기 민족을 위해 똑같은 일련의 조건을 확립하고 싶었다

헤르츨은 일종의 대규모 이주 계획을 꿈꾸었다

나라 없는 민족은 이주 계획을 통해 민족 없는 나라로 이주할 수 있었다.

 

6 반유대주의에 대한 시온주의의 태도

 

시온주의는 헤르츨 서거 이전 지녔던 작은 정치적 추동력마저 갈수록 더 상실했다.

대신 시온주의 내부에 유대인 반대파는 대부분 완전히 학문적이고 이론적인 비판을 통해 헤르츨 저작의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모두 밝혔다.

 

 

정말 근본적으로 비정치적 태도가 정치적 결과를 가졌다면 그것은 이것이다.

첫째, 유대인 지식인들의 개인적인 문제에 관해 가장 중요한 것은 반유대주의 문제였다.

반유대주의의 현상은 다른 민족에 대한 한 민족의 자연 면적 반발로 설명되었다.

반유대주의는 모든 디아스포라 나라를 통해 유대인 역사에 과정에 불가피하게 동반되는 영원한 현상이다.

반유대주의의 영구성을 전제하고 현존하는 상태에 대한 유대인 측의 책임을 부정한다.

인류로부터 개인의 역사를 차단할 뿐만 아니라 유럽 유대인이 국민국가의 구성과 기능에 담당한 역할을 무시한다.

 

 

유대인과 함께 사는 모든 이방인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유대인 증오자가 되어야 한다는 가정, 즉 불합리하고 자의적인 가정으로 바뀐다

반유대주의에 대한 시온주의의 이런 태도는 논리적으로 옳다고 알려졌다

반유대주의는 비합리적이고 그래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고 설명될 수 있는 것 대한 설명을 회피했기 때문이다.

자들은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의 위험하고 전통적이며 소리 깊은 불신을 공고히 했다.

시온주의자들은 유대민족이 반유대주의가 없었다면 디아스프라 국가에서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그들은 대규모로 반위대주의를 제거하려는 어떤 시도에도 반대했다.

 

 

반대로 그들은 우리의 적인 반위대주의자와 가장 신뢰할 친구이며 반유대주의 국가가 우리의 동맹이라고 선언했다.

 

 

시온주의 기구는 유대인 금관 정치가 국민국가의 틀 내에서 수행한 역할에 대한 정치적 이해 그것이 유대 민족의 삶에 미친 영향을 불필요 만들었다

 

 

두 번째 새로운 민족주의 교의는 유대인을 제거하지 않은 채 반유대주의를 제거하려는 소련의 시도에 대한 시온주의자들의 태도에 매우 강력하게 영향을 미쳤다

친구나 적은 우리 시대의 모든 정치 운동과 민족운동이 러시아와 관련해 지극히 주목해야 하는 점, 즉 민족 갈등에 대한 소련의 전적으로 새롭고 성공적인 접근법 민족 평등의 기초에 다른 민족을 조직하는 새로운 형태를 경시한다.

 

 

근본적으로 비정치적인 태도가 야기한

세 번째 정치적 결과는 시온주의 철학이 팔레스타인 자체에 부여한 위치였다.

팔레스타인은 유대인이 유대인 증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 여겨졌다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에서 자신들의 적으로 안전할 것이다.

그들의 적은 기적적으로 자신들의 친구로 바뀔 것이다.

이때 시온주의 기구는 단지 전 세계 유대인의 압력을 통해 유대인 군대를 요청해야만 했다.

그런데 유대인 옆에 다른 대변이 연인은 성급하게 유대인 여단의 중요성을 혐하했다.

 

 

#4

 

유대인 추방 전 세계의 디아스포라에서 유대인 삶에 불가피한 쇠퇴라는 그들의 신조어는 팔레스타인 정착존인 이슈브의 양심이 초연함이라는 태도를 발전시키는 것을 용이하게 했다.

팔레스타인 유대인이 자기 자신들의 문제에 집착했기에 그들은 자신들을 유대 민족 전체의 정치적 선구자로 삼는 대신 자기중심성이라는 정신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유대의 유럽의 끔찍한 재앙의 직면에 추방 유대인 필연적 소멸이라는 이전의 교의를 고수하려는 시온주의자들은 거의 소수였다.

 

 

시온주의가 어떻게 디아스포라 상태에 있는 유대인을 위한 반유대주의에 대한 대답으로서 기여할 수 있는가라는 당혹스러운 질문에 대응해 범유대주의가 반유대주의에 대응하는 최선의 대답이라고 즐겁게 주장한다.

7 시온주의 분파들의 국제 정치: 무익한 외교

 

헤르츨 자신이 유대인 이민을 통해 유대인 문제를 처리하는 데 대한 여러 정부의 관심을 끊임없이 호소하면서 이 정부들과 어떻게 협상했는가는 잘 알려져 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는 반유대적 선동을 액면 그대로 수용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헤르츨과 터키 정부의 협상은 미래를 위해 훨씬 더 중요했다.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바로 1913년 이미 전통이 되어버린 것을 따르는 바로 이런 정신으로 술탄을 자신들 편으로 끌어들이는 희망을 환기시키며 아랍인과의 협상을 중단했다.

헤르츨이 드러나게 했고 바이츠만이 끝장을 볼 때까지 따라가려고 했던 길의 대안은 위대한 혁명 운동 에 협상하기 위한 유대 민족의 조직이었을 것이다.

시온주의 기구 내에서 이런 길을 여전히 고려하는 것을 인식한 유일한 사람은 위대한 프랑스 시온주의이자 베르나르 라자르였다.

공식적 시온주의 지도자는 유럽의 혁명 세력을 감히 지지하지 못했다.

 

 

대신 시온주의자들의 활동이 강대국의 후원을 꾸준히 모색하고 가능한 편익을 배경으로 후원을 활용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했다.

자신들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이 여러 정부의 이익과 일치해야 함을 깨달았다.

시온주의자들의 활동이 민족 운동이기에, 그들은 민족의 관점에서만 생각하고 제국주의가 민족 파괴 세력이었으며 이에 따라 소수 민족에게 제국주의 동맹이나 대리인이 된다는 게 거의 자멸 행위라는 사실을 외견상 자각하지 못했다.

 

 

시온주의자들의 진영 내에 반대파는 공식적 정치 노선을 상쇄할 정도로 충분한 수적 우위를 결코 획득하지 못했다.

좌파 시온주의는 국내 문제에 대해 사회주의를 요구하고 대외 문제에 대해 민족주의적 시온주의를 요구했다.

시온주의 노동자는 아랍 사회의 봉건적 성격, 자본주의의 진보적 성격, 아랍인들이 공유하는 팔레스타인 생활 기준의 일반적 상승과 관련해 참이지만 전반적으로 부적절한 주장을 반복했다.

좌파 단체는 아랍인 노동자에 반대하는 유대인 노동자의 피켓 시위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유대인이 이웃들과 연합을 할 수 없게 되면 될수록 시온주의자들은 더욱더 대영 제국을 막강한 보호 세력으로 간주했다.

 

 

시온주의자들은 유럽 역사와 정치에 어느 다른 요인들과 무관한 것으로 여겨진 유대인의 정치적 사정에 더없이 좋은 현실을 주장하면서 유대인 역사의 특이한 성격에 대해서만 지니는 식견으로 유대 민족의 존재의 중심을 여러 유럽 민족의 범위 밖에 유럽 대륙의 운명 밖에 이데올로기적으로 설정했다.

시온주의 운동은 반유대주의로부터 아주 강렬하게 영향을 받았다.

시온주의자들은 유럽 민족들의 필연적인 연대를 단절시켰을 뿐만 아니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유대인으로부터 자신들이 아마도 지닐 수 있는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가산도 박탈하고자 했다.

팔레스타인은 지중해 유역 전체와 더불어 항상 유럽 대륙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 민족을 아시아 정치의 유형으로 통합시키려는 진지한 시도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식적인 시온주의 개념에서 유대 민족은 유럽 배경에서 뿌리 뽑혀 다소간 불안정한 상태로 있지만 팔레스타인은 그런 실체가 없는 무관심을 실감할 수 있는 달에 있는 한 장소이다.

 

 

민족주의적 사고와 아주 밀접하게 연계된 시온주의는 결코 국민 형성의 필수 조건인 국민 주권에 대 많이 걱정하지 않고 처음부터 이상적인 민족주의적 독립을 원했다.

유대 국민은 자신의 성장을 보호할 만큼 충분히 강력한 강대국의 보호 날개 아래 그러한 독립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였다.

 

시온주의자들은 한 국민의 내재적 독립에 대한 이런 민족주의적 오해 때문에 유대인의 민족 해방이 다른 국민의 물질적 이해관계에 좌우된다고 보이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대표 아셀 사피르는 어느 정치학과의 구성원들이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졌다는 점을 거의 의심하지 않았다.

 

 

즉 두 셈족이 다시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권리 승인이라는 기준에 협력해야 한다는 주장은 근동과 중동 지역의 평화 관리에 도움이 되지 이후 아랍의 접대감은 해가 갈수룩 계속 증대되었다.

유대인이 영국의 보호에 의존하는 것은 아주 절박한 필요사항이 되었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자발적인 무조건 항복의 기묘한 사례라고 부를 수도 있다.

 

#5

 

8 미국 시온주의의 위상

 

오늘날까지 어떤 새로운 접근법 새로운 통찰 시온주의의 개혁이나 유대의 민족의 요구는 가시화되지 않았다.

세계 시온주의 기구 내에서 미국계 유대인과 시온주의의 비중이

엄청나게 증대된다는 점이다.

미국의 유대인 유권자 대다수는 친 팔레스타인 사람들로 간주되며 유대인의 투표가 있는 한 유대인의 투표는 팔레스타인 정책의 영향을 받는다.

 

 

미국에서 자신들을 비시온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다수는 또한 친 팔레스타인적인 견해에 단호한 성향을 가졌다

그들은 유럽에 동화된 사람들보다 한 민족으로서 유대민족의 권리와 팔레스타인 사업에 훨씬 더 긍정적이고 건설적 태도를 갖고 있다.

유대 민족의 조국으로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중대한 관심은 그렇게 국민적 분파가 자신들의 모국에 충성을 보이는 나라에서 자연적일 뿐이며 변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유대인의 모국은 실제로 미국 유대인의 상황을 오히려 정상화하는 경향을 있을 수 있으며 정치적 반유대주의에 대한 좋은 반박의 근거일 수 있다.

 

 

그들은 모든 시온주의자를 위해 원칙적으로 알리야(시온주의로의 이주)를 주장했어야 할 것이다.

바이츠만는 최근에 미국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으로 정착하라고 주장했다.

어떤 명백한 민족 운동도 국민국가(내셔널러티 스테이트) 헌법에 심각한 위협이란 이유로 시온주의 운동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아주 혹독하게 억압을 받아 왔다

실제로 미국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 과격주의자들의 실용적 입장 미국의 이익과 권력이 적어도 근동에서 영국 영향력과 대등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다.

 

 

 

근동에서 현재와 미래의 권력 정치 문제는 오늘날 상당히 전면에 나타나지만 유대 민족의 정치적 현실과 경험은 상당히 많이 드러나지 않고 세계의 주요 운동과 거의 연계를 갖지 않는다.

 

시온주의에서 제기하는 주요 문제는 시온주의가 이런 현실과 경험을 고려하고 적절하게 행동하는 데 어떻게 잘 대비하는가이다.

 

9 정치적 조직화에 대안; 연방의 구상

 

반유대주의는 적어도 유럽에서 제국주의의 단순한 선동적 무기가 아니라 가장 좋은 정치적 무기로 발견됐다.

정치가 인종 개념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곳에서 유대인은 적대감의 중심에 놓일 것이다.

 

 

제국주의가 제한된 영역의 관점이 아니라 속담대로 대륙의 관점에서 고려되는 한 유대인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반유대주의의 새로운 유형으로부터 안전할 것이지만 제국주의 이해관계의 교차점들 가운데 하나인 팔레스타인에서는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시온주의자들에게 제기되는 질문은 이러할 것이다.

시온주의자들은 분산되어 있는 유대인 개개인보다 민족이 어디에 살든 민족 전체와 연관된 적대감의 실체를 볼 수 있기 위해 어떤 정치적 견해를 제한하는가?

시온주의자들에게 제기되는 또 다른 질문은 국가 조직과 연관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민족들 사이에 증대되는 새로운 감정 동유럽 국가들은 국민 국가가 혼합된 주민들과 함께 존재할 수 없다는 가장 훌륭한 법례를 제공했다.

그러나 유대인의 경우 국민국가와 민족주의에 기뻐할 이유는 거의 없다.

 

10 시온주의 문제의 원칙 해결 원칙; 정치적 감각과 책임감

 

시온주의자들은 현실과 가능성이라는 이런 일반적 틀 내에서 국민국가를 통해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나는 국민국가의 본질적 특성인 주권에 결코 기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랍인들이 유대인에게 등을 돌리는 것을 목격해 왔다

단 한 명의 아랍인이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지 않더라도, 아랍 국가들, 유대 국가의 적대적인 민족들 사이에서 실질적 주권이 없다는 것은 정확히 똑같은 결과를 야기했을 것이다.

 

 

유대인은 처음부터 독립국의 지휘라는 착각 속에서 자신들을 세력권으로 확립하자고 이중 민족 팔레스타인 국가나 유대인 공동체는 상상컨대 아랍인과 다른 지중해 민족들과의 실질적 합의 결과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강대국과 관련해 시온주의의 미래 정책은 무엇이며 시온주의자들이 아랍인 유래 유대인 갈등의 해결책을 위해 어떤 계획을 제한해야 하는가?

 

 

가장 낙관적인 평가서에서는 적어도 10년 동안 전후 매년 유럽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약 10만 명의 유대인을 이주시키려는 희망을 담고 있다.

첫 번째 이민자 집단에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이 발생할 수 있는가

유대인이 새로운 유대인 공동체(커먼 웰스)의 미래 시민으로서 동시에 인정되지 않는다.

유대인이 분명히 소수인 나라에서 다수의 권리를 주장하는 부가적인 문젯거리가 나타날 것이다.

이슈브가 지금까지 일부 디아스프라 국가의 피억압 유대인을 위한 유일한 도피처가 아니었다는 것은 이데올로기 문제와 관계없이 공식 기록에 남은 사항이다.

공동체는 또한 다른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지원을 받아야 했다.

 

 

유럽의 재앙은 무엇보다 미국 유대인의 권력과 재원 없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팔레스타인 유대인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었을 것이다.

유대인 공동체가 가까운 미래에 형성된다면 그것은 미국 유대인의 정치적 영향력에 기인할 것이다.

 

 

유대인 공동체가 아랍인의 의지에 거스르거나 지중해 민족의 지원 없이 선포된다면 재정적 지원뿐 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원도 앞으로 오랫동안 필요할 것이다.

이 나라 유대인은 결국 근동의 정치적 운명을 총괄할 힘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그들이 오늘날 상상하거나 내일 성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책임을 의미할 수 있다.

 

 

시온주의는 이 문제들에 진지하게 대답하기 위해 정치적 감각과 책임감을 가지고 1년의 진부한 교의 전반을 재고해야 할 것이다.

 

 

유대인을 구원하거나 20세기 팔레스타인을 구원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시온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당파적 이데올로기를 꾸준히 유지하고 다난적인 현실주의만을 지속한다면, 그들은 소수 민족이 조금도 아름답지 않은 우리들 세계에서 여전히 가질 자그마한 기회마저도 상실할 것이다.

 

The End. 20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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