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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문제와 정치적 사유(한나 아렌트)
유대국가: 50년 이후, 헤르츨의 정치(753-771)
유대인 조국을 구원하자(773-792)
개성의 자산: ‘하임 바이츠만:정치가, 과학자, 유대인 공동체 설립자’ 서평(793-797)
시온에만 몰두한 삶: ‘시행착오: 하임 바이츠만 자서전’ 서평(799-802)
2023.3.20.월. 오후 9:30
유대국가: 50년 이후, 헤르츨의 정치(753-771)
헤르츨의 실천적 제안들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헤르츨 당대의 사람들이 이상주의적이라고 했을 제안들은 오늘날 실제로 시온주의 이데올로기와 정책을 결정한다.
헤르츨은 노동에 의한 구제로 국가를 건설하는 유대인 회사를 제안했다.
팔레스타인 현실은 결과적으로 헤르츨이 꿈꾸었던 것과 반대 상황으로 밝혀졌다
헤르츨이 어떤 의미에서 이 빈 사람은 품격 태도 이상에서 무명의 동료 언론인들과 거의 다루지 않았지만 실제로 별난 사람이었다.
그는 디아스포라에서 유대인 조국으로 그들의 독립성을 보호하면서 재산 이전을 통제하는 가정에서 우리의 임원들과 힘을 합치도록 반대주의자들에게 권유했다.
자기 당대와 보다 최근에 활동한 선동적 정치인들과 함께 대중을 멸시하면서도 대중과 매우 현실적인 관계를 밀접하게 유지했다.
헤르츨은 바로 이러한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속한 사회 계층의 대변자 이상의 화신이었다.
헤르츨은 새로운 반유대주의 운동의 지도자들과 다른 특성을 공유했다.
헤르츨의 변함없는 위대성은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행동하려는 의지, 즉 정치적 관점에서 행위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에 있다.
유대인은 디아스포라 2000년 동안 직접적인 정치 행위를 통해서 자신들의 조건을 변경하려는 시도를 두 차례 했다.
첫째는 유대인 구원을 위한 신비적 정치적 운동이다.
샤베타이 채비 운동이었다.
유대인이 스스로 메시아라고 한 샤베타이 채비를 따를 때 1600년대 중반 팔레스타인으로의 복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메시아적 1000년 왕국에 대한 자신들의 궁극적 희망이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대인의 세속화는 마침내 디아스포라를 해소시키려는 두 번째 시도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 두 번째 시도는 시온주의 운동의 등장이었다.
샤베타이 채비 운동에 대해 실패 이후 유대인이 직면한 현실을 세상의 혼란이었다.
유대인은 세계의 사태를 더 이상 이해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세계 속의 한참 장소를 찾을 수 없었다
내가 방금 제시한 바와 같이 이런 현실에 절실한 필요 샤베타의 채비 운동의 붕괴와 유대인 다중의 의식에서 생생한 요인으로서 메시아 희망의 소멸 이후에 존재했다.
두 요인의 일치는 시온주의를 잉태했고 헤르츨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게 했다.
이러한 요인들 가운데 첫 번째는 본질적으로 유대인의 역사와 거의 관련이 없었다
서쪽으로의 이동이 주요한 두 유대인 분파를 결합시키고 연대감의 기반을 다지고 동유럽 유대인과 서유럽 유대인에게 동일한 관점에서 상황을 주시하는 법을 가르쳤다는 사실은 유대민족의 정치사에서 더욱더 중요했다.
시온주의가 발생하게 된 두 번째 요인은 유대적인 것이었다.
이 요인은 유대인 사회에 전적으로 새로운 계급, 즉 지식인의 출현이었다.
국민들의 특징은 그들이 더 이상 문화적 공백에서 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실제로 동화됐다.
탈유대화됐으며, 서양화됐다.
그러나 동화와 탈유대화는 그들의 사회적 적응에 기여하지 못했다. 지식인들의 상황이 초래한 심리적인 결과는 유대인 지식인들을 자체의 정치적 관점에서 반유대주의를 이해할 수 있는, 역사의 첫 번째 유대인으로 만들었으며, 심지어 반유대주의가 그들을 더 깊고 더 기본적인 정치적 태도에 민감하게 했다는 점이었다.
반유대주의는 다른 것들 가운데 이런 태도의 한 표현이었다.
헤르츨과 핀스커는 모든 측면과 관련성에서 유대인 문제와 반유대주의를 동일하게 취급했다.
반유대주의를 항상 어디서나 유대인의 존재 자체에 대한 모든 민족의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생각했다.
시온주의가 아직까지도 동화주의에 대해 지니는 장점은 처음부터 정치적 수준에서 전체 문제를 설정하고 정치적 관점에서 이런 ‘재조정’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동화주의자들은 최소한의 권력도 갖지 못한 채 유대인을 위한 수많은 직업 훈련 단체를 세우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
동화주의자는 유대인의 지위에 대한 어떤 근본적인 재정의보다 선민이라는 유대교적 개념의 가장 생경한 세속화를 선호한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
자본주의자들은 유대인을 다른 모든 국민과 마찬가지로 한국민으로 바꾸려는 의지 덕택에 세속화에 의해 자동적으로 생산된 유대적 형태의 국수주의에 빠지는 것에서 그들을 구제했다.
시온주의가 현실에 대처하고자 지니는 행위의 의지는 두 번째 장점을 포함했다.
이 접근 방식은 동화주의적 국수주의 못지않게 종교적 태도를 세속화시킨 결과였다.
그러나 평범한 유대인이 아니라 오히려 엘리트가 이런 접근 방법을 주도했다.
유대 국가에서 표현된 훨씬 더 이데올로기적이고 이상적인 요소들은 시온주의의 조직화와 실천에 더 큰 영향을 미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현실을 직시하겠다는 헤르츨의 의지는 현실이 불변하고 변경 불가능다
즉 항상 동일한 구조라고 주장한 견해에 기반을 두었다
계급 구조의 차이 정당이나 운동 사이의 차이 다양한 국가나 역사의 다양한 시기 사이의 차이는 헤르츨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유대인의 정치 행위는 헤르츨의 경우 이런 현실에 불변하는 구조 내에서 하나의 장소, 즉 유대인이 증오나 최종적인 박해로부터 안전해지는 장소를 발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라 없는 민족은 민족 없는 나라로 도피해야 할 것이다.
헤르츨은 독일 자료에서 영감을 받은 민족주의 관점에서 생각했다. 민족 없는 나라가 있더라도 외교 정치 문제가 팔레스타인 자체에서 발생하지 않더라도 헤르츨식의 정치 철학은 여전히 새로운 유대 국가와 다른 국가들 사이의 관계에서 심각한 난관을 야기했을 것이다.
유대 국가의 건국이 반유대주의를 자동적으로 휩쓸어 갈 것이라는 헤르츨의 신념은 더욱 비현실적이지만 오히려 더 영향력이 있었다.
반유대주의는 헤르츨 시대에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무기로 변형됐고 새로운 인종주의 분파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이들의 충성심과 증오는 국경선에서 멈추지 않았다.
현실의 반유대주의자들은 부정직해졌고 국내에서 난관이 발생할 시에 희생양으로서 유대인의 유용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렇지 않고 그들이 정직했다면, 그들은 유대인이 우연히 사는 어느 곳에서나 그들을 절멸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헤르츨 정치 철학의 세 번째 명제는 유대 국가였다.
최근의 시온주의 정책은 단지 헤르츨의 국가 건설 요청을 이상향 같이 보이게 했다.
이 정책은 모든 사람이 국가를 인정할 수 있던 때에는 국가를 요청하지 않았으나 국민 주권의 전반적 개념이 조소의 대상이 됐을 때만 국가를 요청했다.
유대 국가를 건설하자는 헤르츨의 요청이 그의 시대에 정당화될 수 있었기에 이 요청을 진전시키는 그의 방식은 다른 곳에서도 그랬듯 비현실적 특징을 드러냈다
헤르츨은 유대인 해방에 대한 요구를 다른 민족들 요구와 연계시키지 않으려고 주의했다.
그의 정책은 자신의 영향력이나 다른 당사자의 상대적 영향력을 고려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미래의 파도’와 같이 유대인을 약속된 땅으로 데려다주는 반유대주의에 추진력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유대민족이 적들의 세계에 둘러싸여 있고 완전히 강요당한다는 헤르츨의 묘사는 우리 시대의 시온주의 운동을 억제했고 유대인 다중에 공통된 감정이 된다.
참다운 진실은 이러하다
유대인은 모든 곳에서 반유대주의와 투쟁해야 하거나 모든 곳에서 절멸되어야 한다.
시온주의자들이 유대주의를 협력자로 더 이상 간주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반유대주의에 대한 투쟁이 희망 없다는 것을 이전보다 더 많이 확신하는 것 같다
현재 반유대주의의 유용한 성격에 대한 최초의 신념을 상실한 헤르츨의 교의는 자멸충동만을 고취시킬 수 있다.
죽음에 익숙해 있다.
어떤 민족의 자연적 영웅주의는 그러한 충동을 증식시키기 위해 쉽게 이용될 수 있다.
헤르츨은 정치 행위를 수행하려는 유대인의 새로운 의지에 비현실적인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주입했다.
이런 요소는 유대인을 다시 한번 현실로부터 벗어나게 할 가능성이 높다
유대인 조국을 구원하자(773-792)
국제연합의 모든 회원국 가운데 소련과 위성 국가만이 여전히 분할과 유대국가의 즉각적 선포를 지지한다는 점을 명백하게 밝혔다.
유대인 협회와 아랍 고등위원회는 신탁 통치 안을 동시에 거부했다.
유대인은 국제연합이 최초의 결정을 준수할 도덕적 권리를 주장했다. 똑같이 자결권이라는 국제연맹 원칙을 준수할 도덕적 권리를 주장했다.
이 원칙에 따른 다수인 아랍인이 팔레스타인을 통치하고 유대인은 소수파의 권리를 인정받는다.
유대인 협회는 국제 연합의 어떤 결정에도 관계없이 1948년 5월 16일 유대 국가 선언서를 공표했다.
최근에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에서 아랍의 무력보다 상대적으로 우위를 입증하는 몇 차례 초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최소한 지역 평화 협정을 체결하는 대신 유대인 통치 지역에 남아 있는 것보다는 모든 도시와 읍에서 사람들을 소개시키기로 결정했다.
아랍 민족과 유대 민족의 객관적인 필수다
이익을 고려한다면, 두 민족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투쟁하겠다는 현재의 욕구는 완전한 무분별에 불과하다
유대 민족에 관한 한 비극적 사태의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강대국의 혼란스러운 정치적 결정을 동반한 유대인 여론의 결정적 변화이다.
아무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완강한 소수의 반시온주의 저항자들을 예외로 하면 이제 분할과 유대 국가의 건설을 사적 공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개별 유대인과 조직은 거의 없다.
유대인 좌파 지식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의지박약한 사람들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혐하했다.
유대인 조국 건설을 가망 없는 모험적 계획으로 평가했다.
시온주의가 미국 유대인 사이에서 당파적인 쟁점이었듯 아랍 문제와 국가 문제는 시온주의 운동 내에서 팔레스타인에서 논쟁적인 쟁점이었다.
여론은 수정주의자들의 국수주의 다수당의 중도 노선 민족주의 키부츠 운동, 특히 핫쇼메르 하차이르 대부분의 격렬한 반 민족주의적이고 반 국가주의적 감정 사이에 심각하게 분열되었다.
이제는 이런 의견의 차이는 별로 남아있지 않다.
대부분 중유럽 출신의 최근 이민자들로 구성된 소규모에 알리야 하다샤는 여전히 사려 깊은 절제와 영국에 대한 공감을 유지하며 벤구리온보다 바이츠만을 확실히 선호했다.
그러나 바이츠만과 회원들은 항상 분할을 지지했으나, 다른 모든 사람과 같이 빌트모어 강령을 지지한 이후 이런 대립은 인사를 둘러싼 차이 그 이상은 아니었다
아랍인의 요구와 유대인의 요구는 양립할 수 없으며 군사적 결정만이 쟁점을 해결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우리를 반대하며 대영제국은 반유대주의적이고 미국은 제국주의적이다.
요약하면 우리는 끝까지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를 방해하는 누구든 반역자로 생각하고 우리를 방해하기 위해 행해진 어떤 것도 뒤통수치기라고 여긴다
최근 유럽의 재앙 사이에 긴밀한 관계를 부정하고 이어서 생존자에 대해 터무니없게 부당하고 냉담하게 대하는 것은 경솔했다.
이로 인해 아주 무자비하게 생존자들은 난민 신세로 전락했다.
이제 유대인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투쟁하는 것을 믿으며 굴복하는 것을 감성적인 정치 방식으로 생각한다.
만장일치 여론은 서로 다른 사람을 완전히 제거하는 경향이 있다.
만장일치는 합의와 반대로 어느 명확한 대상에서 중단하지 않고 전염병과 같이 모든 관련된 쟁점으로 퍼진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만장일치는 친쏘적 공감의 방향으로 분위기와 일반적 태도의 변화가 시온주의 운동 내에서 반서방적이고 친소적 정향을 형성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은 더욱 중요하다
미국 내 팔레스타인 대표단 개개인의 빈번한 발언은 심지어 더 강력하게 이 방향을 가리킨다
러시아 정책에 대한 이러한 비현실주의적 이해와 이에 복종한 결과 이면에 깔린 사고방식은 시온주의의 오랜 전통을 지녔다
자신들을 아랍인으로부터 보호하며 아름다운 유대 국가를 선물할 것이라는 어린이다운 희망은 항상 현존했다.
영국은 백서 발행 때까지 이러 역할을 유대인의 상상 속에 채웠다
빌트모어 강령 채택 이후 유대인의 빅브라더라는 가상적 역할은 미국에게 떨어졌다
일반적인 이방적 적대감 헤르츨의 생각에 추방 유대인에게만 맞춰진 현상 그래서 팔레스타인 유대 민족의 정상화와 함께 사라지는 현상은 이제 시온주의자에 의해서 어떤 상황에서나 심지어 팔레스타인에서 반복되는 유대인 역사에 변경되지 않은 영구적 사실로 상정된다.
분명히 이런 태도는 명백한 인종주의적 국수주의이다.
유대인과 다른 민족을 대립 지키는 이런 방식은 다른 지배 인종 이론과 다르지 않다
이 순간 유대인 정치의 비극은 유대인 협회가 전적으로 유대인 정치를 결정하며 이 협회에 이렇다 할 반대가 팔레스타인이나 미국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시온주의자들은 벨푸어 선언 시기부터 시온주의 정치에서 충실한 반대파를 형성했다.
시온주의자들은 항상 과격보다 유대인의 요구가 전적으로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했다.
강대국에 의한 유대 국가의 지지와 함께 자신들이 현실 자체에 의해 공박당한다고 믿었다
비시온주의자들은 조국을 건설하려는 유대 민족의 소망보다 벨푸어 선언을 믿었다
그들은 근동에 사는 민족보다 오히려 미국 영국 정부를 존중했다.
그들은 빌트 모어 강령에 동의하기를 거부했다.
미국과 국제연합이 인정한 이후에 이 강령을 수용했다.
비시온주의자들은 강대국의 결정을 궁극적 현실로 잘못 판단했다.
분할의 가능한 결과와 유대 국가의 선언에 대해 동족 유대인뿐만 아니라 각국 정부에 경고할 용기를 갖지 못했다.
팔레스타인과 유대인 조국의 건설은 오늘날 전 세계 유대인의 대단한 희망과 자부심을 형성한다
집단 정착촌은 20세기에 추진한 모든 사회적 실업을 가운데 가장 유망하며 유대인 조국에서 가장 중요 부분을 형성한다.
여기에서 새로운 소유형태, 고질적 갈등을 해결하는 새로운 접근 방식은 완전히 자유롭게 어떤 정부로부터 방해받지 않은 채 조성되어 왔다.
키부츠 개척자들은 우리 시대의 훨씬 유해한 이데올로기에 방해받지 않은 채 새로운 관습과 가치를 확립하며 새로운 제도에 옮기고 수용하면서 자신들의 일을 추진할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의 이런 실험은 개별적 경우뿐만 아니라 모든 곳에 사는 대로 대규모 사람들에게도 수용 가능하고 적용 가능할 해결책에 대한 희망을 지탱했다.
이 선례의 가능성은 이슈브에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유럽 문명의 가장 발전된 방식을 실현한 민족 과거 식민지 억압과 낙후성의 희생자인 두 민족 사이에 긴밀한 협력 가능성이다
아랍인-유대인 협력이라는 이념은 어떤 규모로도 결코 실현되지 않다
유대인과 아랍인은 여러 상황으로 두 민족 사이에 좁혀질 수 없는 차이가 없다는 것을 세계에 불가피하게 보여줄 수 있었다.
유대인-아랍인의 우정을 실현할 많은 기회는 이미 상실했다.
이런 실패 가운데 어떤 것도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존재가 우정의 실현에 좌우된다는 기본 사실을 변경할 수 없다.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 전면전이 초래할 최종 결과에 의혹은 거의 없다.
유대인이 전쟁에 승리하더라도 결과는 팔레스타인에서 시온주의에 특이한 가능성과 성과의 파괴를 보여줄 것이다.
‘승리한’ 유대인은 전적으로 적대적인 아랍주민에 에워 쌓인 채 여전히 국경 내에서 고립되어 위협받고 다른 모든 이해관계와 활동을 침몰시킬 정도로 실제적인 자기 방어에 몰두한 채 살 것이다.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방위력은 어느 순간 수많은 유대인이 살았던 다른 국가들의 방위력과 충돌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 유대인은 궁극적으로 더 큰 규모의 세계 유대인과 분리될 것이다.
고립되어 전적으로 새로운 민족이 될 것이다.
하이파와 티베리아스에서 아랍 주민의 소개는 지금까지 아랍인 유대인 전쟁의 가장 불길한 사건이다.
다른 아랍 지도자들의 손에 놀아난 범죄가 하이파 자체에서 몇 개월 뒤 자행됐다.
어떤 군사적 대상도 목표로 하지 않는 이런 행위는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의 좋은 관계가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장소를 목표로 했다.
유대인 지도자들의 모든 협상 유혹을 차단하기 위해 아랍 민족의 분노를 촉발하고자 의도했다.
유대인 협회와 바아드 레우미의 현 집행부는 테러리스트들이 이슈브 전체를 위한 정치적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할 의향이 없거나 이런 결정을 막을 수 없었다
유대인 협회가 여전히 잠정적 평화를 위해 교섭할 위치에 있는가는 의심스럽다
평화의 시행은 주로 과격파 단체의 동의에 좌우될 것이기 때문이다.
국제 연합과 미국은 현재까지 유럽 민족과 아랍 민족의 선출된 대표단을 솔직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평화 협상이 좌절 이후 강대국에는 단지 두 가지 대안이 남은 것 같다
첫째, 나라를 떠나거나 아니면 유대인 또는 다른 절멸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대규모 국제적 갈등으로 비하될 수 있는 전쟁을 하는 것이다. 두 번째 대안은 분명히 제국주의적 대안이다.
온갖 경찰 테러의 장치를 보유한 전체주의 정부가 수행하지 않는다면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국제연합이 아랍인 유대인 협력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로서 전례 없는 조치를 취할 용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우리는 난관의 탈출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과 다른 난민들을 미국으로, 즉시 입국시키는 것과 더불어 유대인 난민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즉시 입국시키는 조치는 시간과 숫자의 측면에서 제한되더라도 합리적 해결에 필요한 요건이다.
다른 한편, 팔레스타인 아랍인은 유대인의 나라 발전에 명백한 몫을 보장받아야 한다.
이 나라는 어떤 상황에서도 여전히 계속 그들의 공동 조국이 될 것이다.
트루먼이 제안하고 마그네스 박사가 찬성한 신탁 통치가 최선의 잠정 해결책이라는 점은 의심할 수 없다.
신탁 통치는 종주권의 확립을 막는 이점을 지닌다
종주권의 유일한 주권은 자멸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제연합 신탁 통치는 미국과 대영제국이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것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경우에만 효과적으로 실행될 수 있었다. 아랍 고등위원회와 유대인 협회에 현재 회원들이 나라에 권위를 얻지 못했다면, 즉석에서 경찰력을 충원할 좋은 기회는 여전히 있다.
국제연합 회원국인 각 나라 고위 관리의 지휘 아래 유대인과 아랍인으로 구성된 소규모 지역기관은 미래 협력적 자치를 위한 중요한 수련장이 될 수 있었다.
현재 교착 상태의 결과가 어떠하든 다음 객관적 요인들은 선과 악 옳음과 구름의 자명한 기준이어야 한다.
1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현실 현실적 목표는 유대인 조국의 건설이다. 유대 국가의 유사 주권에 결코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2 팔레스타인 독립은 아랍인- 유대인 협력의 확고한 기반에서 성취될 수 있다.
3 모든 테러단체의 제거와 모든 테러 행위의 처벌은 시온주의자가 충분한 책임이 있다는 유일하게 정당을 증거일 것이다.
4 팔레스타인 이민은 유대인 정치에서 최소 기준이다.
5 보수적으로 많은 지역 자치정부, 혼합적인 유대인-아랍인 지역과 농촌 협의회는 결국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해방에 이를 수 있는 오직 현실적인 정치적 조치이다.
개성의 자산: ‘하임 바이츠만:정치가, 과학자, 유대인 공동체 설립자’ 서평(793-797)
바이츠만 자신이 1936년 팔레스타인 왕립 위원회에서 한 연설을 다시 수록한 것이다.
초기에서는 한 민족의 조국 상실로 정의되는 유대인 문제에 대한 간단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바이츠만은 유대인이 서양에서 겪는 불편함도 마찬가지로 세심하게 언급한다.
연설의 두 번째 부분은 역사에 대한 강력한 호소로 시작된다.
이 기간 동안 영국 “정치인들 성직자들은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복귀를 옹호했다.”
아랍 문제를 언급한 몇 단락은 중세 시대 유대인 아랍인 협력을 언급하면서 오늘날 유대인 아랍인 갈등에 대한 언급을 완전히 회피하려고 한다.
바이츠만의 정치적 확신을 형성한 두 가지 주요 요소를 포함한다
그 확신이란 영국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며 마찬가지로 모든 정치적 문제가 실천적 성과에 이차적일 뿐만 아니라 창설과 건설 과정 자체에서 실제로 해결된다는 강력한 신념이다.
그는 한때 정치적 금기에도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군대를 건설 결성하려고 생각하기도 했다.
바이츠만의 성공은 그의 오히려 평범한 정치적 확신보다 매우 진귀한 그의 사회적 재능에 기반을 둔다
시온에만 몰두한 삶: ‘시행착오: 하임 바이츠만 자서전’ 서평(799-802)
바이츠만이 준수한 원칙은 대영제국과의 협력과 더디면서도 냉철한 방식, 즉 정치 행위에 대한 실천적 개척 작업의 우위성(그의 국내정책의 기초)이다.
대영제국이 위임 통치의 권한을 위임받았을 때 시온주의 내 시종일관 친영적인 분파는 사실 그 중요성을 상실했다.
바이츠만 박사의 팔레스타인 소재 정당인 진보적 시온주의당은 거의 전적으로 중유럽 이민자들로 구성됐다.
이런 사실에도 불가피한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결코 생각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선택하는 현실주의의 특징이다. 정치적 논쟁을 위해 사실을 재조정하는 성향은 벨푸어 선언에 대한 논의에도 가시적으로 나타난다
바이츠만은 오랫동안 지녔던 영국적 정향을 정당화하기 위해 “영국은 팔레스타인에서 어떤 임무도 갖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세력권 내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사태에 대한 영국의 제국적 구도에서 유대인 팔레스타인의 중요성에 대한 주장과 더 협상은 시작됐다.
식민지 행정 방국은 위임 통치의 시작부터 친아랍적이고 반유대적이라고 묘사된다.
그의 경우 과학은 진리의 영구적 탐색이 아니라 ‘무엇을 실천적이게 하려는’ 촉구, 명확한 임무를 위한 도구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팔레스타인 건설이며 또한 정치적 성공에 많이 도움이 됐다.
마지막으로, 타의 추종을 부러워할 정도로 국제 세계에 진입하는 입장권을 얻는 데 도움이 된 재정적 독립의 가능성이다.
The End. 2023.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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