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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아 로서 유대인(2023.2.1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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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문제와 정치적 사유(한나 아렌트)

 

파리아 로서 유대인: 숨겨진 전통 (601-658)

 

2023. 212

 

 

파리아로서 유대인 숨겨진 전통

 

유대민족이 유럽 문학 예술 분야에서 자신의 입장을 주장할 때 유대민족은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지만 저항의 속삭임도 드러내지 않은 채 자신의 위대한 작가와 예술가들이 받을 영예를 태연하게 다른 민족에게 돌리고 답례로 악명 높은 사기꾼과 협작군의 창시자로 인정받는 수상쩍은 특권을 받았다.

 

유대인 문학사는 이런 목록의 평준화된 허풍으로 있게 이디시어나 히브리어로 작품을 쓰지 않은 어느 누구도 구하지 못했다.

유대민족의 정신적 존엄성에 실제로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은 소홀히 취급받고 피상적으로만 인정받았다.

 

유대민족의 위대한 인물은 부득이 동화주의적 선전가들의 미숙한 처분에 맡겨졌다

 

해방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해방의 즐거운 소식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유대인으로 인간이려고 시도한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치적 자유를 향유하지 못하거나 국민의 삶에 완전히 참여하지 못하지만 그들은 개개인으로서 자기 자신의 해방 마음과 정신의 해방을 추구했다.

해방이 보장한 자유가 얼마나 모호하고 동화가 드러내는 평등의 약속이 얼마나 기만적인가를 실제로 경험한 사람들은 유럽에서 유대인의 지휘가 피억압 민족의 지위일 뿐만 아니라 막스 베버가 말하는 파리아 민족의 지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가장 명백하게 인식한다.

 

유대인 시인 작가 예술가들이 개인적인 경험에서 인간 유형으로서 파리아 개념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은 놀랍지 않다

 

우리는 이 개념이 상정한 다양한 형태 가운데 네 가지를 선택하고자 한다.

첫 번째 하인리히 하이네의 쉴레밀과 꿈의 주인이다.

두 번째 베르나르 라자르의 의식적인 파리아이고

세 번째 혐의자에 대한 기이한 묘사이다.

네 번째 선의를 지닌 사람의 운명에 대한 프란치 카프카의 시적 상상이다.

 

1. 하인리히 하인의 술레밀과 꿈의 주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시 사바스 공주에서 우리를 위해 자신이 태어나고 운율에 영감을 준 민족의 배경을 묘사한다.

그는 자기 민족을 마법으로 인해 개로 변신한 왕자에 비유한다.

개 같은 존재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 왕자처럼 전통적인 결혼 축가 내 친구에게 오다로 사바스 신부를 환영하고 맞이한다.

메주 치르는 자기 민족의 변신에서 헤어나서 하이네에게 유대인 삶의 적 유일한 적극적 표지인 안식일 같은 존재를 지속적으로 영위하려고 한다.

이 시인들은 술래밀 밴 수리삿대 씨의 후예라고 한다.

하이네는 수리삿대를 슐레밀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그들이 슐레밀이었다는 점이다.

 

순진무구는 슐레밀의 특징이다.

그들은 영웅도 아니고 신념이 굳은 사람도 아니기에 고대 그리스 신의 특별한 후견 속에서 보호를 받는데 만족한다.

유대민족에 대한 하인의 묘사 유대 민족의 시인왕인 자신에 대한 묘사는 물론 상류 사회의 특권 있는 부유한 유대인이 향유하는 개념과 성격이 판이하다

공식적인 사회에서 배제 되고 그 안에 포용되려는 욕구를 갖지 않는 파리아이다.

또한 보통 사람들의 사회적 외면을 함께하면서 환희와 비애 기쁨과 고난을 함께한다.

파리아는 사실 인간 세상과 이 방식에서 대지의 공개적이고 무제한적인 아낌없는 혜택으로 관심을 돌린다

하이네는 바로 이것에 관심을 가졌다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어디 어린이나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단지 소박한 삶의 환희를 발견한다. 삶의 환희는 파리아와 민족의 기본적인 유사성에서 비롯되었기에 문학 비평이나 반유대주의가 결코 폐지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슐레밀로 보이는 사람은 더 이상 버림받은 파리아가 아니라 질서 잡힌 사회 계층 속에서 살며 자연의 넉넉한 선물을 버리고 사회적 특권과 편견의 우상을 취했던 사람들이다.

벼락 출세자들 역시 권력과 높은 지위를 향유하는 슐레밀이다.

 

 

하이네는 인간의 모든 행위와 이런 거리 두기를 자유의 본질로 생각한다.

하이네의 경우 자유는 정당하거나 부당한 예속에서의 해방과 거의 관계가 없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고 자신을 예소하고 매도함으로써만 자신의 자유를 상실한다.

하이네는 자신의 정치 시와 산문 저작에서 모두 이런 인형과 일치해 폭군뿐만 아니라 이들을 불평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슐레밀으로든 꿈의 주인으로든 현실 세계 밖에 서 있고 현실 세계를 외부에서 공격한다.

하이네가 이러한 성향에 굴복하는 것을 구해내고 그가 파리아의 정치적 비존재와 비현실을 예술 세계의 효과적 기반으로 변화시킬 수 있게 해 준 유일한 것은 그의 창조성이다.

그는 삶을 이념의 프리즘이 아니라 장거리 망원경으로 보았다.

그는 과정의 전체 역사에서 실제로 행복한 동화에 특출나게 성공한 모범적 사람이다.

랍비 파이부시에서 포이보스 아폴로를 보고 독일어에 이디시어 표현을 대담하게 도입함으로써 문화의 진정한 혼합을 이루었다

하이네는 극히 일부 사람들만 이해하는 그런 장치를 모두 생략하고 일상적 삶에 소박한 유대교 보통 유대인의 마음속에 실제로 있고 언급되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독일어라는 매개를 통해 일반 유럽 문화에서 유대교의 한 위치를 부여했다.

실제로 이런 편안한 유대적인 관련 내용은 하이네의 작품을 근본적으로 대중적이고 인간적이게 하는 데 기여했다.

하이네는 세계 시민성이란 터무니없는 생각에 기만당하지 않았다.

하이네 시의 활기 있는 영향력을 두려워했기에 특색을 지니지 못한 시인이라는 비방을 날조했다.

이런 비방을 전파하고 이에 따라 하이네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많은 유대인 작가를 비방전에 끌어들였다.

그는 유대 민족이 해방을 성취함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성취했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하이네는 유럽 전역에서 해방의 특징이 됐던 조건을 솔직히 무시했다.

하이네는 이런 입장을 유지했기에 당대 사람들 소수만이 할 수 있었던 것도 할 수 있었다.

 

2. 베르나르 라자르 의식적인 파리아

 

파리아와 시인이 쉴레밀의 모습에서 근본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 이런 비유를 통해 유럽 문화의 세계에서 유대인의 위치를 설명했음이 하이네의 성과였다면 베르나르 라자르의 장점은 동일한 기본적 사실을 정치적 함의의 관점으로 해석한 것이다.

 

해방되지 못한 동포들과는 달리 자기 지위에 대한 의식을 깨달아야 하며 이것을 의식하고 이에 대한 저항자가 되어야 한다.

 

즉 그는 비억압 민족의 옹호자가 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한 그의 투쟁은 유럽의 탄압받는 사람들이 모두 민족해방과 사회 해방을 성취하기 위해 수행해야 하는 중요 요소이다.

라자르는 공개적으로 유대인 문제를 정치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이런 영웅적 노력 속에서 하이네가 간과했고 무시할 수 있었던 여러 가지 특이한 유대인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라자르는 우매한 유대인과 표리부동한 이방인 사이에 이런 관계가 지니는 정치적 함의를 검토하기 위해 애썼다

 

그는 동화에 대한 거짓된 교리를 해독의 근원으로 인정했다.

 

그는 유대인 벼락 출세자에 대항해 투쟁하도록 유대인 파리아를 선동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았다.

 

라자르는 이런 말에서 역사가 요스트가 아주 적절히 규정한 이중의 노예 상태라는 유대인 삶의 현상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라자르는 파리아에게 똑같이 재난인 이 두 요소 사이의 연계성을 자각한 첫 번째 유대인이다.

적은 부유한 유대인에게 소문난 유대인 빈곤층 뒤에서 보호막을 찾게 하는 기재를 만들었다

부유한 유대인은 자신들의 지위가 위태로워질 때마다 유대인 빈곤층을 들먹었다.

부유한 유대인은 상황이 자기들에게 유리해지면 언제나 등을 돌릴 수 있었다.

억압에 저항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의무이기에 유대인이 파리아의 대변자로서 공개적으로 출연해야 한다는 것은 라자르의 이념이다.

 

라자르는 파리아가 거만한 무관심의 태도나 인간 본성 자체에 대한 고귀하고 고상한 인식에서 해방감을 추구하지 않기를 원했다.

 

라자르는 전형적으로 자기 자신의 사회에서가 아니라 어느 다른 민족의 사회에서 혁명과 역할을 선언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귀족이 내 던졌을 아주 하찮은 것에 속고 있을 고대 로마 평민과 같이 부유한 사람의 식탁에 있는 빵 부스러기로 사는 구걸꾼 역할을 선호했다.

어떤 경우에나 파리아는 벼락 출세자를 위해 목숨을 걸었고 사회에서 이들의 입장을 보호하고 그 대가로 벼락 출세자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라자르는 파리아가 슐레밀이 되는 것을 중단시키고자 했다.

 

파리아가 구걸꾼의 역할을 일단 맡으며 그는 자동적으로 자기 자신을 배제시킨 사회 질서를 떠받치는 지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된다.

파리아가 자신의 지혜자들 없이 살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들은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파리아가 되지 않기 위해 두려워하는 벼락 출세자 벼락 출세자가 되기를 열망하는 파리아는 한꺼풀 벗기면 동료이며 자신들의 유사한 측면을 적절히 의식한다.

 

 

 

3. 찰리 채플린: 혐의자

 

 

자선 활동을 국민적 통합의 기초로 구성한 낡은 체계 드러나는 정치적 의미와 지속성의 결핍 때문에 유대 민족은 우리 시대의 정치적 삶에 적극 참여하지 못했지만, 극적인 형태로 변형된 이런 특성은 현대 예술의 가장 특이한 산물들 가운데 하나를 촉진시켰다

 

채플린은 바로 자신의 영화에서 법과 질서의 수호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했던 작은 사람의 만성적인 역경을 연기했다.

 

사회의 눈으로 볼 때 채플린이 연기한 인물 유형은 항상 근본적으로 혐의자다

이 세계와 채플린 사이의 갈등이 각양각생의 각색의 형태를 뛸 수 있지만 그는 항상 어디에서나 혐의를 받는다.

 

그래서 오름이나 그름을 논의하는 것은 좋지 않다

채플린이 역을 맡은 파리아는 경계 밖에 서 있으며 세계로부터 의혹을 받아서 보통 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보통 사람은 사회가 자신들에게 했던 것의 이미지를 채플린에게서 확인했다.

 

채플린의 혐의자는 천진함이라는 공동 요소에 따라 슐레밀과 연계된다.

채플린의 영웅은 미덕의 전형이 아니라 수없이 작은 실수를 하며 법칙과 쉴새 없이 충돌하는 작은 사람이다.

 

제기된 유일한 문제는 처벌이 범죄와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 어쨌든 혐의자인 사람의 경우 그가 범한 범행과 그가 치르는 대가 사이에 관계가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채플린이 자신의 영화에서 아주 일관되게 연기한 혐의자의 무고는 오히려 일반 개념 법칙과 개별적 비행의 위험스러운 양립 불가능성에 대한 표현이다.

이러한 양립 불가능성은 자체 비극적이더라도 그것이 잠재되어 있는 혐의자의 경우에 희극적인 측면을 드러낸다

 

 

그는 혐의자이기에 자신이 행하지 않은 것에 대부분 정면으로 맞서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러나 그가 동시에 경계를 넘어서고 사회의 속박으로 방해를 받지 않기에 그는 상당히 많은 것을 교묘히 모면할 수 있다.

두려움과 무례함의 태도는 이러한 양면적 상황에서 발생한다.

 

기본적으로 채플린의 혐의자가 드러내는 무례함은 하이네의 슐레밀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아주 매력적이다.

 

근심 걱정으로 초췌한 무례함이다. 그러나 이런 무례함은 .. 시인은 세계에서 질서나 정의를 스스로 보지 못하기에 세계의 계급 질서를 인식하지 못하는 불쌍한 작은 유대인의 뻔뻔함, 즉 유대인 세대들에게 아주 친숙한 형태이다.

모든 사람 가운데 작은 사람은 세속적인 재화에서는 빈약하지만 인간 경험에서는 풍부한 이 작은 유대인에게서 자기 자신의 상을 가장 명료하게 확인했다.

그는 오랫동안 일종의 슐레밀 역할을 하는 자신을 기분 좋게 비웃고 자신의 부흥과 자신의 희극적이고 교활한 도피 방식을 비웃는다

그때 변화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웃음에서 해방감 찾기를 중단했다.

 

작은 사람은 큰 사람이 되기로 결정했다.

 

오늘날 사람은 채플린이 아니라 초인이다.

희극 배우가 영화 위대한 독재자에서 대역을 겸함으로써 작은 사람과 큰사람 사이에 현저한 차이를 역설하고 초인적 이상의 거의 야수적 성격을 보이는 이중의 역할을 했다.

 

4. 프란치 카프카: 선 의지를 지닌 사람

 

하이네의 쉴레밀과 라자르의 의식적인 파리아는 모두 근본적으로 유대인으로 생각됐다.

 

채플린의 혐의자도 분명 유대인 특성을 무심코 드러낸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아주 최근에 카프카의 저작에 나타나는 파리아의 유형화는 앞의 두 경우와 아주 다르다

 

파리아는 두 경우, 즉 한 번은 작가의 최초 소설 어느 투쟁의 기록에 다시 최근의 소설들 가운데 하나인 성에 등장한다.

어느 투쟁의 기록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상호 관계 문제와 연관되며 참되고 심지어 다정한 관계의 결과가 사회 영역 내에서 언제나 불리하다는 명제를 제기한다.

사회는 파리아가 실제로 무명인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비현실적으로 무명인이라는 것을 그에게 믿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19세기에 파리아는 현실 인식의 근본적 위기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탈출구를 찾았다.

첫 번째 파리아 사회 같은 상황에 있으며 같은 견해를 가진 민족의 사회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방식을 택하는 것은 현실과 완전히 분리, 즉 실제 세계로부터 자유분방한 단절로 끝나는 것이다.

두 번째 아름다운 세계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파리아는 자신이 공격하지 않은 채 거주할 수 있는 세계를 쫓아 자연과 예술로 퇴각했다.

아름다움에서 발전하고 전통으로 신성시되는 옛 도시들은 인상적인 건물과 널찍한 광장을 파리아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한 환경에서 멸시 받은 파리아 유대인은 현대사회에서 무명인으로 무시당한 채 적어도 과거의 영광을 공유할 수 있었다.

파리아 유대인은 존경받고 자격을 제대로 갖춘 사회 구성원보다 과거의 영광에 대해서 더 감상적인 안목을 종종 보였다.

카프카는 어느 투쟁의 기록에서 바로 이런 도피 방법, 즉 자연과 예술로의 도피에 가시 돋힌 말을 퍼붓는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옳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예술과 자연의 미를 도피 기재로 사용할 때 그것은 한낮 사회의 산물이 되었다.

카프카의 경우 위력이 사유에 의해 손상되지 않고 인정되는 사물들만이 실제적이다.

 

슈레밀 시인의 자유나 혐의자의 순수성이나 자연과 예술로의 도피가 아니라 사회는 새로운 무기다 카프카의 견해에 따르면 사유는 파리아가 사회에 대한 자신의 치열한 투쟁에서 발휘할 수 있는 출생 때 부여받은 유일한 능력이다.

 

자기 보존의 도구로서 이런 추후 사유 능력의 사용은 실제로 카프카의 파리아 개념을 특징 짓는다

 

꿈의 주인의 역설적인 겸성과 우월성이나 채플린의 영혼히 시달리는 작은 사람의 순수한 간교함을 사회와 대면한다.

카프카가 유대인 문제를 논의한 가족 성은 영웅이 단연 유대인인 유일한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도 그를 그렇게 특징 짓는 것은 어느 전형적인 유대인 특성이 아니라 그가 유대인의 삶에 특이한 상황이나 난관에 관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K케이는 자신이 보통 사람이나 이들의 지배자들에 속하지 않기에 결코 보조를 맞출 수 없는 이방인이다.

그는 끊임없이 잉여적이고 반갑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방해가 된다. K는 비난을 받으며 이방인으로서 다른 사람의 선심에 의존해야 하고 기이한 은총 행위 때문에만 받아들여진다는 비난을 받는다.

즉 통치자들은 K케이가 의도한 완전한 동화를 결코 한 번도 고려하지 않음을 알아볼 수 있다.

명목상으로는 국민에 속하지만 실제로는 통치자에 속할지 아니면 전적으로 영원히 그들의 보호를 포기하고 대중에게서 자기 행운을 추구할지의 문제에 직면한다.

공직자 유대인은 항상 통치자에게 매달리는 것을 선호했으며 그 대표자들은 항상 명목상의 마을 사람들일 뿐이다.

그는 실제로 인간으로서 권리, 즉 단지 가정 직업 가족 시민권을 원하는 보통의 보잘것 없는 유대인을 대변한다.

유대인이 자기 이방인 이유꽈 분간하기 어렵게 하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자신이 실제로 전적으로 혼자인 것 같이 처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과 같은 모든 사랑과 동시에 결별해야 한다.

카프카 소설의 영웅은 사실 세계 전체가 유대인이 하기 원하는 것을 한다.

이를 완전히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물론 한 인간이 독특한 유대인 특성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카프카에 대본에서 이런 포기는 단지 유대인 문제가 아니라 인류 문제 전체에 있어서 함의를 지닌다

 

K케이는 분간하기 어렵게 하려는 노력으로 보편적인 것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

그의 욕구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연권과 같은 그런 것에만 관련된다.

마을 사람 원래 그들이 보였던 경멸투의 무관심은 정중한 적대감으로 바뀐다

그때부터 그들의 한가지 욕구는 성에 의존하려는 K케이를 가능한 한 추방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를 점점 더 경악하게 할 정도로 다음과 같은 점을 보이는 데 성공했을 뿐이다.

 

즉 인간적 본능 인권 평범하고 정상적 삶은 이방인이나 마을 사람에게도 거의 실재하지 않는다.

 

 

마을이 성의 통제 아래 있는 한 마을 주민은 각기 자기 운명의 수동적 희생자일 뿐이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결정하고 싶은 선 의지를 지닌 어떤 사람이 있을 곳은 어디에도 없다.

K는 파리아의 천진함을 상실한 때에도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다.

따라서 K케이는 마을에 남아 온갖 어려움에도 현존하는 조건에서 자신을 주장하려고 노력한다.

늙은 유대인의 이상은 단지 한순간만 마음을 흔들며 그는 파리아의 고귀한 자유를 꿈꾼다

K케이는 옳고 그름의 구별해서 탈피할 수 있으나 탈피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정상적 인권을 실세들이 부유한 특권으로 간주하기를 거부하기에 모든 것은 표면상으로는 부질없다.

투쟁 전체는 미결로 남으며 K케이는 완전히 제명에 죽는다

사회가 사람들에게 신세를지고 있는 몇 가지 기본적인 것을 획득하고자 그가 보였던 바로 투쟁은 마을 사람들 적어도 그들 가운데 일부에 눈을 뜨게 했다.

그의 이야기 그의 행태는 그들에게 인권이 얻고자 투쟁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성의 지배가 신법이 아니며 결과적으로 공격받을 수 있다는 점을 그들에게 가르쳤다

 

인류의 기본적이고 소박한 법칙과 괴리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나 박해로 그렇게 되었더라도 진공 속에 살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진정한 인간의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사람의 삶은 예외적이지 않고 정상적이어야 한다.

카프카는 이런 진리에 대한 자각으로 시온주의자가 되었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카프카가 이방인과 마을 생활에 확립된 양식과의 관계를 언급하는 과정에서 묘사했던 것과 같은 상황에 있었던 것이다.

 

5. 결론

 

서유럽 유대인이 사회적 의미에서 파리아가 되는 동안 그들은 벼락 출세자가 됨으로써 상당한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파리아의 삶은 정치적 의미를 박탈당했더라도 결코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파리아 유대인과 벼락 출세자 유대인은 같은 배를 타고 있으며 똑같이 성난 바다에서 필사적으로 노를 적고 있다.

 

두 부류의 유대인은 같은 표지로 낙인 찍혀 있다.

두 부류의 유대인은 똑같이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마침내 개인의 무의미한 자유가 단지 자기 민족 전체의 무의미한 고통을 위한 길을 놓을 수 있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사회적 고립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여러분은 슐레밀이든 꿈의 주인이든 사회와 거리를 둘 수 없다.

 

카프카가 말한 제 삼의 길도 있다.

그렇지만 카프카 본인이 지적했듯이 이것 역시 현대 사회의 틀 내에서는 불가능하다

개인이 출세하는 것은 허용되지만 그는 더 이상 인간적 삶의 기본 요구를 실현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의지를 가진 사람은 성에 있는 유대인 이방인과 같이 오늘날 고립 상태로 내몰린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과 협력해 살고 활동할 수 있을 때만 민족은 이 세상에 공동으로 유지되고 공동으로 통제된 인류를 건설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새로운 문화 분위기의 형성

 

우리가 오늘날 이해하는 문화는 종교의 세속화와 전통적 가치 해체에서 등장했다.

어쨌든 종교적 개념과 성찰의 결과가 아니라 신념과 무관하게 새로운 의미와 타당성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세속화는 종교적 개념과 성찰의 결과를 변화시켰다 문화는 의미상 세속적이다.

문화는 어떤 종교도 결코 행할 수 없는 일종의 편견 없음을 요구한다.

문화는 하위 또는 저속한 수준에서 나타나지만 관용에 대한 종교의 멸시와 진리를 소유한다는 주장을 공유하는 이데올로기와 세계관을 통해 완전히 왜곡될 수 있다.

 

우연히 유대민족은 르네상스와 함께 서유럽에서 시작되어 근대 문화가 탄생한 완만한 세상이다.

세속화 과정을 공유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은 계몽운동과 문화에 직면하고 이에 이끌렸을 때 자신의 세속적인 학습이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시기에 벗어났다

 

대다수 유대인이 자신들의 유대인 기원을 여전히 의식하더라도 문화를 원했던 유대인은 유대교를 지체 없이 버렸다.

 

유대인 지식인들이 유대적인 모든 것에서 갑작스럽게 근본적으로 이탈함에 따라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 문화적 분위기의 성장은 방해를 받았지만 이런 이탈은 개인적 창조성의 발전에 매우 유리했다.

 

유대인은 엄격히 개개인으로서 전통에서 자신들의 해방을 선도했다. 문화 정책과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문화적 분위기의 형성, 즉 엘리어트 코엔의 말에 따르면 유대인 문화가 아니라 유대인을 위한 문화를 목표로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과 똑같이 우리 자신의 공동체 내에서 기질을 유지할 수 있을지 여부는 이러 분위기의 존재 여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이것 유대인의 기질의 유지 여부가 나에게는 문제인 것 같다

 

유대인 문화의 결핍과 세속적인 유대인 삶에 나타나는 민속의 유행 때문에 유대인 공동체를 단순히 저버리지 않았던 유대인 기질은 이런 초월성 경계를 넘어서는 보편적 가치와 연계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창조적 재능이 최근 그들 사이에서 특별히 빈번히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세속화의 기본 노력을 하는 그들은 오래된 전통 새로운 충동과 자각의 새로운 융합을 위한 첫 번째 모델을 제공한다.

이것이 없을 경우 특별히 유대적인 문화적 분위기는 거의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런 재능을 필요로 한다.

 

이것들은 비록 작기는 하지만 우리가 얻은 문화의 유일한 기초 우리가 점진적으로 양방향, 즉 종교적 전통의 세속화와 세속적 민속 생활을 영위하는 위대한 예술가들 대부분 유대인의 민속으로부터 구원하고 확장시켜야 할 기초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탈레스타인 정착촌 이슈브는 완전히 세속적 운동으로 촉진된 첫 번째 유대인 성과이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중심적이고 가장 강력한 집단은 더 이상 국민국가의 조건 아래 존재하지 않고 설사 국민국가에 필요한 주민의 동질성과 인종적 기초를 요구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헌법을 무효화했을 나라에서 산다

 

유대인 문화가 발전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는 이제부터 유대 민족의 통제를 벗어나는 환경에 좌우되지 않고 그들의 의지에 좌우될 것이다.

 

유대 신비주의의 주요 추세 개정판 서평 지난 세계 유대인 역사가들은 디아스포라 역사에 대한 자신의 주요 명제를 시사하지 않은 유대인의 과거 모든 시대 풍조를 무시하곤 했다.

이 명제에 따르면 유대 민족은 자신의 정치사를 갖지 않았으며 언제나 적대적이고 때로는 야만적인 환경에 무구한 희생자였다.

 

다른 모든 민족과 완전히 대조되듯 유대인은 역사의 형성자가 아니라 일종의 자비라는 영구적 정체성을 유지한 역사의 순환자였다.

낭만주의의 비관론이 입법가로서 인간의 정치적 능력에 절망하고 다만 법의 궁극적 정당화는 더 이상 신이 아니라 역사와 전통에 있다에 만 복종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체념했기에 유대인의 니힐리즘은 숨겨진 신의 율법을 발견하고 이에 따라 행동하려는 인간 능력에 대한 좌절에서 생겨났다

 

카발라는 초기 영지주의적 성찰에서 온갖 형태의 마법적 풍습을 거쳐 조하르에 대한 위대하고 순수한 철학적 성찰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교의를 포괄하는 명칭이다.

이 명칭은 율법주의의 위력과 최종적 승리를 표현한다.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숨은 하느님에 관한 새로운 교의에 기반을 두었다

 

계시의 하느님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비인격적인 숨은 하느님은 무한한 것 선택된 소수에게만 자신을 드러내지만 성서의 개시에서 노출되기보다 오히려 은폐된 인격 대신 위력이다.

숨겨진 것과 연관되는 이 교인은 모두 내재적인 역설 효과를 미치는 것과 같다

 

교의 추종자들은 항상 가장 엄격한 비밀 배제성 선택된 소수에게만 노출될 수 있었던 성찰의 비교적 성격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도 신비 사상은 소수만의 관심을 끌지 않고 오히려 엄청나게 대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신비 사상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해석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 학식 있는 랍비와 철학자의 가르침보다 더 많이 대중의 마음을 끌었다 이것은 특별히 유대인 역사의 신비적 추세에도 적용된다.

 

유대교와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이 유대교에 창조 하느님을 비밀스러운 힘으로 바꾸는 성찰은 본질적으로 유물론적 개념의 첫 형태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더 이상 독립적인 실체, 즉 목적 자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카발라 주의자들은 신비주의적 자서전의 지지자는 아니다.

그들은 객관적 기술을 대단히 기뻐하며 자신의 개성이 생생한 묘사에 끼어들도록 방치하는 것을 지극히 싫어한다.

 

창조의 부정과 방출 이론은 인간이 세계의 드라마에 참여했다는 결과적인 생각과 더불어 유대인 신비주의와 영지주의적 신비주의에 가장 두드러진 공통 측면이다.

 

신비주의적 경험의 실험적 성격은 이 경험의 인기에 상당히 기여했다.

 

이 경험은 수 세기 동안 현실 세계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 것 같지만 랍비 유대교는 이를 무시했다.

유대교 신비주의의 주제는 결코 인간이 아니라 바로 성자이다.

신비주의 경험은 오직 반복될 경우에만, 즉 실험적으로 성격을 지닐 경우에만 가치를 가졌다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이 신비주의 경험들에 이런 내재적 성격에도 자서전에서 이들을 연계시켰다는 사실은 그들이 신비주의 자라는데 기반을 두지 않고 인간 본성에 대한 일반적 철학적 관심에 기반을 두는 것 같다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은 비록 실제의 탐구에서 유대인 신비주의자들과 관심을 공유하더라도 1차적으로 행위 자체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의 신념에 따르면 최고의 사건 인간과 세계의 구원은 이미 일어났기 때문이다.

 

유대교 신비주의자들과 기독교 신비주의자들 유대인은 인류의 운명에 적극 참여하는 도구로 발전시키지만 기독교인들은 목적 자체로 발전시키기 위해 동일한 경험을 겪고 오히려 동일한 실험을 수행하는 것 같이 생각된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항상 개개인에게 문제였고 자체의 어떤 연속적 전통을 갖지 않지만 유대교 신비주의의 가장 중요한 측면들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전통 유대교의 공식적 전통과 병행하는 순수한 전통을 확립했다는 점이었다.

 

유대교 신비주의는 샤베타이 운동이 발생할 때까지 전통파에 대한 공격을 자제했고 율법을 준수했다.

그러나 신비 사상은 신중한 자제와 온갖 갈등의 세심한 회피에도 항상 추정자들의 행동을 대비했고 이로 인해 율법의 단순한 해석과 메시아 도래에 대한 단순한 희망을 거부했다.

 

이 유수의 신화에서 괄목할 측면은 이것이 대립되는 두 가지 목적에 기여했다.

이 신화는 추방을 고통 대신 행위로 신비주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민족을 선동해 메시아 운동의 도래를 재촉하고 샤베타의 운동에서 유수 신화의 발생과 성공에 기여한 모든 세력을 격정적으로 돌아내는 원인이 될 수 있었다.

 

이렇듯 동화되고 심지어 탈유대화한 유대인에 대한 자기 해석에서 신비주의 사상의 존속은 신비주의에 다른 후예인 하시디즘이 탈 유대화된 유대인에 미친 놀랄 만한 영향력에서 볼 수 있듯이 단순한 사건은 아니었다

 

유대교 신비주의에 이 마지막 국면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젊은 세대를 통해 확산된다.

 

메시아적 요소의 중립화, 즉 정치적 태도의 중립화 노골적인 도덕 폐기론 성향 유수 신화의 보전 이 세 가지 하시디즘의 주요 요소는 동화된 유대인의 필요에 아주 이상하게 조응했다.

개혁파 유대교와 하시디즘은 모두 오로지 유대인의 생존에 관심을 가지고 시온의 복구에 대한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유수를 민족의 궁극적이고 변경할 수 없는 운명으로 수용했다.

 

유대교 신비주의는 초기부터 행위와 시련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완전히 퇴진하기 전에 샤베타이 운동에서 최대의 발전을 이루었다

 

신비주의는 처음으로 인간의 영혼의 깊은 영향뿐만 아니라 인간을 통해 행위의 엄청난 위력도 보여주었다

 

유대교 신비주의는 과거의 모든 신비주의 추세 가운데 현실과 행위에 대한 배타적 관심에서 특이한 것 같다

 

이해하기 가장 고무적인 측면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신비주의가 패배에도 존속할 수 있다는 사실 유수 신화에서 표현되는 이론이 대중적 행위의 필요와 대중적 체념의 필요에도 똑같이 일시했다는 사실이다.

샤베타의 체비 운동의 파국은 유대인 역사에 한 권을 마무리한 이후에 새로운 시대에 요람이 된다.

 

 

The End. 2023.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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