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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안’으로부터의 토테미즘
p130 : 베르그송은 토테미즘에서 족외혼이라는 수단을 본다. 족외혼은 가까운 친척들끼리 교합하면 해롭다는 것을 예감하는 직감적인 본능에 따른 결과다. 이런 본능이 있는 거라면 굳이 제도라는 길에 도움을 청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잉여다. 게다가 본래의 동물학에서 영감을 얻어 채탁한 사회적 모델은 재밌게도 동물학과 모순된다. 그도 그럴 것이 동물은 족외혼이 아니라 동족혹, 즉 근친교배를 한다. 동물은 같은 종 내에서 서로 교배하고 번식한다. 각 씨족을 ‘전문화’하면서, 각 씨족을 ‘특별하게’ 차이 나게 하면서 결국 찾고자 하는 결과의 반대에 이르게 된 것이다(만일 토테미즘이 생물적 경향 및 자연적 감정에 기초해 있다면 말이다). 각 씨족은 생물 종처럼 내혼을 해야 할 것이며, 다른 씨족들끼리는 서로 이질적이어야 할 것이다.
“두 씨족의 구성원들이 두 종류의 동물을 구성한 것은 그 동물성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강조하는 이원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Bergson, p195)”
(131) 이 철학자의 혜안은 인류학을 직업으로 하는 자들이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인류학 문제에 대한 해답을 계시했다. 그리고 주목할 만한 것은 동시대인이었던 베르그송과 뒤르켐 사이에 정말로 엇갈리는 주장이 나왔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유동적인 철학은 토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대립’과 ‘개념’ 영역에서 찾는다. 뒤르켐은 범주와 이율배반의 문제로 거슬러 올라가 결국 그 해결책을 ‘비구분’, ‘불명료’에서 찾았다. 사실 토테미즘에 대한 뒤르켐의 이론은 시간은 두고 세 단계로 발전했다. 베르그송은 그의 비평에서 처음 두 가지만 주목한다. 씨족에는 우선 ‘직감적으로’ 하나의 상징이 주어진다. 그것은 요약된 그림에 불과할 수도 있고, 몇 가지 특징으로 축소될 수 있다. 후에 이런 문양에서 동물 형체를 ‘식별한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여 형체를 변경한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형상화된 것이 씨족과 그 상징에 대한 감정과 뒤섞이며 신성시된다.
-> 앞서 래드클리프-브라운의 변심에서부터 뒤르켐과 베르그송을 연결짓는 리바이스의 의도는 무엇일까? 간단하다. 특정한 동물이 토템으로 선택된 이유는 자연에서 귀납적으로 찾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연주의적 방법으로 찾으면 안된다. 거꾸로 대립과 구분을 위한 이원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토템은 선택된 것 뿐이다.
p133 : 뒤르켐은 모든 사회생활은 인간의 지적 활동을 전제하며, 그 고유한 형식은 사회의 구체적인 조직을 반영한 것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특히 <종교 생활의 기본 형태>는 원시적 분류 형태에 대한 에세이 <규칙> 두 번째 서문에 두드러진 것처럼, 사회 요소가 지성 요소보다 더 우세하다는 것을 확언하는 뒤르켐의 전도된 관점에 내재하는 모순을 잘 보여준다. 한편 베르그송이 뒤르켐과 반대되는 것은 정확히 이 차원에서다. 뒤르켐식 용어의 의미에서 장르라는 범주, 대립이라는 개념, 이해력, 지성에 의한 즉각적 지각 등은 사회 질서에 의해 이용되고 구성된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사회질서로부터 범주와 자의적 개념이 파생된다고 주장한다. 그로서는 이 사회 질서를 설명하기 위해 감정, 정서적 가치 혹은 전염과 감염 같은 모호한 개념만 발견한다. 그러니까 그의 생각은 모순되는 요구 사항 사이(134)에서 분열되어 있는 것이다. 토테미즘의 역사를 통해 아주 잘 드러난 이 역설은 이렇게 해서 설명이 된다. 베르그송은 진정한 사회 논리학의 토대를 세우는 데 뒤르켐보다 더 나은 자리를 점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역대칭적으로 비정형화된 것에 호소함으로써다.
그가 인류학자들보다 먼저 토테미즘의 어떤 양상을 이해했다면, 그것은 그의 사고가 내부의 토테미즘을 직접 경험하는 소위 원시인이라 말해지는 민족들의 사고와 놀랍게도 유사해서가 아닐까?
-> 리바이스가 뒤르켐과 베르그송을 예로 든 것은 토템의 형식은 사회의 형태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성요소로부터 나온 것임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역대칭’이라는 생소한 단어가 나오는데, 거울관계 같이 반대로 대응하는 관계를 말한다. 뒤르켐은 사회질서를 통해 명확한 분류의 형태가 나왔다고 생각하나, 베르그송은 그것들을 통해서는 비정형화되고 애매모호한 것들만 산출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p135 : 이런 접근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이 잘 요약된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의 문장을 인용한다.
“창조적 에너지의 큰 흐름은 득(得)할 수 있도록 물질 자체에 있다. 멈추는 지점 대부분이 그 물질이다. 우리 눈에 나타나는 생물 종, 즉 유기체도 이런 멈춤이다. 본래 분석적이고 종합적인 우리 시건은 다중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서로 조화되는 다중 요소들을 하나하나 풀어낸다. 조직화 작업은 그 멈춤 자체, 단순한 동작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모래밭을 밟아 모래밭을 파이게 만드는 발의 동작과 유사하다. 수많은 모래 알갱이의 형상이 그 순간 그렇게 결정된다. 그림이 제시되어야 소통된다.”(Bergson)
이것을 읽고 나면 베르그송이 토테미즘 뒤에 감춰져 있던 것을 즉각 이해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가 알았든 몰랐든 그의 고유한 사고가 토템 주민들의 사고와 교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통적인 교감으로 무엇을 얻었나? 친족 관계는 실재의 이런 두 측면을 전체적으로 포착하려는 욕망의 결과로 보인다. 철학은 그것을 연속성과 불연속성이라는 말로 지칭한다. 그것은 둘 중 하나의 선택을 거부하기이다. 같은 진실로(136)나아가면서 상호보완적인 두 관점을 취하려는 노력이다. 래드클리프-브라운은 그의 기질에는 생경했던 형이상학적 사유를 잘 경계하면서 같은 길을 따라간다. 그는 결국 토테미즘을 대립과 통합을 절충시키기 위한 보편적 시도의 특별한 형태로 보게 된다. 원시인들이 생각하는 방식을 기가 막히게 가르쳐주는 현장의 인류학자와 서재에 틀어박힌 철학자가 만난 것은 놀랍다. 그러나 철학자는 어떤 면에서 원시인, 아니 야생인처럼 사고한다. 근본적인 것을 만들고 그것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 우리가 특정한 운동을 잘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동작을 취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역도의 용상은 몇 개의 동작으로 나눌수 있다. 크게는 clean과 jerk로 나눠지고, clean은 데드리프트, 퍼스트풀, 세컨드 풀, 프론트렉 자세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역도를 잘하기 위해서는 이런 구분된 자세들을 정확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그 멈춰진 동작만 잘하려다보면, 자세가 기계처럼 딱딱하게 끊어져서 정작 운동 동작이 유연하게 나오지 않는다. 제대로 된 자세를 알기위해서 사진처럼 정지 동작을 익히는 것이지만, 용상을 실제로 하기 위해서는 물흐르듯이 연결된 움직임을 빠르게 해내야 한다. 이와 같이 베르그송이 멈춤과 단절을 말하는 것은 토템이 이런 차이와 구분을 만들어내기 위해 존재하지만, 그런 차이는 결국 동일성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대립과 통합이 공존한다는 사고(헤겔적으로 표현하면 ‘즉자대자’적 존재)가 있어야 토테미즘을 이해할 수 있다.
p136 :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프랑스 문학이면서 그와 동시에 아마 최초의 종합인류학 논문이기도 할 것이다. 루소는 거의 근대적 용어로 인류학의 중심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자연에서 문화로 이행이다. 베르그송보다 훨씬 신중하게 루소는 본능을 내세운다. 본능은 자연 질서 자체로서 초월될 수 없다.
(137) 루소의 사고에서 예견과 호기심은 지적 활동의 두 측면과 연관된다. 자연적 본능이 지배할 때, 인간에게는 이러한 예견과 호기심이 부족해지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현재 상태의 감정에 내맡겨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루소에게는 감성적 삶과 지적 삶이 대조되는 방식이 자연과 문화가 대조되는 방식과 같다. 둘은 “가장 순수한 감각에서 가장 단순한 지식”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다. 루소의 글에서 간혹 느껴지는 것이지만, 루소는 자연 상태와 대립하는 것을 사회 상태가 아니라 ‘이성 상태’로 보는 듯하다. (138) 문화의 도래는 지성의 탄생과 일치한다. 한편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대립은 생물 구조에서는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 대립은 종 안의 개체의 연속성 속에서, 그리고 동시에 종들의 이질성 속에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 대립은 더 완벽해지려는 인간의 경향 때문에 생겨난 문화 한가운데서 극복된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이행 (사실 하나다), 즉 동물에서 인간으로, 자연에서 문화로, 감성에서 지성으로 이행하는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파악해야 할까? 루소가 이미 파악한 대로 이렇게 동물계와 식물계를 사회로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에서 토테미즘의 열쇠를 보는 것일까? 그런데 뒤르켐이 나중에 깨닫게 된 것처럼 그러한 항들을 근본적으로 철저히 떨어뜨려 놓으면 토테미즘의 발생 기원이 더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루소의 답은 이런 구분을 유지하면서 내용 면에서 감성의 영역과 지성의 영역이 분리되지 않는 정신 상태를 가지고 인간 조건을 정의해보는 것이다. 늘 의식해야 하는 것은 언제든 두 차원이 서로 전환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루소도 말했지만 타자에 대해 자신의 정체성을 구분하는 방식은 어쩔 수 없이 두 항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고 두 측면을 띨 수밖에 없다. 인간은 원초적으로 자기와 비슷한 것들과 동일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그중에 동물도 포함된다. 루소는 이것을 분명히 인정한다). 그리고 이어 비슷한 것들을 구분하면서 스스로를 구분하는 능력을 얻게 된다. 다시 말해 사회적 분화라는 개념의 물리적 실현 매체로서 종의 다양성을 파악한 것이다.
-> 결국 앞서 설명한 것처럼 문화라는 요소로 포착한 것은 본래 완벽히 분리되지 않는 것을 정지화면처럼 포착한 것이다. 문화를 통해서 자연을 바라보며 구분짓는 것인데 여기서 중요한 키워드는 ‘지성’이다. 자연의 대척점에 사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지성’이 있다. 그런데 리바이스가 자꾸 지성을 강조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본래 정신에서 감성과 지성을 구분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자연과 지성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도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그나마 포착해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지성이기에 4장에서 다룬 것처럼 ‘지성을 향하여’ 가자는 것이다.
p139 : 한편 그는 놀랍도록 근대적인 관점에서 자연에서 문화로 이행되는 것을 설명하는데, 앞에서 말했듯이 이러한 이행은 이항 대립이라는 논리적 연산이 출현하면서 생겼으며 상징주의의 첫 번째 표명과도 일치한다. 그는 인간과 동물을 둘 다 감각적 존재로서 우선 총괄적으로 파악한다. 그런 뒤 동일화를 하고, 이어 대립 인식을 명령하거나 이끈다. 다시 말해, 한 영역을 두 부분의 통합으로 파악하는 논리적 속성이 있고, 그 영역 한가운데서 ‘인간’과 ‘비인간’이 나뉜다. 루소가 보기에는 언어의 과정도 이렇다. 언어의 기원은 필요가 아니라 열정이다. 그 결과 최초의 언어가 형상화되고야 말았다.
-> 먼저 ‘상징주의’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상징주의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사실주의, 자연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탄생한 문예사조이다. 낭만주의와 같이 현실을 넘어선 무언가를 드러내려는 경향이나, 상징주의는 낭만주의와 달리 직접적이지 않고 상징적인 표현을 주로 사용했다. 역주에 의하면 “symbol은 고대 그리스어로 깨진 두 도자기 파편(bol)을 맞물려 붙임(sym)이라는 어원적 의미를 갖는다. 즉 나뉜 두 조각의 합이라는 형상은 이항 대립과 그 대립의 총합을 환기한다.” 헤겔의 정반합의 변증법, 즉자대적적 존재라고 설명하면 될 것을 왜이리 복잡하게 설명하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리바이스는 루소 역시 동일화가 먼저 오고 그 다음 대립이 오는 구조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결국 동일성 속의 차이라는 것이다.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이 그러하고, 언어 역시 비언어와 함께 존재하다가 차이를 만들려는 열정에 의해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p141 : 우리가 끌어내고 싶은 교훈은 이런 것이다. 중요한 점은 베르그송과 루소가 이국적 제도(루소의 경우 그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다)의 심리적, 논리적 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우선은 밖에서 포착하여, 혹은 단순히 상상한 것에서 시작하여 사고 양태 자체로 들어가고, 이어 그 내면성과 내재성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모든 인간 정신은 그 정신들을 나누는 거리가 어떻든 간에 인간 정신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조절하기 위한 가상의 경험 공간이다.
토테미즘은 관찰자들의 해석을, 이론가들의 공론을 과장하면서까지 우리의 제도를 원시인들의 제도로부터 차별화하려는 목적에서, 그 원시적 제도들에 생긴 긴장을 더 강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것이 특히 종교적 현상이라 더 많은 운이 따랐고, 토템과 종교를 근접시킴으로써 그 유사성을 지나치게 강조했다. 토테미즘을 종교 속에 놓은 것은 종교적인 것에 대한 강박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위 문명화된 종교가 원시 종교와 접촉하면 녹아 없어질까 두려워 최대한 그것을 문명화된 종교와 멀리 떨어뜨리고 필요하면 풍자하고 비하했다. 뒤르켐의 경험처럼, 종교이면서 토테미즘이라는 원래의 속성이 없는 이상 그 조합은 새로운 형체를 만들어내지 않았다.
(142) 토테미즘의 실체는 어떤 성찰 양태의 특수한 예시 정도로 축소된다. 분명 감정은 거기서 표현된다. 하지만 부차적인 방식으로 절대 닫히지 않을 관념의 몸통에 있는 틈과 상처에 대한 답으로서다. 이른바 토테미즘은 지각을 통한 이해력, 즉 지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한 요구에 답하고, 그 요구를 만족시키려고 탐색하는 과정은 지적 체계이다. 이런 의미에서 태곳적의 것은, 아주 멀리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 이미지는 수신된 게 아니라 투영된 것이다. 그 실체는 밖에서 잡히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환각이 진실의 한 조각이라면, 그것은 우리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 리바이스는 감정이나 종교 등 이성으로 잡히지 않는 묘한 것으로 토테미즘을 잡으려 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런 시도 자체가 우리의 편견이 투영된 환각이라는 것이다. 토테미즘 자체가 지성에서 나온 것인만큼, 그것을 파악하는 것도 지적 체계와 지성을 통해서 수행해야 한다. 토테미즘의 실체는 우리 밖에 있는 뭔가 신비한 외계의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보편성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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