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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토테미즘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 4/ 23.04.20 / 화니짱

오늘날의 토테미즘 4장(230412).hw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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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지성을 향하여

 

p104 : “탈렌시족의 토템 동물은 어떤 클래스도 없고 어떤 동물학적 의미도 없으며, 어떤 유용한 의미도, 신비적 의미도 없다. 토템은 야생 동물일 수도 있고 가축일 수도 있다.” (Fortes)

이것은 말리노프스키의 해석과도 거리가 멀다. 그런데 특히 포르테스는 보아스 이후 토테미즘 때문에 촉발된 환상 뒤로 엿보였던 문제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아마 가장 근본적인 문제겠지만 여전히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이것이다. 왜 하필 동물 상징인가? 상징에 대한 해석이 이번 챕터의 핵심이다.

-> 4장의 문제의식은 3장의 질문과 그대로 이어진다. 왜 하필 특정한 동물이 특정한 토템으로 쓰이냐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리바이스는 포르테라는 학자를 주로 인용한다.

 

p105 : 탈렌시족 사회는 천 조직과 비교할 만하다. 그 씨실과 날실이 각기 특정한 장소와 가계와 일치한다. 내적으로 긴밀하게 얽히기 위해 이런 요소들이 조상에 대한 의례라는 틀 속에서 징계와 특별한 의례적 상징들을 수반하며 어느 정도는 변별적인 실재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탈렌시족은 한 개인은 사회적 인간으로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안다. 각자가 사회의 하나의 측면 혹은 기능과 일치한다. 방향과 선택의 문제가 계속해서 각자에게 주어진다. 토템 상징은 다른 의례 상징처럼 개인이 어떤 길을 갈 때 이용하는 일종의 좌표 같은 것이다 각 씨족은 상징화된, 신성한 동물인 공통 조상을 갖는다. 가계 구성원들(106)은 같은 토템에 의해 훨씬 밀착된다. 자기 운명을 부각하는 특별한 조상이 집에서 기르는 동물 혹은 어던 사냥감 먹이 같은 중재자를 통해 그에게 나타날 수도 있다.

-> 리바이스는 탈렌시족 사회를 조직으로 비유한다. 씨실과 날실이 조화되어 직조되는 천처럼 혈통과 거주지라는 두 가지 요소에 의해 사회가 조직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특정한 토템이 공통조상을 상징하며, 혈통과 거주지라는 특성으로 엮인 사회 구성원들을 밀착시키는 도구로 사용된다.

 

p107 : 연결은 임의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인접관계도 아니다. 퍼스와 포르테스가 알아챈 것처럼 이것은 유사함을 지각한 데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유사성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아야 한다. 어떤 구도에서 그것이 포착되는지 알아야 한다. 방금 인용한 저자들의 말처럼 그것은 물질적 혹은 정신적 차원이다. 말리노프스키의 경험주의가(108)유기체적, 정감적 차원에서 이제 지각과 판단의 차원으로 옮겨간다.

우선 이런 해석은 토템 배열과 유전자 배열이 일치하지 않는 사회의 사례로만 가능하다는 점을 주목하자. 거기에 그만한 중요성이 있음을 인식하면서 말이다. 하나의 세트는 또 다른 세트를 환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이 두 세트는 서로 섞여 있고, 포르테스와 퍼스가 직감적으로 파악한 유사성은 이런 인접성의 사실에서조차 떠올릴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떤 유사성도 암묵적으로 혹은 공공연히 가정되지 않는다. 조상과 동물 간의 연결은 외부적이고 역사적이다.

-> 흔히 리바이스가 유사성은 은유로 논리적 인과성으로 설명하고, 인접성은 환유로 역사적 우연성에 기반해 사용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흥미로운 묘사라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왜 리바이스는 통상적인 용법과는 반대로 설명하고 있는걸까?

 

p108 :달리 말해 퍼스와 포르테스의 해석은 이중으로 밀접하다. 우선 토템 형태의 사회 구조를 비롯해 조상 숭배 풍습이 매우 발달한 문화에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동물 토테미즘 형태에, 혹은 어떤 동물 형태에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편 이 점에 대해선 우리도(109)래드클리프-브라운의 견해에 동의한다. 제한된 적용 범위 내에서 문제해결책을 떠올리면, 가설에 들어맞지 않는 사례들을 거기에 맞게 만들기 위해 조작해버리면, 그리고 관찰된 모든 사례들을 개별 유형으로 드러내기 위해 곧바로 전체 구도 속에 놓아버리면, 소위 토템 문제는 결코 끝을 보지 못할 수 있다.

인간들은 (그 조상들은 특별한 사례를 형성하고) 같은 인간이지만 자기들끼리는 또 다르다. (왜냐하면 사회 구조에서 각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며 사회적으로 분할되어 있기 때문이다). 토템이라고 불리는 재현물이 가정하는 유사함은 이 두 차이체계에 있다. 퍼스와 포르테스는 진일보한 뭔가를 내놓은 셈이다. 주관적 유용성의 관점에서 객관적 유용성의 관점으로 넘어왔으니까. 그런데 일단 이런 진보가 이루어진 이상 이제 남은 것은 외적 유사성에서 내적 상동성으로의 이행이다.

-> 주관적 유용성의 관점에서 객관적 유용성의 관점으로 넘어간다는 뜻은 무엇을 의미할까? 주관적 유용성의 관점이라는 것은 특정 동물 형태에 대해서 사례별로 특별한 주관적 이유를 만들어낸다는 의미(“제한된 범위 내에서 문제해결책을 떠올리면”)일 것이다. 반면 객관적 유용성이라는 것은 토템이라는 사회적 구조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띠고 있다는 발견일 것이다. 그렇다고 동일성에 주목해 성급히 통일해 버리는 것(“개별유형으로 그러내기 위해 곧바로 전체구도 속에 놓아버리면”)은 아니다. 리바이스가 말하고 싶은 것은 들뢰즈적 ‘차이의 동일성’인 것 같다. “분할되어 있는 사회 구조”를 반영하는 자기들끼리 구분되고자 하는 인간의 같은 특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 문단의 마지막 문장(“외적 유사성에서 내적 상동성으로의 이행”)이 뜻하는 바가 그것일 것이다. 분할되어 있기에 완전히 같지 않고 뭔가 유사해보이는 외적 특성에서, 그 속에 있는 동일성으로 분석의 초점을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p110 : 논증은 레드클리프-브라운과 정반대로 진행된다. 에번스-프리처드는 뒤르켐이 이미 도식화한 유사 이론을 환기한다.

누에르족의 토템은 주의를 끌 만큼 놀라운 특성을 가진 것들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신화적이고 시적인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피조물이다. 누에르족이 그들 민화의 맨 처음에 두는 것들은 토템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매우 드물게 나타나거나 별 의미 없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 토템처럼 나타나지 않는 토템이란 무엇일까? 리바이스는 그것을 “매우 드물게 나타나거나 별 의미 없는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거의 무의미한 의미, 도식화된 토템이 아니라 신화로서의 토템을 말하고 싶은 것 아닐까? 그리고 이런 구도가 레드클리프-브라운과 정반대이고, 뒤르켐이 도식화한 유사 이론과 가깝다는 것에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뒤르켐의 유사 이론은 무엇을 뜻하는가? 다시 교재를 뒤져보니 86쪽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뒤르켐은 이런 현상에 대해 우연적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씨족의 지속성과 연속성은 그저 상징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즉, 뒤르켐은 토템의 그 기원적 이유가 특별히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에 의해 우연적으로 선택된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 레드클리프-브라운은 자연과학과 같이 귀납법을 사용한다. 그는 인간과 동물 관계가 토테미즘보다 먼저 공고하게 존재한다고 말한다. 즉 토템을 자연화시킨다. 특정 토템이 선택된 것에는 자연적 합리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레드클리프-브라운과 전반대로 진행된다고 말한 것이다.

 

p111 : 누에르족은 쌍둥이를 정의할 때 처음에는 모순적으로 보이는 형식을 이용한다. 들은 쌍둥이를 한 사람이라고도 말하고 새들라고도 말한다. 이런 형식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그것이 내포하는 것을 단계별로 살펴봐야 한다. 쌍둥이는 우선 신의 아들이다. 하늘은 신이 거주하는 곳이므로 쌍둥이는 높은 곳의 사람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관계에서 아래 있는 사람인 보통 인간과 반대된다. 새들은 높은 곳에 있고, 쌍둥이들은 그 새와 동일시된다. 하지만 쌍둥이는 인간으로서 머문다. (112) 그런데 왜 쌍둥이들은 하늘에 있는 새의 이름이 아니라 지상새의 이름으로 불렸을까? 뿔닭, 자고새 등등으로 말이다.

쌍둥이와 새의 관계는 레비-브륄의 융즉 법칙으로도, 말리노프스키의 유용주의적 고찰로도, 퍼스와 포르테스의 감각적 유사함에 의한 직감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우리는 정신적 관계를 하나로 묶는 논리적 연결 시리즈 앞에 와 있다. 쌍둥이는 새들이다. 그것은 쌍둥이가 새와 혼동되어서가 아니라 닮아서이다. 쌍둥이들은 다른 인간들에 비해 높이 있는 사람이고, ‘높이 있는 사람아래 있는 사람에 비해 높이 있다. 이것은 새들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높이 있는 새아래 있는 새보다 높이 있다. 쌍둥이는 새들처럼 최고의 정령과 인간의 중간 위치에 있다.

-> 일단, ‘융즉 법칙’이란 무슨 뜻일까? ‘융즉적’이라는 뜻은 ‘감응적’ 태도라고 볼 수 있다. 모스와 뒤르켐의 공저인 <분류의 원시적 형태들>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어떤 원주민 부족은 이 우주전체가 부족의 일부이고 어떤 토템의 일부인 마냥 바라보기도 한다.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지않고 혼연일체로 보는 원주민의 감성은 여러 관찰사례에 있다.
어떤 인류학자는 이런 심리를 ‘융즉적 감성’ 이라고 표현했는데 나무와 내가 하나라고 생각한다면 나무가지가 잘려나가는 모습이 제 3자의 눈으로만 볼 수는 없을것이다.”
[각주31] 레브-브륄은 <미개인의 사고>에서 미개인을 논리전(pre-logic) 사고방식, 즉 표상을 논리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신비적인 태도, 논리이전단계, 융즉적 태도로 파악한다고 했다. 이것은 세계의 객관성과 타자의 타자성[헤겔]을 의식하지 않고 거기에 자기 존재를 합체시키는 상태이며, 이것이 원시인(미개인)의 사고라고 보았다.
두 번째로, ‘말리노프스키의 유용주의적 고찰’은 무엇일까? 교재 90쪽을 보면 이렇게 나온다. “말리노프스키는 토템 종을 유용한 종, 특히 식용 가능한 것으로 만들면서 명제에 집착”,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관심 개념’을 조작해야 하며 매번 거기에 고유한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즉, 왜 특정 동물이 특정 토템이 되는지에 대한 이유를 그 종의 유용성에서 찾는 것이다. 그리고 리바이스는 이런 방식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유용주의 해석에 대한 고집스러운 취향은 간혹 이상한 변증법을 만들어낸다.”
세 번째로, ‘퍼스와 포르테스의 감각적 유사함에 의한 직감’은 무엇을 뜻할까? 교재 106쪽에 이런 대목이 있다. “포르테스는 송곳니를 가진 육식동물이 우세한 자리를 점하고 있음을 주목했다. 탈렉시족은 ‘송곳니를 가진’이라는 어휘 아래 동물을 모아놓은 셈이었다.” 그런데 퍼스와 포르테스의 이런 접근법은 유용주의 해석과 어떻게 다른걸까? 리바이스는 107쪽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연결은 임의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인접 관계도 아니다. 퍼스와 포르테스가 알아챈 것처럼 이것은 유사함을 지각한 데서 나온 것이다.” 환유(우연적 인접성)도 은유(논리적 인과성)도 아니라 감각적 유사함이라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왜 유사함에 대한 논리가 아니라 직감일까? 다음 구절을 보자. “이런 유사성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아야 한다. (...)그것은 물질적 혹은 정신적 차원이다.” 109쪽에는 이런 구절마저 있다. “포르테스의 심리 이론은 불완전한 분석에서 나온다. (...) 만일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유사함이 아니라 차이, ‘닮은 차이’이다.” 유사함에 대한 지각이 아니라 차이에 대한 지각, 그리고 그것은 불완전한 심리적 분석이라는 점에서 직관적이다.
그렇다면, 쌍둥이와 새의 관계가 “퍼스와 포르테스의 감각적 유사함에 의한 직감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정신적 관계를 하나로 묶는 ‘논리적 연결’ 시리즈 앞에 와 있다.” 퍼스와 포르테스의 방법은 논리적 연결이 아니라 직감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첫 번째 방법도 탈락이다. 두 번째 방법은 성급한 일반화에 의한 억지 논리로 흐른다는 점에서 탈락이다. 이후에 계속 이어지는 설명에서 리바이스는 새가 날 수 있는 높고 낮은 위치를 사람들의 높고 낮은 권력 구도와 연결시키고 쌍둥이는 신의 아이로서 새의 위치에 자리매겨져 있다고 설명한다. 이는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으로 유추해보면 다음일 듯 싶다. 기의가 아니라 기표가 중요하다. 즉, 각 사물들, 각 단어들의 특정한 의미를 분석하고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의 자리 자체를 구조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각 자리를 차지하는 케릭터의 인격성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 자체, 배역 자체를 바라보는 것. 자리바꿈의 동학을 살피는 것, 그것이야말로 들뢰즈가 말하는 리바이스의 구조주의이다.

p113 : 이런 종류의 추론은 특별한 관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집단과 동물 종 사이의 모든 관계에 적용된다. 에빈스-프리처드가 말한 것처럼 이것은 메타포 관계이다.

-> 여기서 metaphor는 은유를 뜻한다. 비유도 metaphor를 어원으로 취한다. 비유의 대표적인 예가 은유인 까닭일 것이다. 비유는 서로 다른 대상 사이에 발견되는 유사성 때문에 성립한다. 즉 시적 동일성은 유사성의 발견에 그치지 않고, 대상들의 이질성과 유사성이 통합되었을 때 탄생하는 새로운 세계 및 의미 생산을 목적으로 한다. 직유(simile)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와 같이’,‘~처럼’으로 매개되는 장면에서 보듯이, 양자가 비교될 법한 유사성을 공유해야 한다. 즉 원관념과 보조 관념의 유사성 표현에 집중하는 직유와 달리, 은유는 양자의 비교를 통한 새로운 의미 확장에 초점을 맞춘다. 비유의 원어 metaphor는 그리스어 metaphora에서 왔으며, 초월 또는 변화를 뜻하는 meta와 운반 또는 이동을 뜻하는 phora가 합쳐진 말이다. tenor(취지, 대의: 원관념)를 나르는 vehicle(탈 것, 운송수단 : 보조관념)이 비유인 것이다. <붓다와 함께 쓰는 시론>에서 정효구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비유적인 표현을 만날 때, 새롭지만 불편하다는 이중 감정을 갖게 된다.” 사전적, 상식적 언어 너머를 만나는 데서 오는 새로움과 사전적, 상식적 언어로 해결할 수 없는 데서 오는 불편함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유는 약이면서 독이다. 사전적, 상식적 언어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a의 진실을 비유는 해결해주면서, 그 대가로 a의 안정성을 위협하고 a에 대한 사람들의 사유에 혼란을 준다.” 리바이스가 메타포 관계라고 설명하는 이유가 잘 이해된다.

 

p114 : 이런 시각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두 가지 유보 조항이 있다. 첫째, 쌍둥이에 대한 분석은 누에르족에 고유한 교리에 너무 종속되어 있다.

새와 쌍둥이를 동화시키는 도식은 쌍둥이와 새의 이원적 관계로 번역되지 않는다. 그것은 쌍둥이, , 그리고 신의 삼원적 관계로 번역된다. 쌍둥이와 새가 공통적 성격을 갖는 신과 관련해서다.” (Evans-Pritchad)

신성 종교가 이런 유형의 관계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았듯이 누에르족은 훨씬 덜 교리적인 정신 사회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의 해석을 도식화하면서 에번스-프리처드는 해석을 제한할 위험이 있다. 퍼스와 포르테스처럼 특수한 사회의 언어 속에서 일반적인 해석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이해력이 미치는 범위를 제한한다.

둘째, 에번스-프리처드는 레드클리프-브라운이 이룬 혁명의 중요성을 간과한 것 같다. 래드클리프-브라운은 <누에르족의 종교>를 출판하기 몇 년 전 혁신적인 그의 두 번째 이론을 내놓았다. 이 두 번째 이론(115)은 첫 번째 이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영국 인류학자들은 대체로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의 두 번째 이론은 토템 문제를 청산할 뿐 아니라 더 핵심적인 문제를 폭로하는데, 그것은 다른 차원에서, 다른 용어로 다뤄져야 한다.

(118) “왜 모든 새가 아니라 매와 까마귀인지, 혹은 또 다른 쌍들인지?”

이런 연구 방식은 결정적이다. 형식 속에 있는 내용의 재통합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형식주의나 기능주의와는 먼, 진정한 구조주의 분석으로 가는 길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래드클리프-브라운은 한편으로는 표상과 제도를 연결하고, 같은 신화의 모든 다양한 요소들을 연결해 해석함으로써 정말로 구조주의적인 분석을 보여주었다.

-> 리바이스의 비판의 요지는 다음인 듯 싶다. 특정한 형식을 기존의 서양식 사고방식(3항)에 빗대어서 관습적 내용을 끌어오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형식과 내용을 분리시켜서 기능주의적으로 작동시키는 방법도 옳지 않다. 형식 속에 있는 내용을 재통합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형식을 새로운 내용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p120 : “물론 그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 같은 유형의 동화를 열두 개 정도 조사해보니, 공통된 주제가 드러났다. 두 동물 종의 유사점과 차이점은 우정과 갈등, 연대와 대립으로 해석될 수 있다. 달리 말해 인간 사회에 동물의 생활 세계가 번번이 연상되면서 사회적 관계 형태로 표현된다.” (Radcliffe-Brown)

이런 결과를 얻기 위해 자연 종은 대립쌍으로 분류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선은 둘의 공통된 성격이 나타나는 종들이 선택되어야 한다. (121) 달링 강가 부족의 매와 까마귀분할, 이렇게 출발은 잘 했는데, “어떤 구조 원칙에서 매우 빈번한 적용 형태이상은 분석되지 않는다. 이 원칙은 반대항의 결합 속에 있다. 동물과 식물 항으로 된 특별한 명명법(그리고 그게 유일한 특성이다)으로 이른바 토테미즘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상응성과 대립성을 표현한다.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부족에서는 하늘과 땅, 전쟁과 평화, 상류와 하류, 붉은색과 하얀색이다. 이것의 더 일반적인 모델이자 더 체계적인 작용은 중국의 음양사상에서 만나볼 수 있다. 암컷과 수컷, 낮과 밤, 여름과 겨울 등이 하나로 결합하여 조직된 전체, 그러니까 도를 낳는다. 부부라는 한 쌍, 하루 혹은 한 해 역시 그런 음양의 조합이다. 따라서 토테미즘은 일반적인 하나의 문제를 형식화하는 하나의 특별한 방법이 된다.

-> 토테미즘이 동서고금에 일치하는 구조를 표현하는 방법이라는 뜻이다. 음양오행설이 대립성의 조화를 잘 보여준다.

 

p122 : 래드클리프-브라운의 예시는 토테미즘의 지지자만이 아니라 반대자들도 가지고 있던 딜레마를 결정적으로 해결했다. 왜냐하면 자연스러운 자극제 혹은 임의적 구실이라는 두 역할이 생물 종에게 다 부여될 수 있기 때문이다. 토템 동물은 무서움의 대상 혹은 찬탄, 갈구의 대상이 되는 걸 멈춘다. 감각으로 느낀 실체는 관찰한 정보에서 출발해 사색적 사고로 나아가 개념과 관계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자연 종은 먹기 좋아서가 아니라 생각하기 좋아서선택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가설과 그가 이전에 내세운 가설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커서 래드클리프-브라운이 자기가 가고 있는 길을 의식했는지 못했는지 알고 싶어질 정도다. [이때의] 10년 전은 인류학이 구조주의 언어학에 접근해가던 시기이다. 이런 시도가 래드클리프-브라운의 사고에 어떤 메아리로 가 닿았다고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사실상 대립성과 상관성 개념은 긴 역사를 갖는다. 구조주의 언어학과 그에 이은 구조주의 인류학은 이 인문학 어휘에 다시 명예를 부여한다. 래드클리프-브라운은 자연주의와 경험주의의 낙인이 아직 남아 있는 채 자신의 이전 입장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 리바이스는 래드클리프 브라운이 자연주의(특정 토템이 선정된 것에는 자연에 나타나는 유기체적 특정 이유가 있다.)와 경험주의(자연과학의 연구방법인 귀납적 방법을 택한다는 점에서 경험주의는 자연주의와도 연관되어 있다.)를 포기하고 입장을 선회한 것은 구조주의 인류학의 영향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p123 : 현대 구조주의 결과물은 이미 신뢰도가 떨어진 개념연합주의심리학을 끌어당기지 않을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개념연합은 기초 논리의 윤곽을 그릴 때 큰 장점이 있다. 그것은 모든 사고의 가장 작은 공통분모이다. 다만 그것이 무정형한 의식의 정중앙이 움직이면서 수동적으로 생긴 산물이 아니라 본래적 논리인지, 뇌의 정신 작용을 통한 사고 구조를 직접 표현한 것인지는 알아야 한다. 래드클리프-브라운이 아직도 믿고 싶어 하는 것과는 달리, 이것은 반대성과 상관성의 논리이며 배제와 포함, 양립과 비양립의 논리이다. 그것은 모순적 반대 법칙이 아니라 연합법칙을 설명한다. 혁신된 연합주의는 불대수(digit 0,1의 이분법)와 유사한 연산체계에 기초한다. 레드클리프-브라운의 결론이 보여주듯이, 오스트레일리아 사례는 단순한 인류학적 일반화를 넘어 언어 및 사고의 법칙을 보여준다.

-> 일단 ‘개념연합주의’는 무엇일까? 연합주의는 고대 그리스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연합된 기억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서술한 것에서 기원한다. 흄은 특히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에서 지각으로부터 얻은 인상이 사고의 과정을 결정하여 개념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연합주의자들에 의하면 배움이란 지적인 반응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반응이 연합적 구조에 따라 정보로서 기억되는 것이다. 연합주의자가 옹호하는 의식의 연합적 구조는 명제적 구조와 대립한다. 명제적 구조란 심적 명상이 명제를 표현하며 이 명제들이 구성하는 구조는 연합주의가 옹호하는 두 개념의 단순한 연합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 연합이란 심적 표상간의 인과적 관계만을 설명할 뿐이지만, 명제적 구조는 대상간의 관계까지 설명하기에 더 적합한 설명이라 판단될 수 있다. 연합주의는 논리적이거나 구문적인 사고의 성질에 의존하지 않고 다른 생각들의 연합적인 관계에만 의존한다. 리바이스가 래드클리프-브라운이 포착한 구조주의 분석을 혁신적 연합주의라고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그것이 연합주의라 할 수 있는 것은, 다양한 문명권에서 비슷한 사유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그것이 혁신적인 것은, 연합을 위한 성급한 일반화가 아니고 반대성과 상관성이 포함된 연합이기 때문에 그렇다.

 

p123 : 이게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래드클리프-브라운이 구조주의 분(124)석에서는 내용과 형태를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해했다고 언급했다. 형태는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다. 동물식 명칭을 쓰는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 그것을 구체화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경계를 그리는 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경계 너머 임의가 지배한다. 그 의미는 공표되지 않는다. 그건 아무 데도 없거나 도처에 있다. 우리의 틀에 박힌 지식은 흔히 우리가 의미를 계속 추격해 가장 축소된 것으로 만드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사실이다.

래드클리프-브라운이 취한 방법은 그 방법이 제시하는 해석만큼이나 견고하다. 사회적 실제의 각 층은 다른 층이 이해 불가능한 경우 필수적인 보완으로 나타난다. 인습은 신앙을 일깨우고, 신앙은 기술을 일깨운다. 하지만 다른 층들은 단순히 서로가 서로를 비추지 않는다. 변증법적으로 서로를 비춘다. 그 결과 제도, 표상, 상황을 각각 대립상관적인 관계 속에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학은 결국 그 실질적인 시도로 인간의 사고와 인간이 사용하는 오브제 간의 구조적 상동성을 밝히는 것에 불과하다. 내용과 형식의 방법론적 통합은 그 나름대로 훨씬 본질적인 통합을 반영한다. 그것은 방법과 실제의 통합이다.

-> 형태가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 고유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의 선입견에 근거해서 판단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 문화의 구조에 맞춰서 재단하기 싶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에 존재하는 형식과 구조에 끼어맞추지 않고, 구체적 사례에 맞춰서 새로운 형태와 새로운 구조를 찾아내 그 의미를 가장 축소된 것으로 디테일하게 부여해야 한다. 이와 같은 내용과 형식의 방법론적 통합은 제도 등의 구조를 주어진 것으로 상정하고, 표상, 상황을 그에 끼어 맞추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사고방식과 오브제 간의 구조적 상동성을 밝히기 위해서는 이렇게 방법론 자체를 실제의 방식에 맞춰야 한다.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서로의 관계성이 그 안에서 나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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