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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역사학과 민족학
p4 : 먼저 민족지와 민족학의 정의를 내려두자. 민족지란 인간 집단을 그 특수성을 통해 파악하고 관찰 분석하는 일이며, 그 지향하는 바는 각 집단의 생활을 되도록 충실히 복원하는 일이다. (연구대상은 연구의 성질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이론의 실제적인 이유들에 의해, 우리와는 차이점이 가장 많은 인간 집단 속에서 선택된다.) 이에 반해 민족학은 비교라는 방법에 의해 (또 다음에 규정되어야 할 목적을 위해) 민족지가 제시하는 자료를 이용하는 일이다. 이 정의에 의해 민족지는 모든 나라들에서 같은 의미를 갖게 되고, 민족학은 앵글로 색슨계의 여러 나라들에서 사회 인류학이나 문화 인류학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과 비슷하게 대응하게 된다. (사회 인류학은 표상의 체계로서의 제도의 연구에 종사하고, 문화 인류학은 사회생활에 유용한 기술로서의 제도의 연구에 종사하고 있다.)
-> 리바이스는 민속지와 민족학을 구분하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민속지는 인간 집단을 특수성을 통해 파악하는 일입니다. 이에 반해 민족학은 민속지의 자료를 비교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민속지와 다르게 민속학은 사회의 체계와 제도를 연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리바이스가 비판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민족지의 연구 대상을 설정하는 것 자체가 타자화라는 것입니다. 우리와 가장 다른 집단을 골라 연구하는 것이 연구비를 많이 타내고, 학자로서의 성취를 자랑할 수 있기에 우리와 가장 달라 보이는 인간 집단이 선택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구의 성질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이유로 인해서 민속지를 통한 타자화는 더욱 가속화됩니다. 그리고 그런 민속지의 자료를 이용할 수 밖에 없는 인류학이나 민족학도 타자화의 학문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렇다면, 리바이스는 그 대안으로 무엇을 제시하고 있나요? 이 책에서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진 않지만, 리바이스의 후계자 지 까스트루는 <식인의 형이상학>에서 총3부 중 1부의 제목을 ‘안티 나르시스’라고 붙이며 이 뜻을 승계하고 있습니다. 가스트루는 마니글리에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참된 인류학은 그 속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는 우리 이미지를 우리에게 되돌려준다.” 즉 인류학과 민족학의 연구 대상은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을 연구하고, 그 자료를 연구할지라도, 그 연구의 목적지는 타자화가 아니라, ‘안티 나르시스’ , 즉 자기중심성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현재의 인류학에 대한 근본적 비판의식이 리바이스로 하여금, 민족지와 민족학, 역사의 차이에 대해 길게 설명하게 만드는 숨은 동인입니다.
1절.
(p5) 이리하여 민족학적인 여러 학문과 역사학의 관계라는 문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즉 민족학은 현상의 통시적 차원, 즉 시간에 있어서의 현상의 질서에 관여한 것인가(
그때는 민족학이 여러 현상의 역사를 쓸 수 없다.) 아니면 역사학자와 같은 방식으로 연구할 것인가(그때는 시간의 차원이 소멸된다). 그 역사를 밝힐 수 없는 과거를 재구성하려는 일과, 과거가 없는 현재의 역사를 그리려는 일(한쪽은 민족학의 드라마이고, 다른 쪽은 민족지의 드라마지만)이 50년간의 발전 과정에서 양자가 빈번히 빠져들었던 딜레마인 것이다.
-> 이 부분부터는 본격적으로 역사학의 연구방법과 민족학의 연구방법을 비교하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민족학은 통시적 시간감각 혹은 역사적 시간감각을 통해 연구할 수 있는데요. 먼저 통시적인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관찰대상의 지역을 고정시켜두고,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천과정을 살핀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리바이스는 ‘여러 현상의 역사를 서술할 수 없다’고 그 한계점을 부연하는 것입니다. 리바이스가 하고자 하는 작업은 한 지역의 특수성이 아니라 모든 지역의, 모든 인류의 보편성을 알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역사학자의 방법을 택하면 ‘시간의 차원이 소멸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역사학자의 방법은 다른 지역과의 비교가 가능하지만, 공시적인 관점, 즉 시간대가 동등한 차원에서 각 지역별 차이성을 살핀다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시간은 멈춰있다는 것이지요. 공간에 집중할 것인가, 혹은 시간에 집중할 것인가에 따라서 다른 쪽은 놓칠 수 밖에 없었는데요. 공간에 집중하고 시간을 놓친 게(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차이) 민속지라면, 시간에 집중해 공간(지역별 차이)을 놓친 게 민족학입니다.
2절.
p12 : 전파주의의 주장자는 현재 볼 수 있는 여러 유형 중의 하나, 통상 가장 내용이 풍부하고 가장 복잡한 것을 이 제도의 원초적 형태의 대표로서 골라내어, 그것이 가장 뚜렷이 인지되는 지구상의 어떤 지역을 기원으로 정하고 다른 모든 형태는 이 공통이 근원으로부터의 이동과 차용의 결과라 할 것이다. 어느 경우나 경험적으로 부여되는 모든 것 중에서 자의적으로 하나의 유형을 골라내어, 이 유형을 모델로 하고 사변적인 방법으로 다른 모두를 이것으로 환원시키려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보아즈의 명목론(유명론, nominalism <-> 실재론 : 보편은 단순한 명사에 불과하고 다만 개별적 사물만이 실재한다. 유명론은 영국 경험론으로 이어짐. / 참고로 <오늘날의 토테미즘 2장 제목이 ‘오스트렐리아 유명론’)을 극도로 추진시켜, 관찰되는 개개의 사례를 각각의 개별적인 것으로서 연구하여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먼저 다음과 같은 것을 확인해 두지 않으면 안 되리라. 즉 한편으로는, 쌍분 조직(dual organization)에 할당되어 있는 기능(functions)이 일치하고 있지 않다는 것, 다른 한편으로 각 사회 집단의 역사는 반족(moieties)으로서의 분할이 매우 상이한 기원에서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13) 이 추론을 사회 생활의 다른 여러 분야 모두로 넓혀 나간다면, 오직 사회 때문에 제도 등을 부정한다고 하는 데까지 이끌려 갈 것이리라. 민족학과 민족지(전자는 후자로 환원된다)는 문자에 의한 자료 또는 형태가 있는 자료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부끄러워서 참으로 역사란 이름조차 입에 담지 못할 정도의 역사 밖에 안되는 것이 되리라.
그들은 전대 미문의 기적에 의해, 비교의 모든 자료에는 관계하지 않는다고 하는 하나의 지엽적인 조건은 지키면서 내적 성찰에 의해 일거에, 보아즈가 그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았던 바인 일반적 진리에 도달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리바이스는 이 문단에서 전파주의와 유명론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먼저 전파주의는 무엇인가요? 전파주의는 기원을 설정합니다. 마치 단군을 전세계 모든 민족의 기원인 것처럼 설명하는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처럼, 자의적인 기원을 만들어내고, 모든 것을 이 기원으로 환원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전파주의는 문화의 우열을 나누는 진화주의의 쌍생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명론은 전파주의와 어떻게 다를까요? 유명론은 실재론을 부정합니다. 보편자가 실제로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유명론의 입장입니다. 보편자는 없고 다만 개별적 사물만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명론과 경험론과 친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류학자 중에서는 보아즈가 진화주의와 전파주의를 비판하며 ‘유명론’의 방법을 따르고 있습니다. 리바이스도 <오늘날의 토테미즘>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유명론’이라는 이름으로 토테미즘을 포착하고자 한 것을 보면, 유명론적 방법론을 긍정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유명론에는 결정적인 문제점이 있습니다. 모든 인류학적 사례들을 개별적인 특수성으로 파악해서 이야기하면, 그것을 아울러서 이야기 할 수 있는 보편성이 창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특수하게 말하는 학문이 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과학과 학문은 보편성을 상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류학도 학문인 이상, 보편적 결론을 말해야 하는데요, 유명론이 가지고 있는 이런 딜레마를 보아즈는 얄팍하게 해결했습니다. 중간 단계를 생략한 체, 개별사례의 특수성을 주장하다가 갑자기 ‘일반적 진리’를 말하며 결론으로 도약하는 것입니다. 그런 비약을 리바이스는 ‘전대미문의 기적’이라고 비야냥대고 있습니다.
p14 : 하나의 사회가 기능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지만, 어떤 사회에 있어 모든 것이 기능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바보스런 일이다. 기능주의적 해석에 숨겨져 있는 이 자명의 이치에 빠질 위험은 이미 보(15)아즈에 의하여 지적되었다. “위험은 언제나 문화적 총체의 연구로부터 도출되는 광대한 일반화가 매우 우스꽝스러운 것에 귀착된다고 하는 점에 있다.” 그 일반화의 성격은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생물학자나 심리학자의 영역의 것이 된다. 민족지학자의 역할은 갖가지 사회에 그것이 나타나는 방식에서 볼 수 있는 상위를 기술하고 분석하는 데 있고, 민족학자의 역할은 여기에 관하여 설명하는 데 있다.
일반적으로 사회 상태에 관하여 습속이나 습속의 무한한 다양성에 대하여, “인간의 유기적인 필요(식이, 보호, 생식)가 사회 생활의 발전을 초래하는 기본적 명령이다”(말리노프스키)라는 명제가 눈 앞에 제시된다고 해서 그것으로 무엇을 안 것이 되는가? 그러한 유기적 필요란 인간에게도 동물에게도 공통되는 것이 아닌가?
(16) 민족학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어떤 기능의 보편성이란 것이 아니다. 그러한 보편성은 아직도 확립되려면 멀었고, 그것은 이런 종류의 일체의 습관(customs, 관습)과 그 역사적 발전의 주의 깊은 연구 없이는 확인될 수 없다. 오히려, 이 습관과 매우 변하기 쉽다고 하는 관습이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이야말로 민족학자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그 유일한 것은 아닐지라도, 첫째 목표가 상위점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데에 있는 주된 목표가 차이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에 있는 학문이 유사점밖에 보려고 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문제를 잃고 마는 것은 확실하다. 더 나아가 그것은 동시에, 구하고 있는 일반적인 것을, 그것이 만족하는 평범한 열망하는 일반진리와 그것을 통해 만족시켜야 하는 사소한 것들과의 구별을 위한 모든 수단을 잃고 말게 되는 것이다.
-> 이번에는 기능주의에 대한 비판이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저번 주에 네이버 지식사전을 단톡에 올려드린 개념어 중에 ‘기능주의’도 있었는데 기억하시나요? 기능주의를 신봉한 인류학자로는 말리노프스키와 레드클리프-브라운이 있습니다. 기능주의란 모든 사회적 제도들과 관습들이 상호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고, 그것들은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들로서 각각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말리노프스키는 개인의 생리적, 심리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측면에서의 기능을 해석하기에, 그의 기능주의를 심리학적 기능주의라고 부릅니다. 반면, 레드클리프-브라운은 심리적인 해석을 거부하고 사회적 제도들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관계의 유형에 의하여 기능이 결정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사회학적 기능주의 혹은 구조기능주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아즈 그리고 리바이스는 왜 기능주의를 비판하는 것일까요? 너무나 광대하고 자명한 이치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말하나 마나 한 진리만을 일반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리노프스키의 다음과 같은 발견이 그렇습니다. “인간의 유기적인 필요(식이, 보호, 생식)가 사회 생활의 발전을 초래하는 기본적 명령이다” 이러한 일반화된 진리가 인류학에 어떤 교훈을 줄 수 있을까요? 이런 특성은 동물과 인간에게 모두 동등한 조건 아닐까요? 너무 큰 채로 거른 곡물처럼 인류학이라는 학문에 도움이 될만한 구분점은 모두 사라지고 마는 것이죠. 일반진리라는 보편성을 띤 결과를 도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진리가 다른 모든 것을 포괄하면 안되고, 오히려 다른 사소한 사실들을 대비되고 구분되어야 의미있게 쓰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p18 : 결국 기능주의적인 방법을 정식화한 것은 역사학자이다. 로마 사회의 한 상태를 특징짓는 여러 특성 전체를 열거한 다음, 오제는 1903년에 이렇게 덧붙이고 있었다. “이 모두가 떼어질 수 없는 복합체를 이루고 있으며, 그것의 모든 사실은 로마인의 가족의 발전이 유태인 또는 중국인, 혹은 아스테카 인의 가족의 발전에 의하여 설명되는 것 이상으로 상호적으로 해명되는 것이다.” 이 말은, 오제가 제도에 사건들을 부가하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말리노프스키에 의해서도 쓰여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그의 말은 이중의 유보를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발전에 관해 진리인 것은 진리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조에 관해 진리인 셈은 아니기 때문이며, 민족학자에게 있어, 비교연구가 어느 정도까지는 쓰여진 자료의 결여를 보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파라독스)은 존재한다. 즉, 진화주의적 해석과 전파주의적 해석의 비판에 의해 밝혀진 것은 민족학자가 역사적 연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에는 역사와 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가 역사적 연구를 한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을 때야말로, 그는 마찬가지로 자료의 부정부족에 제한받고 있는 훌륭한 역사학자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 역사학자 오제는 로마인 가족의 발전양상이 유태인이나 중국인 등의 가족의 발전에 의하여 상호적으로 설명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리바이스는 이런 설명이 말리노프스키의 기능주의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보편성을 띤 결과를 도출했지만 이중의 유보사항이 있습니다. 첫째. 가족의 발전상에 관해서는 여러 민족의 보편적인 양태라고 말할 수 있으나 구조적 진리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둘째. 다양한 다른 지역 사례에 대한 비교연구를 통해 자료 부족으로 인해 보편성을 도출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완해야 합니다. 다시 1절로 돌아가서, 민족학적 방법론, 역사학적 방법론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두 방법을 섞어 사용함으로써 돌파한 셈입니다. 즉, 시간적 변화를 살피되 한 지역 밖에 보지 못하는 민족학적 연구방법론을, 서로 다른 지역의 사례를 모아 일률선상에 높고 비교하는 역사적 연구 방법을 통해 보완한 것입니다. 리바이스가 역사적 연구를 한다고 생각지 않을 때, 훌륭한 역사학자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훌륭한 역사학자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허접한 역사학자가 모든 지역의 사례를 동일선상에서 아주 쉽게 비교하며 보편성을 단언하는데 비해, 훌륭한 역사학자는 가지고 있는 사료를 보면, 쉽사리 보편적 진리라고 단언할 수 없지만, 학문적 보편성을 어떻게든 말하고자하기에 한계를 알면서 조심스럽게 보편성을 도출해내고자 한다는 점에서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민족학자가 역사적 연구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에는 역사와 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말리노프스키가 앞서 “유기적 필요가 사회생활 발전을 초래한다”고 말한 바를 떠올려 봅시다. 말리노프스키는 인류학적 보편성을 역사적 심리주의에서 찾았습니다. 즉 모든 지역을 동일한 시간성 상에서 비교하는 역사적인 방법론을 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말리노프스키는 너무나 광범위한 범위(모든 지역의 생명체)와 시간대(모든 생명의 시간 속에서)를 상정했기 때문에 더 이상 역사라고 서술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버렸습니다. 그런 점에서 역사와 반대되는 일을 해버린 것입니다.
3절.
p19: 역사가나 민족지학자가 할 수 있는 일, 또한 사람들이 그들에게 요구할 수 있는 일의 모든 것은, 어떤 특수적인 경험을 일반적 또는 보다 일반적인 경험의 차원으로까지 확대하고, 그에 의하여 이것을 다른 나라, 다른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경험으로서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p20 : 우리는 역사학과 민족학의 근본적인 차이가 대상에도, 목적에도 방법에도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싶다. 사회 생활이라는 같은 대상을 갖고 있으며, 인간의 훌륭한 이해라는 같은 목적을 갖고 있으며, 방법도 단지 연구의 구체적 절차의 비율이 다르다고 할 뿐인데 양자가 구별되는 것은, 오로지 상보적인 시점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 즉, 역사학은 사회 생활의 의식적인 표현과의 관련으로 자료를 정서구조화(organize)하고, 민족학은 무의식적 여러 조건과의 관련으로 자료를 정서구조화한다고 하는 것이다.
-> 리바이스는 역사가나 민족지학자가 특수한 사례들의 종합을 통해 보편적 진리를 도출해 내야 한다는 점에서 같다고 합니다. 대상, 목적, 방법도 대동소이합니다. 그렇다면 두 학문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역사학은 ‘의식적인 표현’을 연구자료로 사용하는 반면, 민족학은 ‘무의식적 여러 조건’에 대한 자료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무의식이라는 영역을 해석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정신분석학과 비슷하게 들립니다. 무의식의 구조를 포착하는 방법론에 있어서 정신분석학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다음 구절을 읽어봅시다.
p22 : 경험적으로 상이한 대상의 심부에 있어서의 동일성을 이 새로운 수준에서 보증하는 것은 같은 음소, 동일한 요소인 것이다.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둘의 닮은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현상인 것이다. 의식에서 무의식으로의 이행 과정은 특수에서 일반으로의 진행에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언어학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민족학에 있어서도 일반화를 기(23)초짓는 것은 비교가 아니다. 그 반대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믿고 있듯이 정신의 무의식적 활동이라는 것이, 어떤 내용에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이 형식이 근본적으로는 (언어에 나타나는 상징 기능의 연구가 뚜렷이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고대적, 근대적, 또는 미개, 문명의 여하를 불문하고 모든 정신에게 있어 동일한 것이라 한다면, 그것으로 다른 여러 제도, 다른 여러 관습에 관해서도 들어맞는 해석의 원리를 획득하려면, 하나하나의 제도가 관습의 밑바닥에 있는 무의식적 구조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되며, 또 밝히기만 하면 충분하다는 것이 된다. 물론 이 분석을 충분히 깊게 밀고 나가는 것이 그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이 무의식적 구조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민족학의 방법과 역사학의 방법이 만나는 곳이 여기이다. 역사적인 지식에 있어서, 분명코 불가결한(indispensable, 필수적인) 통시적 구조 문제를 여기서 상기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사회 생활의 어떤 발전이 통시적인 구조를 함유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음운론의 예는 이 연구가 훨씬 복잡한 것임을 민족학자에게 가르치며, 그리고 그들이 겨우 손대기 시작한 공시적 구조의 문제와는 다른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공시적 구조의 분석조차 줄곧 역사에 의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여러 제도의 변화를 밝히는 것에 의해, 역사만이 다양한 외부로의 발현 밑에 있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변하지 않는 구조라는 것을 밝혀내는 일을 가능하게 해준다.
-> 처음에 봤듯이 통시적인 접근은 특정한 지역을 고정해놓고 시간의 변화를 살피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 논했듯이 역사적인 지식은 본인에게 약점일 수 밖에 없는 이런 통시적인 접근이 필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엔 민족학자들은 같은 시간대를 상정하고 여러 지역의 특성을 비교하는 공시적 부분에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방식은 역사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역사에 의지할 필요가 있다고 리바이스는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통시성과 공시성을 모든 가지고 있는 역사적 시야에 의해 ‘구조’를 밝혀내야 합니다. 그것은 ‘여러 제도의 변화’를 추적하고 비교하며 보편성을 뽑아내는 것을 통해 가능합니다.
p24 : 캘리포니아의 모노 족, 요쿠트 족의 경우, 어떤 촌락에는 쌍분 조직이 있고, 어떤 촌락에는 이것이 없으며, 우리는 어떻게 하여 동일한 것이 없는데 동일한 사회적 도식이 정확하게 규정된 제도적인 하나의 형태를 관통하여, 혹은 그것의 외부에 실현될 수 있는 것인가를 연구할 수 있다. 이들 모든 경우에 있어, 어떤 것이 여전히 간직되어 있다. 그것은 역사적 관찰에 의해 점차로 획득되는 즉 일종의 필터를 통해 제도나 관습의 사서적인 내용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 여과되고, 구조적 요소만이 남는 것이다. 쌍분 조직의 경우 그러한 구조적 요소란, 다음의 세 가지인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는, 규칙상의 필요, 둘째는 자기와 타인과의 대립을 직접 통합할 수 있는 형식으로 간주되는 상호성의 개념, 셋째는 선물의 종합적 성격이다. 이러한 요소는 고찰된 모든 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고, 동시에 보다 미분화된 관행이나 관습에 관한 설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민족학은, 역사적 과정 및 사회적 현상의 최고도로 의식적인 여러 표현에 대해 무관심할 수는 없게 된다.
-> 인류학은 역사적 관찰이라는 필터를 통해 ‘제도나 관습의 서사적인 내용’을 간추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구조적 요소’입니다. 예를 들어 쌍분 조직에서는 구조적 요소를 규칙상의 필요, 상호성의 개념, 선물의 종합적 성격이라는 3가지로 추출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적 요소란 모든 사회에 공통된 보편적인 것이며 동시에 미시적인 각종 사례에 적용해 설명할 수 있는 ‘서사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민족학은 역사학과 언어학(의식적인 여러 표현)이라는 두 가지 방법론을 이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p24 : 하지만, 민족학이 그것들에(25)역사가와 같은 커다란 주의를 지향시킨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른바 일종의 뒷걸음질에 의해, 사건이나 반성에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다. 그 목표는, 인간이 그의 형성에 관해 생각하고 그리는 의식적이며 언제나 갖가지 인상을 초월하여, 무의식적 가능성이란 재산 목록을 입수하는 것에 있다. 무의식적 가능성이란 무제한으로 있는 것이 아니며, 그 목록 각각이 다른 모든 것과 양립될 수 있는지 없는지 하는 여러 관계는 역사적인 발전에 논리적인 구조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의미에 있어 맑스의 유명한 정식(“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하지만 역사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은 전반의 말로 역사학을 정당화하고, 후반의 말로 민족학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 된다. 그리고 동시에 이 정식은, 두 개의 대비점이 나누기 어려운 것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 이렇게 인류학이 역사학의 방법론을 대폭 수용하며 사이좋게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였는데, 아니였습니다. 리바이스는 다시 한번 인류학과 역사학이 다를 수 밖에 없음을 상기시키는 데요. 인류학이 역사학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역사학과는 다르게 어떤 사건의 특이성과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의식적 인상을 초월해 ‘무의식적 가능성’을 추적하는 것이 바로 인류학의 과제입니다. 그런데 무의식에 집중한다는 인류학의 목표는 의식의 영역을 추적하는 역사학과 완전히 나누기 어렵습니다.
p26 : 그러므로, 의식적 내용의 연구에서 무의식적 형식의 연구로라는 인간 인식의 길에 관하여, 역사가와 민족학자와는 반대 방향을 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부정확한 것이리라. 양자는 함께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들이 함께 하는 여정이 각각 다른 양태의 것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역사가에 있어서는 현재적인 것에서 암묵리의 함축적인 외양적인 것에서 explicit 내포적인 것으로 imlpicit, 민족 학자에게는 개별적인 것에 보편적인 것으로) 그것은 기본적인 접근법의 동일성을 조금도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걷는 길은 같은 방향(direction, 움직이는 방향)의 같은 길이지만, 방위 결정(orientation, 상대적 위치, 지향)만은 다르다. 즉, 민족학자는 그가 늘 잃어버리는 일이 없는 의식을 통해 지향하는 무의식에게도 가능한 한 구체적, 개별적 활동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며, 거기에서 멀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보다 풍부하고 완전한 전망에서 이것을 포착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 왜 리바이스는 앞 문단에서 역사학과 민족학을 나누기 어렵다고 하는 것일까요? 의식과 무의식은 완전히 다를 것 같은데 말이죠. 리바이스는 두 학문이 공히 가고자 하는 direction(목적지, 방향)가 같으나 그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 세부적으로 위치를 조정하는 점에 있어서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포착하고 다른 사례와 구분하며 그것의 특이성을 인정하며, 그것을 보편성 속에서 위치짓기 위해서 렌즈의 배율을 확대하기도 하고 축소하기도 하며, 큰 그림 속에서 살피기도 하고, 세부적인 것을 확대해 자세히 살피기도 합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개의 조건 속에서 원근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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