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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1 : 앞에서 엘킨이 토테미즘을 구하기 위해 어떤 시도를 했는지 살펴보았다. 두 반대 방향에서 자신의 전략을 끌어낸 것이다. 그는 래드클리프-브라운으로부터는 꼼꼼한 관찰 방법과 분류 취향을 말리노프시키로부터는 다소 성급한 일반화와 절충적 해결안을 이어받았다. 엘킨의 분석은 래드클리프-브라운의 교훈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며, 종합해보려는 태도는 말리노프스키의 그것과 비슷하다.
-> 레비스트로스는 다양한 인류학자들을 인용하며 각자에 대한 다른 방식으로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서술되어 있는 연구자들에 대한 포지셔닝을 계속 인지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을 독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말리노프스키는 토테미즘의 실체를 인정한다. 미국 비평가들에 대해 그가 제시한 답은 엘킨의 답처럼 실제 사례 속에서 토테미즘을 복구해 변별적 실체로 조각내는 게 아니라, 되찾아낸 토테미즘을 하나로 뭉뚱그려 직감적으로 포착하는 것이다.
(82) 그에게 토템의 문제는 세 가지 물음으로 요약된다. 왜 토테미즘은 동식물을 사용하는가? 그것은 인간에게 음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음식의 필요성이 원시인 의례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한다. 그것은 강렬하고도 변화무쌍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83) 숭배성은 식용할 수 있든 유용하든 혹은 위험하든 그 종을 통제하고 관리하려는 욕망과 연관된다. 그런 힘을 가진 신앙은 삶과 생명 공동체에 대한 개념을 이끌어낸다.
문제가 두 번 뒤집힌다. 토테미즘은 더 이상 문화 현상이 아니며 ‘자연 조건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가 된다. 그 기원과 표현에서 인류학이 아닌 생물학과 심리학이 부각된다. 왜 토테미즘이 존재하고, 왜 하필 각기 다른 형태로 존재하는가 하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 관(84)찰과 묘사, 분석은 부차적인 관심사에 지나지 않는다.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한데 누가 그걸 제기했나?) 그것이 왜 도처에 존재하지 않는가하는 것이다.
-> 세 가지 질문이라고 하는데, 왜 두 가지 질문 밖에 없을까?
(85) 지금까지는 특히 각 형태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시도를 했다. 하지만 우리가 원주민 사회의 과거를 전혀 혹은 거의 모르는 이상 그 기획은 억측과 사변이 될 수 있다.
래드클리프-브라운은 역사적 조사에서도 자연과학에서 영감을 받은 귀납적 방법을 이용한다. 복잡한 경험 사례들을 통해 몇 가지 간단한 원칙에 도달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토테미즘이 인간 사회 안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의 특별한 형태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까? 모든 문화에, 그러나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을까?”
-> 수많은 사례를 통해서 분석하는 자연과학과 같이 귀납법의 시도를 하는 래드클리프-브라운.
뒤르켐은 최초로 이런 용어들의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었다. 레드클리프-브라운은 뒤르켐에서 헌사를 바치며 성(holy)개념에 대한 불완전한 분석에서 출발해 자기 논의를 발전시킨다.
사회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선 씨족들이, 즉 사회를 구성하는 분절들의 지속과 연대가 보장되어야 한다. 이런 지속성과 연대성은 개인적 감정들을 통해서만 생겨날(86)수 있는데, 그것이 효과적으로 표명되기 위해서는 집단적 표현이 필요하며 그 과정에서 구체적 오브제에 시선이 고정되게 마련이다.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개인 감정 -> 의례화된 집단 행동 -> 집단을 대표하는 오브제 |
현대 사회에서 국기, 왕, 대통령 등과 같은 상징에 부여된 역할이 이런 식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왜 토테미즘은 동물 혹은 식물에 호소하는 것일까? 뒤르켐은 이런 현상에 대해 우연적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씨족의 지속성과 연속성은 그저 상징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뒤르켐이 보기에 동식물과 관련한 토테미즘은 일종의 ‘나중’ 현상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자연스럽게 그냥 만들어졌을 뿐이다. 반면 래드클리프-브라운은 의례화된 인간과 동물 관계는 토테미즘보다 더 종합적이고 방대한 틀을 제공한다고 본다. 그 의례화된 관계 내에서 토테미즘은 공고해지게 마련이다.
-> 레비스트로스는 뒤르켐 식의 후차적 서술을 비판한다. 뒤르켐은 그 기원적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사회적 필요에 의해 우연적으로 선택된 것이라는 것이다. 반면 래드클리프-브라운은 인간과 동물 관계는 토테미즘보다 먼저 공고하게 존재했다고 말한다. 그럼 그 공고하게 존재한 그것은 무엇인가?
p87 : 관찰해보면 늘 어디서나 암시되듯이 자연물에 대한 관심은 의례 행위를 불러일으키며, 의례 분할은 사회 분할로 이어지고, 단순한 토테미즘 문제는 사라지고 다른 문제가 생겨난다. 그러나 이것은 훨씬 더 일반적인 이점이 있다.
“우리가 원시적이라고 부르는 민족들 대다수의 의례와 신화에는 왜 동물과 다른 자연 종에 대한 의례적 태도가 있는 걸까?”
래드클리프-브라운은 앞선 분석들이 답을 마련해주었다고 생각한다. 한 사회의 정신적, 물질적 안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물이나 사건은 의례 행위의 대상이 되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만일 토테미즘이 사회적 상징으로서 사회 분할에 도움이 되도록 자연 종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토테미즘이 나타나기 이전에 이런 종들이 이미 의례로서 수행하는 행위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레드클리프-브라운은 뒤르켐의 해석을 뒤집는다. 뒤르켐의 해석에 따르면 토템은 의례 행위의 대상이다(뒤르켐식 언어로는 신성한 것들). 왜냐하면 토템은 사회적 상징으로 쓰이기 위해 요청되었기 때문이다. 래드클리프-브라운에게 자연은 사회 질서에 종속된다(88)기보다 사회 질서에 ‘동화’된다. 요컨대 그의 이런 사고 발전 과정에서 래드클리프-브라운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뒤르켐식 사고를 ‘자연화’한다. 자연과학에서 공공연히 차용한 방법은 사회적 요소를 전혀 다른 구도에 놓는 역설적 결과를 낳는다. 말하자면 인류학은 자연과학 방법론으로 옹호될 수 있고 그렇게 해서 인류학이 자연과학이라는 것이 다시 한번 확언되는 셈이다.
-> 뒤르켐은 사회질서가 요구하기 때문에 토템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즉 토템은 원래 신성했기 때문에 추앙된 것이 아니라, 사회의 필요에 의해 신성한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반면, 레드클리프-브라운은 자연적 질서에 사회적 질서와 동일한 면모가 있기 때문에 동화된다고 말한다. 즉 토템을 자연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연화’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자연화란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하는 과정’을 뜻한다. 따라서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강조하는 인식론은 형이상학을 다루는 철학을 거부하고, 지식습득을 위한 경험적 과정을 중시한다. 토템으로 특정한 동식물이 선택한 것에는 각기 해당되는 사물에 대한 반복되는 경험에 의한 특정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의례적 분할과 종교적 분할은 ‘자연적’ 관심사로 남는다. 말리노프스키처럼 래드클리프-브라운의 첫 번째 이론에 따르면, 동물은 우선 ‘먹기 좋을’ 때만 토템이 된다.
한데 필적한 만한 상대가 없는 조사관이었던 말리노프스키는 구체적인 문제가 대번에 일반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전체로서의 토테미즘을 연구하는 게 아니다. 가령 트로브리안드 군도에서 나타나는 특별한 형태에 대해 생물학적, 심리학적, 도덕적 고찰을 함으로써 그는 인류학과 역사학에도 자유로운 영역을 열어놓았다.
-> 앞서 ‘오스트레리아 유명론’에서 살펴봤듯이, 토테미즘이라는 도식에 끼워맞춰지는 개별사례가 아니라, 개별사례에 대한 개별적 이론을 다양한 관점에서 열린 태도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말리노프스키는 래드클리프-브라운과 다르다. 그런데 지금 이 설명은 이 챕터에서 처음 묘사한 구도와 반대이다. 레비스트로스가 이름을 착각한 걸까? 영어본을 살펴봐도 한글본과 똑같다.
p89 : 말리노프스키의 이런 언급을 보아도 토템 동물은 원주민 문화에서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순서는 해당 씨족에 부여된 서열로 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데, 이것은 토테미즘의 일반론과 모순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설명은 문화 체계에 의한 것이지 자연 체계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발상이 아니라 사회학적 발상인 것이다. 씨족의 서열을 고려하려면 말리노프스키는 가설을 더욱 구체화해야 한다. 그에 따르면 두 씨족은 바다에서 온 침략자에서 유래했고, 다른 두 씨족은 토착민을 대표한다. 가설은 역사적이고, 따라서 보편성을 주장하는 일반론과는 달리 비보편적이다.
방금 환기한 예들에서 그 관계가 경험된 것이 아니라 파악된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런 것들을 도식화하면서 정신은 ‘실제적’(practical)이기보다는 이론적인 목적성에 이끌리게 된다.
-> 지금 부분은 토템을 자연화 시키는 래드클리프-브라운을 비판하는 대목이다. 실제를 잘 설명하기 위해 이론이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을 위해서 현실이 조작된다는 것이다.
p90 : 거기서 토템인 동식물은 원주민 문화의 시각에서 파악될 수 있는 어떤 유용성도 제공하지 않는다.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관심 개념’을 조작해야 하며 매번 거기에 고유한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그 결과 경험적 요구가 처음부터 주어지고, 그것은 점점 언어유희로 논리 선점 오류로 혹은 동어 반복으로 변한다.
유용주의 해석에 대한 고집스러운 취향은 간혹 이상한 변증법을 만들어낸다. (91) 유용주의 및 자연주의에 근거한 이론은 내용물은 텅 빈, 그저 제안 정도에 불과할 수 있다.
p93 : 래드클리프-브라운이 생애 마지막 30년 동안 자신의 사고의 진화를 분명하게 의식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의 사고 안에 두 가지 경향이 공존했고, 때로는 하나가 때로는 다른 하나가 어떤 순간에 따라, 또는 어떤 경우에 따라 더 많이 나타났다. 점차 각 경향이 분명하고 섬세해지면서 훨씬 뚜렷하게 대립되나 그 경향 중 어떤 것이 마침내 우세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토테미즘에 대한 자신의 첫 이론을 도식화한 지 정확히 10년 후, 주술에 대한 래드클리프-브라운의 생각이 말리노프스키의 생각과 반대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너무 놀랄 것은 없다. 주술 현상에 대한 그의 해(94)석 방식이 말리노프스키의 그것과 매우 가깝고 그 자신이 이전에 제시한 개념과는 상당히 멀지만 말이다. 이 점에서만큼은 훨씬 일관된 말리노프스키는 토테미즘과 같은 방식으로 주술 의식을 다루었다. 사실 모든 의식과 주술은 출구가 불확실한 시도 속으로 들어가는 일로, 인간으로서 느끼는 근심을 없애거나 완화하는 수단이 된다. 주술은 그렇게 실제적이고 감정적인 합목적성을 갖는다.
-> 말리노프스키는 불완을 완화시키는 수단으로서 주술과 토템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토템의 기원은 인위적이다. 래드클리프-브라운은 반면에 토템 자체에 자연적 기원으로서의 원인적 특성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초기의 래드클리프-브라운의 이론이다. 그런데, 나중에 되면 래드클리프-브라운은 토템의 자연적 기원보다는 사회적 기원, 즉 인위적 발생론으로 전회하게 된 것일까?
p95 : “인류학 이론이 주술과 종교가 인간에게 자신감, 안정감, 편안함을 준다고 확언한다면, 거꾸로 그것이 인간에게 두려움, 불안 같은 감정을 생기게 하는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고도 말할 수 있다.”(Raddcliffe-Brown)
인간이 어떤 상황 속에서 불안감을 느껴 주술 의식에 호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주술 의식에 호소를 하니까 불안이 발생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한편 이런 논의는 래드클리프-브라운의 토테미즘에 관한 첫 번째 이론과 반대되는 것일 수 있다. 인간은 자신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동물 종과 식물 종에 대해 의례 행위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해주는 셈이다. 여기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이 관심이 자발적이고 무의식적인 관(96)심이라는 것이다. 토템 목록이 다양하고 기이하게 나타나는 것은 인간이 그것들에게서 어떤 관심거리를 발견해서라기보다 의례 행위 때문에 도리어 관심을 갖게 된 게 아닐까? 그러면서 이런 종들을 관찰하는 것이고?
-> 래드클리프-브라운의 첫 번째 이론은 특정 동식물이 특정한 토템이 되는 것에는 자연적 이유(특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동식물이 있음)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인용구절을 보면, 주술과 같은 사회적 요소를 통해 이런 감정이 인공적으로 주조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즉 래드클리프-브라운의 전회가 관측되는 것이다.
의례 때문에 불안이 생긴다 하고 설명을 마칠 수는 없다. 우선 불안이 존재하고, 훨씬 엄격한 설명한 필요한 행동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주관적으로 모호하게 내면의 무질서를 느끼는 방식으로, 그게 신체에서 오는 것인지 정신에서 오는 것인지 모를 수 있다. 지각적인 연결이 있다면, 그것은 분절된 행동과 무질서한 구조들 사이에서 찾아야 할 것이고, 거기에 이론이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이런 행동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감정의 막(幕) 위에 투사된 알 수 없는 현상들의 반영 사이에서 말이다.
-> 이런 래드클리프-브라운의 전회, 즉 사회적 기원설 역시 자연적 기원설 만큼이나 문제이다. 둘다 ‘불안’이라는 최종심급에서 탐색을 멈춘다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충동이나 본능적으로 그렇게 행동한다는 설명에서 멈추면 안된다고 말한다. 무의식적인 구조, 그 무질서한 구조까지도 들여다봐야한다는 걸까?
p97 : 말리노프스키 이론의 근본적인 폐단은 결과 혹은 동시에 발생한 현상에 불과한 것을 원인으로 간주한 것이다.
감정은 인간의 가장 모호한 측면인데, 거기에 끊임없이 도움을 청하려고 하는 것이다. 설명에 저항하는 것은 그 사실 자체로 설명되어 사용되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듯이다. 소여(The given)는 처음의 것이 아니다. 그 이전에 뭔가가 있다.
[그 뭔가를 설명하지 않는다면,]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믿으면서 문제에 또 다른 라벨을 붙이는 정도에 만족해야 한다.
이런 환상은 토테미즘에 대한 성찰을 그르친다. 래드클리프-브라운의 첫 번째 이론은 그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 지금까지 래드클리프-브라운을 향하는 비판의 이유가 말리노프스키에게 향하니 당황스럽다. 그렇다면, 래드클리프-브라운은 처음에만 말리노프스키처럼 생각해서 틀렸지만, 나중에는 말리노프스키와 다르게 설명했다는 의미인 것일까? 말리노프스키는 사회적 기원설을 주장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람 역시 사회적 행위가 감정을 일으키게 했다는 점에서 설명을 멈추기에 문제라는 것이다.
어쨌든 리바이스의 비판은 그 사물이 특정한 감정을 일으키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특정한 동식물을 선택한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프로이트가 부친 살해 충동을 역사적 사건으로 인식하는 걸 포기한다면(프로이트는 그런 것으로 보이지만), 토테미즘과 터부 같은 자주 반복되는 현상들 및 제도들에 의해 암시된 심리적 태도에 대한 총칭적이고 비시간적인 모델로서의 빈번한 잠재성의 상징적 표현을 볼 수 있을 것이다.(Kroeber)
하지만 문제는 거기 있지 않다. 프로이트가 지지하는 것과는 달리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사회적 강요는 그 기원에 대해서도, 그 고집스러운 지속성에 대해서도 수세기에 걸쳐 서로 다른 개인들에게 같은 성격으로 다시 나타나는 충동 혹은 감정 효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98)일 감정의 빈번함이 인습의 집요함을 설명한다면 의식의 기원은 감정의 출현과 일치하는 것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친 살해 충동이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전형적 상황에 상응한다고 할지라도 프로이트 이론은 변경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리바이스가 볼 때 프로이트의 문제는 기원으로서의 역사성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전형으로서 설명하는 것일지라도, 감정에 기반해서 특정한 스토리텔링을 하는 이론의 비과학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리바이스는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의 출현이라고 서술할까?
우리는 신앙의 첫 번째 기원에 대해서나, 아주 먼 과거 속에 침잠해 있는 뿌리, 즉 의식의 첫 번째 기원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며 알 수도 없으리라. 하지만 현재에 대한 것일 경우, 그 사회적 행위가 현재적 감정의 효과 아래 각 개인에 의해 즉각적으로 실행되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인간은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각자 개인으로서의 느낌에 따라 반응하는 게 아니다. 각 인간은 이러저러하게 안내되거나 규정되는 방식대로 느낀다. 인습은 내적 감정을 발생시키기에 앞서 외적 규준으로서 주어진다. 그리고 이런 무감각적 규준이 개인의 감정을 결정한다. 또한 그러한 감정이 할 수 있는 혹은 해야만 하는 개인의 감정을 표현한다.
그런데 만일 제도와 인습이 개인들의 감정에서 생기를 얻고 원기를 회복한다면, 즉 제도와 인습의 첫 기원이 그런 감정적인 것과 비슷한 것이라면 늘 분출하는 풍부한 것을 내포하게 마련이다. 그것이야말로 긍정적인 내용물인 것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그 내용물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 리바이스는 우리의 무의식적 감정들이 과거의 누적되어 있는 경험에 의해서 발생된 것이라는 설명을 경계한다. 감정은 인류의 누적된 무의식적 전승이 아니라, 문화적 요소에 의해 세례받은 후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런 감정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윈이 설명하듯이, 동물도 인간이 느끼는 많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진화심리학에서 설명하듯,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두운 장소에 대한 불안이나 무서움 등은 진화과정에서 생존에 도움이 되는 감정으로서 축적된 경험으로 전승되는 부분도 있다. 리바이스는 이렇듯 ‘아무것도 없다’는 설명을 부정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들뢰즈나 라캉은 이러한 환유적 요소, 즉 자리바꿈의 요소에서 등장하는 내용물이 빈 곳, 그 자리로서 존재하는 그 무의식이야말로 구조로서 중요하다고 말한다. 리바이스와 들뢰즈, 라캉의 주장은 어디에서 일치하고, 어디에서 갈라지는가?
p99 : 우리는 뒤르켐과 합류하는 듯하다. 하지만 뒤르켐은 마지막 분석에서 감정으로부터 여러 가지 사회적 현상을 끌어온다. 그의 토테미즘 이론은 필요에서 출발해 감정에 대한 호소로 완성된다.
-> 뒤르켐은 인위적 기원을 설명하나, 거기에 감정이라는 요인을 덧붙인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환기했다시피 토템이라는 것은 동물 혹은 식물 허상에 대한 인식의 결과이다. 그것은 우선 비형체성의 임의적인 기호일 뿐이다. 하지만 왜 인간은 그들 씨족의 친족성을 기호로 상징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로, 뒤르켐은 ‘본능적 경향’을 말하는데, 그것이 “저열한 문화의 인간들이 공동생활 속에 결합되어 이런 공동체 존재를 환기하는 이미지들을 몸에 그리거나 새긴다는 것이다”. 이런 ‘그래픽 본능’이 토테미즘의 기초가 되며, 신성에 대한 정감성으로 그것이 완성된다. 하지만 방금 비판한 것처럼 신성의 집단적 기원에 대한 뒤르켐의 이론은 논리 선점 오류이다. 그것은 의식을 발생시키거나 영속화하는 집회나 의식의 자리에서 느끼는 그때그때의 감정이 아니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의식 행위이다. 종교적 개념이 “흥분시키는 사회 환경 및 그 흥분 자체”(뒤르켐)에서 태어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 뒤르켐에 대한 리바이스 비판은 다음과 같다. 뒤르켐은 집회나 의식의 자리에서 그런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감정이 나타나 종교적인 형식화가 출현한다고 설명한다. 리바이스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도록 의식 행위가 짜여져 있기 때문에 그런 감정이 인위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감정이야말로 진짜이며, 그것은 인위성과 상관없이 자연에서 출현한다는 뒤르켐과 그것마저도 인위에서 출발한다는 리바이스의 주장이 대조된다.
사실상 충동과 감정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육체의 힘이든 정신의 무력함이든 그것은 항상 결과다. 두 가지 다 결과이지 결코 원인이 아니다. 생물학에서처럼 원인은 유기체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 혹은 인류학 및 심리학이 가는 독특한 길인 지성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
-> 리바이스는 정신분석학의 전제를 부정하고 있따. 무의식의 가능성을 믿지 않고 있다. 그럼 그가 말하고 있는 유기체, 몸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그리고 무의식과 다른 빅데이터, 즉 기원에 대해 스토리텔링하는 출처인 지성은 무엇이며 무의식과 어떻게 다른가? (각주) 지성은 ‘지각’된 것을 ‘정리’하고 ‘통일’하여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식’을 낳게 하는 ‘정신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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