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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부 귀로

39. 탁실라 유적

탁샤실라(석공들의 도시)’라는 산스크리트의 이름을 갖고 있었던 탁실라의 유적은 이중의 권곡 안에 있다. 깊이가 약 10km이며, 하로 강과 탐라 날라(708) 강이 합류하여 생긴 골짜기들로 이루어져있다. 이 언덕에는 1000~1200년 동안 사람이 살고 있었다. 가운데 언덕의 아래에 있는 비르 마운드는 가장 오래된 유적이다.

탁실라 유적지의 왕조 변천사(709~710).

B.C 5C 아케메네스 제국 학예중심지, B.C 326년 알렉산드로스 경유
B.C 3C 마우리아 제국 - 아소카 왕, 불교 전파
B.C 231 박트리아의 그리스인 왕 정복
B.C 80 스키타이인 정복
B.C 30 파르티아인 정복, 아폴로니우스 방문 추측
B.C 60 쿠샨 왕국이 주변을 점령하여 파르티아인과 경계 접함.
3C 훈족 점령
7C 현장 삼장 방문 시 쇠락, 흔적만 남음.

 

시르카프 페허는 사각형의 평면을 그리고 도로는 일직선으로 뻗어 있다. 중앙의 기념 건조물 쌍머리 독수리 제단은 대좌 위에 얕은 돋을새김의 세 개의 문이 있다. 하나는 그레코로만 양식의 삼각형 박공, 하나는 벵골풍의 종 모양, 세 번째 것은 고대 불교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탁실라는 헬레니즘 문화, 힌두 문화, 불교 문화, 조로아스터교의 페르시아가 공존했고 파르티아인과 스키타이인에 의한 중앙아시아의 초원문명도 여기서 그리스 영향과 접합되었다. 그 후 이슬람이 침입(710)해서 지금까지 정착했다. 기독교를 제외한 구세계의 문명의 모든 영향이 이곳에 모여있다. 구세계의 인간이 자신의 축소된 소우주를 잘 보여주고, 역사와의 유대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근원을 돌아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간다라의 예술을 만들고 고대 불교도들에게 신의 모습을 상상해내는 대담성을 불어넣어 주었던 조각들이 살았던 장소다(711).

델리의 무굴 궁전은 위압적이었다. 페허가 비치는 고대의 싸움터인지, 내버려진 토목공사장인지 틀이 잡히지 않는 고시가는(712) 환멸감을 주었다. 그곳도 영국군의 주둔지에 불과했다. 델리는 던져진 주사위들처럼 유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황야같았다. 이곳의 지배자들은 하나의 전통을 세워보려는 욕심으로 항상 그 전의 것을 몽땅 깨뜨려버리곤 했다(713).

무굴 황궁

무굴제국의 후마윤의 분묘는 전체적으로 봐서 아름답고 부분적으로도 정교하지만 전체와 부분 간의 유기적인 연관성을 포착할 수가 없다. 잠마 마스지드 대사원은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게끔 구상되었고 의도된 것이었다고 인정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714). 이슬람 문명의 매력은 아그라의 타지 마할 영묘에 있다. 이는 단순한 역사의 우연이나 정복에서가 아니라 더 깊은 친연 관계에 근거를 두고 있다. 1900년을 전후 해서 유럽화되어 흔적을 남기고 있었고 서양 세계에게도 인도 시대였다는 것을 이곳에서 납득할 수 있다(715). 아그라는 중세 페르시아, 아라비아 문명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716). 대리석을 모방한 구축물이다. 벽걸이 천을 치기 위한 기둥들이 남아 있고 라호르에서는 모자이크로 벽걸이 천의 흉내까지 내고 있다. 층계는 구조물로 구성되었다기보다 그저 되풀이되어 있다. 조형미술의 빈약성의 깊은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잠마 마스지드 대 사원

라호르 대학에서 조각 교육은 금지되어 있고 음악은 숨어서 밖에 하지 못하고 미술은 장식용의 기술로만 가르치고 있었다. 우상숭배는 여전히 인도에 건재하고 있다(717).

이슬람 예술은 전성기를 지나기가 무섭게 완전히 붕괴해버린 이유는 현실을 베끼는 그림을 배척한 데서 온 결과인가? 예술가들은 현실과의 접촉을 빼앗기고 핏기가 전혀 없는 묵은 전통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다. 시크 교파의 프레스코화는 저속하면서도 멋이 있고 대중적이면서도 우아한 데가 있다. 성채만을 예외로 한다면, 이슬람교도는 인도에 사원과 분묘밖에는 짓지 않았다.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닌 점에서 이슬람은 고독을 생각하기가 어려운 종교다. 삶이란 공동사회를 의미한다. 따라서 죽은 자도 언제나 하나의 공동사회의 틀 안에 자리잡는다(719). 이슬람 세계의 분묘는 사자를 위하는 것이 아닌 호화로운 기념관과 빈약한 거처로 나뉜다. 지나칠 정도면서도 실효가 없는 쾌적성이 있고 실질적인 불편성이 있으되 전자가 후자를 보상하고 있다. 희유(稀有)한 세련성의 결합이야말로 회교문명의 상징이다.

미학적 측면에서 이슬람의 엄격주의는 관능적 향락을 전면적으로 금하지 않고 향료·레이스·자수·정원 같은 완화된 형태로 제한하는 데 만족한다. 강제적 성격을 띠는 개종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관용이 베풀어지는 모순도 있다(720).

예언자 마오메트는 관용을 권함으로써 계시의 보편타당성과 복수 종교 신봉의 용인이라는 두 가지 모순에서 생기는 영속적인 위험 상태에 놓여 있게끔 만들었다. 이런 역설은 한편으로는 불안을 낳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만족의 근원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논리도 다 허사다. 이슬람교도들은 자유, 평등, 관용같은 보편적 가치를 설법하는 데서 허영심을 만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러한 대 원리를 실행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정함으로써 신용을 도리어 떨어뜨리고 있다(721).

이슬람의 모든 제도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젯거리들이 많이 쌓이게 내버려 두었다가 후에 가서 아주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식의 방법인 것 같다. 싸움터에 있는 동안 아내와 딸들의 정조 걱정을 간단히 해결했다. 얼굴을 베일로 가려서 집안에 가두어놓는다. 현대식 부르카는 밖을 내다볼 수 있게 장식끈이 붙은 창구멍이 있고, 똑딱단추와 끈이 달려 있으며, 완전히 몸을 싸 감출 수 있는 반면 무거운 천으로 되어 있어서 몸에 착 달라붙는 겉옷이다(722).

부르카

푸르다라는 여성 격리 풍속은 사랑의 밀통에 장애물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 여성들만이 그 사정에 정통하고 있는 여성들만의 세계를 만들어줌으로써 밀통을 돕게 된다. 하렘의 침입자는 일단 결혼하면 자기 하렘의 감시자가 되고 만다(723).

이슬람교도들의 형제애는 문화적·종교적 기반 위에 있다. 어떠한 경제적·사회적 성격도 띠고 있지 않다. 양립할 수 없는 감정으로 괴로워지면 그들은 자기들이 품고 있는 열등감을 아랍 정신과 결부시켜온 전통적인 승화의 방법-질투(724), 자존심, 영웅주의-를 써서 치유한다.

만성적인 고향상실증과 결부된 지역주의 근성은 바로 파키스탄의 국가 형성의 근원으로 종교적 신앙에 기반을 둔 공동체나 역사적 전통으로는 매우 불완전하게밖에는 설명될 수 없다. 파키스탄은 자기네끼리 함께 살기 위해서 철회가 불가능한 단 한 가지 선택과, 토지와 재산과 육친과 직업, 조상의 묘지까지 포기할 것을 강요한 하나의 집합적 의식의 드라마였다. 외부와 유대를 맺는 능력의 결핍 위에 구축된 대 종교, 이슬람의 불관용은 불관용을 유죄시하는 그들 자신들끼리의 세계에서는 자각되지 않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남이 인 채로 그대로 자기들과 함께 공존하는 것을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혹이나 굴욕에서 자신을 방어할 유일한 수단은 소멸시키는 데 있다. 이슬람의 형제애는 비신도 배척행위의 환위명제이다(비신도를 배척하는 행위가 곧 형제애라는 말). 그러나 이 배척행위는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공개적으로 한다면(725) 사실상 자신이 비신도의 실존을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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