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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역사3 / 4장 육체 / 푸코 / 2016.08.21.() /닥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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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은 공익의 실천으로서 널리 인정받았으며, 또한 수사학과 철학에 근접한 상위의 문화형태로서 인정받았다. 플루타르크는 의학이 복지와 건강에 관계되는 것인 만큼 그것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 했다. 한편 각자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는 의학적 지식을 스스로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은 너무 잦은 진료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자기실천의 근본 원리는 도움이 될 만한 말들을 배워서 숙지하여 항상 수중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학의 로고스는 바로 그러한 자기 실천의 원칙들에 속하는 것으로 매순간 양생술을 부추긴다.

건강에 대한 실천은 살아가는 공간과 환경, 장소, 시기에 대한 의학적 인식을 내포한다. 신체, 건강, 환경, 상황에 대한 염려라는 큰 틀 속에서 의학은 성적 쾌락의 문제를 제시한다. , 성적 쾌락의 성질과 메커니즘의 문제, 유기체에 대한 성적 쾌락의 긍정적 혹은 부정적 가치의 문제, 성적 쾌락이 따라야 할 양생술의 문제 등이 제기되는 것이다.

 

1. 갈레누스

 

아프로디지아에 대한 갈레누스의 분석은 죽음, 불멸, 생식 간의 관계에 대한 오래된 주제 내부에 자리 잡고 있다. 생식의 가능성은 영원성의 결여이다. 자연의 관심이자 자연이 노력을 기울인 것은 불멸의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근본적인 난관 해결을 위해 교묘한 어떤 것, 술책이 필요하다. 술책의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 수정에 사용되는 기관, 둘째, 예외적이고 아주 강렬한 쾌락, 셋째, 놀랍고 형언할 수 없는 그 기관을 이용하고자 하는 욕망. 성의 교묘함은 단지 미묘한 해부학적 배열과 세삼하게 정비된 메커니즘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쾌락과 욕망이 그러한 것들에 결합된 데에 있다. 아프로디지아는 워낙 격렬하기 때문에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이 굳이 그 이유를 몰라도 된다.

갈레누스 생리학의 특징은 먼저 해부학적 원칙에 의거해 남자 여자에게 성행위가 동형이라는 점이다. 그의 분석은 성행위의 메커니즘을 유기체 전체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시키는 동시에, 성행위를 개인의 건강과 종국에는 개인의 생명 자체를 연루시키는 과정으로 파악하는 이중의 결과를 담고 있다. 강렬한 욕망은 마음에 추가로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신체 메커니즘의 결과로 마음에 새겨진 것이라고 한다. 물질과 기관의 배치 때문이다. 이 메커니즘에서 쾌락의 요소가 있다. 먼저 체액의 축적이 있다. 고환의 체액은 물질적 요소이다. 억누르기 힘든 쾌락이다.

쾌락이 국부적으로 형성되어도 성행위시 작용하는 것은 몸 전체를 연루시킨다. 사정할 때 정액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프네우마이다. 프네우마가 형성되는 곳은 뇌의 복잡한 미궁이다. 액들의 소모가 계속된다면 몸 전체가 생명력을 빼앗긴 상태가 된다.

 

갈레누스의 생각에서 성행위와 간질, 경련현상 사이에 설정된 관계망을 이해할 수 있다. , 유사관계, 상사관계, 인과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성행위는 매커니즘 상 경련들의 대계보에 속한다. 간질과 성행위에 유사점이 있다. 간질은 진한 액으로 가득 차 있는 뇌충혈에 의해서 유발되는데, 이로 인해 프네우마가 머무르고 있는 뇌실로부터 나오는 맥관이 막히게 된다. 그러한 축적에 의해 프네우마는 갇히게 되며 고환 속에 정액과 함께 축정 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밖으로 나가려 하게 된다. 또 간질 발작은 성기에 경련을 일으키는 인과관계가 있다.

 

갈레누스가 세운 대이론체계 속에서 아프로디지아는 세 가지 차원 속에 차례로 자리잡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아프로디지아는 조물주의 섭리의 체계 속에 강하게 자리잡는다. 즉 아프로디지아는 창조의 지혜가 죽음 속에서 부딪힌 한계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신의 권능을 구조하러 오는 바로 그 지점에서 구상되고 배치된다. 두 번째로, 아프로디지아는 그 과정의 정확한 해부학적 자리잡기와 동시에 그것이 프네우마의 전체 구조 속에서 이끌어내는 결과들에 의해서 신체와의 복잡하고 부단한 상관관계의 작용 속에 위치한다. 마지막으로 아프로디지아는 질병 전체와 유사관계에 있는 거대한 영역 속에 자리잡고 그 내부에서 유사관계와 인과관계를 유지한다.

 

2. 성적 쾌락은 좋은가 나쁜가?

긍정적 가치평가에 속하는 것은 우선 씨, 정액에 대한 것이다. 자연은 이 귀중한 물질을 만들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징비하는데 그토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 씨가 수컷에게 우월성을 부여하며 건강 몸과 마음의 활력 생식에 기여한다. 성적 결합은 본능이기에 좋은 것이다. 그러나 성행위가 이루어질 때 내재적인 위험이 잇다. 정액이라는 귀중한 물질을 소모하는 것이 질병과 흡사하다. 성행위가 간질의 징후를 지니고 있다. 성적 쾌락의 역설이다. 양면성이 있는 것이다.

 

성적 활동 자체에 대한 병리학은 통상 성행위의 위험을 특징짓는 두 요소는 격렬한 무의식적 긴장, 고갈될 정도의 무한정한 소모 주위에서 구성된다. 한쪽에는 흥분의 메커니즘을 무한히 연장하면서 성행위를 유지하는 지속적 흥분병이 있다. 음경을 발기시키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이다. 병의 원인은 확장된 동맥의 구멍이나 신경에서의 프네우마의 생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전자가 더 의심된다. 여자의 경우도 성기의 소양증으로 나타난다. 성기의 과긴장으로 나타나는 병은 대표적으로 히스테리이다. 과부에게서 확인된다.

병리학의 또 하나의 극은 무한한 소모이다. 이것은 음경의 발기 없는 사정이다. 그 병에 걸린 젊은이는 게으르고 힘도 없고 무기력하고 우둔하고 의기소침하다. 이것은 수치스러운 병인데 지나친 성교로 비롯되는 병이고 그 자체로 남성의 숫기를 잃게 하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 죽음이 불가피하고 후손에게도 위험한 병이다.

 

성행위는 1, 2세기의 의학에 의해 병리학의 고유 영역을 넘어서서 복잡한 병원학의 교차로에 위치하게 된다. 아프로디지아가 아주 미약하게 그리고 아주 일시적으로 활동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유기체 전체에 끼치는 영향은 상당하고 매우 광범위하기 때문에 성행위의 시기나 정도에 어떤 편차가 있을 경우에 성적 쾌락으로 야기될 수 있는 악영향들, 즉 불쾌감이나 질병의 목록은 실로 무한하다. “만일 독의 흡수에 뒤따르는 질병과 같은 질병들이 우리의 몸속에 생겨나 우리를 점령해 버린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오염되고 억제되어 있던 부패한 점액이 병에 걸리기 쉬운 몸속에 불쾌한 증세를 일으킨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성적 활동은 어떤 경우에는 치료를 가능케 하며, 반대로 병을 일으키는 성질이 있다. 그러나 두 가지 중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를 측정하기란 어렵다. 그것은 개인적 기질이나 특별한 상황, 신체의 잠정적 상태에 달린 일이기 때문이다. 갈레누스 역시 성 관계에는 몸과 마음을 치료하는 많은 효과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주체가 처한 조건에 따라서 성 관계가 가져 올 수 있는 역효과에 대해서도 강조한다.

성행위의 긍정적 부정적 효과는 몽정의 문제로 논쟁이 전개되었다. 어떤 의사들은 경련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아이들이 첫 번째 성 관계를 맺는 시기를 앞당기도록 충고하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성적 금욕에 긍정적 효과를 부여하는 경향일 것이다. 장애들은 성관계를 자주 갖는 사람들에게서 관찰되는데, 그런 사람들에게서 성 관계의 중단은 양생술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온다. “본래는 가장 강했던 사람들이 무절제로 인해 가장 허약한 사람들보다도 더 허약해지며, 가장 허약한 사람들도 절제에 의해서 가장 강한 사람들 보다더 더 강해진다.”

반면에 여자들의 경우에는 금욕의 가치가 덜 인정받는데 그것은 여자는 사회적으로나 생리적으로 결혼과 출산을 위해 마련된 존재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성적 접촉은 개인의 건강이란 점에서는 자연스럽게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인류 보존의 의무만이 그 행위를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만드는데, 즉 그 행위를 부과하는 것은 개체의 양생술 이상으로 자연의 일반법칙이다.

4세기의 의학적, 철학적 사고에 의해서 이미 명시화되었던 논지들이 발전되면서, 우리는 어떻게 모종의 굴절이 발생하는지를 보게 된다. 즉 성적 활동이 낳는 결과의 모호성에 대한 주장, 유기체 전체를 통해서 성적 활동에 인정된 상관관계들의 확장, 유기체 자체의 취약함과 그것의 병리학적 힘에 대한 강조, 양생에 있어서의 금욕행위에 대한 가치 부여 등이다.

 

3. 쾌락의 관리법

 

성행위는 극도로 주의 깊은 관리법에 따라야 한다. 관리법은 자연스러운 형태를 규정하려는 규제체제와는 아주 다르다. 규범적이기보다 양보적이다. 성행위를 가장 덜 방해하는 조건들, 성행위가 평형의 총체에 가장 덜 영향을 주는 조건들을 결정하는데 많은 주의를 요하는 상황적 관리법이다. 출산에 유용한 시간, 주체의 연령, 시기(계절), 개인의 체질 이상 네 가지 변수가 고려된다.

 

아프로디지아의 관리법과 출산,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서는 훌륭한 자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전통적 주제다. 아이를 낳으려는 이들은 영혼과 육체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 요점은 개인이 완전히 건강을 누리는 시기를 선택하는데 있다. 자손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번식자가 자손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의무라는 형식 하에서 이다. 좋은 자질을 부여받는 자손을 얻는 다는 것은 그에게 유익한 일이기 때문이다. 자기 삶에서 자신을 그다지 중용시하지 않는 인간들은 자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갈레누스는 지적하면서 소크라테스의 자기 배려의 주제를 되풀이한다.

 

주체의 연령, 아프로디지아의 활용은 너무 늦게까지 계속되어서도 안 되고 너무 일찍 시작되어서도 안된다. 늙었을 때의 성관계는 육체를 쇠진하게 한다. 너무 젊을 때도 해를 끼친다. “정액의 생산이 14세에서 시작되어 젊은이들은 자신들을 성관계로 치닫게 하는 욕구가 있어 그를 피로하게 함으로 욕망을 억제할 수 있도록 육체단련이 많아야 한다.”

여자는 월경이 자연적으로 자리잡을 때까지는 처녀로 남아있는 것이 좋다. 루푸스가 제안하는 해결책은 상대적으로 늦게 결혼시키되, 이미 이차성징부터 처녀들의 삶에 수반되었던 모든 관리법에 따라 결혼을 준비하는 것이다. 노래하고 합창하는 참여하는 것이 최상의 운동형태라고 보았다.

 

알맞은 때, 성행위의 카이로스는 많은 토론의 대상이 된다. 최상의 계절은 겨울과 봄이고, 가을은 반반이다. 여름엔 금욕해야 한다. 가장 알맞은 시간은 절제된 식사 후의 시간, 취침 전이다.

 

성교에 적합한 체질은 다소 뜨겁고 습한 체질이다.

 

4. 영혼의 작업

 

성적 쾌락을 위해 제기되는 관리법은 전적으로 육체에 중점을 두고 있는 듯 보이지만 영혼도 고유한 역할이 있기 때문에 의사들은 영혼을 개입시킨다.

분별 있는 영혼은 두 가지 역할을 갖는다. 영혼은 육체에 교유한 본성과 경향, 육체가 처해 있는 상태와 전황에 의해 규정되는 관리법을 정해주어야 할 것이다. 성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혼과 육체의 완전한 관리법이다. 육체를 그 자체의 법칙에 따라 인도할 수 있도록 영혼이 스스로를 교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은 주체가 유기체의 실제적 필요를 넘어서게 할 위험이 있는 세 가지 요소, 욕망의 움직임, 이미지의 존재, 쾌락에의 집착이라는 세 가지 요소와 관련하여 의사들에 의해 기술되었다.

 

의학요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욕망의 제거가 아니다. 욕망은 두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어서 육체에서도 영혼에서 나타난다. 관리법에서 문제가 자리 잡게 되는 것은 바로 양자의 상호 관계 속에서이다. “최상의 것은 인간이 영혼의 욕망과 육체의 요구에 의하여 동시에 재촉 받을 때 성행위에 전념하는 것이다.”

영혼이 육체 안에서 나타는 욕망의 형태를 벗어날 때를 독사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루푸스는 영혼을 굴복시키고 그것을 육체에 복속 시켜라 라는 정식을 제시한다. 이 명제는 스토아주의가 불어넣었을 이론적, 의학적 맥락 속에서 파악되야 한다. 육체에의 자발적 복종은 자연의 질서를 주재하고 육체의 구조를 정비한 이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동물의 쾌락은 즐거운 것이다. 대소변의 배설만큼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의학요법은 일종의 에피투미아(뭔가를 좋아하는 것)의 동물화를 제안한다. 그것은 영혼의 욕망이 육체의 욕구에 가능한 한 엄격하게 종속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이미지들(phantasiai)에 대한 의사들의 일반적 불신이 기원한다. 영혼에 육체적 욕구와 상관없는 공허한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이미지들은 여러 유형이 있다. 꿈의 이미지가 있다. 의사들은 꿈의 이미지가 몽정을 수반할 때 특히 관심을 기울인다. 이미지의 문제가 애정문학에서 매우 많이 논의 되었다는 것을 상기할 수 있다. 시선은 정념의 가장 확실한 전달수단으로 간주되었으며, 정념이 가슴속에 파고들고 유지되는 것도 시선에 의해서이다. 사랑에 관한 이미지들에 대한 온갖 테크닉이 존재한다.

 

쾌락의 문제가 남는다. 쾌락을 없애버리거나 사랃믈이 느끼지 못하도록 할 수 있을까? 갈레누스는 쾌락이 과도하게 흐르는 것을 아프로디지아의 경제성 속에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합리적 관리를 위해서 쾌락을 목적으로 추구하지 않고 아프로디지아를 행해야 한다. 디오게네스는 사정의 쾌락을 추구하지 않은 채 자신의 정액을 배출하기를 원했다. 여기서 수음과 자위는 긍정적으로 다루어진다. 그러나 기독교 수도원이후의 문헌에서는 수음이 상상력이 만들어낸 망상과 위험으로 남아있다. 반면 기원 후 초기 몇 세기의 의학윤리에서 수음은 쓸데없는 욕망이나 이미지, 쾌락을 가장 철저히 배제한 형태이다.

 

성의 양생술보다 영양섭취의 양생술에 더 많은 자리를 부여하는 것은 그리스, 로마의 의학 전체에서 나타난 공통된 특징이다. 성과 성의 관리법이 음식물 처방보다 우세해지는 때가 유럽 사회의 윤리사에서 중요한 순간이다.

 

이러한 의학적 관리법에서 우리는 성행위에 대한 일종의 병리학화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서구사회의 병리학화는 성 행동은 정상적 형태와 병적 형태, 질병학, 치료학을 보유하는 하나의 영역으로 조직된다. 하지만 그리스 로마의 의학은 성행위를 유기체의 동요로 인하여 매 순간 영향을 받고 장애를 일으킬 위험이 있는 영역 속으로 그래서 역으로 끊임없이 직간접적으로 다양한 질병을 도래할 수 있는 영역 속으로 편입시킨다.

크레시스 아프로디지온의 의학이 성 행동의 병리적 형태의 범위를 정하려 하지 않았다. 성행위 근원에 있는 수동성은 파토스란 용어의 이중적 의미에 따르면 병의 근원이기도 하다. 성행위는 하나의 병이 아니라 그로부터 끊임없이 다양한 질병이 발생할 수 있는 영원한 질병의 발생지이다.

 

이러한 의학이 말하는 성행위에서 주의가 요구되는 것은 주체가 자신이 따라야만 할 규칙들을 지속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자기 내부의 모호한 욕망을 추적할 것이 아니라 아무런 위험이나 손실 없이 적절하게 쾌락행위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작용하게 마련인 조건들을 알아보아야 한다. 자기 자신을 진리의 담론에 붙들어 두어야 한다. 담론은 주체에게 성행위의 본질과 관련하여 성행위를 어떻게 하는 것이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하고 엄밀하게 그 본질에 순응하는 것인가를 가르쳐야 한다. 캉길렘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치유를 가능케 하는 것은 의학적 활동 안에서의 건강한 상태이며 의사가 아니라 건강의 환자를 치유하며, 일반적으로 기술적 생산물의 책임은 장인이 아니라 기술에 귀착되며, 기술, 그것은 자연적 로고스의 비반성적 목적성이라고 말했다.

 

섭생법적 충고 이후에 기독교 도덕과 의학적 사유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계율 사이에 많은 유사점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만 말한다면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 유형에 연관된 따라서 주체가 자신에 대해 갖는 경험 내로 계율들을 통합하는 형태에 연관된 근본적 차이점들을 무시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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