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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 3_ 제5장 아내_윤명_샘.hwp

우리는 크세노폰, 이소크라테스, 플라톤, 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결혼생활을 잘 이끌도록 하기 위해 남편들에게 어떤 까다로운 계율을 부과했는지 보았다. 아내가 누릴 수 있는 특권, 아내에 대한 올바른 태도, 아내에게 모범이 되고 아내를 교육하는 데 드는 수고, 이 모든 것은 단순한 생식적 기능을 훨씬 넘어선 어떤 관계양상을 암시한다. 특히 결혼한 남자가 한 가정의 가장이자 명망 높은 시민, 또 타인에게 정치적·도덕적 권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사람이었던 만큼 결혼은 남편에게 특별한 행동양식을 요구했다. 그런데 결혼의 기술에서 현명하고 절도 있고 정당한 남자의 행동에 특수한 형태를 부여해야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지배의 필요성이었다.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까지의 시기에 나온 일련의 텍스트들에서 결혼행동의 윤리는 상당히 다르게 조명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결혼관습에 나타나는 어떤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로, 부부 사이의 인격적 관계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행해야 할 여러 중요한 책무 중 하나라기보다 주변의 다른 모든 것을 조직하고, 파생시키면서 거기에 힘을 부여하는 일차적이고도 근본적인 요소로서 간주되었던 것 같다. 요컨대 결혼생활에서의 처신술은 지배의 테크닉보다 개인적 유대의 양식에 의해 더 많이 정의될 것이다. 두 번째로, 결혼한 남자의 행동의 절제 원칙은 타인에 대한 지배보다는 서로에 대한 의무에 속한다는 점이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자기에게 행사하는 자신의 주권이 점점 더 타인에 대한 의무의 이행과 특히 아내에 대한 어떤 존경의 실행으로 표명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자기에 대한 배려의 강화는 타인에 대한 가치부여와 병행한다. 결국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유대와 균형으로서의 결혼의 기술이 부부간의 성 관계에 상대적으로 더욱 중요한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는 점이다. 예로 출산에 대한 관심은 사랑이나 화목, 상호 공감 등과 같은 다른 의미 및 다른 가치들과 결합한다.

이제 부부생활의 양식은 결혼생활에 대한 전통적 계율로부터 해방된다. 우리는 이러한 양식을 부부 유대의 기술, 성적 독점의 주장, 마침내 공유된 쾌락의 미학 속에서 상당히 잘 찾아볼 수 있다.

 

부부의 유대

쌍수적 관계

무소니우스: 그의 여러 공식에서 우리는 생식적목적에서 공동체적목적으로 강조점이 전이되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단지 자손을 갖는 것만이 문제가 된다면 사람도 동물과 똑같이 결합하였다가 바로 결별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사람들이 그런 지승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바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과 자식을 함께 양육한다는 것은 본질적 형태가 갖는 두 측면이다.

무소니우스는 인류가 처음 남자와 여자로 분리될 때를 언급하면서 창조자가 양성을 분리한 이후에 그 둘을 다시 접근시키기 원했던 사실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해 본다. 무소니우스가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창조자는 양성 각각에게 격렬한 욕망’, ‘교접과 동시에 결합-호밀리아(homilia, 성 관계)와 코이노니아(koinonia, 공동체적 삶)-욕망을 불어넣음으로써 그들을 근접시켰다. 극도로 격렬한 욕망은 성적 결합을 이끄는 움직임뿐만 아니라 삶의 공유로 향하는 움직임을 특징짓는다. 반대로 양성 사이에서 일어나는 성적 관계는 두 객체를 관심, 정감, 영혼의 공유를 통해 서로 연결하는 관계와 마찬가지로 합리적 차원에 속한다. 결국 성 관계와 공동체적 삶에서 드러나는 동일한 자연적 경향이 동등한 강도와 동일한 유형의 합리성을 지니고 삶에서의 합일과 육체의 결합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결혼을 본질적 목적으로서 직접 결혼으로 이끄는, 그리하여 결혼을 통하여 공동의 자손과 삶의 동반관계라는 결혼에 내재된 두 결과로 이끄는 원초적이고 단일한 경향에 뿌리박고 있다. 결혼의 자연스러움은 그 행위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결과들에서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며, 원래부터 결혼을 바람직한 목적으로 설정하는 어떤 경향의 존재에서 이미 예고된다.

히에로클레스 또한 유사한 방식으로 결혼을 어떻게 보면 이원인 인간의 본성에 근거 짓는다. 무소니우스와 마찬가지로 히에로클레스도 자연이 결혼에 위상을 마련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개인으로 하여금 본능적으로 결혼에 이끌리도록 부추긴다고 주장한다. 자연은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현자 또한 결혼으로 이끈다. 결혼을 추진하는 움직임에서 자연과 이성은 서로 일치한다. 그러나 히에로클레스가 짝을 지어 사는 인간 존재의 쌍서적 특성과 무리를 이루어 사는 군서적특성을 마치 양립할 수 없는 두 가능성인 양 서로 대립시키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인간은 짝을 이루어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수 속에서도 살도록 만들어졌다. 인간은 부부생활을 하는 동시에 사회적이며, 쌍수적 관계와 다수적 관계는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전 생애에 걸쳐서, 그리고 생의 모든 측면에서 부부의 쌍수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동물로서, 이성적 생물로서, 이성에 의해 인류에 연결된 개인으로서, 어쨌든 인간은 부부적 존재이다.

 

보편적 관계

결혼에 호의적인 스토아학파 철학자 무소니우스와 에픽테투스나 히에로클레스의 관점에서 결혼한다는 것은 더 나은 것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의무이다. 결혼관계는 보편적 규율에 속한다. 이와 같은 일반적 원칙은 두 유형의 성찰에 근거한다. 인간 존재는 자연적인 동시에 이성적이므로 결혼은 자연을 따르는 것이며, 인간은 누구나 동일한 충동에 의해 결혼으로 인도된다. 또한 인간 존재가 스스로를 공동체의 구성원이자 인류의 일부로서 인정하는 한 피해서는 안 될 임무와 의무의 총체 중 하나로 포함되어 있다. , 결혼은 개별적 존재가 모든 사람에 대한 가치를 지니게끔 해 주는 의무들 중 하나이다.

에픽테투스는 세 가지 논거를 들어 그에게 반박한다. 첫 번째는 결혼의 직접적 유용성과, 결혼 포기를 보편화한다는 것의 불가능성에 의거한다. 만일 모든 사람이 결혼하기를 거부한다면 시민들은 어디서 생겨나겠는가? 누가 그들을 키우겠는가? 누가 장정들을 감독하겠는가? 그들의 교육은 어떻게 되겠는가?” 두 번째는 결혼을 사회적 책무로 정의한다. 이러한 책무를 그 누구도 회피해서는 안 되는데 시민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 결혼하는 것, 아이들을 갖는 것, 신을 경배하는 것, 부모를 돌보는 것이 바로 사회적 책무들이다. 마지막으로, 이성이 복종할 것을 명령한 행위의 자연성에 의거한다. “자연에 부합하는 행위에서 우리의 열기를 돋우고 우리를 자제하기 위해서는 사제나 하녀처럼 쾌락을 의무에 복속시켜야 한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결혼을 해야 한다는 원칙은 결혼의 이익과 불편함을 비교하는 문제와 분리되어 자연에 부합하고 만인에게 유용하므로 보편성을 띠는 삶을 선택하라는 요구로서 모두에게 표현된다. “당신은 벌과 손실을 입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의무를 행하지 않았다는 바로 그 손실이죠. 당신은 당신 안에 존재하는 충실하고, 위엄 있고, 절도 있는 사람을 망가뜨릴 것입니다. 그보다 더 중대한 손실을 찾으려고 하진 마십시오.”

여러 상황 중에 오랫동안 토론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철학적 삶의 선택이다. 철학자의 목표(자기 영혼의 배려, 정념의 정복, 정신의 평온의 추구)는 전통적으로 결혼생활의 동요나 혼란이라고 묘사되는 것과 양립불가능하다. 간단히 말해서 철학적 삶의 독특한 양식과 결혼의 의무적 오구들을 일치시키는 것은 어렵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두 개의 중요한 텍스트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뿐 아니라 문제의 여건을 제기하는 데에도 전적으로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무소니우스는 철학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결혼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철학자의 첫 번째 역할을 자연에 자신을 일치시키고, 자연에서 유래하는 모든 의무를 수행하면서 살아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자는 그 누구보다도 훨씬 더 이를 잘 수행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의 역할은 단지 이성에 따라 사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모든 사람에게 이성적 삶의 본보기이자 그러한 삶으로 인도하는 스승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혼생활은 철학과 양립할 수 없기는커녕 철학에 두 배의 책무를 부여하는데, 하나는 자기 자신에게 보편적으로 유효한 삶의 형태를 부여할 의무이며, 다른 하나는 타인에게 삶의 모범을 보일 필수성이다.

에픽테투스는 이상적 견유주의자란 철학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무대에 올라 인간을 불러모아서 그들의 삶의 방식을 질책하는 공공의 교육자이자 진리의 전령이며 제우스가 인간에게 보낸 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혼하면 사람들은 사사로운 의무들에 얽매이게 되는데, 이상적 견유주의자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감독하고 그들의 후원자가 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자 하며, 의사처럼 순회 왕진을 하고” “모든 사람들을 진맥해야하기 때문에 결혼을 포기해야 한다. 모든 개인적 관계를 포기한다는 것은 그가 철학자로서 인류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가족이 없다. 왜냐하면 그의 가족은 바로 인류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가 없다. 왜냐하면 어떤 점에서 보면 그는 모든 남자와 여자를 낳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견유주의자가 개개의 가정에 전념할 수 없는 까닭은 바로 보편적 가족을 떠맡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잘 납득해야 한다. 이런 전투적 철학자에게서 나타나는 결혼의 거부는 본질적 강요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황적 필요성에 속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사람이 자신의 본질적 본성에 부합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면 철학자의 독신생활은 사라져 버리리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독특한 관계

제국 시대의 철학자들은 부부간의 유대는 다른 어떤 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긴밀한 것으로 생각했으며 온갖 삶의 양식을 규정지었다. 결혼생활은 상호보완적 과업과 행동의 분배로 특징지어진다. 남자는 여자가 수행할 수 없는 일을 해야 했고, 아내는 나름대로 남편의 소관이 아닌 일들을 수행했다. 남편과 아내의 서로 다른 활동과 생활양식에 가정의 번영이라는 동일한 목표는 당연히 통일성을 부여했다. 결혼은 두 배우자가 각각 자신의 삶을 둘의 삶으로 이끌어 함께 공통된 하나의 삶을 이루어내는 어떤 행동양식을 촉구한다.

무소니우스는 훌륭한 결혼을 한 부부들이 느끼는, 함께 있으려는 욕구를 강조한다. 아내에게는 남편의, 남편에게는 아내의 부재만큼이나 참기 어려운 부재는 없으며, 슬픔을 줄이고 기쁨을 키우고 불운을 극복하는 데는 그 어떠한 것도 그러한 힘을 가지지 못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에 의하면 훌륭한 결혼은 호모노이아(homonoia)에 기초한다. 부부가 결혼생활에서 구축해야 할 것은 바로 진정한 윤리적 단일체인 것이다.

우리는 텍스트들에서 비록 단편적일지라도 부부생활의 뚜렷한 모델의 초안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이 모델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상대방과의 관계는 혈연관계도 애정관계도 아니다. 그것은 결혼이라는 제도적 형태 내에서, 그리고 그 형태에 중첩되는 공동생활 내에서 조직되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이다. 가족체계, 또는 다양한 애정의 그물망이 사회적 중요성의 대부분을 차지했음은 틀림없지만, 삶의 기술에서 성이 다른 두 사람을 연결하는 유대에 비교하면 약간 그 가치를 잃는다. 존재론적인 동시에 윤리적인 자연적 특권이 다른 모든 것들을 희생시켜 이 쌍수적이고 이성적인 관계에 부여된 것이다.

아내라는 여자와의 관계가 삶에 본질적이라면, 또 인간 존재가 누군가와 공유하는 삶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본성을 실현하는 부부적 개인이라면,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와 타인과 맺는 관계 사이에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양립불가능성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부부생활의 기술은 자기 연마의 필수불가결한 일부분이 된 것이다. 그러나 자기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간지 결혼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결혼생활에 심사숙고한 형태와 특별한 양식을 부여해야 한다. 각자의 삶에 그토록 뚜렷한 흔적을 남기는 부분의 유대 속에서 배우자는 특정한 파트너로서 자신과 동일한 존재이자 자신과 함께 실질적 단일체를 형성하는 원소로 취급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 연마 면에서 결혼의 주제가 갖는 모순이며, 자기 연마를 발전시켰던 철학 전체가 갖는 모순이다. , 그러한 철학에서는 여자-아내가 무엇보다도 타자로서 평가되지만, 남편은 그녀를 자기와 함께 단일체를 구성하는 요소로 인정해야 한다.

 

2. 독점의 문제

고전시기의 텍스트들에서 결혼관계와 성 관계는 번식이라는 주된 이유 때문에 통합될 수 있었다. 또한, 적어도 남자들에게 있어서는 성행위의 본성 자체고, 결혼 자체의 본질도 쾌락이 부부관계 내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함축하지는 않았다. 비합법적 출산의 문제와 자기 지배라는 윤리적 요구를 제외한다면, 비록 기혼남이라 할지라도 그의 모든 성적 쾌락을 오로지 아내를 위해서만 남겨두라고 강요받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기원후 초기 몇 세기에 표명된 것으로 보이는 엄격한 결혼윤리에서 성 관계의 직접적인 동시에 상호적인 부부화라고 명명할 수 있을 만한 것을 쉽사리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직접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결혼 외부에서 성 관계를 갖는 것을 배제해야 한다는 점이 성 관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또한 상호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다른 곳에서도 구할 수 있을 성적 쾌락을 배제하는 것이 결혼의 본질이며 부부사이에서 형성되는 유대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지 않는 한 쾌락을 절대적으로 삼가라고 그에게 강요하기란 엄격한 도덕 내에서도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성적 쾌락을 절제한 이들의 표현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 덕성의 요점은 그가 쾌락을 단지 결혼에만 유보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을 잘 지배하여 보통 사람들보다 더 오랫동안 성적 쾌락을 맛보는 순간을 기다릴 줄 알았다는 사실에 있다. 에픽테투스는 성 관계에 극도의 제한을 두는 이유를 사람이 신의 단편인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같은 엄중함을 지키는 데는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의식보다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상기함이 항구적 원칙이 되어야 한다. “성관계를 맺을 때의 그대는 누구인가, 관계를 행하는 그대는? 그대가 사회생활을 하고 육체를 단련하고 대화를 하는 동안 그대가 양육하는 것은 하나의 신이라는 것을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모든 것을 보고 듣고 있는 그대 안에 현존하는 신 앞에서 그대 자신의 본성을 알지 못하는 인간, 신의 분노를 입을 그대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행하면서도 얼굴을 붉히지 않는구나.”

반면에 무소니우스는 성 관계가 부부의 틀 안에서 성 관계 고유의 목표에 입각하여 전개되지 않을 때에는 모든 성 관계를 비난하므로 그는 성적 활동의 전적인 부부화를 지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피임은 인구를 유지하는 데 주의하는 국가의 법률에 위배되며, 자손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유익할 일인 만큼 개인에게도 해가 되는 행동이었다. 그에게 성행위, 부부의 유대, 자손, 가족, 국가와 내세, 인간 공동체, 이 모든 것은 각 요소들이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계열을 이루며, 이러한 계열에서 인간의 삶은 합리적 형태를 발견한다. 여기서 쾌락을 끌어내어 부부관계로부터 분리하고 다른 목적을 제시하는 것은 사실상 인간 존재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을 침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결혼은 인간 존재에게 성적결합과 아프로디지아의 활용의 유일한 합법적 틀이다.

 

이처럼 성적 관계와 쾌락이 합법적 부부관계에 소속됨으로써 우리는 간통이 새로이 문제시되고 이중적 성적 정절의 요구가 나타난 것을 이해하게 된다.

간통이 오로지 남편의 권리 침해로만 정의되는 것은 에픽테투스의 도덕처럼 까다로운 도덕에서까지도 찾아볼 수 있을 만큼 일반적이었다. 에픽테투스는 간통을 행할 경우, ‘남자가 정절을 위해 태어났다는 정절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절을 결혼제도의 틀 안에 국한시키지 않았으며, 부부관계를 본질적 형태들 중 하나로 제시하지도 않는다. 간통이 과오가 되는 이유는 각자 타인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인지하도록 요구받는 남자들 간의 관계망에 간통이 균열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간통에 대한 이러한 전통적 성격규정에 상관없이, 우리는 결혼생활에 대한 몇몇 성찰에서 드러나는 더욱 엄격해진 오구들-남자와 여자 사이에 대등함의 원칙을 점점 더 작용시키고 이 대등함의 정당성을 두 부부 사이의 인격적 관계에 대한 존중에 관련시킨다는 이중적 의미에서-을 볼 수 있다.

무소니우스는 <아프로디지아에 관하여>에서 하녀의 문제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여노의 쾌락적 활용을 금지하는데, 그 근거로 대칭의 원칙을 강조한다. 비록 가족을 감독하는 데 남자가 여자보다 더 많은 권리를 갖는 것이 합법적인 동시에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할지라도, 무소니우스는 성적 관계와 쾌락의 차원에서는 정확한 대칭을 요구한다. 한편 이러한 권리상의 대칭은 도덕적 지배의 차원에서 남자의 우월성을 분명히 드러낼 필요성에 의해 완성된다. 남자가 실제로 우월한 사람이 되려면 그는 여자에게 금하는 것을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절형태는 부부의 유대를 쾌락의 활용 면에서 책무들을 정확히 평형화하는 체계처럼 보이게 한다.

<가정관리술>(저자 아리스토텔레스로 추정)에선 정절의 가치를 전적으로 강조하면서도, 아내에게 남편의 과오에 관련된 문제에서는 그녀가 상대적으로 타협적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라고 분명히 이야기한다. “그녀는 또한 남편이 마음의 혼란으로 그녀에게 저지른 잘못들을 잊어야 한다.”, “그녀는 그가 행한 것에 대해 어떤 불평도 해서는 안 되며 용서하지 않아서도 안 된다. 반대로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병이나 무경험, 또는 우연한 실수로 돌려야 한다.” 반면에 남편은 치유된 이후에 아내에게 감사의 마음을 보일 용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부부의 계율>(저자 플루타르코스>에선 정절의 원칙을 형식상으로 정확히 대칭적인 요구로 표명하지 않는다. 아내들은 모르는 척하는 것이 더 나을 뿐만 아니라 남편이 창녀나 하녀와 쾌락을 추구하더라도 이는 남편이 그녀에 대한 존경에서 자신의 방탕과 방종과 무절제를 그녀와 공유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제 남편이 밖에서 얻는 쾌락은 더 이상 남편의 신분적 우월성을 인정하는 결과가 아니라 아내가 자신의 명예를 보전하면서도 양보와 관용을 통해 남편에게 자신의 애정을 증명해 보이는 만큼 남편 스스로가 더욱더 제한해야 하는 어떤 품행상의 과실의 결과이다.

 

3. 결혼의 쾌락

아내를 정부처럼 대해서는 안 되며 결혼생활에서는 애인이 아니라 남편으로서 처신해야 한다는 원칙을 발견할 수 있다. 아프로디테와 에로스는 결혼에서만 그 모습을 드러내야 하며 다른 그 어떤 곳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어서는 안 된다. 자기 아내에게 너무 강도 높은 쾌락을 가르치는 것은 그녀가 악용할 수 있고 그녀에게 가르쳐 준 것을 후회하게 될 나쁜 가르침을 그녀에게 줄 우려가 있다. 아내와 너무 격렬하게 행위하는 것은 아내를 간통한 여자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 주제는 매우 중요한데, 우리는 그것을 기독교적 전통에서 재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의 자연스럽고 합리적 원칙이란 두 존재를 결합시키고 자손을 생산하며 국가에 유용하고 인류 전체에 이익을 주는 데 있다. 따라서 결혼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쾌락의 감각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법을 깨뜨리고 목적들의 서열을 뒤엎으며 남자와 여자를 짝으로 결합하도록 하는 원칙을 위반하는 일이 될 것이다.

결혼이 여러 개인적 관계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인 동시에 합법적 쾌락의 유일한 장소가 되면서 많은 엄격함이 요구된다. 이러한 엄격함은 결혼에 수반되는 자연적이고 이성적인 두 가지 커다란 목적에 의해 정당화될 것이다. 첫 번째는 물론 번식이다. 세네카가 강조했듯이, 쾌락을 자연이 번식을 위해 준비한 행위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의무는 행동을 규제하고 허용되거나 금지된 행동의 형태들을 체계화하는 도식이라기보다는 원칙의 입장이었다.

결혼의 두 번째 중대한 목적-공동의 삶과 전적으로 공유되는 삶의 정비-은 부부관계 내에서 엄격성을 요구하는 또 다른 원칙을 형성한다. 번식의 목적과 마찬가지로 이 원칙 역시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을 명백히 구분하지는 않는다. 견고한 유대의 형성과 강화는 아프로디지아의 활용에서 하나의 담보일 뿐만 아니라 아프로디지아를 장려하는 한 요소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성적 쾌락에 대한 가치부여가 생겨나게 되는데, 이러한 가치부여는 쾌락을 행할 때 엄격함을 권장하는 태도와 결부되어 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엄격함이야말로 부부의 결합에서 쾌락에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아내가 다른 여인들과 같아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어둠으로 인해 남편이 그녀의 육체를 볼 수 없다 하더라도 그녀 안에 있는 덕성스러운 것, 그녀의 정절과 애정을 빛나게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플루타르코스는 남자든 여자든 지나치게 까다롭고 엄격하게 굴지 말아야 하며 너무 쉽게 방종에 빠져서도 안 된다는 것과 관련하여 몇 가지 충고를 나열한다. 그는 결혼 초기의 성 관계가 내포하고 있는 위험에 중점을 두는데, 그에 따르면 이는 결혼 후기에 생성되는 훌륭한 상호 이해와 굳건한 유대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결혼 초에 지나치게 강한 육체적 쾌락을 맛보게 되면 그 쾌락이 사라질 때 애정도 식지 않을까 염려하면서, 사랑은 그 생명력을 부부의 성격과 그들의 정신적 성향에서 얻는 편이 더 낫다고 말한다. 아울러 부부간의 성 관계에서 부부간의 애정에 이로운 것이 있다면 그것을 결혼생황 내내 주저 없이 이용해야 할 것이다.

아프로디테의 임무는 단순한 육체관계나 육체적 결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감정, 필요, 상호적 관계와 상호 교제에 있는 것이다. 결혼생활에서 성 관계는 대칭적이며 역전 가능한 애정관계를 형성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되어야 한다.

 

기독교 사목교서에서는 부부간의 완전한 정절의 원칙이 자신의 구원에 전념하는 사람에게 무조건적 의무가 될 것이다. 반면에 스토아주의가 고취한 도덕에서는, 자신과의 관계에 고유한 요구들을 만족시키고 사람의 자연적이고 본질적인 존재를 해치지 않고, 자신을 이성적 존재로서 영예롭게 하기 위해서 결혼 내에서 성적 쾌락들을 그 목적에 부합하도록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방식, 관계들의 양식이다. , 결혼의 도덕과 부부생활에 대한 충고들은 보편적으로 유효한 원칙인 동시에, 자신들의 삶에 영예롭고 아름다운 형태를 부여하기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규칙이다. 그것은 어쨌든 몇 사람에 의해서밖에는 실행되지 않는 존재의 미학이 지닌 불문율적 보편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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