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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소년들

  

기원 후 1, 2세기에 ‘소년애’에 관한 성찰은 그리스 시대에 비교할 때 그 강도와 날카로움을 잃어버린다. 소년애적 성행위가 사라졌다거나 평가절하된 것은 아니다. 여러 텍스트들은 소년애가 계속 자연스러운 일로 간주되었음을 보여 준다. 즉 소년들에 대한 취향과 그 취향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가치 판단이 변한 게 아니라, 그 취향과 판단에 대해 각자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 점점 변하게 된다. 소년애는 낡은 문제가 되고, 덜 중요한 이슈로 취급되었다. 특히 로마의 가족법과 공법, 교육 형태와 제도들에 의해 청소년은 더 잘 ‘보호’받았고, 이로써 소년과의 관계에 성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훨씬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이와 관련된 중요 텍스트 세 개가 있다. 사랑에 대한 플루타르코스의 대화, 루키아노스의 (것으로 추장되는) 후기 대화, 소크라테스적 사랑에 대한 티르의 막심의 논문이다. 이 중 마지막 논문은 남성 간 두 종류의 사랑, 곧 아름답고 정당한 사랑과 그렇지 못한 사랑을 구분하고 비교한다. 전통적 도식에 따라, 전자는 그리스적이고 남성적이며 후자는 여성적이고 야만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반면 플루타르코스와 루키아노스의 저작은 이와 다른 구성을 취한다. 티르의 막심의 논문과 마찬가지로 이원적, 비교적, 가치 대조적 형식으로 글이 전개되지만, 이때 비교 대상은 ‘소년들과의 관계’와 ‘여자들과의 관계’(구체적으로 합법적 아내와의 관계)다. 특히 여자에 대한 사랑과 결혼은 에로스 영역 수준에서 논의된다. 결혼은 도덕적 삶의 양식을 정의하는 데 가장 능동적인 중심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쾌락적 관계들을 통합하고 이에 적극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된다. 그 결과, 소년애가 비난받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치가 철학적으로 ‘투자삭감’ 받는다. 플루타르코스와 루키아노스의 저작은 소년애의 여전한 합법성을 보여 주는 동시에, 소년애가 존재 양식의 주제로서 점점 쇠퇴하는 것을 보여 준다.

  

플루타르코스

≪사랑에 관한 대화≫에는 일종의 삽화처럼 한 젊은이의 고민에 대한 토론 장면이 나온다. 두 구애자(남성과 여성) 사이에 끼어 누구를 택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던 ‘바콘’은, 그 결정을 연장자들에게 맡긴다. 토론은 소년애에 대한 지지자들과 이성애에 대한 지지자들 간에 이루어진다. 플라톤의 텍스트에서는 남성적이고 고귀한 에로스와 흔하고 육체적인 에로스가 대립하는 반면, 플루타르코스의 저작에서는 ‘“소년들’이냐 ‘결혼’이냐”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대두된다.

이 저작에서 특징적 요소는 바콘을 좇는 여자, ‘이스메노도르’의 특성이다. 그녀는 아직 젊지만 바콘보다는 연장자고, 사회적 신분도 더 높은 과부다. 더구나 그녀는 장점이 매우 많았다. 덕성스러우며, ‘단아한 삶’을 영위하고, 여러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으며, ‘험담의 대상이 되지 않고’, ‘수치스러운 행동에 대한 의심이 그녀의 집을 스쳐간 적도 없다.’ 이러한 모든 특성(연령차, 사회적 인정, 도덕적 특징과 좋은 평판, 구애의 자발성 등)은 전통적 남색 모델에서 소년들의 애인이 갖는 특성이기도 하다. 즉 그녀는 ‘남성 연장자’와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자’의 위치에 있다. 따라서 바콘이 처한 상황은 상이한 두 유형의 사랑(소년애와 이성애)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다. 소년애와 이성애라는 차이를 차치하고 보면, 결국 형태가 동일한 구애 중에서 하나를 택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처럼 플루타르코스의 대화는, 남색의 고유한 가치들을 배격하지 않고 반대로 그 가치들을 좀 더 넓고 완전한 형태 안으로 끼워 넣으려 한다. 이 텍스트에서 우리는 매우 뚜렷하게 남자-여자, 나아가서는 남편-아내라는 관계 모델 위에서 일원적 연애술을 구성하려는 시도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 단일한 사랑(소년애와 이성애를 같은 하위 범주로 묶는 관점에서의 사랑)에 비해 남색적 애착은 사실상 평가절하된다. 이는 이원론에 대한 비판, 일원적 이론의 정교화, ‘카리스(charis)’라는 개념으로 구체화된다.

 

1.

이원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소년애 지지자들이다. 그들은 이성애가 자연적 성향 이상의 것이 아니라 비판한다. 아울러 여자들과의 본능적 관계가 갖는 불완전성을 지적하고 그 필요성을 경멸하면서, 훨씬 더 높은 곳을 지향하는 소년애와의 차이점을 언급한다. 그들에 따르면, 소년애는 쾌락을 초월할 때에만 진실로 본질에 부합한다. 추악한 쾌락이 소년애에는 부재한데, 왜냐하면 소년애가 필연적으로 덕성에서 분리될 수 없는 우애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이 전통적 논거에 반해, ‘남색의 위선’에 대한 고발이 이어진다. 솔론이 한창 때의 소년들이 대해 ‘그들의 엉덩이와 입술의 달콤함’을 노래하지 않았듯이, 소년 애호가는 자신에게 철학자와 현자의 모습을 부여하길 좋아한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단 하나의 ‘기회’(육체적 성행위)만을 원한다. 더구나 사랑받는 자가 이미 ‘덕성’스럽다면, 강제력을 발휘하지 않고서는 그에게서 쾌락을 취할 수 없다. 반대로 그가 동의한다면, 그는 여자 같은 나약한 남자다. 소년을 덕성으로 이끄는 우애란 소년애 지지자들의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2.

대화의 중심부에는 에로스에 대한 찬양이 나온다. 그리고 이 찬양의 구조와 논리는 소년애 논의를 차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찬양을 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여성애의 합창단원’임을 자처하는 플라타르코스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플루타르코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에로스는 소년들과의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성과의 관계에서도 그의 존재, 권능, 효과를 느끼게 한다. 단지 “아름다움”과 “자연적인 것보다 우월함”만이 문제가 되는 곳에서 ‘성의 차이’가 무슨 역할을 하겠는가? 사랑에서의 덕(arete)은 모든 성차를 넘어선다. “우리가 단지 진리만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소녀들에 대한 기호와 여자들에 대한 기호가 단 하나의 동일한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플루타르코스).

또한 플루타르코스는 ‘우애’가 남자와 여자의 관계, 적어도 자신과 아내의 관계 역시 특징 짓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성 관계에서는 부부관계만이 우정의 형태를 보여 줄 수 있는데, 부부관계는 공동생활 전체에 걸쳐 삶의 공유를 함축하고, 상호적 호의를 요구한다. 또 “더 이상 둘이길 원치 않으며, 둘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일치를 전제하고, 상호적 절제와 다른 모든 관계를 절제하게 하는 ‘소프로수네(sophromune)를 요구한다. 여기서 절제는 수치심과 공포심에 의해 부과되는 절제가 아니라, 에로스의 결과 자체다. 플루타르코스는 오랫동안 동성애자의 사랑에 부여되었던 특질들을 부부의 상호관계성에 도입한다.

 

3.

사랑이 결혼에서 완벽하게 실현될 수 있다는 것, 반대로 소년애는 이를 완벽하게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이 대화의 최종 목표다. 먼저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에로스 없는 아프로디테가 일시적 쾌락밖에 제공하지 못하듯이 아프로디테 없는 에로스는 “무화과와 보리에서 추출한 음료가 야기하는 ‘술 없는 도취’와 같고 성과 없고 충만한 없는 고통일 수밖에 없으며, 곧 혐오와 불쾌감으로 변한다.”

이에 반해 소년애는 아프로디지아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왜냐하면 소년애는 강제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관계를 감내해야 사람(소년)은 분노, 증오, 복수의 욕망을 키운다. 아니면 자신의 ‘나약함’과 ‘여성성’ 때문에 자신을 가장 낮을 지위로 깎아 내리며 ‘수동적으로 되는 것에서 쾌락을 얻는’ 사람들만이 성 관계를 갖는다. 이처럼 플루타르코스는 소년애가 에로스와 아프로디지아의 조화로운 합성물이 될 수 없다고 말하며, 그 이유를 ‘아카리토스(acharistos)’, 곧 카리스(charis)의 결여에서 찾는다.

카리스란 여자가 남자와 기꺼이 하는 동의로, 단지 결혼적령기에만 나타나는 동의이다. 동의는 성 관계를 자연에 의해 규정된 능동성과 수동성이라는 두 극점과 함께 상호적 호의의 관계 안에 통합시키고, 육체적 쾌락을 우애 안에 내접시킨다. 여자에 대한 사랑과 소년에 대한 사랑 중, 전자만이 동의의 부드러움 덕택에 아프로디테의 쾌락과 우애와 덕성이 결합하는 완벽한 형태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즉 부부관계에서 성행위는 애정적 관계의 출발점이다. 육체적 쾌락은 결혼관계에서 상호 애정의 근원이다. 나아가 플루타르코스는 성 관계가 마치 사람들이 협약을 재활성화하는 것처럼 부부 간 유대에 새로운 힘을 부여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적 쾌락은 사랑과 우애관계의 원칙이자 담보물로서 결혼관계의 핵심에 위치한다.

이로써 부부 간 사랑은 이중적 활동이 된다. 두 사람 각자는 상대방을 ‘사랑하고’(능동), 상대방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사랑의 표현을 받아들이는 데 동의하며, 결과적으로 ‘사랑받는 것’(수동)까지 좋아하게 된다. 이는 또한 정절의 원칙을 이루는데, 두 사람 각자는 상대방에 대해 품고 있는 사랑을 자신의 행동을 규제하는 규율이자 욕망을 제한하는 근거로 삼는다. 여기서 두 사람은 각각 에로스의 관점에서 볼 때 영구적으로 능동적 주체가 된다. 이와 비교할 때, 소년들과의 교제는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가 매우 뚜렷이 구별되며, 사랑받는 자(소년)가 처하게 되는 수동성의 딜레마를 풀 수 없게 된다.

 

루키아노스 추정본

'테옴네스트'는 소년들과 여자들 양자에게 모두 끌리는 청년이다. 그는 루키아노스에게 어느 쪽이 더 나은 선택인지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루키아노스는 어떤 대화, 즉 '카리클레스'와 '칼리클라티다스'가 나누었던 대화를 들려 준다. 대화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두 가지 종류의 사랑에서 성적 쾌락은 어떤 위상과 형태를 띠는가?

1.

'이성애 편'인 카리클레스의 논증은 스토아주의적 세계관에 근거한다. 자연은 하나의 씨를 퍼뜨리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두 성을 구분했다. 그리고 양성 각자에 이성에 대한 욕구(pothos)를 불어넣었다. 이러한 자연 질서에 바탕해, 예전의 인간은 그 덕성에서 신과 가까울 수 있었고, 영웅적으로 행동하려 했으며, 조화로운 혼례를 가졌고, 고귀한 자손을 남겼다. 그러나 인간은 점차 타락했고, '자연 그 자체를 위반'하게 된다. 이는 '자연의 입법'에 따르는 동물에 비해 인간이 더 '야수적'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요컨대 소년애는 세계의 질서를 교란하고 폭력적·기만적 행동을 야기하며, 결국 인간 존재의 목표를 위협한다.

칼리크라티다스는 전혀 다른 입장에 선다. 그는 오히려 세계가 카오스에서 형성되었다는 관점을 내세운다. 그리고 육체에 화합의 원칙을 부어넣고 ‘우애의 신성한 정감들에 의해’ 사람들이 서로 애착을 느끼게 함으로써 원초적 무질서를 극복하게 하는 것이 바로 에로스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세계사는 원초적 필요성에서 점차 해방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 논리에 준하면, ‘소년애’(와 철학)는 좀 더 많은 호기심과 지식을 향한 ‘인류의 상승’에 의해 매우 나중에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2.

소년 애호자에게 ‘쾌락’을 묻는 것은 이미 그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당신들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을 사랑하는 소크라테스의 제자들로 자처한다. 그런데 당신들이 지혜로 가득 찬 노인들이 아니라 추론할 줄 모르는 아이들을 따라다니는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카리클레스는 ‘소년과의 교제’와 ‘여성들과의 교제’에서 쾌락의 위상을 구별하기 위해 먼저 ‘연령’과 ‘순간성’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한다. 여성은 노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매력을 보존하지만 소년은 단지 일순간만 매력적이다. 소년의 육체는 매우 빨리 털투성이가 되고 근육으로 뒤덮인다. 여성과의 교제가 유리한 또 다른 이유는 ‘상호성’이다. 카리클레스는 여자와의 성 관계에는 ‘향락의 동등한 교환’이 존재한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상황은 수동적이어서 다소간 폭행을 당하는 소년의 상황과 대비되는 것이다.

칼리크라티다스는 여기서 소년애의 핵심은 ‘카리스’가 아니라 ‘아레테(arete)’, 즉 덕성이라는 오래된 주장을 꺼내든다. 파트너들 사이에 명예롭고 현명하며 절제된 쾌락과 두 존재들 간의 관계에 필수불가결한 공동체를 보장하는 것이 바로 덕성이다. 칼리크라티다스는 쾌락의 상호성을 착각이라 비판하고, 소년들과의 덕성스러운 관계를 유일한 진리라고 내세운다. 그는 여자들을 나쁘게 말하기 위해 심술궂은 상투어들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여자들은 자신의 추함을 은폐하기 위해 화장, 몸치장, 머리손질, 보석, 장식구 등으로 애를 쓴다. 여자들의 세계는 비밀스럽다는 점에서 또한 기만적이다. 칼리클라티다스는 기만적 유혹을 풍기는 화장한 여자의 모습과, 어떤 꾸밈에도 신경 쓰지 않는 소년의 모습을 대비시킨다. 이 ‘기만 없는’ 소년과 일생을 공유하는 것은, 사라져버릴 우아한 육체를 대상으로 삼지 않는 한 평생 지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소년이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청년이 되면 ‘사랑을 되돌려 주어야 하며’, 그것도 ‘둘 중에 누가 사랑받는 자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그러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의 애정은 사랑받는 자에 의해 마치 거울에 비친 영상처럼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소년애를 덕성과 쾌락이 결합될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정의하면서도, 그 쾌락을 결코 성적 쾌락으로 굳이 국한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칼리클레스와 칼리크라티다스의 논쟁은 소년애의 ‘승리’로 끝난다. 이는 육체적 쾌락을 교묘히 회피하는 남색, 그리고 이를 철학자들에게만 인정하는 전통적 도식에 부합하는 승리다. 그러나 이 논쟁이 또 다른 대화, 즉 남성과 여성 모두에 동일하게 이끌릴 때 자신이 어떤 사랑을 선택해야 할지를 묻는 테옴네스트와 루키아노스와의 대화에 끼워져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테옴네스트는 즉시, 남색적 사랑의 승리에 대해 빈정거린다. 남색적 사랑이 철학과 덕성, 육체적 쾌락의 제거와 관련되기 때문에 우월하다고 해서, 사람들이 소년들을 사랑하는 방식도 실제로 그러하다고 할 수 있는 근거가 있을까? 그는 소년애에서 철학자들이 말하지 않으려는 것, 즉 육체적 접촉, 입맞춤, 애무, 향락을 그 사랑의 진정한 존재 이유로 다시 제시한다. 루키아노스의 이 텍스트는, 여자들에 대한 사랑이 더 낫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이 텍스트는 “아프로디지아”, 그리고 그것과 결부된 관계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랑에 대한 논증이 지닌 본질적 취약성을 보여 준다.

   

새로운 연애술

소년애에 대한 성찰이 불모성을 드러내는 그 순간, 새로운 연애술의 몇몇 요소가 나타난다. 그것은 남녀관계에 대한 소설적 이야기들로 표현된다. 하나의 남성극과 여성극으로 표지되는 이성극 관계, 욕망의 정치적이고 남성적인 지배보다는 처녀적 순결성을 훨씬 더 모범으로 삼는 금욕의 욕구, 영적 결혼이라는 형태와 가치를 가진 결합 내에서의 순결의 성취와 보상이 그것들이다.

물론 소년애가 소설적 이야기들에서 완전히 부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페트로네스나 아풀레우스의 이야기는 소년애가 매우 빈번했으며 일반적으로 용인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러나 소년애는 결코 이야기의 주된 대상이 되지 못한다. 관심의 초점은 ‘소녀’와 ‘소년’의 관계에 맞춰진다. 그들은 서로 동일한 용기, 동일한 참을성, 동일한 정절을 지닌다. 대단원에 이르기까지 사건들의 주된 의미는, 두 등장인물이 상호간에 엄격하게 성적 정절을 유지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는 주인공이 결혼한 경우에는 정절로, 결혼 전까지는 동정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동정은 단순한 금욕이 아니라, 사랑에 선행하는 삶의 선택이다.

즉 동정은 성행위에 선행하는 금욕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선택, 삶의 양식으로 드러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가장 고귀한 시련은 어떤 값을 치르고서라도 위험에 저항하며 동정을 보전하는 일이 된다. 혼전순결은 두 약혼자들 간의 정신적 유대를 강화하며, 그들 자신의 욕망을 억제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침내 결합하게 되었을 때에도 금욕하게 된다. 따라서 결혼 후 성 관계가 동정의 반대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와 관리 동정은 결합을 위한 예비적 시련, 결합을 완성하는 움직임이다. 사랑, 동정, 결혼은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육체적인 동시에 정신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할 두 연인의 결합의 순간까지, 그들은 육체적 순결뿐만 아니라 마음의 순결도 지켜야 한다.

이처럼 소년애와 마찬가지로 성적 쾌락의 억제가 그 핵심에 자리하지만, 동시에 이와 같다 할 수 없는 또 다른 연애술이 발전하기 시작한다. 성적 쾌락의 억제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대칭적이고 상호적인 관계 주위에서, 동정에 부여된 높은 가치와 완벽한 결합 주위에서 조직된다.

 

 

전체 결론

  

기원 후 초기 두 세기 동안, 성적 활동과 성적 쾌락에 대한 성찰에서 ‘엄격함’이라는 주제가 강화된 것을 볼 수 있다. 의사들은 성행위의 결과를 걱정하며 그것을 삼가길 권했으며, 쾌락보다 순결을 지키는 것이 더 좋다고 공언했다. 철학자들은 혼외의 모든 관계를 비난했고, 부부가 서로에게 정절을 지킬 것을 강권했다. 결국 소년애를 이론적으로 평가절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기독교적 도덕의 초안(성 행위 자체를 악으로 간주하고 부부 간 성 행위에만 합법성을 부여하며 소년애를 반작연적인 것으로 죄악시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성적 엄격성의 원칙들이 제국 시대 철학에서 최초로 정의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기원 전 4세기의 그리스 사유에서도 제국 시대만큼이나 엄격한 정식들을 발견할 수 있다. 매우 오래 전부터 육체와 건강에 대한 배려, 여자 및 결혼에 대한 관계, 소년들에 대한 관계는 엄격한 도덕을 정교화하는 모티브들이었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기원 후 초기 철학자들의 성적 엄격성은 장래의 도덕을 예고하는 만큼이나 고대의 전통에 뿌리박고 있다.

그렇지만 성적 쾌락에 대한 성찰들에서 단지 오래된 의학적, 철학적 전통의 유지만을 보는 것도 잘못된 일이다. 실제로 고전 문화와 전통은 몇 세기 동안 조심스럽게 유지되었고, 자발적으로 재활성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몇몇 뚜렷한 변모도 눈에 띈다. 이는 무소니우스의 도덕이나 플루타르코스의 도덕을 크세노폰, 플라톤, 이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의 단순한 재강조로 간주할 수 없게 한다.

예컨대 양생술과 건강을 문제 삼는 태도에서, 변화는 더욱 강렬한 불안, 성 행위와 육체 간 관계에 대한 더욱 폭넓고 상세한 규정, 그리고 그 결과의 양가성 및 교란적 결과에 대한 주의로 나타난다. 이는 육체에 대한 더욱 증대된 배려일 뿐만 아니라, 성 행위 자체를 바라보는, 그리고 성 행위가 질병과 악과 맺는 관련성 때문에 성 행위를 두려워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한편 남편의 올바른 처신과 그가 자신에게 부과해야 하는 절제는 단지 신분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부부 관계의 본성과 그 보편 형태, 그리고 거기서 도출되는 상호적 책무와 연관된다. 마지막으로 소년애에서 금욕은, 사랑에 가장 고귀한 정시적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고유한 결함의 표시로 인식된다.

그런데 기존 주제의 이러한 변모를 통해 우리는 자기배려에 의해 지배되는 삶의 기술이 발전함을 볼 수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기술은, 타인을 지배하기 위해 제어해야 할 행위를 강조하는 대신 성적 활동에 의한 개인의 취약성을 점점 더 강조한다. 또 이는 사람들을 결합시키고, 자연적이고 이성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정초될 수 있는 보편적 형태에 성적 활동을 복종시킬 필요성을 제시한다. 아울러 자기 자신의 순수한 향유에 이를 수 있게 하는 실천과 단련을 발전시켰다. 요컨대 성 도덕의 변모는, 금지의 강화가 아니라 자기와 자신의 종속성 및 독립성, 자신의 보편적 형태, 타인과 수립할 수 있고 수립해야 하는 관계, 자기 통제력을 자신에게 행사하는 절차, 자기를 완전히 지배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 주위를 선회하는 ‘삶의 기술’이 발전한 결과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쾌락의 윤리에 특징적인 이중적 현상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성 행위의 결과, 그 위치와 역할, 가치와 난점들에 더욱 적극적 관심을 가질 것으로 요구한다. 그러나 그것에 더 집착하고 관심을 가질수록, 성 행위는 더욱 쉽게 위험한 것으로, 즉 사람들이 정립하려 시도하는 자기와의 관계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성 행위는 점점 더 경계되고, 통제되고, 가능한 한 결혼관계 내에서만 국한된다. ‘문제제기와 불안’, ‘문제삼기와 경계’가 병행한다. 여기서 성적 활동은 실질적으로 악 자체는 아니지만, 그 형태와 결과들로 인해 악과 관련된다.

그리하여 삶의 기술들과 자기배려의 정교화 내에서 이후의 도덕들에서 정식화될 계율들과 상당히 가까워 보이는 몇몇 계율의 윤곽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 유사성을 보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후의 도덕들은 ‘자기에 대한 관계의 다른 양태’다. 예컨대 그것은 종말·타락·악에 입각하여 윤리적 실체를 특징짓는 양식, 한 인격적 신의 의지이기도 한 일반적 법률에의 복종 형태 속에 예속화되는 양식, 영혼의 해독과 욕망의 정화적 해석학을 함축하는 자기에 대한 노고의 양식, 자기 포기를 지향하는 윤리적 완성의 양식 등을 규정할 것이다. 쾌락의 절제, 부부의 정절, 남자들 간 관계와 관련된 규약의 요소들이 유사한 형태로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때 그 요소들은 전적으로 수정된 윤리와, 자기를 자신의 성 행위의 도덕적 주체로 구성하는 또 다른 방식과 관계된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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