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몸의 정치학

라캉에 따르면 아버지의 법은 ‘상징계’의 구조를 이루며, 문화 자체를 조직하는 보편 원리가 된다. 이 법은 기원적 리비도 욕망(예컨대 엄마에 대한 아동의 근본적 의존)을 억압하고 규제한다. 이로써 언어의 다원적 의미 대신 일의적이고 분명한 의미가 세상에 자리 잡는다.(238)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이 라캉의 서사에 도전한다. 크리스테바의 ‘기호계’는 기원적 모성의 몸(모체)에서 생겨나는 언어의 한 차원으로, 상징계 안에 있는 전복의 원천이다. 그 대표적 표현 형태가 시적 언어다. 시적 언어는 아버지의 법을 파열하고 전복하고 대체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238)

그러나 크리스테바의 비판은 멀리 나가지 못한다. 기호계가 전복의 잠재력을 지니지만, 그럼에도 상징계에 종속돼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크리스테바는 다성적 욕구(와 전담론적 리비도 조직)가 언어 자체보다 앞서 있다고 말하며 문화적 전복의 장소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문화적 전복이 계속되면 문화적 삶 자체가 붕괴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기호계를 해방의 이상으로 단정하면서 또 부인하는 것이다.(239)

크리스테바의 이러한 자가당착은 문화 개념을 부권적 구조에, 모성성을 문화 이전 차원에 배당하는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기인한다. 즉, 여기서 모성성의 문화적 구성과 변이 가능성은 사전에 배제된다. 그러나 리비도의 다원성과 전담론적 모체 등의 개념은, 문화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 아닐까?(240)

***

크리스테바는 충동이 언어로 나타나기 전에 어떤 목적을 지니지만, 언어가 이런 충동을 억압하거나 승화시키므로, 충동은 일의적 의미 구조에 불복하는 언어 표현으로만 표명된다고 가정한다. 시적 언어는 억압될 수 없는 다성적 소리와 의미의 이질성이 드러나는 사례다.(241) 기호계는 언어 속에서 표명되는 충동의 다양성에 토대를 두며, 이 충동이 지속적인 에너지와 이질성으로 (상징계의) 의미화 작용을 분열시킨다. 상징계(일반 언어)가 모성적 몸(충동)을 거부하는 반면, 기호계(시적 언어)는 리듬, 유운, 억양, 소리 작용, 반복 등을 통해 모성적 몸(충동)을 재현하고 회복한다.(242) 요컨대 기호계는 상징계의 억압을 받지만, 어느 경우에는 그 의미화 작용을 분열시키기도 한다. 기호계는 아이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처럼 ‘의미 이전’에 있거나, 정신병자가 말을 못하게 될 때처럼 ‘의미 이후’에 있다.(243)

여기에 크리스테바가 라캉과 공유하는 서사가 있다. 그것은 금지의 법이 모성적 의존 관계를 단절하면서 주체를 생성하고, 상징계나 언어 영역을 하나의 의미화된 기호 체계로 만든다는 서사다. 금지의 법은 일관되고 분명한 정체성 확립을 의미한다. 반면 모성적 몸은 그러한 정체성의 상실을 의미하며, 그 결과 시적 언어는 정신병의 경계에 놓인다.(245)

크리스테바의 목적은 상징계를 기호계로 대체하려는 것도, 기호계를 어떤 문화적 가능성으로 설정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시와 모성성 등을 (아버지의 법이 허가한) 문화 내의 특권적 실천으로 자리매김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천은 아버지 법 안에서, 아버지 법을 통해 재현되어야 하기에 상징계를 완전히 거부할 수 없다. 크리스테바에게 ‘해방’ 담론은 불가능하다.(249)

크리스테바의 관점이 특히 문제가 될 때는 여성이 시적 언어를 발화할 때다. 그 관점대로라면, 여성의 시적 언어는 근친상간 금기뿐만 아니라 동성애 금기에도 저항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크리스테바는 동성애를 정신병과 직접 연관시킨다. 크리스테바는 이성애야말로 친족과 문화의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하며, 레즈비어니즘이 자아 상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251) 그는 부권적으로 허가된 문화적 법칙에 대한 레즈비어니즘의 도전을 수용하기보다는, 레즈비언의 경험을 문화 변용에 선행하는 어떤 퇴행적 리비도 상태로 여긴다.(252)

***

충동의 전복적 다양성에 관한 크리스테바의 가정에는 인식론적, 정치적 문제가 있다.

충동이 상징계의 언어와 문화 형식 내에서만 표명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이를 의미화 ‘이전’의 것으로 위치 지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시적 언어가 문화적으로 소통 가능해지기 위해 상징계에 참여해야 한다면, 우리는 이 영역의 ‘외부’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크리스테바가 모성적 충동을 두고 ‘생물학적 운명’의 일부니, 그 자체로 ‘비상징적, 비부권적 인과론’의 표명이니 하고 주장할 때, 담론 이전의 육체적 다양성에 대한 가정은 더더욱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이때 기호계, 모성적 인과론, 모성 본능은 ‘목적론적 개념’이 된다.(254) 크리스테바가 옹호하는 다양성의 원칙은, 이상하게도 정체성의 원칙과 매우 닮아 있다. 크리스테바의 글에서 ‘태고적’이고 ‘동양적’인 양식들이 모두 모성적 몸의 원칙에 종속되는 것이 그 방증이다.(255)

언어나 문화 구성에 앞서는 모성적 충동을 목적론적 목표로 삼는 것은 정치적 차원에서도 많은 문제점을 야기한다. 모성적 리비도의 다양성이 부권적 단일성을 분산·분열시킬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의미 영역의 열림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부권-이전의’ 인과론을 따르는 생물학적 의고주의의 발현인가? 크리스테바는 전자가 아닌 후자를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다양성과 이질성은, 사실상 직선적이고 일의적인 목적론의 규제를 받는다.(256)

크리스테바는 욕망을 ‘억압’한다고 일컬어지는 법이 바로 욕망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 예컨대 ‘모성성’은 친족 구조가 요구하는 사회적 관행일 수 있다. 크리스테바는 친족 구조에서 여성 교환이라는 양태를, 여성의 몸을 강제로 모성적 몸‘인 것처럼’ 구성하는 문화 기제의 결과가 아니라, 모성적 몸이 억압되는 문화적 국면으로 이해한다.(257) 크리스테바는 아버지 법의 기능을 금지나 억압으로 한정한다.(258)

***

『성의 역사』 1권 마지막 장에서 푸코는 성의 범주를 “허구적 통일체 … 인과론의 원칙”이라 여기는 관점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이 허구적 성의 범주가 오히려 욕망의 구조와 의미를 야기하며, 인과관계를 역전시키기 때문이다. “‘성’이라는 개념은 인공적 통일체, 해부학적 요소, 생물학적 기능, 행동, 감각, 쾌락에 있어서 모두를 하나로 묶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259)

푸코가 보기에 몸은 오로지 권력관계의 맥락에서, 담론 안에서 의미를 획득한다. 크리스테바는 모성적 몸을 담론 이전의 것이라고 상정하지만, 푸코의 관점을 취한다면 모성적 몸을 전담론적이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특정 권력관계가 자가 확장하면서 사실을 숨기는 하나의 전술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모성적 몸’이란, 모성성을 여성 몸의 본질이자 욕망의 법칙으로 여기게끔 하는 섹슈얼리티 체계의 효과,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260) 이런 점에서 크리스테바는 생물학적으로 요구되는 모성의 법을 아버지 법에 선행하는 전복 작용으로 끌어올리지만, 정작 그 법의 비가시성을 체계적으로 생산하면서 법의 필연성이라는 환영을 만드는 데 일조한다.(261) 억압은 그것이 금지하는 대상을 생산한다. ‘법을 넘어선 진정한 몸’ 또한, 아버지 법의 생산물일 수 있다.(262)


푸코, 에르퀼린, 그리고 성적 불연속성의 정치학

푸코의 계보학적 비평은 주변부 섹슈얼리티가 문화적으로 인식 불가능하다고 보는 라캉과 신라캉 이론들을 비판하는 데 주효하다. 푸코는 섹슈얼리티에 이미 항상 권력이 들어와 있다고 보며, ‘법 이전이나 이후의 섹슈얼리티’라는 접근법에 비판적 시각을 견지한다. 그런데 푸코는 몇몇 글에서, 계보학적 비평과 모순되는 어떤 해방의 이상을 드러낸다. 프랑스 양성인간 ‘에르퀼린 바르뱅’의 일기에 부친 ‘서문’이 그 대표적 사례다. 이 글에서 푸코는 그/녀의 쾌락세계를 ‘비정체성의 행복한 중간지대’, 즉 섹스와 정체성의 범주를 초월하는 세계로 낭만화하는 경향을 보인다.(265∼264)

『성의 역사』에서 푸코는 ‘섹스’를 기원이 아닌 하나의 결과로 간주한다. 그는 육체적 쾌락의 기원적·연속적 원인으로 간주되던 ‘섹스’라는 표현 대신, 담론과 권력의 복합적 역사 체계로서 ‘섹슈얼리티’라는 표현을 제안한다. 이 체계는 권력 관계를 영속화하고 이를 감추기 위한 전략으로 ‘섹스’라는 잘못된 이름을 생산한다. 그 구체적 전략이 권력과 섹스를 ‘외적 관계’로 설정하는 것이다. 이 설정에는 억압이나 지배로 간주되는 권력과, 해방이나 진정한 자기표현으로 간주되는 성을 대립한다. 이러한 사법적 모델의 결과, 성은 권력에 의해 억압되는, 그러나 기본적으로 원형 그대로의 것이라고 간주된다. 섹스가 본질화되는 것이다.(265)

푸코는 이러한 사법적 모델에 반대 입장을 취한다. 예를 들어 페미니즘이 젠더에 대한 이분법에서 출발하는 반면, 푸코는 성의 범주와 성차가 어떻게 담론 안에서 몸의 정체성의 필수 요소로 구성되는지 탐구하려 한다. 푸코에게 성별화된다는 것은 일련의 사회 규약에 복종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규제들이 명하는 법이 사람의 섹스, 젠더, 쾌락, 욕망을 형성하는 원칙이자, 또한 자기 해석의 해석학적 원칙이 된다.(266)

에르퀼린 바르뱅의 일기를 편집·출간하면서 푸코는 양성구유의 몸이나 성-교차적 몸이 어떻게 성적 범주화의 규제 전략을 드러내고 반박하는지 폭로한다. 또 ‘성’이 서로 필연적 연관성이 없는 몸의 기능과 의미를 통합함을 보여 준다. 그런데 이 글에서 그는 ‘성’이 소멸된다면, 이분법 안에서 일의적 성으로 강제되었던 인식의 틀이 깨지고 쾌락의 증식이 일어날 것이라고도 예측한다. 이 지점에서 푸코는 『성의 역사』에서 자신이 비판하던 해방 담론에, 모순적이게도 감상적으로 몰두하고 있다.(267) 이러한 모순은 『성의 역사』 몇몇 부분에서도 발견된다. 푸코는 담론과 권력의 복합적 상호작용으로 섹스가 생산된다고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법 앞의’ 섹슈얼리티를 사실상 전제하는 전담론적 리비도의 다양성이라는 비유를 동원하고 있다.(268)

에르퀼린의 섹슈얼리티를 ‘성’의 부과나 규제에 앞서는, 유토피아적 쾌락의 유희로 낭만화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공식적인’ 푸코식 질문, 즉 어떤 사회적 관행과 관습이 이런 형태의 섹슈얼티를 생산하는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는 우리가 다원적 섹슈얼리티를 형이상학적으로 물화하지 않고 에르퀼린의 사례를 구체적 서사 구조와 정치문화적 관습하에서 탐구하게끔 한다. 이 관습들이 에르퀼린의 부드러운 키스, 온몸에 산포해 있는 쾌락, 저항과 위반의 전율을 생산하고 규제한다.(270)

***

에르퀼린과 파트너 간 섹슈얼리티를 생산하는 권력의 모태들 중에는 여성 동성애 관습과 종교 이데올로기가 있다. 또 에르퀼린은 상당 수준의 독서량을 자랑하며, 그/녀가 받은 19세기 프랑스식 교육에는 프랑스 낭만주의뿐 아니라 고전주의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그/녀의 자전적 서사는 일련의 확립된 문학 관습 아래서 집필되었다.(271)

에르퀼린의 몸이 양성구유인 탓에, 그/녀의 1차적인 성적 특징과 그/녀의 젠더 정체성 및 욕망의 방향·대상을 분리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몸을 젠더 혼란의 원인, 젠더 위반적 쾌락의 원인으로 가정한다. 마치 그 쾌락들이 자연적/형이상학적 사물의 질서 바깥에 있는, 어떤 본질의 결과이자 표명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의 이례적 몸을 그/녀의 욕망, 문제, 애정 행각, 고백의 원인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텍스트화된 몸, 사범 담론이 생산한 해결 불가능한 양가성의 기호로 읽어야 한다.(272)

에르퀼린의 자기 폭로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그/녀의 성적 경향과 섹슈얼리티가 처음부터 양가성 구조를 띠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섹슈얼리티의 일부는 확대가족인 수녀원의 여러 ‘자매’와 ‘어머니’의 사랑과, 그 사랑의 과도한 실행을 금지하려는 제도적 명령으로 구성된다. 푸코가 기술하듯 이 ‘이상한 행복’은 수녀원의 감금이라는 관습 속에서 ‘의무적이면서 동시에 금지된’ 것이었다. (273)

그런데 한편으로 에르퀼린은 이러한 동성애적 맥락 안에서 자신만의 성차 담론을 주장한다. 그/녀는 자신이 욕망하는 젊은 여성과 자신의 차이를 알게 되고 그것을 즐기지만, 동시에 이 교환에서 자신의 입장이 위반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아가 이때 그/녀가 남성적 특권을 찬탈하고 또 저항하게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274)

이러한 상황은 성적 모호성의 층위에서조차 ‘섹스’에 한계를 짓는 ‘권력’의 작용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녀의 유의는 과연 얼마나 자유로운 걸까? 푸코는 성의 범주가 이질적인 성적 기능과 요소에 인공적 통일성을 부과한다고 봤다. 그러나 이러면서 푸코는 루소와 거의 방식으로 ‘자연스러운’ 이질성과, 이를 축소하고 왜곡하는 ‘인공적인’ 문화의 법이라는 이분법을 구성한다. 에르퀼린은 스스로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이성과 맞서는 자연의 끊임없는 투쟁”이라고 지칭했다.(275)

***

에크퀼린의 섹슈얼리티는 법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의 양가적 산물이다. 그/녀의 고백은 그/녀의 욕망처럼 복종이자 저항이 된다.(283)

법은 ‘자연’이라는 자신의 개념에 순응할 것을 요구하고 이분법적, 비대칭적 몸의 자연화를 통해 합법성을 획득한다. 이런 점에서 에르퀼린의 쾌락과 욕망은 결코 사법적 법의 부여에 앞서 번성하고 증식하는 목가적 순수가 아니다. 그/녀는 법의 ‘외부’에 있지만 이 법은 자신 안에 그 ‘외부’를 갖고 있다. 사실 그/녀는 법을 체현한다. 칭호를 부여받은 주체로서가 아니라, 그러한 모반을 생산하는 법의 기괴한 역량의 증언자를 체현하는 것이다.(284)


발제_젠더트러블_3장_1절_2절_161125.pdf

끝.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