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젠더트러블 결론 .hwp

2016.12.10.

기레민

 

『젠더 트러블』

결론 – 패러디에서 정치성으로

 

페미니즘의 정치학이 ‘여성들’이라는 범주 안에 들어 있는 ‘주체’ 없이도 가능한 것일까. 여성 즉, 페미니즘의 ‘우리’는 언제나 그리고 오로지 환영적 구성물에 불과하다. 이 환영적 구성물은 자신의 목적이 있지만, 그 용어의 내적 복잡성과 불확정성을 부정하고, 또 그것이 동시에 재현하고자 하는 구성물의 일부를 배제해야만 자신을 구성한다. 이처럼 ‘우리’라는 위상은 실상 빈약하고 환영적일 뿐인 것일지도 모른다. 이 범주의 근본적인 불안정성은 페미니즘의 정치적 이론화에 대한 근본적 제약을 문제시하며, 젠더와 몸뿐 아니라 정치학 자체를 다르게 배치할 길을 연다.

정체성의 정치학을 근본주의적 방식으로 사유하게 되면 정체성이란 무엇보다도 정치적 관점이 고양될 수 있는, 그에 따라 정치적 행동이 취해질 수 있는 자리에 놓여야 한다고 가정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버틀러의 주장은 ‘행위 뒤의 행위자’가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며, ‘행위자’는 행위 속에서 행위를 통해 다양하게 구성된다는 것이다.

‘행위주체성’의 위치를 결정하는 문제는 보통 ‘주체’의 생존 가능성과 연관되어 있다. 여기서 ‘주체’는 그것이 타협해나가는 문화의 장에 선행하는 어떤 안정된 존재를 갖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주체는 반대편 인식론의 틀에서 담론적으로 구성된 환경을 마주하게 되고 곧 문화에 빠져 있는 주체는 이런 구성물이 자신의 정체성을 단언하고 있는 순간에도 자신의 구성물과 협상한다. 즉 ‘나’는 젠더와 완전히 동일시 될 수 없는 행위주체성의 한 지점인 것이다. 문화적 선언들이나 정체성의 이론의 나열 속에 등장하는 ‘등등(etc)’은 끝없는 의미화 과정 자체에 대한 기호인 동시에 소진을 나타내는 기호이다. 이것은 보충이고 정체성을 상정하려는 그 어떤 노력도 결코 수반하는 일이 없는 넘침이다. ‘등등’은 이처럼 스스로를 페미니즘 정치 이론화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제안한다.

정체성에 대한 당대의 정치 담론이 갖는 인식론적 유산의 일부로서, 이분법적 대립은 일련의주어진 의미화 실천에 들어 있는 어떤 전략적 움직임이다. 그것은 ‘나’를 이런 대립물 안에, 대립물을 통해 설정하며 이 대립을 어떤 필연성으로 물화시켜버린다. 행위주체성의 문제는 의미화와 재의미화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의 문제고 재공식화된다. 하나의 정체성으로 의미화된 것은, 시간이 지난 이후에는 그저 힘없는 실재론적 언어 조각으로 거기 있을 뿐인데, 그 주어진 시간에서는 의미화가 되지 않는다. 분명 정체성은 너무나 많은 정체된 본질들로 나타날 수 있다.

의미화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그 안에 인식론적 담론이 ‘행위주체성’이라고 지칭한 것을 품고 있다. 인식 가능한 정체성을 지배하는 규칙, 즉 ‘나’에 대한 인식 가능한 주장을 규제하는 규칙, 젠더 위계와 강제적 이성애의 모태를 따라 일부 구성되는 규칙은 반복을 통해 작동한다. 주체는 구성되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주체가 단순히 인식 가능한 정체성의 소환을 지배하는 특정한 규칙-지배 담론들이 만든 하나의 결과일 뿐이라는 점이다. 주체는 자신이 태어난 규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의미화란 토대를 다지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규제된 반복과정이기 때문이다. 주체와 규칙 모두 본질화의 효과를 만들어냄으로써 주체는 숨겨지고 규칙은 강화된다. 어떤 면에서 모든 의미화는 반복하고자 하는 충동의 궤도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행위주체성’도 그런 반복중에 변형될 가능성 속에 위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화와 반복성에 대한 이해를 따라 새로운 젠더의 가능성을 주장할 수 있게 만들려면 정체성의 전복은 오로지 반복된 의미화 실천의 내부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무엇이 젠더의 의미화 실천 속에서 전복적인 반복을 구성하는가? 버틀러는 섹스/젠더의 구분에서 섹스는 ‘실재적인 것’ ‘사실적인 것’으로, 또한 젠더는 문화적 각인 행위로 작동하는 물질적이거나 육체적인 토대로 상정되어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젠더란 몸 위에 글로 씌어지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각인이 자기 안에서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문화적 장치가 도구와 몸의 만남을 주선하는가, 또 이런 의례적인 반복에는 어떤 간섭들이 가능한가이다.

패러디의 실천들은 특권화되고 당연시된 젠더 배치와, 파행되고 가상적이며 모방된 것, 말하자면 실패한 모방본의 구분에 재개입해서 그것을 재통합하는 작용을 할 수 있다. 분명 패러디는 절망의 정치성을 심화시키곤 한다. 그 정치성은 자연스럽거나 실재적인 것의 영역에서 주변적인 젠더를 겉으로는 필연적으로 배제한다는 것을 확증해주기 마련이다. ‘실재적’이거나 ‘자연스러운 것’을 체현하는 데 실패하는 젠더 수행상의 구성적 실패는 전복적인 웃음의 효과를 발휘한다. 그렇게 본질적인 정체성을 불안하게 만들고, 중추적인 ‘남자’와 ‘여자’ 주인공들에게서 강제적 이성애라는 당연시된 서사를 제거함으로써, 확산된 젠더 배치의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젠더의 패러디적 반복은 단단한 심층과 내적 본질이라는 젠더 정체성의 환영 또한 폭로한다.

버틀러는 종종 페미니즘 정치학이 정체성의 범주를 근본적인 것으로 가정했다고, 즉 그 범주가 페미니즘을 정체성의 정치학으로 가동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처럼 간주되었다고 주장해왔다. 여기서 문화적으로 인식 가능한 ‘성’을 생산하는 암묵적 규제들은 자연화된 토대보다는 생산적인 정치구조로 이해되어야 한다. 정체성을 하나의 효과, 즉 생산된 것이나 산출된 것으로 새롭게 개념화하면 젠더 범주를 근본적이거나 고정된 것으로 생각하는 입장들이 음흉하게 배제했던 ‘행위주체성’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 하나의 정체성이 어떤 효과를 갖는다는 것은, 그것이 숙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도, 완전히 인공적이거나 자의적인 것도 아니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구성과 행위주체성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은 행위주체성에 꼭 필요한 무대이며 행위주체성이 발화되고 문화적으로 인식 가능해지는 관점이다. 페미니즘의 비평적 과제는 구성된 정체성의 외부에다 어떤 관점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문화적 위치를 부인하게 될 인식론적 모델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페미니즘의 비평적 과제는 이런 구성물들이 가능하게 만든 전복적 반복 전략의 위치를 결정하는 일이다. 또한 이런 정체성을 구성하고 경합시킬 내적 가능성을 제시하는 반복적 실천에 참여함으로써, 그 실천에 개입할 공간적 가능성을 확인하는 일이다. 그래서 문제는 반복을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반복할 것인가이다. 사실은 젠더의 근본적인 증식을 통해서 반복 자체를 가능케 하는 바로 그 젠더의 규범을 어떻게 반복하고 또 위치 변겅할 것인가이다.

 

 

 

 

 

 

『젠더 허물기』

서문

합주 행위

 

이 글들은 허물어지는 경험의 좋은 면과 나쁜 면에 대한 것들이다. 때로는 젠더에 대한 규범적 관념이 살 만한 삶을 계속 이어갈 능력을 약화시키면서 누군가의 인간됨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라 해도 규범적 규제가 허물어지는 경험이 누군가의 정체성에 대한 과거의 관념을 허물 수 있다. 단지 살 만한 삶의 가능성을 높이려고 비교적 새로운 정체성을 시작하는 어떤 사람의 과거의 관념을 말이다.

젠더는 규제의 장 안에서 일어나는 즉흥적 행위이다. 게다가 우리는 자신의 젠더만 ‘행하는do’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과 더불어, 혹은 다른 사람을 위해 ‘행하고 있다’. 내가 ‘나만의’젠더라고 부르는 것은 때로 어쩌면 내가 창작해낸 것이거나 정말 내가 소유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누군가 자신만의 고유한 젠더를 구성하는 관점은 처음부터 그 사람 외부에 있고, 저자가 한 명이 아닌 사회성 속에, 그 사람 너머에 있다.

헤겔 철학에서 거론하는 ‘인정’이라는 것, 혹은 ‘인정’이라는 욕망과 그것을 이루는 규범들은 인감됨에 대한 사유를 제기한다. 만일 욕망이 바라는 게 인정을 받는 것이라면, 젠더도 욕망으로 인해 작동되는 한 인정을 받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는 인정 도식이 인정을 함으로써 그 사람을 ‘허물거나’ 아니면 인정을 거두어서 그 사람을 ‘허무는’ 도식이라면, 인정은 인간을 차별적으로 생산하는 권력의 장이 된다. 이는 욕망이 사회적 규범에 개입되어 있는 만큼 권력의 문제와 결부되고, 또 누가 인정받을만한 인간이고 누가 그렇지 못한지의 자격을 정하는 문제와도 결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식 가능성(젠더의 결과)은 사회적 규범에 의해 인정을 받은 결과이다. 그것은 사회적 소속감을 줄 수 있다. 한편 규범에 대한 거리두기는 소속감을 덜하게 할 수 있다. 거리두기는 규범에 비판적이면서 규범에 변화를 주는 관계를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물론 나를 인정하고 있는 그 관점이 내 삶을 살 수 없게 만든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여기가 바로 비평이 등장하는 지점이다. 이때 비평은 다른 삶의 양식의 가능성을 열기 위해서 삶이 규제받는 관점이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차이를 차이 자체로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동화의 양식에 저항하는 삶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한 보다 폭넓은 조건을 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젠더 허물기』에 실린 글들은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존속과 생존의 문제와 연결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이는 ‘신젠더정치학’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트랜스젠더, 트랜스섹슈얼리티, 인터섹스 그리고 이들이 페미니즘 및 퀴어 이론과 맺는 복잡한 관계와 관련된 여러 운동의 조합물이다. 이 화두는 페미니즘 이론과 퀴어 이론이 동시에 발전해나가면서 서로 수용되기도 하는 운동과 이론적 실천의 산물이랄 수 있다.

신젠더정치학이 제기하는 문제는 여러모로 페미니즘이 제기하던 문제와 같은 원인을 공유하고 있다. 이를테면 성별이 모호하거나 양성구유의 어린 아이에게 성을 ‘정상화’한다는 목적으로 강제로 수술을 하는 관행은 이상화된 인간 신체를 지배하는 규범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문제삼을 수 있다. 아동의 초기 동성애 성향의 징후를 검사하는 진단은 타고난 젠더가 아닌 다른 젠더 특질을 표현하는 것을 병리화하여 트랜스섹슈얼리티라는 특성을 얻게 한다.

10년 전 혹은 20년 전 젠더 불평등은 암묵적으로 여성에게만 적용되었지만, 이젠 더 이상 여성이 젠더 불평등의 현대적 용례를 확인할 유일한 틀로 작용하지 않는다. 여성에 대한 불평등은 지속되고 있고, 전세계적으로 천차만별인 빈곤과 문맹의 수준을 골해본다면 특히 빈곤층 여성과 유색인종 여성의 불평등은 여전하므로 이와 같은 젠더 불평등의 차원을 인정하는 것은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제 젠더는 젠더 정체성을, 특히 트랜스젠더주의나 트랜스섹슈얼리티의 정치학 및 이론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의미하기도 한다. 트랜스젠더나 트랜스섹스인 사람은 폭력과 병리화의 대상으로 노출되고 그런 상황은 유색인종 사회의 트랜스인 경우 더욱 악화되기 마련이다. 트랜스로 ‘판독’되거나 트랜스로 판명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젠더 폭력 연쇄의 일부로 볼 수 있다. 이들을 향한 살해 행위나 인터섹스 유아나 아동에게 행해지는 강제 ‘교정’ 행위, 종종 그들의 몸을 평생 불구로 만들고 그 몸에 외상을 남기며, 또 성 기능과 성적 쾌락에 대해 신체적 제한을 가하는 강제적인 ‘교정’ 행위와 연결해서 이해해야 한다.

인터섹스 운동은 원치 않는 수술에 반대하고, 트랜스섹스 운동은 때로 예정수술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 이 둘은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타고난 이형성을 확립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원칙에 대해서는 두 운동 모두 반대한다는 점을 파악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 (인터섹스나 트랜스 섹스 운동을 포함한) 트랜스 행동주의는 원치 않는 강제적 젠더 배치 형식에 반대하며 더 큰 자율성을 요구한다. 이 자율성은 복잡한 논리를 담은 주장이지만 범박하게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결정권이 배치된 장소는 사실 행위 주체의 활동을 지원해주고 또 가능케 해주는 사회 세계의 맥락에 놓일 때에만 가능한 개념이 된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가능한 선택을 확립해주는 제도를 바꾸는 것이 자기결정권 행사의 전제 조건이므로 개별 행위자는 사회 비판 및 사회 변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다. 그래서 자기 힘으로 젠더를 주장하는 행위를 가능하게 하고 또 지원해주는 사회 규범이 존재하는 한에서만 우리는 ‘자기만의’ 젠더의 의미를 결정할 수 있다. 어떤 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외부’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의 입지를 가지려면 자기가 사회성 속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남자 또는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트랜스섹슈얼의 욕망을 단순히 기존 정체성 범주에 순응하려는 욕망으로 일축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변화 자체에 대한 욕망, 변화 활동으로서의 정체성 추구, 변화 행위로서의 욕망을 나타내는 본보기일 수 있다. 각가의 경우 안정된 정체성에 대한 욕망이 작용하고 있지만, 살 만한 삶이 가능하려면 정말 여러 종류의 안정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게 중요해 보인다. 즉 인식 범주가 존재하지 않는 삶을 살만한 삶이 아니듯, 인식 범주에서 살아낼 수 없는 규제가 생기는 삶도 수용할 만한 대안은 못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하게 짚어야 하는 것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살 만한 삶을 모두에게 입법화하는 것을 중단하는 일이고, 마찬가지로 특정한 사람에게만 살기 힘든 삶을 모두에게 금지하는 것을 막는 일이다. 입장의 차이, 욕망의 차이가 존재하는 만큼 삶의 가능성을 최대화하기 위해, 견딜 수 없는 삶이라는 사회적 죽음 또는 실제 죽음의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젠더 규범에 대한 비판은 분명 삶의 맥락 위에 놓여야 할 것이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전환한 트랜스섹슈얼리티에 대한 비판은 마치 여성성은 타고난 어떤 성에 속하는게 합당하고, 젠더 정체성은 틀림없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신체에서 비롯될 수 있고 비롯되어야 하는 것처럼 여성성을 ‘전용’하는 데 초점을 두어왔다. 그러나 젠더를 역사적 범주로 이해한다는 것은, 몸을 문화적으로 구성하는 방식이라고 여겨지는 젠더가 계속 수정될 수 있게 열려 있으며, (인터섹스 운동이 분명히 밝혔듯) ‘신체’와 ‘성’은 문화적 틀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치 당연하거나 필연적인 속성이기라도 한 것처럼 여성성을 여성의 몸에 귀속시키는 일은 규범의 틀 안에서 일어나고, 그 틀 안에서 여성성을 여성의 것으로 배치하는 것은 젠더 생산의 기제이다. ‘남성적’ 혹은 ‘여성적’ 같은 용어는 가변적인 것이다. 문화적 규제와 경계에 따라서 ‘남성적’, ‘여성적’이라는 용어가 되풀이된다고 해서 그것이 늘 같은 것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이런 용어의 사회적 표명은 그 용어가 반복에 의존하는 방식을 지칭하며, 이런 반복은 젠더의 수행적 구조의 한 차원을 구성한다. 따라서 젠더를 지칭하는 용어는 결코 안정될 수 없으며, 언제나 수정되는 과정 중에 있다.

 

젠더와 기술에 대한 안건은 트랜스섹슈얼에 대한 담론이기도 하지만 페미니즘의 전선에서도 중요한 내용이다. 특히 재생산의 기능이라는 우익의 담론에 대해서 낙태권 행사와도 밀접한 이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착안해야 할 점은 태아를 대변해 ‘생명’이라는 용어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삶의 ‘생존 가능성’이 어떻게 몸의 자율권 행사와 그 자율권을 가능케 하는 사회적 조건에 좌우되는지를 이해하자는 데에 있다. 그러나 젠더 정체성 장애 진단이 가져오는 병리화 효과를 극복하려는 사람들의 사례에서처럼 우리는 사회적 지원과 보호를 요구하며 행위 주체성 자체가 여러 젠더 가운데서 어떻게 다르게 배치되는지를 지배하는 규범의 변화를 가져오는 자율성의 형식에 대해 말하려는 의욕을 가진 만큼 여성의 선택권이라는 축소된 개념은 잘못된 명칭이 될 것이다.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우리가 인간적 삶에 대해 말할 때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살아가고 있는 어떤 존재를 지칭하고 있으며, 살아가는 존재의 범위는 인간의 범위를 넘어선다는 것을 밝혀왔다. 삶의 가능성은 인간적인 것을 초월해 살아 있는 존재에 속하는 것이므로, 이런 역설은 살 만한 삶의 문제와 인간적 삶의 위상을 분리할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프란츠 파농이 새로운 인간주의를 언급하면서 제기한 인간됨에 대한 범주는 ‘인간’의 범주를 구성하는 데 내재하는 권력의 차이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인간’이라는 용어의 역사성,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만들어지고 굳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겠다.

‘인간’이라는 범주는 자기 안에 인종 간 권력 격차 작용을 자신의 역사성으로 간직하고 있다. ‘인간’ 범주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고, ‘인간’은 결코 파악될 수가 없다. 인간 범주가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며 또 광범위한 소수자들을 배제해야만 작동된다는 말은, 그런 범주에서 배제된 자들이 그 범주에 대해, 그 범주에서 말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범주에 대한 새로운 표명을 시작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런 문제들이 미래의 어떤 안건들을 형성할 것이다. 이 안건이 앞으로 학자와 활동가로 하여금 함께 긴급하고도 복잡한 문제인 친족 구조상의 변화들, 게이 결혼에 대한 논쟁, 입양의 조건, 재생산 기술에 대한 접근권과 같은 것들을 제기할 것이다. 이는 인간이 어디서 어떻게 존재가 되는지 재고해보는 부분에는 유아가 등장하는 사회적 지형과 심리적 지형에 대해 재고하는 일도 포함될 것이다.

정신분석학은 개인의 심리 생활의 핵심을 형성하는 일차적 성차 개념을 옹호하는 데 활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심리적 지형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부계 계보의 보존, 국가 문화의 전파, 이성애적 결혼을 목적으로 정신분석학 용어를 동원하는 것은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할 뿐 특별히 생산적이지도 필연적이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은 섹슈얼리티가 자신을 규제하는 사회 규범에 순응하지 못하는 방식을 알기 위한 이론이며 문화적 적응에 대한 비판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 알 수 없는 것에 의해 내몰리는데, 이런 충동은 딱이 완전히 생물학적이지도 그렇다고 문화적이지만도 않은 언제나 그 둘의 밀도 높은 집중이 일어나는 장이다. 내가 나 자신일 거라고 예측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내가 나 자신에게 타인이라는 사실은, 나의 자기이해를 넘어서는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작동 영역을 유지하면서도 나의 탄생과 죽음 너머에 규범의 사회성이 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마찬가지로 섹슈얼리티는 일정 정도 우리를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설정한다고 생각해볼 수 있겠다. 우리는 완전한 의미와 목적을 분명하게 설정할 수 없는 어딘가 다른 곳에서 동기를 얻어 움직인다. 그것은 단지 섹슈얼리티가 규범의 작동을 통해서 또 규범이 허물어지는 주변적 양식을 통해서 문화적 의미를 전달하는 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젠더에 대해서 말하고 우리의 섹슈얼리티를 드러내면서 이런 문제들에 말하지만 전혀 의도치 않게 존재론적 교착과 인식론적 난국에 사로잡히게 되기도 한다. 내가 나라는 주장을 할 때 다른 사람들에 의해 나라는 것이 주장된다 할지라도, 젠더라는 것이 내 것이 되기도 전에 다른 사람에 대해,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섹슈얼리티 또한 어떤 특정한 ‘나’의 박탈을 포함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게 나의 정치적 주장에 종지부를 찍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단지 누군가 이런 주장을 할 때, 그 사람은 그 사람보다 훨씬 많은 것에 대해 주장하고 있다는 뜻일 뿐이다.

 

 

 

 

 

 

 

 

 

 

 

 

 

 

 

 

 

 

 

 

 

 

 

 

옮긴이 후기

<나를 허물고 우리로>

 

젠더가 허물어진다. 내가 우리 앞에 무너진다. 개별 주체의 수행적 젠더 구성을 논의하던 버틀러가 젠더는 사회적 규범성으로 허물어진다고 말한다.

즉 개인의 삶은 개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안에 그 의미를 구성하며 그 사회 속의 개인은 상호 의존성과 상호 관계성 안으로 무너져내린다. 과거 개별 ‘젠더’의 계보학적 구성을 이론적으로 고찰하던 버틀러는 이제 하나의 젠더가 혼자서는 설 수 없다는 현실의 상호성에 주목한다. 현실의 젠더는 이처럼 상호 의존과 상호 관계에 열려 있어서 자율적이거나 독립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개별적이고 단독적인 ‘나’는 언제나 ‘우리’ 앞에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나’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에서 제시되고, 이제 ‘나’는 그런 맥락 속에서 공동체인 ‘우리’를 전략적 범주로 재소환한다. 『젠더 허물기』에서 ‘우리’는 상당 부분 남성과 다른 대우를 받아왔고, 공적인 발언의 중요성에 있어 의심을 받았고, 합의를 이뤄낼 가능성이 미약하다고 간주되어온 여성들이며, 더 나아가 비제도적 방식으로 철학을 공부한 철학자 비규범적 방식으로 젠더를 수행한 퀴어들이기도 하다.

 

『젠더 허물기』는 14년 전의 『젠더 트러블』과 달라졌다. 3가지 정도로 추려볼 수 있겠다.

①‘나’에서 ‘우리’로의 존재의 인식론으로 확대

②이론적 정교함에서 현실적 정치성으로 선회해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정치윤리적 성찰’

③다문화 시대에 차이를 수용하는 올바른 방식으로서 ‘문화 번역’의 가능성을 강조

 

과거의 『젠더 트러블』이 ‘나’의 불안정하고 비결정적인 젠더 모호성을 옹호하면서 하나의 범주로 고정되지 않는 비정체성의 젠더 이론을 형성하고자 했다면, 『젠더 허물기』는 여성이면서 사회적 소수자로, 또 성적 소수자로 살아가는 현실의 사회, 문화, 역사, 지역적 관계 속에서 소통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정체성을 논의한다. 이것이 바로 문화 번역이라는 현실적 삶의 정치성이 주창되는 지점이다.

 

‘나는 우리로 허물어진다’라는 언술은,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인식, 우리를 우리라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은 이미 나와 우리의 외부에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우리의 존재론적 의미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관계, 우리가 사는 사회와 문화의 배경과 맥락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호감이나 성적 경향과 관련되어 있고. 그런 의미에서 이미 우리는 우리의 외부에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차이에서 오는 도전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인식 가능성의 척도 자체를 문제 삼는 차이를 윤리적으로 대면할 수 있을까? 그것은 나와 다르다는 것, 그 차이가 내 존재에 위기와 문제를 가져온다고 하더라도 그 차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윤리적 방식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차이의 윤리적 대면이라는 주제는 자연스럽게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정치윤리의 문제로 나아갈 계기를 마련한다. 강대국의 제도권 학자, 버클리 대학 백인 교수인 버틀러는 자신의 혈통적 출신. 젠더 동일시 문제를 겪는 사람이며 따라서 비정통적 방식 비제도적 교육, 비주류 젠더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비규범적 젠더로서 비제도적 철학을 한다는 그녀의 ‘타자적 위상’이 사회적 소수자의 문제를 깊이 돌아보게 만든 것이다.

이제 버틀러는 젠더 규범에 순응하는 전형적 여성만 페미니즘 논의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젠더 교차적 동일시를 하는 여성 젠더도 페미니즘을 주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제도권 철학이나 규범적 젠더라는 안정된 제도나 확정된 의미가 기존의 고정된 규제에서 자유로울 때 새로운 해석과 의미가 열릴 수 있다. 정통 철학, 규범적 젠더만을 고집하는 것은 억압과 폭력을 생산할 수 있는 반면, 그로부터의 자유와 타자성과의 소통은 비억압적이고 비폭력적인 미래로 향할 가능성을 연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의 이단아, 젠더의 문제아가 철학의 타자로서, 또 젠더의 타자로서 철학과 젠더 내부의 이질성과 차이를 드러내고 동일시의 폭력을 막을 윤리적 방식을 제시할 수 있다.

그리하여 버틀러는 다문화 시대에 차이를 마주할 윤리적 방법으로 문화 번역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복잡한 글로벌 사회에서 문화 번역은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의 변환 속에 일어나는 ‘타자와의 대화적 관계’의 가능성이다. 문화 번역은 보편성 개념에서 배제된 것으로부터 역사적이고 우연적인 자기 정의를 발견하는 언어도단이나 수행 모순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서로 경쟁하는 열린 보편성으로 재소환되어 자기 안의 유령인 타자를 포함할 가능성, 반토대주의적인 의미에서의 ‘구성적 외부’가 될 잠재성으로 제시된다. ‘경쟁하는 열린 보편성’으로 재소환된 문화 번역을 기존의 보편성 개념을 파괴하면서 보편성의 구성적 외부이자 보편성의 우연적 경계를 구성할 수 있다. 이는 따지고 보면 보편성으로 ‘구현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보편성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구성한다는 뜻으로 확장될 수도 있는 것이다.

버틀러의 『젠더 허물기』는 젠더화된 상호작용과 제도의 사회적, 법률적 의미화의 층위가 구성되는 방식, 그리고 제도 담론의 모태적 틀이 되는 인식 가능성에 비평적 시선을 가질 것을 주장한다. 엄격히 규범적인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삶을 허물자는 의미에서 본다면 기존 젠더 계보학의 연장선에 있다고도 할 수 있지만 더 중요하게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맥락과 지형에 대한 비평적 독해를 강조한다.

비평적 시각을 갖는다거나 비평적이 된다는 말은 근본적으로 장소를 갖지 않는 어떤 자유로운 ‘비장소’를 갖자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기존에 당연히 받아들이던 조건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열린 사고’를 갖자는 것이다. ‘비평성’이란 사유 실험, 에포케, 의지 행위를 통해 도달할 수는 없지만 토대 자체의 열개와 파열을 거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너무나 의심 없이 당연시 되던 규범적 기준을 형성하는 권력관계와 담론 조건에 대해 끊임없이 정치적, 윤리적으로 심문하는 일이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