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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트러블 3장 3-4절 발제문(16.12.04) (2).hwp
3장. 전복적 몸짓들
3. 모니그 위티그 - 몸의 해체와 허구적 성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썼다.(292) 그러나 이미 젠더화되지 않은 인간이 있기는 한 것인가? 젠더의 표시는 몸에 인간의 몸이라는 ‘자격을 부여하는’ 행위로 보인다. 유아가 인간이 될 때 어느 쪽 젠더에 맞지 않는 몸의 형태들은 인간됨의 외부로 나가떨어지고 사실상 탈인간화 영역과 비체의 영역을 구성한다. (293) 보부아르는 성별화되어 태어나는 것과 인간이 되는 것은 동시 공존하면서 동시발생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의 이론은 그녀가 향유하지 못한 급진적인 결과를 함축한다. 예컨대 섹스와 젠더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해서, 주어진 섹스가 된다는 것이 주어진 젠더가 된다는 말은 아니다. 섹스가 젠더를 제한하지 않는다면, 섹스의 분명한 이분법으로 규제받지 않는 젠더, 즉 성별화된 몸에 대한 문화적 해석방식들이 가능할 것이다. (294)
몸에 작용하는 언어의 권력은 성적 억압의 원인이기도 하고, 그 억압을 넘어설 방법이기도 하다. 언어는 마법 같지도, 변경 불가능하지도 않다. 즉 “현실은 언어를 바꿀 수 있는 성형력이 있으며, 언어도 현실을 바꾸는 작용을 한다.” 언어는 발화 행위를 통해 현실에 작용하는 권력을 가정하기도 하고 또 변화시키기도 하는데, 이런 작용이 반복되면서 관행을, 궁극적으로는 제도를 침해하게 된다.(303) 지배는 이와 같은 언어를 통해 발생한다. 그 언어는 자신을 성형할 수 있는 해동으로 이차적 질서, 인공적 존재론, 차이와 불펴등의 환영을 창조하고, 결과적으로 사회적 현실이 되는 위계질서를 창출한다. (306)
위티그는 추상적 관념과 물질적 현실 간의 구분을 거부하면서, 관념은 언어의 물질성 안에서 형성되고 순환하는 것이며 언어는 사회적 세계를 구성하기 위한 물질적 방식 속에서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 이런 구성들은 근본적인 통일성과 풍요성이라는 선험적 존재론의 영역과 반대된다고 판정될만한 왜곡과 물화의 사례들로 간주된다. 따라서 구성물들은 담론 안에서 권력을 획득한 허구적 현상이 될 때에만 실재적이다. 그러나 이런 구성물들은 언어의 보편성과 존재의 통일성에 은근히 의지하려는 발화수반행위(수행문의 일종, 발화 순간에 행위가 즉각 발생하는 화행) 때문에 위력을 상실한다. (309)
위티그는 자의식적으로 도전적 제국주의 전략을 쓰면서, 오직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관점을 취해야만, 또 효과적으로 전세계를 레즈비언화해야만 강제적 이성애 질서가 파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강제적 이성애 분야와 경쟁하는 전쟁 전략만이 그 이성애의 인식적 헤게모니에 효과적으로 도전하는 작용을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311) 그러나 위티그의 주장은 이성애가 완전한 위치 변경을 필요로 하는 전체적 체계로 이해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성애주의를 재의미화 가능성 자체가 거부된다. (313) 나는 위티그가 이성애와 동성애 사이에 설정한 근본적인 단절은 진실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314) 분명 강제적 이성애라는 규범은 위티그가 묘사하는 강제력이나 폭력과 함께 작동한다. 그러나 나의 입장은 그것이 이성애가 작동되는 유일한 방식은 아니라는 것이다. (315)
레즈비언의 맥락에서 볼 때, 부치의 정체성으로 보이는 남성성과의 ‘동일시’는 단순히 레즈비어니즘을 이성애적 관점과 동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한 레즈비언 팸이 설명한 것처럼, 그녀가 자신의 애인이 여자다웠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은 ‘여자답다는 것’이 부치의 정체성에서 ‘남성성’을 맥락화하고 재의미화한다는 의미이다. 그 결과 이를 남성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남성성은 언제나 문화적으로 인식 가능한 ‘여자의 몸’과 반대적 양상으로 가시화된다. 그 욕망의 대상이 구성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이런 욕망의 위반이 생산되는 불협화음의 병치이자 성적인 긴장이다. 다시 말해 레즈비언 팸이 욕망하는 대상은 탈맥락화된 여성의 몸도, 분명하지만 중첩되어 있는 남성적 정체성도 아니며, 성애적 상호 작용으로 들어가면서 두 용어 모두 안정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317)
만일 성의 범주가 반복된 행위들을 통해 설정된 것이라면, 반대로 문화 영역 안에 있는 몸의 사회적 행동은 위티그의 주장대로, 실제 권력을 철회할 수도 있다. 반복된 몸의 행위가 성의 범주에 부과한 바로 그 실제 권력을 철회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권력이 의지로 환원되지 않고 자유에 대한 고전적인 자유주의와 실존주의 모델이 거부당한다면, 권력관계는 바로 그 의지의 가능성을 규제하고 구성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고, 내 생각으로는 그렇게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318) 따라서 권력은 거부될 수도, 철회될 수도 없다. 다만 재배치될 뿐이다. 사실 나의 견해는, 게이와 레즈비언의 실천에 대한 규범적 핵심은 권력의 완전한 초월이라는 불가능한 환영보다는, 권력의 전복적이고 패러디적인 재배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19)
위티그의 결론은 자신이 극복하고자 했던 바로 그 근본적인 의존관계를 만들어낸다. 레지비어니즘은 이성애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이성애와의 근본적인 단절 속에서 자신을 규명하는 레즈비어니즘은, 바로 그 이성애적인 구조를 재의미화할 능력을 자신에게서 제거하게 된다. 그 결과 이 레즈비언 전략은 강제적 이성애를 억압적인 형태로 공고하게 만들 것이다. (326)
4. 몸의 각인, 수행적 전복
내부와 외부의 구분도 그렇지만, 몸의 경계도 원래 정체성의 일부였던 것을 더러운 타자로 방출하거나 전환하면서 확립된다. 섹스, 섹슈얼리티 혹은 피부색에 따른 몸의 거부는 섹스/인종/섹슈얼리티라는 차이의 축을 따라 문화에서 지배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되고, 또 정체성을 강화하는 혐오감 때문에 발생하는 추방이다. 영의 크리스테바 전유는 혐오 작용이 어떻게 배제와 지배를 통해서 대타자 및 일련의 타자들을 만드는 데 기초한 정체성들을 강화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는 사실상 내부가 외부로 되어버리는 배설경로 때문에 혼란에 휩싸인다. 사실상 이것은 타자들이 배설물이 되는 양상이다. (336)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가 완전히 구분되려면 몸의 전체 표면이, 있을 수 없는 침투 불가능성을 이뤄내야 한다. 이런 표면들의 봉합은 흠 없이 매끈하게 주체의 경계를 구성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봉합은 반드시 파열하게 되어 있다. 그 봉합이 두려워하는 배설물의 더러움 때문이다.
만일 내부세계가 더 이상 어떤 장소를 지칭하지 못하면, 자아의 내적 고정성, 그리고 실은 젠더 정체성의 내적 위치도 마찬가지로 의심스러워진다.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공공담론의 어떤 전략적 관점에서 내/외부의 분절된 이분법이 장악력을 갖게 된 것일까? 몸은 어떻게 깊숙한 곳에 숨겨진 비가시성을 몸의 표면 위에 형상화할 것인가? (337)
내면성에서 젠더 수행성으로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죄수들의 상황에서 훈육체계의 전략은 욕망을 강제로 억압하는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몸을 그들 자신의 본질, 양식, 필연성이라는 금지의 법으로 의미화한다고 쓰고 있다. 이 법은 문자 그대로 내면화되는 것이 아니라 합체되며, 그 결과 법은 그 몸의 위에, 또 그 몸을 통해 의미화되는 그런 몸들을 생산한다. 그리고 거기서 법은 그들 자아의 본질, 영혼의 의미, 양심, 그리고 욕망의 법으로 명백히 드러난다.(338) 몸은 자기 자신을 의미화의 결여로 제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혼은 이제 내부/외부라는 구분 자체가 다툼을 벌이며 위치 변경하는 어떤 표층의 의미화가 되고, 원래의 자신을 영원히 부인하는 어떤 사회적 의미화로서 몸 위에 각인되는 내적 심리공간에 대한 비유가 된다. 푸코의 용어로 말하자면, 얼마간 기독교적 상상력이 제창하듯 영혼이 몸 안에 갇히거나 몸에 의해 가두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몸의 감옥이다.” (339)
행위, 제스처, 그리고 욕망은 내적 핵심이나 본질이라는 결과를 생산하지만, 또 정체성의 조직 원칙이 어떤 원인이 된다고 암시하지만, 결코 그 원인을 드러내지 않는 의미화의 부재들이 작용을 일으키며 그것을 몸의 표면 위에다 생산한다. 보통은 그 의미가 해석되는 이런 행위, 제스처, 실행들은 수행적이다. 다시 말해 욕망을 분명히 표현하고 실행하는 행위와 제스처야말로 내면이라는 환영, 즉 젠더를 조직하는 핵심이라는 환영을 창출하는 것이다. (341)
드래그의 연기는 연기하는 자의 해부학과 연기되고 있는 젠더의 구분 위에서 작동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중요한 육체성에 관한 세 가지 우연적 차원에 직면해 있다. 그것은 해부학적 섹스, 젠더 정체성, 그리고 젠더 연기(performance)이다. 만일 연기자의 해부학적 구조가 이미 연기자의 젠더와 다르다면, 그리고 이 둘 모두가 연기하는 젠더와 다른 것이라면, 이 연기의 수행은 섹스와 연기 간의 불일치를 암시할 뿐 아니라 섹스와 젠더, 그리고 젠더와 그 연기 간의 불일치까지도 암시한다. (343) 여기서 주장하는 젠더 페러디의 개념은 이런 패러디적 정체성이 모방하는 원본을 가정하지 않는다. 사실 패러디는 원본이라는 개념 자체에 관한 것이다. 젠더 정체성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개념은 환영의 환영, 즉 언제나 이미 이중적인 의미에서 비유인 대타자의 변형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젠더 패러디는 젠더가 그 양식에 따라 스스로 형태를 갖추는, 원래의 정체성 자체가 원본 없는 모방본이라는 것을 폭로한다. 더 정확히 말해 그것은 사실상, 그 효과로 인해 모방본의 위상을 띠게 되는 생산물이라는 것이다. (344) 프레드릭 제임슨의 ‘포스트 모더니즘과 소비자 사회’에 따르면, 원본 개념을 조롱하는 모방은 패러디보다는 패스티시의 특징이다. “패스티시는 어떤 중립적인 모방의 실천일 뿐이다. 패스티시는 텅 빈 패러디이고, 유머를 상실한 패러디이다.”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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