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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트러블] 22절 라캉, 리비어 그리고 가면의 전략 / 161120 아루미 발제

라캉은 여성에게 강요되는 것, 즉 이렇게 팔루스인 것 처럼 보이는것은 필연적으로 가면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이성애적 코미디에 대해 계속 설명한다. 이 용어는 모순적 의미를 안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한편으로 ‘~이기(being)’, 즉 팔루스에 대한 존재론적 특징이 가면이라면, 그것은 모든 존재를 보이기’, 즉 존재의 외양이라는 형식으로 환원하는 것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 결과 모든 젠더의 존재론은 외양의 작용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 가면은 그에 선행하는 어떤 존재나 존재론적 특징이 있다고 주장한다. 가면으로 가려지고 폭로될 수 있는 여성의 욕망이나 요구, 다시 말해 정말로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적 의미화 경제의 종국적 파열이나 위치 변경을 약속할 여성적 욕망이나 요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175)

라캉의 모호한 분석구조에는 최소한 두가지의 전혀 다른 과제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가면은 성적 존재론의 수행적 산물, 즉 가면 자체를 어떤 존재로 확신시켜 보이려는 것쯤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른 한편, 가면은 여성적 욕망의 부정으로 읽힐 수 있는데, 남근 경제의 규제를 받아 재현 불가능하던, 어떤 선험적인 존재론적 여성성을 전제로 하는 여성적 욕망의 부정으로 읽힐 수 있는 것이다. 첫번째 과제는 패러디적인 ()구성을 써서 젠더 존재론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하는 것과 관련되며, 아마도 보이는 것존재하는 것간의 애매한 구분이라는 유동적 가능성을, 즉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긴 하나 라캉이 추구했던 성적 존재론의 코미디차원이 극단화된 양상을 추구하는 것 같다. 두번째 과제는 남근 경제라는 관점에서 억압되어온 여성 욕망은 무엇이든 복원하거나 해방시키기 위해, 가면 벗기기라는 페미니즘의 전략을 개시할 것이다.(176)

여성이 자신의 여성성에서 본질적인 부분을 거부하고, 특히 가면을 통해 여성성의 모든 속성을 거부하는 이유는 바로 팔루스가 되기 위해서, 즉 타자의 욕망의 기표가 되기 위해서이다. 여성이 사랑하거나 욕망하리라 예상되는 것은 자신이 아닌 어떤 것을 향해 있다. 그러나 여성은 자신이 사랑의 요구를 전달하고 있는 사람의 몸에서 욕망의 기표를 발견한다. 물론 우리는 이 기관에 페티시의 가치를 갖는 의미화 작용을 투여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p.84)

[가면은 우울증적 합체(incorporation) 전략의 일부이고, 사랑의 거부 결과 상실이 발생하는 곳에서 상실한 대상/대타자(Other)의 속성을 몸에 걸치는 것이다. 가면이 이처럼 거부를 해결하는 동시에 지배한다는 말은, 이런 전유야말로 그 거부가 스스로 거부되는 전략, 요컨대 두 번 상실한 사람을 우울증으로 흡수하면서 정체성의 구조를 강화시키는 이중 거부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의미심장하게도 라캉은 가면에 대한 논의를 여성 동성애와 연관시켜 설명한다. 그는 관찰에서 밝혀졌듯이 여성의 동성애 경향은 실망에서 오는 것이고, 그 실망은 사랑의 추구라는 측면을 강화시킨다”(p.85)라고 주장한다. 편의상 누가 관찰하고 무엇이 관찰되는가는 생략되어 있는데도, 라캉은 자신의 해석이 누구든 주의 깊게 본 사람에게는 명백히 나타난다고 간주한다. ‘관찰을 통해서 바라보게 되는 것은 여성 동성애자의 근원적인 실망이고, 여기서 이 실망은 가면을 통해 지배/해결된 거부를 되살아나게 한다. 또한 여성 동성애자가 어떤 강화된 이상화(idealization), 즉 욕망을 대가로 이루어지는 사랑의 요구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도 다소 관찰하게 된다.(179)

아마도 라캉은 관찰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레즈비언의 탈성화(desexualiztion)된 위상, 욕망의 부재로 보이는 일종의 거부의 합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결론이 레즈비언 섹슈얼리티를 섹슈얼리티 자체의 거부로 받아들이는, 이성애적이고 남성적인 관찰에 따른 필연적 결과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여기서의 섹슈얼리티는 단지 이성애적인 것으로만 간주되고, 이성애 남성으로 구성된 관찰자는 명백히 거부당하고 있기 때문이다.(180)

[모든 거절(refusal)이 결국, 현재 혹은 과거에 있었던 다른 어떤 관계에 대한 충성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거절은 동시에 어떤 것의 보존이기도 하다. 가면은 이와 같은 상실을 감추지만, 그것을 감춤으로써 그 상실을 보존(하고 부정)한다. 우울증의 이중 작용이라는 이중적인 기능을 하는 것이다. 우울증적인 동일시를 몸 위와 몸 안에 각인하고 덧입는 한 방식인, 합체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가면을 쓰게 된다. 사실 그것은 거절당한 타자의 양식으로 몸을 의미화하는 것이다. 전유를 통해 지배당했던 모든 거절은 실패하고, 거절한 자는 바로 그 거절당한 자의 정체성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이 대상의 상실은 결코 절대적이지 못하다. 그것은 상실을 합체하기 위해 확장된 심리적/육체적 경계선에서 재분배되기 때문이다. 이는 젠더 합체과정을 우울증이라는 더 폭넓은 궤도에 놓이게 한다.](181)

리비어는 여성 섹슈얼리티가 이성애 혹은 동성애 형태로 발전되는 어니스트 존스의 유형학에 경의를 표하면서 그것을 검토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한다. 그러나 리비어는 이성애와 동성애 간의 경계를 흐리는, 그러면서 은근히 존스의 분류체계가 갖는 서술능력에 대항하는 중간 유형에 초점을 맞춘다. 라캉이 손쉽게 관찰을 언급한 것과 유사하게, 리비어는 이 중간 유형에 자신의 초점을 맞추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일상적 지각이나 경험에 의존하려 한다.(182)

페렌치는 동성애 남성이 자신의 동성애에 대한 방어의 일환으로 이성애를 과장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는 남성성을 갖고자 소망하는 여성이, 남성의 위협에 대한 불안과 보복을 피하기 위해서 여성성이라는 가면을 쓸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p.35)

독자는 내가 여성성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혹은 진정한 여성성과 가면의 경계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질문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는 바는 거기에는 어떤 차이도 없다는 것이다. 근본적이든 피상적이든 둘은 같은 것이다.(p.38)

여성성은 남성적 동일시를 지배/해결하는 가면이 된다. 남성과의 동일시는 이성애적 욕망의 모태라고 가정되는 것 안에서 여성인 대상, 즉 팔루스를 향한 욕망을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성을 가면처럼 쓴다는 것은 여성적 동일시의 거절을 의미할 수도 있고, 동시에 거절된 여성 타자의 과장된 합체를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강제적 이성애를 심리적으로 깨달은 결과, 우울하고 부정적인 나르시시즘의 순환 속에 그 사랑을 보존하면서도 보호하는 어떤 기묘한 형태가 되는 것이다.(187)

//우리는 여기서 구성된 남성성과 여성성의 개념이 해소되지 않은 동성애적 카섹시스(cathexis, 프로이트가 말하는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의 집중 발현)에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릴 수 있겠다. 동성애의 우울증적 거부/지배는 동성인 욕망의 대상을 합체하는 것에서 정점에 달하며, 배제를 통해 대립물을 요구하고 또 설정하는 확실한 성적 본성의 구성을 통해 다시 등장한다. 양성애의 우선성을 전제로 하거나, 리비도를 남성적인 것이라고 우선적으로 특징화하는 것은, 여전히 이 다양한 우선성들의 구성에 대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몇몇 정신분석학적인 설명들은 여성성이 남성성의 배제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고, 그때의 남성성은 양성적 심리를 구성하는 요소의 한부분이 될 것이다. 이분법의 공존이 전제되어 있으므로, 억압과 배제는 확실히 젠더화된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 개입된다. 그 결과 정체성은 언제나 이미 선천적으로 양성애적 기질에 입각해 있으면서, 억압을 통해 정체성의 구성요소로 분리된다. 어떻게 보면, 문화에 대한 이분법적 규제는 이성애적 관계가 문화로 등장하면서 이성애적 관계로 분리되어버린, 문화 이전의 양성애로 가정될 수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분법적 규제는, 문화란 그 문화가 억압하려는 양성애보다 결코 뒤늦게 오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즉 문화는 인식 가능성의 모태를 구성하고, 이 모태를 통해서 최초의 양성애 자체가 사고 가능한 것이 된다. 심리적 근원으로 놓였다가 후에 억압된다고 표현되는 양성애야말로 모든 담론에 선행하는 어떤 담론적 생산물이다. 이 생산물은 규범적 이성애라는 강제적이고 생산적인 배제의 관행을 통해서 발생한다.(190)

금기가 섹슈얼리티의 근본적인 분리를 만들어낸다면, 그리고 이 분리가 바로 그것의 작위성 때문에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입증된다면, 그것에 저항하는 분리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즉 모든 분리의 노력을 약화시킬 심리적 이중성이나 선천적 양성성이 존재할 것이 분명하다. 라캉이 표명한 목적은 이러한 심리적 이중성을 법의 결과로 고찰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그의 이론 안에 있는 저항의 지점이기도 하다.(191)

//상징계가 규정한 방식으로 성별화되는 질서는 언제나 실패하며, 몇몇 경우에는 성 정체성 자체의 환영적인 본성을 폭로하게 된다. 당대의 지배적 형식으로 문화적 인식 가능성이 되고자 하는 상징계의 요구는 다양한 정체성의 실패라는 드라마와 이런 환영들의 힘을 효과적으로 강화한다. 그 대안은 정체성이 어떤 현실적인 성과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낭만화, 실은 실패에 대한 종교적인 이상화, 또한 라캉의 서사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의심하게 만드는, 법 앞의 겸손이나 법의 경계가 있는 것 같다. ‘법 앞에서의필연적인 실패와 충족될 수 없는 사법적 명령 간의 변증법은 구약의 하느님과, 그 하느님께 보상을 바라지 않고 복종했던 겸손한 종들의 비틀린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그 섹슈얼리티가 이제 이런 종교적 충동을 욕구나 욕망 섹슈얼리티가 모두 소멸되는 일종의 황홀한 초월감 과는 다른, 사랑의 요구(‘절대적 요구로 간주되는)의 형식으로 체현한다는 것은 상징계에 더 큰 신뢰를 주게 된다. 상징계는 인간 주체가 그것에 접근할 수는 없어도,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신성으로 인간 주체에 작동하는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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