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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탈_ 3장 한 여인이 내게 나타났다_윤명_샘.hwp

I.

동성애자이면서 여성이라는 이중 결격사유로 고통받아온 레즈비언들은 반복적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빼앗겨왔다. 1960년대 후반 여성운동에 등장한 레즈비언 세대의 선결 과제는, 바로 앞 세대인 1950년대 레즈비언들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1950년대의 그녀들은 빈약한 고문헌 수장고를 뒤져서 초기 선구자들을 복원하는 과제를 이미 이뤄놓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레즈비언 역사 실천을 어렵게 만드는 침묵이 레즈비언 과거를 규명해낸 선배들의 작업마저 빛을 잃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한 여인이 내게 나타났다의 출간은 환영받을 만하다. 이 소설은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시대의 문헌적 유산이며 역사적 자료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작가인 르네 비비앙의 뮤즈이자 연인인 나탈리 클리퍼드 바니와 얽힌 고통스러운 관계를 열정적이고 몽환적으로 다룬 소설이다. 역사적이고 전기적인 맥락을 어느 정도 알면 이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9세기 역사에 누락된 하나의 편린은 섹슈얼리티 내부에 매우 중대한 역사적 변화가 이 시기에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동성애를 근대적 형태라고 상정했던 시기가 바로 19세기였다. 중세에는 동성애를 일종의 행동 양식, 죄스러운 행위로 정의했다. 동성애자가 하나의 인물 유형이라는 발상은 19세기의 산물이다. 동성애자 범주를 인식하여 그것을 기술하는 용어를 발전시킨 사람들이 19세기의 성과학자들이었다. 당대 작가들도 많은 동성애 경험을 특징짓는 도시 하위문화에 대한 증거를 기록했다. 콜레트가 매력적으로 묘사한 1910년 이전에 있었던 다양한 레즈비언 사회를 보면, 하층계급 술집에서는 청년들이 여자들에게 관심이 없고, 여자들은 음식이 나오기 전에 보수를 받지 않고 즐기며 춤을 추었고, 귀족계급들은 그녀들만의 비밀 파티를 열었다.

1900년이 되기 적전, 르네 비비앙과 나탈리 바니는 두 사람 다 갓 스물을 넘겼을 때 파리에 왔다. 이 두 젊은 여성이 레즈비언 르네상스를 일으킨 곳이 바로 파리다. 그녀들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게이 의식(?)’을 지니고 있었고, 이로써 당대 파리 레즈비언들과 자신들을 구별했다.

 

II.

나탈리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알았다. 훗날 그녀는 만일 자신의 연구가 수포로 돌아간다면 그 이유는 내 책들이 단지 여성의 표정만 짓고 있기때문이라고 스스로 평했다. 나탈리는 1899년 파리에 정착한 직후,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고급 매춘부 리안 드 푸지를 유혹했다. 푸지는 실화 소설 사포의 목가에서 그 관계를 다룬다. 이 소설은 남자들의 법이 얼마나 부당한지에 대한 반론을 펼치는, 그리고 육체라는 종교, 그것의 입맞춤은 기도라는 레즈비어니즘을 주장하는, 젊은 나탈리를 묘사한다. 바니를 모델로 한 소설 속 인물은 레즈비어니즘을 도착이라고 부르는 것에 반대한다. 그 대신에 레즈비어니즘을 일종의 개종이라고 부른다.

르네 비비앙과 나탈리 바니가 관계를 맺기 시작할 무렵, 그녀들 각자는 여성과 레즈비어니즘을 대표하는 문학 전우를 찾아냈다. 자신들의 뿌리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사포(시인)와 헬레니즘을 발견했던 것이다. 두 여성은 자신들이 고대 그리스 영혼의 후예이자 이교도이노라 천명했다.(왜 헬레니즘인 걸까요?)

르네 비비앙과 나탈리 바니는 뚜렷이 구분되는 레즈비언 자의식을 각성했고 그것을 명확히 드러냈다는 점에서 유일무이했다. 두 여성의 글은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에 대항해 분기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드러낸다. 동성애적 상황이라는 차원을 파악한 동성애자는 남녀를 분물하고 거의 없었다. 두 여성 모두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커밍아웃의 중요성을 통감했다. 래드클리프 홀이 관용을 논할 때, 그녀들은 자부심을 논했다. 관용론자들이 동성애가 선천성 기형이므로 그 누구도 법적 유죄 판결을 받을 까닭이 없다고 말할 때, 비비앙과 바니는 레즈비언을 낭만적인 인물로 묘사한 19세기 프랑스 문학의 관점을 지지했다.

리하르트 폰 크라프트 에빙이 통성애를 퇴행성 질병으로 분류하는 등 오만한 극단주의가 수반하는 반동성애적 경멸에 대해 그녀들은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산 지오반니, 여자가 실제로 남자를 사랑한 적이 있기나 한 거야?”

난 그런 미친 짓을 상상할 수조차 없어. 내게는 사디즘과 아동 강간이 오히려 정상인 것 같아.”

 

르네 비비앙과 나탈리 바니는 레즈비어니즘에 대해서만큼이나 페미니즘에 대해도 거침없이 말하곤 했다. 비비앙은 여성 독립이라는 주제에 관한 자료를 찾아 헤맸다. 그녀의 글에는 여전사, 남녀추니(남자와 여자의 생식기를 둘 다 가지고 있는 사람), 고대 여신이 넘쳐난다. 그녀의 산문 작품 중 상당수는 숭고한 여성 반역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고결한 처녀, 그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은 창녀, 사랑 없이 왕실 침대의 노예로 사는 대신에 가난과 자유를 선택한 왕비 같은 인물이 등장한다.

르네 비비앙은 남자에게 부당하게 희생당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도 여러 편 썼는데, 그중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는 영원한 노예이다.

 

, 당신, 영원히 고통받고 심약하여 속고 마는 사랑의 순교자여, 왜 당신은 품위를 깎아먹으면서까지 굴욕을 참고 이 거짓된 반려자의 야비함을 기꺼이 따르는 것입니까? 당신은 사랑에 굴복하는 것입니까, 공포에 굴복하는 것입니까?”

 

그녀는 내게 대답했다. “나는 사랑이나 공포에 굴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거 무관심과 습관일 뿐이에요.”

이 말을 듣자 거대한 슬픔과 거대한 희망이 몰아닥쳤다.

남성이 여성을 성적으로 독점하는 문제에 민감했던 르네 비비앙은 남성을 거부하는 여성들의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그녀는 인간 남자의 욕망을 수락하느니 차라리 괴물을 짝으로 택하거나 죽기를 자처하는 여성들에 관한 글을 다수 남겼다. 그녀의 많은 이야기는 그런 여자를 우연히 만나 거부당하는 굴욕을 맛본, 얼마간 넋이 나간 남자의 관점을 취한다.

르네 비비앙이 레스보스의 시인이었다면, 나탈리 바니는 뮤스였다. 바니 역시 작가였고 시인이었으나 작품보다는 그녀의 강렬한 개성, 관습에 아랑곳하지 않는 도도한 태도, 명료한 생각, 유혹하는 능력 면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작가들로 에워싸인 채 살았고, 그들 다수는 그녀의 다채로운 성격을 거의 그대로 작중 인물의 모델로 삼았다. 고독의 우물에서 홀은 나탈 리가 자아낸 분위기를 이렇게 기록했다.

 

그런 사람들이 발레리 시모어의 집에 자주 왔다. 신의 낙인을 이마에 새겨야 했던 남자와 여자 말이다. 차분하되 자기 확신에 차 있는 발레리 덕분에, 용기가 샘솟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발레리 시모어의 집에 모여 있을 때면, 모두가 지극히 정상이며 스스로 용감하다고 느꼈다. 거기에 그녀가 있었다. 매력과 교양을 두루 갖춘 이 여인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의 등대 같은 존재였다. 파도가 그녀의 발치를 후려쳤지만, 이내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III.

소설에 나타난 르네와 나탈리의 관계에서 가장 첨예한 쟁점, 그리고 다른 모든 갈등의 결정체는 일대일 관계였다. 나는 여기서 성 역할과 성애 관계에 대한 나탈리의 복잡한 이론을 온전히 다룰 수는 없다. 지금은 성애적 정서 구조 비판을 포괄하는 성 역할 비판을 나탈 리가 발전시켰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녀는 성 역할이 서로 다른 성에 할당된 인격적 특질을 억압하고 지배하라고 지시함으로써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고 여겼다. 그녀는 또한 각 개인이 잃어버린 완전성을 이성에게서 찾는 이유가 성애 관계의 인위적인 성별 구분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탈리는 질투, 소유욕, 독점욕 등의 정서가 이런 성적 체계로부터 유래했음, 여성이 부차적인 지위에 머문 것 또한 성적 체계 탓이라고 보았다. 나탈리는 의존성이 아닌 상호 독립성을 바탕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며, 사랑에 정절을 강요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녀에게 정절은 사랑과 욕망의 사멸을 의미했다.

나머지 내용들은 모두 르네와 나탈리의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애증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다. 그래서 그런지 개정판 후기에서 저자는 초역판 서문의 과오를 바로잡고 문체를 다듬을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나는 글을 대폭 수정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왔다.’라고 썼다.

 

한 여인이 내게 나타났다개정판 후기

바이올렛, 르네, 나탈리, 이 여성들이 침대에서 벌였던 전쟁에 대한 세밀한 연대기는 흥미진진한 역사가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레즈비언과 게이 역사 내부의 발전으로 인해 바니와 비비앙의 중요성이 점차 명확해지고 있다. 게이/레즈비언 역사가 그 체계, 기획, 그리고 실천의 측면에서 혁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제프리 웍스의 커밍아웃(1977)은 동성애 역사를 편찬하려는, 그리고 동성애 사회사를 구성하려는 추세의 가장 훌륭한 사례일 것이다. ‘새로운게이 역사의 특징은 유럽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은 언제나 성적인 행위를 해왔지만, 극히 최근에 이르기까지 이성애자와 동성애자의 세계에서 살지 못했다.”라는 통찰로 압축된다. 새로운 게이 역사의 목적은 이러한 성적으로 특화된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계의 출현과 이에 수반되는 사회학과 정치학을 기술하고, 연대를 확정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게이 역사를 상징하는 전형적인 개인들의 행위, 발상, 저작, 그리고 성적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개념적 틀을 개발해야 한다. 비비앙와 바니의 중요성은 그녀들의 정서적이고 성적인 불장난에 있는 것이 아니라, 19세기 말 성적 자유를 외치던 영웅들 가운데 제일 중요한 두 명의 레즈비언이라는 그 위상에 있다.

 

<생각났던 것들>

1. 생각해보면 유명한 작품 중에는 퀴어가 등장하는 작품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남성 중심 사회의 영향력 때문일까?

2. 르네와 나탈리의 연애사를 들어보면, 바람기 많은 사람과 낭만적 사랑을 꿈꾸는 사람의 연애 이야기일 뿐이다. 그 이야기에선 어떠한 혐오감도 느낄 수 없다. 사람들은 왜 동성애를 혐오할까?

3. 자신들을 동성애자로 위치시키며 그들만의 역사를 서술할 새로운 개념적 틀을 개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를 구분시키고 특이적 존재로 위치시키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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