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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탈 / 1장 여성거래 / 게일루빈 / 2016.09.11.() /닥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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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억압의 원인 분석은 젠더위계가 업는 성 평등 사회에 도달하려면 정확히 무엇이 변화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모든 평가의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더욱더 중요하다. 만약 남성의 선천적 공격성과 우월성이 여성 억압의 근원이라고 한다면 페미니즘 기획은 공격적 성을 없애버리거나 교정하는 우생학적 처리가 필요하다는 논리적 귀결에 이른다.

어떤 관계가 생물학적인 여자를 억압받는 여성이 되도록 만드는 것일까?

레비스트로스와 프로이트의 중첩된 작업은 생물학적 여자를 원자재로 하여 순치된 여성이라는 생산물을 형성해내는 체계적인 사회적 장치들을 파악할 수 있다.

섹스/젠더 체계는 한 사회가 생물학적 섹슈얼리티를 인간 행위의 산물로 변형시키고 그와 같이 변형된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련의 제도이다.

마르크스

아내가 노동자의 생필품 중 하나인 것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 가사 노동을 하는 것, 자본주의는 여성들이 대를 잇지 않고 여성들이 지도하지 않으며 여성들이 신과 대화하지 않는 기나긴 전통의 상속자라는 점을 결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런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요소이다.

 

앵겔스

 

유물론적 개념에 따르면, 역사에서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적 요소는 직접적인 생존의 생산과 재생산이다. 이것은 다시 두 가지 성격을 지닌다. 하나는 생존수단의 생산, 즉 음식, , 주거, 그리고 그런 생산에 필요한 수단의 생산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그 자신의 생산, 즉 종의 번식이다.”

 

섹슈얼리티 관계는 생산관계와 구별될 수 있고 구별되어야 한다는 엥겔스의 통찰은 주목 할 만하다.

 

친족: 유인원에서 인간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섹슈얼리티가 담당했던 역할

 

국가 형성 이전 사회에서 친족이란 성적 행위 뿐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의례적 행위까지도 조직하는 사회적 상호작용이라는 상용어이다. 생산과 분, 적대와 연대, 종교의식과 사회의식 이 모두는 친족이라는 유기적 구조 속에서 이루어진다. 많은 인류학자는 친족의 발명이 반 인류와 인류는 나누는 결정적 발전이라 간주해왔다.

레브스트로스의 친족의 기본구조는 친족이 생물학적 생식이라는 사실 위에 문화적 조직을 부과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 책이다.

 

하찮고도 소중한 상품 모니크 비틱, 레 게리에르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선물과 근친상간 금기라는 이 두 가지 절합이 여성 교환이라는 그의 개념과 덧붙여 진다. 친족의 기본 구조는 모스의 증여론을 일부 급진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모스와 레비스트로스 둘 다 선물 교환의 결속적 측면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선물 증여가 이바지하는 다른 목적들은 그것이 도처에 편재하는 사회적 교류의 수단이라는 점을 강화할 뿐이다. 모스는 서물이 사회적 담론의 가닥, 다시 말해 그런 사회들이 특화된 통치 제도 없이도 단결하게 하는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원시적 호혜성 이론에 결혼이 선물 교화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라는 생각을 덧붙이면서, 결혼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은 바로 여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결혼을 조직하는 것은 남성들이다. 여성 교환은 매력적이고 강력한 개념이다. 이 개념은 여성 억압을 생물학이 아니라 사회 체계 속에 위치시킨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그것은 우리가 여성 억압의 궁극적 위치를 물품 거래가 아니라 여성 거래에서 찾아야 한다고 제시한다.

여성 교환은 문화적 정의도 아니고 그 자체로 본질적이고 자연적인 체계도 아니라 사회관계의 이해이다. 친족 체계는 자연 세계의 일부에 사회적 목적을 부과한 것이다. 그것은 생산이다. 즉 주관적 목적을 위한 목적에 의한 대상들의 주조 및 변형이다. 나름의 생산, 분배, 교환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특정한 소유형태가 포함되어 있다. 여성 교환을 친족의 근본 원리로 간주했던 레비스트로스가 옳다면, 여성 억압은 센스/젠더가 조직되고 생산되는 관계들의 산물로 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의 마법

 

남근 선망과 거세 개념을 프로이트가 도입한 이유는 다름 아닌 여성성의 획득을 설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여자아이는 어머니가 거세되었음을 인식한 결과 어머니로부터 등을 돌리고 자기 리비도의 남성적 요소들을 억제한다. 여자 아이는 자신의 조그만 클리토리스를 커다란 페니스와 비교한 후 페니스가 어머니를 만족시키는 데 더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명백한 증거와 대면하고서 남근 선망 및 열등감의 포로가 되어버린다. 해부학적 해석인 듯 보이는 프로이트의 해석은 여성 생식기의 열등성은 상황적 맥락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친족, 라캉, 그리고 팔루스

 

라캉의 도식에서 오이디푸스 위기는 어린아이가 성적 규칙을 배웠을 때 발생한다. 그 위기는 체계를 이해했을 때 시작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따랐을 때 해소된다. 오이디푸스 단계 이전에 어린아이의 섹슈얼리티는 유연하며 상대적으로 비체계적이다. 오이디푸스 단계를 벗어날 무렵이면 아이의 리비도와 젠더 정체성은 그를 길들이고 있는 문화적 규칙에 순응하도록 조직된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절적한 성적 개인들의 형태를 만들어 내는 하나의 기계이다.

현대 프랑스 정신분석학은 팔루스와 페니스라는 용어를 구분함으로써 페니스가 거세 콤플렉스에 대한 고전적 용법이 그것에 부여한 역할을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는다는 생각을 강조한다.

아이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팔루스를 갖거나 갖지 못 하거나이다. 거세는 팔루스를 갖지 않는 것이다. 팔루스는 두 성적 지위인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수반한다. 팔루스는 두 성을 구분하는 특징 그 이상이다. 그것은 남성이 얻게 되는 특정한 권리에 내재된 남성의 지위를 체현한 것이다. 그것은 남성 지배가 전달되는 한 가지 표현이다. 그런 지배는 여성들을 통과하여 남성들에게 정착한다. 그것이 스치고 지나간 궤적에는 젠더 정체성과 두 성의 분할이 포함된다. 그것은 남근숭배 문화 속에 사는 여성들에게 엄청난 불안의 의미가 담겨 있는 남근 선망을 남긴다.

 

오이디푸스의 재림

 

생물학과 문화의 경계에 있는 두 명의 전-오이디푸스적 양성 소유자들을 보자. 개인들에게 오이디푸스 위기는 근친상간 금기가 팔루스의 교환을 개시한 바로 그 분기점에서 발생한다. 각각의 아이는 양성중 하나의 젠더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남자아이는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를 포기하지만 그 덕분에 성인 남자가 되어 자기 여자를 차지하게 될 관계를 보장받는다. 여자아이는 팔루스가 없기 때문에 팔루스를 가진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수동적 위치가 된다. 생식기에 대한 열등감을 경험하게 된다.

여자 아이는 어머니에게 줄 팔루스가 없기 때문에 어머니로부터 돌아선다. “어머니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능동적인 성충동의 감소와 수동적인 성 충동의 상승이 관찰된다. 그리하여 여성성의 발전 경로가 여자아이에게 열린다.”

 

프라이트는 오이디푸스의 재앙에서 빠져나오는 서로 다른 세 경로가 있다고 한다. 첫째, 여자아이는 겁에 질려 무성애자가 된다. 둘째, 남성적이 되거나 동성애자가 된다. 셋째, 사회계약에 서명하고 정상성을 획득한다.

케런 호니는 프로이트의 이론체계 전반을 비판한다. 여성성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이론은 여성의 발달이 주로 고통과 굴욕에 바탕을 두고 있음에도 여성이 여성임을 기뻐해야 할 이유를 성명하면서 교묘한 말재간을 부린다. 출산과 처녀성의 상실은 고통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고통의 과정 전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만약 여성들이 성적 체계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을 때 리비도를 빼앗기고 마조히즘적 에로티시즘을 강요당한다면 분석가들은 낡은 배치를 합리화하는 대신 왜 새로운 배치를 주장하지 않았을까?

 

레비스트로스와 프로이트는 그들이 아니었다면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을 성적 억압의 깊은 구조들의 일부를 해명해준다. 그들은 우리가 싸우고 있는 대상의 지난함과 방대함을 상기시켜주는 이론가들이라 할 수 있으며, 그들의 분석은 우리가 재조직해야만 하는 사회 기구들에 대한 예비적 지도를 제공해준다.

 

문화의 오이디푸스적 잔재를 없애버리기 위해 여성들이 단결하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남성의 권리를 남자아이에게 부여하고, 여자아이들에게 더 적은 권리에 적응하도록 강제한다.

페미니즘 운동이 각 개인의 오이디푸스적 경험이 덜 파괴적이게 되는 방식으로 섹스와 젠더의 영역을 재조직함으로써 문화의 오이디푸스 위기를 해소하려고 시도해야만 하는 것을 뜻한다. 오이디푸스 위기 단계가 여자아이의 자아 형성에 그처럼 파괴적인 효과를 미치지 않도록 하려면 그중 몇 가지 요소는 변경되어야만 한다. 오이디푸스 단계는 여자아이에게 양립 불가능한 요구를 부과함으로써 자체 모순을 만들어낸다. 한편으로 어머니에 대한 여자아이의 사랑은 양육이라는 어머니의 역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다음으로 여자아이는 남성에게 소속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성 역할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도록 강요받는다. 만약 양성의 성인 모두가 평등하게 자녀를 키우는 것으로 노동의 성별 분업이 일어난다면 양성 모두가 최초로 사랑하는 대상으로 선택될 것이다. 만약 성적 소유 체계가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최우선적 권리를 가지지 않는 방식으로 재조직된다면 그리고 젠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오이디푸스 드라마 전체는 유물이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페미니즘은 친족 체계를 혁명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궁극적으로 철저한 페미니즘 혁명은 단지 여성을 해방하는 것 이상이고 그것의 성적 표현의 형태들을 해방할 것이며, 인간의 인경을 젠더라는 구속복으로부터 해방할 것이다.

 

아빠, 아빠, 이 개자식 이제 끝났어 실비아 플라스

 

레비스트로스와 프로이트를 페미니즘 이론 안으로 흡수하기 위해 선취해야할 논의는 다소 고통스럽다. 첫째, 레비스트로스나 프로이트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기술한 체계에 내재한 명백한 성차별주의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보기에 제기해야 할 문제는 명확하다. 둘째, 그들의 작업은 우리에게 섹스와 젠더를 생산양식으로 분리할 수 있도록 해주며, 성 억압을 경제럭의 반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특정한 경향에 반대할 수 있게 해준다.

 

섹스/젠더 체계는 불변하는 억압적 장치가 아니며 전통적 기능의 상당부분을 이미 상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항이 없다면 그것은 저절로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섹스/젠더는 정치적 행동을 통해 재조직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레비스트로스와 프로이트에 대한 해석은 페미니즘 정치와 페미니즘 유토피아에 대한 비전을 제공해준다. 그들의 해석은 우리가 남성의 제거가 아니라 성차별주의 및 젠더를 만들어내는 사회 체계의 제거를 목표로 해야 함을 보여준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설득력 있는 꿈은 양성적이며 (섹스가 없진 않겠지만) 젠더가 없는 사회에 대한 꿈이다. 그런 꿈속에서 한 사람의 해부학적 성은 그 사람이 누구이고, 무엇을 행하며, 누구와 사랑을 나누는가 하는 문제와는 무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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