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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2.9. 기레민
<캘.버.사.토>
1. 고고학과 계보학
-고고학적 탐구라고 부르는 것은 사회학에서 하는 해석학적 작업과는 다른 연구방식이다. 사회를 분석하기보다는 담론 현상들과 담론들을 연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담론들에 대한 분석은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았던 것들을 해석하는 것과 구분하고 싶다. 사건 혹은 일련의 사건들로서 담론을 분석하고 그것이 가지는 독특한 지위와 효과들을 다루고 싶었다.
-담론적 사건들이 어떻게 우리가 현재 구성하는 바를 결정하는지, 또 우리 자신 우리의 인식, 우리의 실천, 우리 식의 합리성,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와 우리가 타자와 맺는 관계들을 구성하는 바를 결정하는가를 살피는 것이 계보학이다.
-푸코의 연구의 일반적인 주제는 사유의 역사다. 당연히 사유는 담론들과 분리될 수 없다. 담론을 통하지 않고서야 우리가 현재하고 있는 사유, 우리 자신의 사유, 동시대의 사유, 혹은 우리보다 앞선 시대 사람들의 사유에도 접근할 수 없다. 여기에는 고고학적 연구가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성 윤리의 역사를 고찰한다고 했을 때 여기서 관건은 연속성이나 불연속성이 아니다. 성에 대한 담론은 기원전부터 오늘날까지 윤리적으로는 동일한 점이 있지만 다른 담론 체계인 과학에서는 전혀 다른 윤리 담론 체계가 존재한다. 그러니까 고고학에서 다루는 담론의 문제는 연속적이거나 보편적인 원리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특정한 담론의 위치와 효과에 관한 것이다.
-과학적 사유의 어떤 역사성은 고유의 변화의 방식을 통해서 나타난다. 이 변화의 방식은 대단히 특수하고 어떤 의미로는 같은 순간에 거의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따라서 왕왕(토마스 쿤이 말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것이 어떤 점에서 푸코의 에피스테메와 마주보고 있는 것으로 보임) 어떤 것이 특정 지점에서 변화할 때에는 나머지 것들도 변화시켜야만 한다. 그러나 푸코는 다른 방식의 변화를 목격했다. 이 극적인 변화는 외적 원인도 없고 인과성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이 『말과 사물』에서 다루고 있는 것인데 이를테면 어떻게 특정한 상황이 광기와의 특정한 관계, 혹은 적어도 광인들과의 특정한 관계가 16세기와 18세기 초 사이에 변화했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는 과학적 합리성 내에서의 변화가 사회적 절차들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어떤 것이 과학적 문제가 되고 사회가 관심 가져야 할 문제로서 불쑥 나타난다는 사실이 사회적 절차들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과학이 귀납법이라면 푸코식의 문제 접근은 연역법 같다)
2. 역사 연구
-역사 연구는 사법적 연구과 역사적 연구의 연결고리는 매우 명백하다는 것이 푸코의 의견이었는데 푸코는 자신의 제자가 발견한 역사의 해석과 종교의 연관성을 지적했음을 밝힌다. 이는 주로 성서에 관한 해석하의 문제인데 성서에 대한 해석을 고치는 것은 성서 속에서 현재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한 노력의 한 장면이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로부터 계속해서 현재에 대한 연속성과 정당성을 찾는 과정이 역사적 연구의 방향이었다는 것이다.
-16세기에 나타난 시간 단위로서의 ‘세기’라는 개념은 글쓰기의 테크닉 또는 수집의 테크닉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에 영향을 받아서 글쓰기, 연대기의 정리, 행정 기록물의 보관의 현재적인 방식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
3. 규율 테크닉
-『감시와 처벌』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18세기의 사회개혁가들은 감금과 같은 체계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만 해도 감옥은 사법적 처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감옥은 이제껏 행정, 군주권이 어떤 사람을 제거하고 싶을 때 그 사람을 감옥에 집어넣는 식의 장소였을 뿐이다. 18세기 중반이 지나서 감옥은 도처에서 생겨난다. 감옥이 군주가 전횡하는 상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감옥과 감금이 처벌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죄수들 및 수감자들을 교화하는 데 아주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견의 근저에는 17세기 중반에 나타난 규율 테크닉이 있었다. 학교의 모델이나 군대의 모델 등에 따른 형벌제도의 구축이 시도되었는데 이는 최종적으로 감금이라는 처벌의 효과를 발견하게 된 계기였다. 벤담의 판옵티콘이 공장이나 학교 등지에서도 이와 같은 효과를 노리면서 나타나게 되었다.
푸코는 감옥은 규율 체계의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니까 규율 체계라는 것은 어떤 ‘제도 전체’가 아니라 당대에 벌어지는 합리성의 유형이기 때문이다. 통치하고 가르치고 교정하는 등의 효율적이고 함축적인 수단이 규율이었던 시기가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는 나중에 국민국가에서는 규율을 통한 통치가 ‘보험 관리 체계’라는 합리적인 수단으로 바뀌었음을 지적한다. 그런 점에서 현대에서 규율 체계는 더 이상 효율적인 수단은 아니다.
4. 자기 수양
-<자기 수양>에서 푸코가 제시했던 플라톤의 <알키비아데스>와 스토아주의자인 세네카를 인용했다. 푸코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기 수양 또는 자기 돌봄이란 현재 자기계발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경험이나 기술의 축적의 방식은 아니다. 푸코가 인용한 알키비아데스나 세네카 두 인물 모두 자기 자신을 돌봄에 대한 힌트를 제공하는데 자기 돌봄이라는 윤리적 행위는 모두 기억과 관련된다.
알키비아데스가 자기 자신을 돌본다는 것은 영혼을 돌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영혼을 돌본다는 것은 현실적인 차원이 아니라 초월적이고 다른 차원에 연관되는 영혼에 대한 돌아봄이다. 여기서 기억이 매우 큰 중요성을 가짐에도 직접적인 세계에 관한 것은 아니다. 스토아주의에서 죽음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준비는 늘 서둘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삶을 회상하면서 지각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건들의 기억을 통해서 죽음에 대한 상상을 내면화한다.
-기억을 돌아본다는 행위는 스토아주의자나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행위이다. 그런데 여기서 스토아주의는 자기 자신이 하루 동안 한 일과 규칙이 일치하느냐라는 점에서 자기를 돌아보는 행위이다. 반면 그리스도교의 돌아봄은 자기가 한 일을 알기 위해 밤낮으로 자신을 관찰하는 것으로 구원받을 수 있을 만큼 순수한 정도를 판독하기 위한 행위이다. 물론 두 행위는 모두 현세에서의 완벽함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그리스 로마 문화는 사람들이 진정한 자율적 자기 수양으로 생각되는 그런 것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사적인 선택이며 결코 종교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고유의 비결들이 있는데 이를테면 플루타르코스가 친구에게 폰다누스에게 보내는 (답장으로 보이는) 편지에는 “다급하고 절박한 시기”에 “영혼의 평정을 위한 성찰의 방식”으로 이미 고유한 자기 수양의 비결이 있음이 나타난다. 이처럼 고대의 자기 수양의 중요함이 나타난 이유가 자기 자신을 돌볼 짬이 있는 황금기였기 때문은 아니다. 고대는 성 윤리가 몹시 가혹했고 끔찍했기에 여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윤리라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 맺기가 필요했을 것이라 본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종교, 법, 과학이라는 윤리의 준거점은 이전과는 다르다. 우리는 우리에게 윤리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지금 푸코는 고대적인 의미에서의 윤리를 계승하자는 의미로 고대의 자기 돌봄의 윤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 로마의 윤리는 실존의 미학으로서 연구하고 동시에 지금 우리의 윤리에 대해 생각하자는 제안으로 볼 수 있다.
5. 앎과 권력
-쾌락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 그런데 그리스 로마에서는 욕망과 쾌락은 뗄 수 없는 문제였다. 그리스 문헌만이 아니라 중국의 성애술에 관한 책들도 쾌락의 대해 중요하게 다룬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는 통속적으로 그리고 학문적으로 많이 하고 있지만 쾌락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려워한다. 욕망과 쾌락은 실제로 다른 문제가 아니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문명에서는 쾌락보다는 욕망의 문제가 훨씬 중요하다. 우리 스스로를 쾌락의 주체가 아니라 욕망의 주체로서 인식하려고 한다. 푸코가 보기에 이런 현상이 발견되는 것은 윤리에 대한 강조에서 자기 해석의 시도가 쾌락보다는 욕망에 초점을 두게 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앞서 강조되기도 했지만 고대에서 성의 윤리는 상당히 혹독했다. 그렇기에 인간은 자기를 주인으로 보는 관점을 욕망을 해석하는 것으로 동시에 쾌락을 제한하는 것으로 발전된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 해석학을 통한 수양이 그리스도교적인 고해의 형식을 취할 때 규율적 효과들은 아주 명백하고 강력하다. 반면 정신분석학적 테크닉들에서는 규율적 효과들이 덜하다는 것이 푸코의 생각이다.
-그리스 시대는 성적인 삶의 황금기가 아니었다. 이런 점에 대해서 강조하면서 푸코가 진척하고 싶어하는 방향은 성적 품행의 사회적 역사가 아니다. 푸코에게는 우리 문명이 성의 문제를 진실의 문제에 통합한 방식, 혹은 진실의 문제와 성의문제가 서로 결부되는 방식이다. 그는 진실, 개인적인 진실과 맺는 관계 내에서의 사유로서의 성을 다루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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