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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이란 무엇인가? / 자기 수양≫ 

‘옮긴이 해제’ 요약


1978년의 <비판이란 무엇인가>와 1983년의 <자기 수양>. 이 두 강연은 푸코 사상의 변화와 연속성을 보여 준다. 특히 푸코 후기 사유의 중심 주제 중 하나인 ‘자기’의 문제에 대한 풍부한 성찰을 제공한다. 


비판이란 무엇인가?

이 강연에서 푸코는 ‘비판적 태도’의 존재 방식을 칸트의 ‘비판’ 기획에서 새롭게 끌어낸다. 우리에게 익숙한 ‘비판’이란, 특정 이론이나 견해를 진리에 근접시켜 완성하는 연마 과정을 일컫는다. 반면 푸코가 말하는 ‘비판적 태도’는 15세기 이후에 세속화된 문제, 곧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 또는 “어떻게 통치받을 것인가”라는 문제의 대두[통치화(gouvernementalisation)]와 결부돼 있다. 이들 문제는 즉각 “어떻게 통치받지 않을 것인가”라는 역방향의 물음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며, 바로 이 물음이야말로 비판적 태도 형성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즉 푸코가 말하는 비판적 태도란, “어떻게 하면 이런 식으로, 이들에 의해서, 이런 원칙들의 이름으로, 이런 목표들을 위해, 이런 절차를 통해, 그런 식으로, 그것을 위해, 그들에 의해 통치 당하지 않을 것인가”와 같은 물음을 제기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비판적 태도는 ‘이런 식으로 통치받지 않기 위한 기술’이다. 

한편 푸코는 이 ‘비판적 태도’가 칸트의 또 다른 개념인 ‘계몽’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권위가 힘이나 지도를 통해 인간 지성의 힘을 약화시켜 미성숙 상태에 잡아두려 하므로 이에 대항하는 용기와 결의를 촉구하는 것, 이것이 칸트가 말하는 계몽이다. 

이에 견줄 때 칸트의 ‘비판’은 ‘계몽’과 묘하게 모순된다. 칸트는 비판을 지식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너는 네가 어디까지 알 수 있는지 정말로 알고 있는가? 네가 바라는 만큼 이치를 따져라. 그런데 너는 네가 어디까지 위험하지 않게 이치를 따질 수 있는지 정말로 알고 있는가?” 이 비판의 정의의 따른다면, 계몽 또한 ‘용기를 갖되 용기의 한계를 알아야 하고, 인식하되 인식의 한계를 알아야 하는’ 것이 된다. 즉 칸트에게 계몽의 ‘알고자 하는 용기’는 지식의 한계를 명확히 하기 위한 이성적, 지성적 작업에 처음부터 포섭되어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푸코가 칸트적 비판이 아예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칸트는 권력과 진실 게임 사이에, 예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비판을 위치시키기도 했기 때문이다. ‘지식’을 인식하는 과제를 비판에 할당한 것이다.

‘지식’은 인간에게 중립적이거나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식은 권력과 결합해 비로소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므로 지식과 권력의 연결망을 분석하는 것이 필요해지는데, 이 분석을 통해 정신병, 형벌, 행위, 성현상의 체계 등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고고학’적 전략은 어떤 강제가 수용된다는 사실을 실정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푸코의 목적이 어떤 통일된 역사 서술을 완성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식과 권력의 결합은 하나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여러 주체가 참여하는 전략적 영역 안에 있다. 즉 지식과 권력은 강제 메커니즘임과 동시에 가능성의 장이기도 하다. 이 양의성이 바로 우리에게 저항과 역전의 가능성을 준다.

칸트가 의도한 바는 아니더라도, 칸트적 비판과 계몽 간의 미묘한 간극은 지식과 권력이 양의성을 내포하는 전략의 장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푸코는 근대가 칸트적 ‘비판’을 자신의 통치 기법으로 채용했던 역사의 흐름을 추적한다. 하지만 동시에 칸트적 ‘비판’의 출발 지점, 즉 ‘이런 식으로 통치받지 않기’라는 의지적 결단이야말로 어떤 지배에 대한 저항을 가능케 하며, 역사적으로 존재하면서 역사에 속박되지 않는 우리들의 가능성의 영역을 열어젖힌다고 본다. 이상의 논의를 전제로 할 때, 계보학적 작업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우리인 바가 되게 만든 우연성으로부터 현재의 우리인 바, 현재 우리가 사유하는 바, 현재 우리가 행하는 바가 이제는 더 이상 아닐 수 있는 가능성을 끌어”낸다. 


자기 수양

≪주체의 해석학≫의 요약판이라 할 수 있는 이 강연을 시작하면서, 푸코는 <계몽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논의한다. 푸코는 칸트의 두 물음, 즉 ‘진리를 인식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순수이성비판≫)와 ‘우리의 현실태는 무엇인가’(<계몽이란 무엇인가>)를 기점으로 서구 철학에 어떤 ‘단절’이 일어났으며, 특히 후자의 물음을 통해 ‘우리 자신에 대한 역사적 존재론’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현실태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기 이전까지 서구 전통 철학은 주로 ‘보편’, 즉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은 어떤 것을 물어 왔다. 그런데 특정한 시점과 장소에 한정된 문제의 제기, 특히 ‘지금, 여기’에 대한 문제 제기가 중요해지면서 우리 자신에 대한 철학적 질문은 “우리 사유의 역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현재의 우리로 만드는가”라는 형태를 띠게 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토대로 푸코는 우리와 진리(진실)가 맺는 관계, 우리와 타자가 맺는 관계를 연구해 왔다고 밝힌다. 특히 ≪감시와 처벌≫은 우리를 둘러싼 지식과 권력의 연결망에 의해 우리의 행동 방식, 사유 방식, 주체성이 어떤 식으로 결정되는지 보여 주었다. 

그런데 푸코는 이상의 분석을 통해 우리가 우리로 형성되는 과정에서 우리 바깥에 있는 것[진실, 타자]과 맺는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파한다. 자기가 자기와 맺는 관계의 기술들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자기와 관계 맺는 다양한 기술들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푸코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꽃 피웠던 중요한 태도를 발견한다. 그것은 ‘자기를 어떤 예술 작품의 질료로 여기며 가꾸어 나가는 태도’다. 푸코에 따르면 이러한 태도는 서구 역사 속에서 상당 부분 잊혔으며, “교육과 교습의 테크닉, 의료와 심리학적 테크닉에 통합되어 버렸”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철학사에서 ‘자기’를 인식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경향이 짙어지면서, 인식되고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어떤 실체로서의 ‘자기’가 이미 존재한다고 전제되었다. 또 자기와 관계 맺는 다양한 방식이 오늘날 교육이나 의료, 심리학적 테크닉에 통합되면서 협소한 영역에 한정되어 버렸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교의 금욕주의 전통이 결정적이었다. 그리스도교 윤리는 자기와 맺는 관계를 포기하고 그 자리를 신과 맺는 관계들로 채우는 것을 중요시했다. 

따라서 푸코는 그리스도교 탄생 이전 시기로 돌아가, ‘자기 인식’에 가려져 평가절하된 개념인 ‘자기 돌봄’ 개념을 발굴한다. 푸코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자기 돌봄은 자기 인식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오히려 자기 인식은 자기 돌봄의 한 단계 혹은 수단 정도로 여겨졌다.

구체적으로 플라톤의 대화편인 ≪알키비아데스≫에서, 자기 돌봄은 앞으로의 인생을 기획해야 하는 젊은 시기에 꼭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자기 돌봄의 목적은 젊은이의 교육이다. 이를 위해 “영혼의 현실에 해당하는 신성한 요소를 명상해야” 하며, 자기 자신과 제대로 관계 맺으려면 타자와의 관계 맺기(스승과 제자 간의 철학적, 연애적 관계 맺기)가 필요하다. 

한편 기원 후 1∼2세기에 이르면 자기 돌봄은 도시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 젊은 시절에 잠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자기 자신과 관계 맺는 지속적 작업이 된다. 푸코는 “자기 돌봄이 성인의 실천이 되고 평생에 걸쳐 수련해야 하게 된 순간 자기 돌봄의 교육적 역할은 소거되고 … 비판적 기능이 출현”한다고 말한다. 자기 돌봄은 항상적 “투쟁의 기능”과 “치료적 기능”도 갖게 된다. 평생에 걸쳐 참과 거짓을 지속적으로 분별하고 거짓에 대해서는 용기 있게 맞서며 비판하고 자기 자신의 잘못된 부분을 철학적으로 치유받는 것이 중요해진다. 자기 돌봄의 기술들도 구체적 형태로 발전했는데, 일기 쓰기나 서신 교환이 대표적 사례였다.


결론

이상의 강연은 ‘주체’ 형성의 복잡성을 보여 준다. 푸코는 주체가 역사적 절차, 합리성 모델과의 관계, 인식 및 진실과 관계 맺는 방식, 제도, 통치받는 방식 등을 통해 구축되는 것임을 알려 준다. ‘자기 수양’이라는 화두 또한 이러한 맥락과 관련되어 있다.

즉 푸코는 주체가 실체와 같은 것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자기가 맺는 수많은 관계의 방식에 입각해 구축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자기는 자기와 맺는 여러 관계 외의 그 무엇도 아닙니다. 자기는 관계입니다.” 자기는 자기 테크놀로지의 상관물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자기를 석방하거나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새로운 유형의, 새로운 종류의 자기 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궁리하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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