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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이 책에 소개된 푸코의 두 강연은 5년이라는 시간차를 둔다. 얼핏 매우 동떨어진 내용을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접점이 있다. 이 두 강연 모두에서 푸코는 칸트의 비판 기획을 숙고했고, 그 비판 기획을 급진적으로 재정의해 자기화하려 했다. 두 강연에서 우리는 푸코의 역사-철학적 관점뿐만 아니라 그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작업을 ‘비판’의 기획 안에 기입하려는 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엉뚱한 제목, 혹은 칸트 대 칸트

캉길렘의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의 영역본 서문에서 계몽에 대한 칸트의 텍스트를 언급하면서, 푸코는 18세기 말 ‘철학적 저널리즘’이 탄생하는 순간을 기술한다. ‘철학적 저널리즘’은 ‘현재 순간’에 대한 분석을 개진하면서 철학에 ‘역사적이고 비판적인 일대 차원’을 열었다. 이를 통해 푸코는 선험적 비판에 대한 칸트의 문제 제기를 ‘비판적 태도’와 관련시킨다. “나는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선험적-인식론적 질문은 ‘태도의 문제’로 바뀐다. 이로써 비판은 “진실에 대해서는 그 진실이 유발하는 권력 효과를, 권력에 대해서는 그 권력이 생산하는 진실 담론을 문제 삼을 수 있는 권리를 주체가 자신에게 부연하는 것과 관련된 활동”으로 재정의된다. 이를 토대로 비판의 목적은 “진실을 둘러싼 정치라고 부를 수 있는 활동 속에서 탈예속화”하는 것이 된다.

이런 식으로 통치 당하지 않는 기술

‘비판이란 무엇인가?’ 강연은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섬세한 분석이라기보다는, 우선적으로 콜레주드프랑스에서의 강의 “안전, 영토, 인구”에서 푸코가 진척시킨 견해를 연장시킨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푸코는 ‘비판적 태도’와 닮은 어떤 특정한 사유 방식, 말하기 방식, 행동 방식의 출현을 탐색하려 한다. 그가 보기에 이들의 출현은 서구 근대의 역사적 현상과 관련 있는 것이었다. 15∼16세기에 시작된 인간 통치 기술(예: 가톨릭교회의 ‘사목’ 활동)의 파급은 개인의 일상적 품행을 인도하는 권력 형태가 시민 사회 내에서 확대되었음을 방증한다.

여기서 푸코는 ‘통치성’이라는 주제를 개진한다. 통치성은 “어떻게 이런 식으로, 그들에 의해, 그러한 원칙의 이름으로 통치받지 않을 것인가?”라는 문제와 분리 불가능하다. 곧 비판적 태도는 통치술과 쌍을 이루며 통치술의 반대항이 된다. 그것은 “이런 식으로 통치당하지 않는 기술”이다. 특히 푸코는 그리스도교 사목의 장에서 발생한 저항의 거점들에 몰두하면서 ‘대항 품행’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그것은 “다르게 인도받고자 하는” 의지로, 다른 인도자(목자)에 의해 다른 목표와 다른 구원의 형식을 향해 다른 절차와 방법을 통해 인도받고자 하는 의지로 표명되는 태도다. 즉 대항 품행은 “이렇게, 이런 식으로, 그들에 의해, 이러한 대가를 치르면서 통치받지 않고자 하는 의지”로, 비판적 태도라는 개념과 유사하다.

‘비판이란 무엇인가?’ 강연의 또 다른 특징은 ‘계몽’에 대한 푸코의 해석에서 나온다. 푸코는 비판적 태도가, 칸트가 1784년에 계몽에 대해 내렸던 정의[‘외적 권위가 인간성을 지탱하고 (타인의) 관리감독과 관계 맺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수 없는 미성숙 상태’에서 벗어나는 용기 있는 시도]와 상응한다고 주장한다. 즉 푸코의 강연에서 계몽은 통치적 관리 감독의 권력에 저항하는 실천적 태도로 정의된다. 계몽은 주체와 권력, 진리(진실)의 관계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들의 관계를 해체하거나 전복하려고 시도하면서 저항하는 실천적 태도다.

강연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긴 방법론적 성찰도 특징적이다. 여기서 푸코는 ‘역사-철학적’ 실천을 묘사한다. 이 실천은 “진실한 담론을 조직하는 합리성 구조와 그것과 결부된 예속화 기제” 간의 관계를 탐험하는 데 목적을 두며, 특히 계몽과 특권적 관계를 유지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비판은 어떠한 조건들하에서 “우리가 이러한 계몽이라는 문제, 즉 권력과 진실과 주체의 관계를 역사의 어떤 일정한 시대에 적용시킬 수 있는지” 알려고 시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역사-철학적 분석을 진척시킬 것인가. 푸코는 정치적 접근, 즉 권력의 문제를 출발 지점으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인식’과 ‘지배’라는 용어를 ‘지식’과 ‘권력’이라는 용어로 대체함으로써 진리(진실)와 정당성의 보편적 문제 제기를 가능한 한 피하는 것, 그리고 언제나 특수하고 한정된 ‘지식-권력 결합체’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계몽의 문제에 접근한다는 것은 권력을 언제나 “상호 작용의 장 안에서 기능하는 관계로”, 그리고 “가능성의 영역, 결과적으로 가역성의 영역이며 역전 가능한 영역”에 연결된 것으로 고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푸코이 계몽이라는 화두에 파고드는 이유는, 계몽이 어떻게 그 자신을 올바른 관념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태도의 윤리-정치적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고,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집단적으로)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 통치받지 않고자 하는 데 있다.

계몽과 우리 자신의 역사적 존재론

푸코는 1983년 ‘자기 통치와 타자 통치’ 강의의 첫 시간을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와 (프랑스혁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학부들의 논쟁>을 논의하는 데 할애한다. 이 두 텍스트는 ‘철학하기’의 특수한 방식을 보여 준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현실태를 자문하는 것이다. 이 강의에서 푸코는 칸트의 텍스트가 철학에 ‘새로운 종류의 문제’를 도입했다고 말한다. 그 문제란 “철학자 글을 쓰는 그 순간, 그가 속해 있는 바로 그 순간”의 역사-철학적 의미를 묻는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현재의 우리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연결된다.

여기서 푸코는 칸트가 서로 환원 불가능한 두 가지 철학 전통을 창시했다고 본다. 한편에는 ‘진실의 형식적 존재론’ 혹은 ‘인식의 비판적 분석’의 전통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우리 자신의 역사적 존재론’ 혹은 ‘사유의 비판적 역사’가 있다. 푸코는 칸트의 3대 비판서를 ‘진실의 분석적’ 전통과 연결하는 한편, 계몽과 프랑스 혁명에 관한 텍스트는 ‘가능한 경험들의 실재적 장’의 문제를 제기하는 비판적 전통과 연결한다.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 강연에서 푸코는 자신이 두 번째 전통에 속하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우리 자신에 대한 모든 존재론적 역사는 일련의 세 관계들, 요컨대 우리가 진리(진실)와 맺는 관계, 우리가 의무와 맺는 관계, 우리가 우리 자신 및 우리의 타자와 맺는 관계들을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푸코가 1978년에 정의한 바 있는 ‘비판의 진원지’를 다시 목도하게 된다. 주체와 권력 그리고 진실 사이의 얽힌 관계가 그것이다.

이어서 푸코는 광기, 정신분석, 범죄와 처벌을 연구하던 시절에는 진실과 권력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파고들었다면, 지금은 ‘우리가 경험하는 성현상이 어떻게 구축되었는지’를 연구하고 싶다고, 또 점점 더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와 ‘자기 기술’에 관심이 간다고 밝힌다. 즉 계몽에 관한 칸트의 텍스트와 우리 자신의 역사적 존재론에 대한 논의는, 자기와의 관계 분석과 우리 자신의 구조를 지배하는 자기 기술의 분석에 하나의 철학적 틀로 사용된다.

자기 수양

버클리 강연은 그 구성에서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 강연과 유사한 내용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푸코는 자기라는 것이 “우리 역사를 통해 발전된 기술들의 상관물”에 불과하다고 단언하면서 강연을 마무리한다. ‘역사의 바로 이 순간에 있는’ 오늘의 우리가 누구인지 자문해 보는 것, 우리의 ‘자기’ 형태가 갖는 우발적 차원을 숙고하는 것, 이를 통해 이론적이고 실천적으로 ‘현재의 우리인 바를 거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여는 것, 이로써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맺는 여러 형태의 관계를 창조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여는 것이 문제인 셈이다. 푸코가 실존의 미학으로서 그리스 로마의 자기 수양에 관심을 갖는 것은 현대의 도덕 모델들의 ‘대안’으로서 고대 윤리로의 회귀를 제안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푸코는 ‘윤리적 상상력’과 연관된 역사적 분석 작업의 도움을 받아, 고대의 자기 수양은 이미 약화되어 버린 종교, 법, 과학이라는 세 개의 주된 준거를 넘어서는 ‘새로운 윤리’를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본다.


자기 수양

1983년 4월 12일,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

철학자는 ‘현재’라는 것의 역사적, 종교적, 철학적 의미를 물어 왔다. 대개 이 물음의 목적은 현재와 그 이전 시대를 비교하거나, 어떤 징후를 해독함으로써 미래를 예고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칸트의 짧은 글 <계몽이란 무엇인가>(1784)는 철학적 성찰의 장에 새로운 종류의 문제를 유입했다. 이 새로운 문제란 철학자 칸트가 글을 쓰는 바로 그 순간, 그가 속해 있는 바로 그 순간의 역사적이고 철학적 속성, 의미, 의미화의 문제다. 칸트는 자신의 속해 있는 현실태(actualite)의 분석을 통해 자신의 철학적 임무를 정당화하고 또 철학의 목표로 ‘이성의 자연적이고 자연발생적 역사 내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기’를 설정한다.

이 글에서 칸트는 근대 철학 특유의 문제를 제기한다. “역사적 형상으로서 우리의 현실태는 무엇일까? 이 현실태에 속하는 한에서 우리는 누구이고 또 누구여야 하는가? 왜 철학하는 것이 필요하며 또 이 현실태와 관련해 철학의 특수한 임무는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 설정은 이후 서구 철학(피히테에서 후설에 이르기까지)의 중요한 방향 가운데 하나였다.

“현재의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역사-비판적 물음의 결과, 19세기 초 이래로 철학 활동의 장에 서로 연관되면서도 환원될 수는 없는 두 극이 생겨난다. 한 극에서는 “진리(진실)이란 무엇인가? 진리(진실)를 인식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와 같은 물음들이 발견된다. 이는 진리(진실)의 형식적 존재론 혹은 인식의 비판적 분석에 해당한다. 다른 극에서는 “우리의 현실태는 무엇인가? 이 현실태에 참여하는 한에서의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가 우리의 현실태에 속해 있는 한에서 우리의 철학적 행위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발견된다. 이는 우리 자신에 대한 역사적 존재론, 혹은 사유에 대한 비판적 역사라 표현할 수 있다.

역사적 존재론은 일련의 세 요소들, 요컨대 우리가 진리(진실)와 맺는 관계, 우리가 의무와 맺는 관계, 우리가 우리 자신 또는 우리의 타자와 맺는 관계를 분석한다. 곧 “현재의 우리는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사유하는 존재로 간주해야 한다. 사유를 통해 우리는 진리(진실)를 추구하고, 의무사항과 법률과 강제를 수용하거나 거부하며, 또 자기 자신이나 타자와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적 존재론의 목표는 “사유하는 존재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유의 역사가 어떻게 해서 우리 자신을 현재의 우리로 만드는가”에 답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 사유의 역사를 통해 우리 자신의 형성된 방식을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가 핵심 화두다. 그리고 이때 ‘사유’라는 표현은 철학, 이론적 사유, 과학적 인식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를 할 때의 사유’를 포괄한다. 즉 사람들이 자신의 품행에 부여하는 의미, 자신의 품행을 일반적 전략들 내에 통합하는 방식, 다양한 실천과 제도와 모델과 품행들 내에서 인정하는 합리성의 유형이 사유에 포함된다.

이전까지 푸코는 광기와 정신의학, 범죄와 처벌에 대해 연구하면서 우리가 진리(진실)와 맺는 관계를 강조했고, 그다음 의무와 맺는 관계를 강조했다. 지금(1983년)은 우리가 경험하는 성현상이 어떻게 구축되었는가를 연구하면서 점차적으로 자기와 자기가 맺는 관계들, 그리고 이 관계들을 만들어 내는 기술들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 ‘자기 기술’의 분석에는 개념적 출발점이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epimeleia heautou’라 불렀고 로마인들이 ‘cura sui’라 부른 것, 곧 ‘자기 돌봄(자기 배려)’이 그것이다. 자기 돌봄은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에게 중대한 윤리적 원리 가운데 하나, 삶의 기술의 중대한 규칙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이는 거의 1000년 동안 지속되었다.

몇몇 순간들을 일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동료 시민들에게 자기 자신을 배려하는 데 전력을 다하라고 권고한다. “당신들은 자신의 재산, 평판, 명예는 배려하면서도 자신의 덕이나 영혼은 배려하지 않습니다.” 그 후 8세기가 지나 동일한 자기 배려 개념이 그레고리우스의 글에도 등장한다. 그런데 이때 자기 배려 개념은 소크라테스의 그것과 완전히 다른 의미를 띤다. 그레고리우스에게 자기 배려는 결혼을 포기하고, 육욕에서 벗어나며, 마음과 정신에 내재된 순결성의 도움을 받아 읽어버렸던 불멸성을 되찾는 활동을 의미한다.

삶의 조언자이자 실존의 안내자임을 자청했던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와 그레고리우스라는 두 극단적 준거점 사이에서 자기 배려(돌봄)의 원리를 보편적으로 수용했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배려하는 데는 너무 늦거나 이르거나 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반복한다. 스토아주의자인 무소니우스 루푸스는 “인간은 자기 자신에 항상적으로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자신의 안녕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세네카는 “시간을 낭비 말고 네 영혼을, 네 자신을 돌봐야 하고 네 자신 안으로 후퇴하여 거기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에픽테토스는 인간 존재를 “자기 자신을 배려해야 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종”이라고 정의했다. 신이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에게 맡겼고, 이러한 위임을 통해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과 자유로워야 하는 의무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에픽테토스에게 인간의 유한성과 결부돼 있는 이 자리 배려는 실천적 형태의 자유를 의미한다.

반면 오늘날 자기 배려 개념은 약화되고 모호해졌다. 자기 배려는 소크라테스의 자기 인식(gnothi seauton)이나 자기 포기를 내포하는 그리스도교 금욕주의에 가려졌다. 우리의 철학적이고 역사적인 전통은 ‘너 자신을 알라’를 과대평가하는데, 사실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계율은 고대 문화에서 항상 자기 배려의 계율가 연관돼 있었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돌보는 한 가지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아울러 그레고리우스와 같은 사람이 영적 경험에서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돌보는 방법의 새로운 형태였다는 것도 지금은 망각되고 있다.

그러나 자기 경험의 두 주요 형상인 자기 인식과 금욕주의는 수백 년의 자기 배려 전통에 뿌리를 둔다. 자기 돌봄은 그리스 로마 문화에서 정언이자 태도이고, 동시에 기술이었다. 자기 수양의 두 가지 양태, 특히 기원적 4세기와 기원후 1∼2세기의 자기 수양 양태를 간단히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다.

“너 자신을 돌봐야 한다”라는 원리의 최초의 철학적 구상은 플라톤이 쓴 대화편 ≪알키비아데스≫에 등장한다. 이 대화편에서 첫 번째 쟁점은 알키비아데스가 자기 자신을 배려해야 하는 이유다. 알키비아데스는 도시 국가 아테네의 모든 사람들을 제압하고 스파르타의 왕, 페르시아의 군주도 제압하길 원한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그럴 수 있는 교육을 받지 못했고, 그래서 절망한다. 이때 소크라테스가 개입한다. “네가 쉰 살이라면 상황이 심각하겠지.… 하지만 너는 아주 젊다. 그러니 바로 지금이 네가 너 자신을 돌볼 때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돌볼 의무는 우선 젊은이의 나이, 도시 국가를 통치하려는 그의 계획, 그가 받았던 부실한 교육과 결부되어 있다. 아울러 소크라테스의 개입에서도 볼 수 있듯, 자기 배려는 제자에 대한 스승의 개인적 관계, 개인적이고 철학적인 사랑과도 결부되어 있었다. 덧붙여 소크라테스는 자기 배려에서 자기가 ‘영혼’에 다름없으며, 이 영혼을 배려하는 것은 영혼이 실제로 무엇인지 발견하는 것을 전제한다고 설명한다. 자기 배려의 방법은 우리 자신의 영혼을 명상하는 것이다.

한편 기원후 1∼2세기에 출현한 자기 수양은 이와 심층적으로 다르다. 세네카, 디온, 에픽테토스, 플루타르코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갈리아노스 등이 실천한 자기 수양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띤다. 첫째, 자기 수양은 도시 국가의 훌륭한 통치자가 되기 위해서만이 아닌 자기 자신과의 항상적 관계를 내포한다(예: ‘전향’의 의미 변화). 둘째, 불완전한 교육을 보충할 뿐만 아니라 자기와의 비판적 관계를 내포한다(비판 기능, 투쟁 기능, 치교 기능으로 확장). 셋째, 스승과의 연애 관계가 아닌 권위적 관계를 내포한다(교육 기관과 개인 고문의 조직). 넷째, 영혼에 대한 순수 명상과는 다른 일련의 금욕적 실천들을 내포한다(글쓰기, 서신 교환). 요컨대 이 시기의 자기 배려는 어떤 특수한 철학적 교의 내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계율이자 실천이었다. 이 시대의 자기 배려는 체제, 규칙, 방법, 기술, 수련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 배려의 기술들은 왜 사라져버렸을까. 첫째, 그리스도교 금욕주의의 윤리적 역설 때문이다(자리 배려 기술의 일종인 자기 포기의 역설). 둘째, 자기 기술들 대부분이 오늘날 서구 세계에서는 교육과 교습의 테크닉, 의료와 심리학적 테크닉에 통합되었거나 여론, 대중매체, 여론조사 기술(이들은 오늘날 우리의 타자에 대한 태도와 우리 자신에 대한 태도를 형성하는 역할을 담당한다)에 통합되어 버렸다. 오늘날 자기 수양은 타자들에 의해 강요되어 그 독자성을 상실했다. 셋째, 인간과학들이 자기와 자기가 맺는 관계에서 ‘인식’을 본질적인 것으로 전제하기 때문이다. 넷째,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자기 자신의 숨겨진 현실을 벗기고 해방시키고 발굴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는 자기 테크놀로지의 상관물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문제는 자기를 석방하거나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새로운 유형의, 새로운 종류의 자기 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궁리하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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