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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오이디푸스 왕』에서의 진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진실을 말하는 심급이 신에서 시민으로 옮겨 가는 상황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오이디푸스는 영웅들끼리 겨루는 장이 아닌 ‘사법의 장’, 곧 정치적이고 사법적인 구조를 갖춘 장에서 진실을 확정하려 한다. 푸코는 17세기까지의 서양 비극은 언제나 ‘법에 대한 사색의 장’이었으며, 이 『오이디푸스 왕』이야말로 법과 관련된 가장 기본적인 극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진실 말하기의 세 가지 심급
오디이푸스의 고발과 저주로 시작되는 이 극은 진실을 밝히기 위한 재판으로 시작되어, 진범을 도시국가에서 추방하는 재판으로 끝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극은 진실을 폭로하는 추리극이며, 진법이 재판관이 되는 재판극이다.
푸코는 여기서 진실이 폭로되는 절차를, 세 가지 중층적 심급을 갖는 진실의 드라마로 분석한다. 먼저 신과 예언자가 진실을 말한다. 다음으로 영웅인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가 진실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목자와 전령이 진실을 말한다.
왜 진실을 세 번씩이나 말해져야 했을까? 진실이 코로스(도시국가 시민들을 대변하는 극적 장치)에게 의심할 수 없는 형태로 드러나는 절차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곧 이 절차는 도시국가의 진정한 주체인 시민들이 법적 정통성을 스스로 담당하게 되기 위한 절차다. “제가 여기서 고찰하려는 것은 법적 정통성의 검증으로서의 진실의 확립이라는 축입니다.”
첫 번째 진실의 드라마: 신과 예언자의 심급
최초의 진실을 신과 예언자가 말하는 진실이다. 아폴론은 테바이에 역병이 도는 원인이 ‘라이오스’가 살해된 데 있음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그 동기나 범인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그래서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불려 나온다. 이 테이레시아스는 ‘초기의 현자’를 의미하는 인물로, 신에서 진실을 떠넘겨 받은 자이자 진실 말하기의 대가를 알고 있는 자다.
진실 말하기를 처음엔 거부하던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에게 ‘범인과 한통속’이라는 혐의를 받고 결국 진실을 한다. “그대가 바로 그대가 찾는 범인”이라 말하는 테이레시아스를, 오이디푸스는 힐난한다. 그는 테이레시아스가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 한다고 생각한다. 또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자신과 비교하여 테이레시아스는 무지하면서 진실을 볼 수 없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는 진실이다. 답은 처음부터 나와 있으며, 의문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진범이 지명되고 있다. 여기서 푸코가 주목하는 것은 시민들을 대표하는 코로스 또한 이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테이레시아스는 자신의 힘으로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폴론의 명령해 의해 진실을 말하는 자, 곧 ‘예언자’다. 도시국가는 예언의 심급에서 말해지는 진실을 법적 심급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로코스는 신이 말한 진실이 ‘시민’에게도 진실로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진정한 증거’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안틸로코스에서 진실과 오이디푸스에서 진실의 차이점이 명확해진다. 안틸로코스의 경우에 진실을 드러내는 것은 신의 위력이다. 반면 오이디푸스의 경우에서는 신의 진실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것은 도시국가의 법적 절차와 법적 기구를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 이는 그리스 도시국가에 민주주의가 침투함과 동시에 진실의 심급이 신과 예언자에서 도시국가의 시민들과 법적 기구로 점차 이행해 간다는 것을 보여 준다.
두 번째 진실의 드라마: 영웅의 심급
『오이디푸스 왕』의 2막과 3막에서는 ‘왕’의 사적인 장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기서 진실은 세 가지 계기를 통해 밝혀진다. 이오카스테의 독백, 오이디푸스와의 대화, 오이디푸스의 독백이 그것이다. 이오카스테는 예언이 적중하지 않아 왔다고 주장하는데, 그 증거로 자신의 아들에 대한 예언을 든다. 오이디푸스 또한 예언이 들어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아버지를 죽인다는 예언이 실현되지 않았음을 증거로 든다. 두 사람 모두역설적으로 예언의 실수를 증명하려 하면서 예언의 정확함을 폭로하고 있다.
여기서 진실이 다시 명백해진다. 오이디푸스 또한 조금씩 불안을 느낀다. 그러나 코로스는 오이디푸스가 조금씩 인정하기 시작한 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의 기억은 두 사람의 기억이지, 여전히 시민들이 확실하게 인정할 수 있는 증거는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진실은 신탁 또는 신에 대한 서약을 통해서도, 왕의 가족들의 기억을 통해서가 아니라 좀 더 물질적인 형태로 제시되도록 요구받는다. 진실은 누구나 검증할 수 있고 납득할 수 있는 증거를 찾는, 이른바 ‘테크네’의 행사를 통해 제시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오이디푸스의 양가적 위치가 중요하다. 통상적 의미에서 그는 테바이를 통치하는 참주로서 독재 정치를 행하고 주어진 권력을 남용할 수 있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스핑스크의 수수께끼를 푼 테크네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오이디푸스의 테크네는 신의 지식처럼 직접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증거에서 진실을 발견하는 기술이다. 즉 여기서 코로스는 참주로서 오이디푸스의 방만은 비난하면서도, 오이디푸스의 지식 속에서 도시국가의 시민에게 적합한 테크네만을 취할 것을 바라고 있다.
세 번째 진실의 드라마: 노예와 전령의 심급
이제 마지막으로 세 번째 심급의 진실이 등장한다. 코린토스에서 온 전령과 양치기의 증언으로, 이는 코로스와 도시국가 시민 모두 납득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 여기서 오이디푸스는 증언을 확인하고, 나아가 미진한 증언을 끌어내는 재판관 역할을 담당한다. 오이디푸스는 원고에게 죄를 고백하고 하고 피고에게 변론하게 하며 증인을 불러 확인하고 필요하면 노예를 고문하여 진실을 쥐어짜는, 고대 그리스의 법정 변론을 스스로 주관한다. “기원전 6세기~5세기에 걸쳐 사용되기 시작했던 진실 탐구의 새로운 절차”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이 법적 기구의 성치와 동시에 그 역할을 끝마친다.
푸코는 “오이디푸스는 진실이 드러나기 위해 진실을 형성할 수 있는 사법 장치가 규칙적인 형태로 확립되기 위해 필요했다. 그러나 이제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설치한 이 사법 장치에 의해 과잉된 것으로 배제되는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비극의 위상
푸코는 『오이디푸스 왕』을 분석하면서, 진실을 말하는 것이 영웅의 임무일 뿐만 아니라 시민의 수준에까지 도달했다는 것을 밝혔다.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오레스테스』에서 재판을 행하는 것은 시민들로 구성된 알레이오파고스이지만, 시민들은 거기서 한마디도 발언하지 않는다. 반면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코로스가 시민의 목소리를 대표해 도시국가에서 최선의 결과를 기대하며 왕이 자신의 선언대로 진실을 명확히 하고 스스로를 재판하는 것을 지켜본다. 이 비극에서 최후의 진실을 말하는 것은 양치기와 하인이라는 극히 낮은 신분의 시민과 노예들이다. 진실은 이제 영웅이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시민이 말해야 하는 것이 된 것이다.
3장 파레시아
정치적 파레시아
파레시아와 자유
『오이디푸스 왕』은, 말해진 진실로서 유효한 것은 시민이 말하는 진실뿐이며 이것만을 신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시민이 진실을 말하는 이 행위’ 자체가 이윽고 ‘파레시아’라고 불리게 된다. 파레시아란, 고대 그리스어에서 모든 것(판)과 말해진 것(레마)이 합쳐진 말로, 진실 말하기, 솔직히 말하기, 자신이 믿는 바를 자유롭게 말하기라는 의미를 띤다. 자신이 믿는 바를 말하는 자는 ‘파레시아스테스’라 불렸다.
푸코는 1983년 버클리대학 강의에서 파레시아가 애초에는 정치적 개념으로 등장했다고 말했다. 예컨대 에우리피데스가 기원전 409년경에 발표한 『포이니케 여인들』에서 파레시아는 아테네 자유인의 정치적 권리로서 명확히 제시된다. 여기서 폴뤼네이케스는 나라 밖으로 추방당해 다른 도시국가에서 외국인으로 살았던 괴로움을 말하면서 파레시아의 권리, 곧 정치적 장에서 자유롭게 발언할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다고 한탄한다.
이세고리아, 이소노미아, 파레시아
당시 아테네에서는 민주 체제 유지와 병사 사기 진작에 세 가지 요소가 작용했다. 이세고리아(평등한 발언권), 이소노미아(법 앞에서의 평등), 파레시아(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자유롭게 말할 권리)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 승리의 원동력이 이세고리아에 있다고 여겼다. 이세고리아의 이념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탄원하는 여인들』에서 웅변적으로 표출된다. 여기서 테세우스는 테바이 사자의 “누가 이 나라의 독재자요?”라고 묻는 말을 아테네의 민주제를 옹호하는 말로 맞받아친다. “자유란 이런 것일세. ‘누가 도시에 유익한 안건을 갖고 있어 공론에 부치기를 원하십니까?’ 원하는 자는 이름을 날리고, 원치 않는 자는 침묵하면 된다네. 도시에 이보다 더한 평등이 어디 있겠는가?” (한편 이소노미아는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으로 부족이 재편성됐을 때 도입되었는데, 모든 아테네 자유인은 어떤 특정한 구에 소속되며 거기서 평등한 권리를 보증받게 되었다.)
시민이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발언할 권리, 곧 파레시아는 아테네 민주제 차제까지도 비판할 수 있다. 스파르타에서 도시국가의 버팀목인 법을 비판할 자유는 없었던 것과 대비된다. 아테네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민주제를 지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파레시아는 법적으로 보증된 것은 아니었다. 시민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할 ‘용기’를 가져야 했다. 누구나 민회에서 자유롭게 법을 제안할 수 있지만, 그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 자유로운 발언에는 리스크가 수반되었다.
푸코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의 원초적 파레시아스테스에 세 가지 조건이 결부되었다고 정의한다. 첫째, 파레시아테스는 자신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바를 말해야 한다. 둘째, 발언은 자유롭게 행해져야 한다(강요나 요구에 응한 발언은 파레시아가 아니다). 섯째, 말을 거는 상대를 비판하고 돕고 개선시키기 위해 스스로 리스크를 떠안아야 한다.
파레시아와 민주제
이세고리아와 이소노미아, 파레시아는 원칙적으로 아테네에서 태어난 남성 자유인에게만 인정된 권리였다. 여성과 어린이, 거류민(메토이코이)과 노예는 배제되었다. 특히 아테네 시민이 어머니로부터가 아닌 조국의 ‘대지’로부터 태어났다는 신화를 통해 공적 영역에서 여성을 배제하고, 자유인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들을 노예로서 예속시켰다. 또 거류민과 이방 배성을 배제하고 그리스 이외의 나라들을 바르바로라 부르며 결명했다. 이는 그리스 도시국가의 한계를 나타낸다.
나쁜 파레시아
파레시아는 그리스 도시국가의 민주제를 상징하는 것이었지만, 이윽고 정치적 자유를 발휘하는 행위와 정반대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408년 상연된 에우리피데스의 후기 비극 『오레스테스』는 파레시아가 갖는 문제를 분명히 드러낸다. 시민이 갖는 바람직한 권리였던 파레시아가, 도시국가를 잘못된 길로 나아가게 하는 위험한 행위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마지목해 아르고스인이 된 그자는 군중들의 갈채와 자신의 어리석고 방종한 혀(파레시아)에 의존했는데, 청중에게 재앙을 안겨 줄 수 있을 만큼 설득력이 있었어요.”
여기서 파레시아는 정치적 권리가 아닌, 민중을 선동하고 “청중에게 재앙을 안겨 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변화는 당시 아테네가 실제 직면했던 상황에서 비롯되었는데, 특히 데마고그(선동가)인 클레오폰에게 선동당한 민중이 아테네에 유리한 평화 제안을 거부하게 된 사건 등이 영향을 미쳤다. 민회에서 누구나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파레시아의 권리가, 도시국가에서 결정적 실수를 가능성이 있음이 점차 인식되기 시작했다.
에우리피데스가 『오레스테스』에서 파레시아를 ‘수다스러운’ 남자에게 사용하게 된 것은, 파레시아가 ‘문제’로서 인식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푸코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민주주의와 진실에 대한 두 물음이 교차하는 장에서 태어난 파레시아의 위기를 통해, 기원적 5세기 말의 아테네에서 그 전까지는 문제시되지 않았던 자유와 권력, 민주주의, 교육, 그리고 진실의 관계가 중요한 ‘문제계’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전의 문제는 신이 침묵하고 있을 때 어떻게 파레시아를 행할까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좋은 파레시아와 나쁜 파레시아의 분열 때문에 파레시아 자체가 ‘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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