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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2.24.

기레민


현자와 목자 20170224 파레시아 발제.hwp

『현자와 목자』, 4장 도덕적 파레시아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자유롭게 말할 권리인 파레시아는 소크라테스를 통해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정치적 파레시아스테스로서, 다른 하나는 도덕적 파레시아스테스이다. 정치적으로 파레시아를 행사하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공적인 자리에서 공인으로서 그 자신이 자신의 목숨이 걸린 위험한 장면에서 진실을 말하는 파레시아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대한 재판에서 법과 올바른 것의 편에서 말함으로써 그리고 30인 참주 과두제에 불응하는 방식으로 파레시아를 실천한다. 이는 침묵하고 있을 수도 있었지만 굳이 자신의 의지로, 권력을 가진 상대의 마음에 들지 않는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용기있는 행동이자 권리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후로의 파레시아의 실천은 도덕적 파레시아스테스로서 나타난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나타나는 진실과 진실 말하기의 문제는 그가 자신에 대한 ‘진실’을 제시하도록 요구받으면서 시작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소크라테스는 레토릭에 의존하지 않는 말하기를 구사하고자 하며 파레시아의 사람으로서 민중 앞에 등장한다. 수사학에 비판적인 소크라테스는 레토릭에서는 말하는 주체가 말하는 내용을 믿고 있는지 여부가 문제시되지 않기 때문에 그와는 다르게 “그때그때 생각나는 낱말들로 되는 대로 말하겠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말하는 것들이 올바른 것들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하기 방식을 바탕으로 『변론』에서 그가 행하는 변론은 전통적인 세 가지 심급(신의 신탁/현자의 심급/스승의 심급)을 벗어난 것이다. 그는 정치가, 예술가, 기술가를 찾아다니면서 대화를 통해 대화 상대자가 자신이 진정한 현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면서 도덕적 파레시아를 행사한다. 따라서 대화자는 스스로에 대한 진실을 자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생애 마지막에 이르러 마지막 파레시아 장면을 법정에서 연출한다.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변론은 법정이라는 공적인 장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적 파레시아와, 대화라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도덕적 파레시아가 일체가 된 희귀한 장이었다. 변론의 전반부에서는 자신에 대한 진실을 밝히면서 후반부에선 대중에 대한 진실을 밝히면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간언을 한다. 여기서 도덕적 파레시아와 정치적 파레시아가 완벽히 겹친다. 저잣거리에서 사람들을 시험하는 철학 행위 과정에서 소크라테스가 전통 종교를 무시하고 청년들을 혼란에 빠지게 했다는 것이 비록 그를 죽음으로 내몰고 갔지만 그는 그들과의 대화 과정에서 늘 전장에서의 싸움을 하는 것과 같았다는 변론을 통해 도덕적 파레시아에 충실했음을 고백한다. 그런데 아테네인들에게 자기를 배려하라고 촉구했다는 소크라테스는 정작 자신을 배려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신의 신탁에 따른 ‘신의 선물’로 행동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치 아테네라는 굼뜬 말을 일깨우는 등에 같이 말이다. 그는 등에의 역할을 자처하면서 시민들이 신경쓰고 있는 평판이나 돈이나 명성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배려하기 위해서는 잠으로부터 깨어나는 것, “최초의 빛”을 봐야 함을 호소한다.

푸코는 등에로서의 파레시아스테스의 죽음을 통해 소크라테스의 파레시아스테스 상을 끄집어낸다. 푸코는 『라케스』에서 소크라테스가 끝까지 ‘용기’에 대해서 충분한 정의를 내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의 스승이라고 한다. “우리 자신들을 지금 상태로 그냥 있도록” 하지 않고 “우리 모두가 누구보다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라도 최선의 교사를 함께 찾아야만” 한다는 것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금석인 “교사”로서 광물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인 소크라테스라는 그가 심문해보면서 청년이 심문당하는 과정을 겪고 자신에게 가까이 와서 ‘긁히는’ 사람에게서 로고스(이성)가 비오스(삶)와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이는 ‘파레시아 게임’이라고 말해볼 수도 있는데 일대일로 마주 본 관계를 전제로 한다. 정치적 파레시아 게임에서 청중의 수동성은 말하는 자에게 설득당한다는 데 있다면 소크라테스의 파레시아 게임에서 듣는 사람은 소크라테스의 말에 인도되어 “자기 자신이 현재 어떤 방식으로 살고 있는지, 또 어떤 방식으로 생활해 왔는지” 에 대해 ‘자기에 대한 로고스’말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푸코가 밝혀내는 선생 소크라테스의 파레시아스테스는 올바른 정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삶의 방식과 자기를 배려하는 마음이야말로 중요하다는 것을 명확히 하는 역할을 한다.

 

5장 에로스의 변증법

1. 에로스와 진실

소크라테스에게 알키비아데스가 그러했듯 그리스 시민들에게 젊은이를 쾌락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정당한 행위이다. 그러나 이제 성인이 되어 시민이 될 젊은이에게, 성행위에서 타자의 쾌락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타자에게 지배되는 것이고 이것은 용인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젊은이는 상대의 욕망을 무시해서도 안 되는 “소년의 모순”(푸코)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거부와 회피의 게임”으로 젊은이뿐만 아니라 젊은이와 젊은이를 사랑하는 자 사이에 전개되는 ‘게임’이며 두 사람의 공동 작업이다. 젊은이를 사랑하는 자도 또한 젊은이가 아름다운 삶을 쌓아 나갈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하는 것이다. 에로스의 게임을 피하지 말고 게임 속에 살며 시험되는 것이 중요하다.

푸코는 플라톤이 에로스의 난문을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길로 다듬어냈다고 보았다. 플라톤은 소년애가 갖는 이 모순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역으로 이 모순이 진실을 향해 가는 계기로 이용되도록 만든다. 플라톤이 『향연』과 『파이돈』에서 고찰한 에로스론은 아름다운 육체를 바라보는 데서부터 젊은이를 사랑하는 자(에라스테스)와 사랑받는 젊은이(에로메네스)가 함께 변증법적 절차를 경유하여 진실을 향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소년애에서 아름다운 신체에 욕망을 품는 것이 이 에로스의 첫걸음이다. 사랑의 변증법의 첫 단계에서는 사랑하는 자가 주체이고 사랑받는 자가 객체이다. 사랑하는 자는 아름다운 신체에 대해 말하는 법을 배우고 칭송하고 찬양한다. 그리고 로고스라는 보편적 수단을 통해서 하나의 개별적 신체의 아름다움이 다른 신체의 아름다움과 공통되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신체만이 아니라 모든 아름다운 신체에 깃들어 있는 아름다움을 끌어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플라톤이 인도하는 길은 분명 아름다움의 이데아로 향한다. 젊은이의 신체를 사랑한는 자는 아름다움 자체를 관조하게 된다. 이에게서 교육받은 젊은이는 그와 덕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아름다운 일에 대해서 듣고 주체적 자세를 채용하게 되며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는 함께 아름다움 자체를 볼 수 있다. 이것이 플라톤이 생각한 이데아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사랑받는 자를 사랑하는 자라는 주체적 입장으로 사랑의 변증법 두 번째 단계에 이르렀음을 확인할 수도 있다.

에로스는 안에서 바깥으로 솟아나는 내적인 힘이라면 『파이드로스』에서 히메로스는 외부로부터 폭력적이기까지 한 힘을 발휘하여 주체를 빼앗아 버린다. (히메로스도 에로스의 한 모습이다) 젊은이를 사랑하는 자는 젊은이의 신체를 해하지 않고 젊은이를 “섬기는 신과 모든 점에서 똑같은 상태로 이끌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젊은이를 위해 봉사하기도 하면 젊은이는 이러한 숭고한 동경으로 타오르는 사람의 봉사를 받아 그것이 진실한 우정임을 깨닫고 상대에게 흘러든 히메로스가 눈을 통해 젊은이에게 역류한다. 이를 통해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가 더불어 날개 돋은 자가 되어 빛나는 삶을 이야기하고 동반의 길을 가며 사랑의 힘으로 똑같은 날개가 생겨나게 된다. 이러한 사랑의 변증법에서 세 번째로 나타나는 단계는 젊은이나 사랑하는 자나 단순한 객체가 아니라 상대와 진실을 더불어 사랑하는 주체로서 행동하는 것이다. 푸코는 히메로스를 “주체의 금욕과 진리(진실)를 향한 공동의 접근에 관심의 초점이 놓여진 연애술로의 이행”이라고 읽었으며, 여기어 나타나는 자기 제어 자체가 타자에 대한 배려임과 동시에 진실을 향한 지향성이랄 수 있기에 윤리적 파레시아의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2.소년애와 파레시아

고대 그리스에서는 완전히 같은 말이라도 그 말을 말하는 인물의 존재론적 위치가 다르면 동일한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품행이 나쁜 인물에게는 파레시아를 행사할 자격이 없고 뛰어난 제안이라도 그 의미를 잃고 만다고 여겨졌다. 소년애라는 관습이 있지만 남성이면서 여성처럼 행동하는 자는 대중에게 매춘부와 동일한 존재로 여겨지고 파레시아의 자격을 부정당하기로 했다. 소년애의 모순은 파레시아와도 깊은 관련을 맺는 것이다.

 

3.소크라테스와 자기 배려

그리스에서 호메로스의 시기에는 아직 ‘내면’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기원전 4세기가 되면 ‘내면’이랄 수 있는 것과 유사한 것으로 오라스테스의 ‘양심’이라는 개념이 나타난다. 마음의 법정 이미지라고 할 수 있는 ‘양심’은 자기의 죄를 의식하도록 추궁하는 일종의 법정이며 이는 세네카로부터 아우구스티누스를 경유하여 칸트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양심(쉰에이데시스)는 ‘증언하다’와 ‘인식하다’의 합성어로 이는 자신의 마음속에 어떤 타자가 존재한다는 의식이 이 시기에 등장했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이 시기 데모크리토스나 소크라테스는 마음에서의 분열을 피하려고 한다. 이 분열은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이를테면 자신의 부덕을 목격한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속에는 ‘타자’의 시선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부덕에 대해서 스스로 ‘수치’가 생겨나게 된다. ‘수치’는 그리스에서 ‘양심’을 대신하는 관념으로 형성되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간의 마음에 분열이 있는 경우에는 선한 의지가 실현된다고 하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은 누구나 정의를 바라고 정의롭지 못한 일을 하면 자기 안에 어떤 분열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자기 마음속에서 ‘일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마음의 불협화음의 비유가 『라케스』에서의 ‘시금석’ 개념과 가까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천과 담론의 일치가 중시되었던 『라케스』에서와 유사하게 사유와 행동의 일치가 강조된다. (플라톤이 쓴 『고르기아스』) 분열을 경계했던 『고르기아스』에서의 소크라테스는 ‘마음’속에 어떤 차이가 도입되고 있는 듯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자기에 대한 의식으로 자기 안에 어떤 타자가 존재한다는 경험이고 이는 신체와는 다른 차원에 “내적 인간”이 탄생하는 것이다.

수염이 나기 시작한 알키비아데스가 도시국가를 통치하고 싶다는 바람을 말하자 소크라테스는 그에게 타자를 통치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보여 주려 한다. 타자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를 알고 자기를 통치하며 배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선 자기를 아는 것이 문제이다. 자기는 신체와 인간(영혼)으로 나뉘어 있다. 인간이 주체이고 신체가 객체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체와는 다르다. 영혼이 인식해야 할 객체라면, 영혼은 인식하는 주체일 수 없는 것이라는 난점이 생긴다. 그럼 영혼은 자기를, 영혼 자체를 인식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거울에 대한 비유를 가져온다. 인간은 거울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신체를 바라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신의 영혼을 알기위해서 영혼의 거울을 바라보는 행위를 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서로 바라보는 행위 속에서 사람은 주체임과 동시에 객체가 된다고 생각했고 바라보는 상대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 보기를 제안한다. 여기서 주체인 눈동자는 살아 있는 인간 안에서 객체인 자기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영혼이 ‘자기’를 인식하려 한다면 자기 자신의 영혼으로 다른 영혼을 들여다 보고 거기서 자기를 인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말, 로고스다.

영혼이 자기이고 주체라는 것은 영혼이 타자의 영혼과 ‘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타자의 영혼을 개입시키지 않고서는, 영혼은 자기를 인식할 수 없다. 그리고 영혼에 의한 자기 배려란 단순히 자기를 자기로서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자기 배려에까지 관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푸코는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에게 말을 건네기 위해 그가 나이 들기를 기다리고 알키비아데스 그 자체, 그의 영혼, 행위 주체로서의 그의 영혼을 배려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그것은 알비키아데스가 자기 자신을 배려하는 방식을 배려한 것이라고 한다. 『알키비아데스1』에서 나타나는 ‘자기’란 어딘가에 실체처럼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주체로서의 영혼이며, 타자와 맺는 배려의 관계로만 존재하는 행위 안에 있는 것이다. 그중 하나의 귀결로서 자기 배려 속에 ‘스승’ 개념이 도입되게 된다. 자기 배려는 공허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고독한 행위가 아니라, 우정으로 자란 ‘사제’관계에서, 대화를 나눌 때의 ‘불꽃’ 속에서 행해져야 할 것이며 자기 배려는 타자와의 시선 가운데 자기를 소재로 계속되는 것이다. 각설하면 자기를 배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 타자와의 우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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