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현자와 목자/ 나캬야마 겐 / 16장 왕과 현재 플라톤의 시험 / 2017.3.2.() / 닥홍

 

170302 현자와 목자 1부6장 나카야마겐 발제닥홍.hwp


플라톤의 시켈리아 방문

 

그리스 아테네의 도시국가에서 자유인이 향유하던 정치적 파레시아는 소크라테스를 기점으로 도덕적 파레시아, 삶의 파레시아로 전환되어 왔다. 정치적 파레시아는 이제 민회에서가 아니라 왕의 궁정에서 행해지는 왕이나 참주에 대한 간언이라는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파레시아는 아테네라는 도시국가의 장을 떠나기 시작한다. 플라톤은 시켈리아의 참주 디오뉘시오스 1세 아래서 파레시아를 행사하게 된다. 플라톤은 세 번 시켈리아를 방문한다. 플라톤은 시켈리아를 방문하여 참주의 조카인 디온에게 강한 영향을 주고, 국가에서 말한 바 있는 철학자 왕 설을 불어넣음과 동시의 어떤 의미에서 장차 참주정의 붕괴를 기도하고 있었다. 일설에 따르면 플라톤은 디오뉘시오스와 만나 얼굴을 마주보며 왕의 역할을 지정하고 그가 참주임을 비판했기 때문에 화가 난 디오뉘시오스에 의해 동맹국 스파르타의 외교 사절에게 넘겨져 아이기나 섬에 노예로 팔리게 되었으며, 플라톤의 친구들이 그를 다시 사서 아테네로 귀국할 수 있었다고 한다. 플라톤은 디오뉘시오스 2세를 교육하고 시험한다. 물론 시라쿠사이의 참주를 철학자로 교육함으로써 이상 국가를 만들어 내는 것을 목표로 하긴 했으나, 첫 방문 때처럼 자기 신변의 위험을 각오한 상태에서 적국이나 다름없는 시라쿠사이를 방문하고 참주가 듣기 싫어하는 것을 고하는 것이 파레시아 행위의 전형인 것이다.

 

폴리테이아의 목소리

 

플라톤이 기원전 352년경 디온의 동료들에게 보낸 여덜째 편지에 따르면, 참주제를 뛰어난 왕정으로 전환시키는데 필요한 수순을 설명하기 위해 파레시아를 행사한다고 한다. 플라톤이 자신의 견해를 파레시아로서 제시하는 것은 아마도 디온의 동료들이 시도하고 있는 정치 개혁이 플라톤이 제시하는 개혁, 즉 참주정으로부터 왕정으로 가는 온건한 개혁과는 다른 노선이었고 따라서 디온의 동료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플라톤은 철학자가 정치에 관여할 때에 중요한 것은 왕에게 철학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폴리테이아(정치제제)의 목소리를 분별하는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플라톤은 좋은 입법자와 좋은 철학자는 그 폴리테이아의 목소리, 이를테면 국가의 본질과도 같은 것을 분별할 귀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이 디온의 동료들에게 과격한 민주정을 구축하기보다는 참주정을 왕정으로 변혁시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 폴리테이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결과이다. 이 경우에는 민중의 의견에 저항해서라도 국가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것이 파레시아 행위가 된다.

플라톤은 아테네라는 국가가 이미 너무 낡아서, 이미 꽤 나이를 먹은 민중들은 앞선 사람들의 영향으로 플라톤이 하게 될 조언과 배치되는 많은 것들을 행하는 습관이 들어 있다고 지적한다. 조언하는 행위가 위험을 동반하지 않는다고 여겨졌더라면 조언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플라톤은 민주제가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한 것에 절망했을 뿐만 아니라, 아테네에는 우정과 호기가 결여되어 있다고 판단했다.

 

카이로스

 

플라톤은, 두 번째로 방문했을 즈음의 시라쿠사이에 아테네와는 다른 상황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디온은 참주인 디오뉘시오스 2세도 철학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플라톤의 이론을 믿고 실행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강조했다.

푸코는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라는 조합, 그리고 플라톤과 디오뉘시오스 2세라는 조합에 공통점과 차이점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공통점이라 함은 시라쿠사이 방문에 우정과 호기가 존재했던 것처럼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 사이에도 우정과 호기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알키비아데스가 단순히 사랑받는 소년으로서 응석받이 취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어른으로서 행동하도록 기대되는 시기가 도래함과 동시에 알키비아데스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도 줄어들게 된다. 소크라테스에게 이것은 지배자가 될 인간에게 철학과 자기 배려의 중요성을 가르칠 호기인 것이다. 플라톤에게 철학을 몹시 배우고 싶어 했던 젊은 참주 디오뉘시오스 2세의 등장 역시 플라톤으로서는 놓칠 수 없는 호기였다.

 

설득의 조건

 

철학자가 왕을 설득하는데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고 푸코는 세 관점을 제시한다.

첫 번째 조건은 철학자의 담론에 귀를 기울이려는 인물의 존재이다. 상담 내용에 관해 조언해 줄 경우 따를 용의가 있다고 여겨지는 조건이 충족된다면 플라톤은 기꺼이 조언해주고 그저 욕 안 먹을 정도로 적당히 끝맺지는 않겠다고 말한다. 플라톤은 의무감뿐만 아니라 열정을 갖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은, 철학자의 충고를 듣게 될 상대의 어떤 존재론적 조건이다. 자유인 환자는 자유인 의사가 치료하는데, 이 경우에는 강제적으로 처방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설득하고 병이 아닌 환자의 생활 방식 자체를 바꾸려고 시도한다. 어떤 식으로든 납득이 되기 전에는 지시를 내리지 않고, 언제는 환자를 설득과 함께 고분고분해지도록 준비를 한 그때에야, 건강으로 인도함으로써 만족한 결과를 얻도록 노력한다. 철학자가 설득하는 상대는 자유인이며, 적절한 이성을 갖추고 철학자의 설득을 들을 용의가 있는 인물이어야만 한다. 노예의 처방처럼 일방적으로 철학자가 지도하고 입법하고 실행시킨다면 철학자의 담론은 현실과 만날 수 없다.

세 번째 조건은, 조건은 들을 생각이 있는 인물이 철학자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이것은 두 번째 조건과 같은 존재론적 조건이 아니라 그 개인이 가지는 일회적이고 역사적인 능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를 위한 기본적 기준으로서 플라톤은 쉬이 배우는 능력, 좋은 기억력, 그리고 물음과 대답을 통해 진리를 이끌어내는 능력을 들었다.

푸코는 플라톤에게서 찰학자의 설득 상대가 이 조건을 만족시키지 않는다면, 철학자의 설득은 효과없이 끝나고 철학이 현실과 만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고 지적한다.

 

플라톤의 시험

 

시험의 결과 디오뉘시오스 2세는 두 가지 점 때문에 불합격 된다. 하나는 왕이 플라톤이 제시한 길을 따르려 하지 않고 자신이 철학에 대해서 충분히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다른 자들에게서 귀동냥한 것을 가지고 자신이 가장 중요한 것들을 많이 알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충분한 척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푸코는 디오뉘시오스 2세가 플라톤의 시험에 실격한 것은 이 어설픈 지식 때문만이 아니라 주워들은 것들을 자기 자신의 철학 강요와 같은 책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디오뉘시오스 2세가 단순히 플라톤의 이론을 자신의 이론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책으로 만든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푸코는 플라톤이 이점에서 디오뉘시오스 2세에게 중대한 철학적 결함이 있다고 판단하고 젊은 참주를 불합격시켰다는 데 주목한다. 책을 썼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은, 푸코의 꽤나 독창적인 점이며 통설과는 다르다. 푸코는 표절보다도 책을 쓰는 행위 자체가 문제였다고 보는 것이다. 플라톤의 에크리튀르 이론을 생각해 보자.

 

에크리튀르 이론

 

플라톤은 철학자가 써서 남긴 에크리튀르가 철학자의 말 보다 열등하다고 지적했다. 책과 문자에 대한 플라톤의 이론에 대해서는 데리다가 상세히 분석한 바 있다. 데리다는 플라톤에게 문자가 기억과 지혜의 약으로서의 위상을 가진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러나 이 약은 상기하기 위한 약이기는 해도, 진리나 기억에는 독약으로 작용한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문자로 쓰여진 책에 의존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지식이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을 시험하여 실은 그들이 무지함을 밝혀냈는데, 책은 부지불식간에 사람들을 무지하게 만들어 버린다고 플라톤은 주장한다. 책은 진리를 민주적인 것으로 만다는 효과가 있으며 문자에는 정치적 의미가 있다. 헤겔은 그리스의 법률이 명문화되어 있었다는 데 주목하며, 무엇이 금지되어 있고 무엇이 허용되어 있는지에 대해 사람들이 명확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법률이 문자로 쓰여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을 시험하는 시금석의 기능을 함으로써 도덕적 파레시아를 행했다면, 문자로 쓰여진 책은 나쁜 파레시아와 마찬가지로 사람들로 하여금 잘못을 저지르게 할 수도 있어 위험하다.

플라톤은 이론은 바뀔 수도 있는 것인데도 책이 그것을 고정시켜 버린다고 지적하면서, 쓰는 행위를 경계한다. 표절 그 자체보다도 철학 이론을 쓴다는 행위의 위험성 때문이다.

철학에서 진리 개념은 책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에 주목하자. 이것은 푸코가 이제까지 다루어 온 파레시아의 실천적 개념과 공통되는 요소이다. 진리는 태양에 비추어지듯 모든 사람의 눈에 드러나는 것으로서 제시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플라톤은 동굴 밖으로 나와 태양빛 아래 드러난 진리를 본 철학자가 다시 비-진리의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고 말한다. 플라톤에게서의 진리가 이데아로서 보여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주체의 어떤 단련이 필요하다나는 것 역시 확실하다. 진리를 볼 수 있기 위해서는 진리를 보는 주체에게 어떤 존재론적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진리의 이론

 

플라톤은 앎의 다섯 가지 요소를 제시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우선 이름, 정의, 모상이라는 세 요소가 필요하다. 다음으로는 앎이 필요하다. , 지성, 참된 의견이 구체적인 내용이다.

플라톤은 언어로 진정한 실재에 도달하려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책도 이렇게 허약한 언어로 쓰여진 것에 불과하며 그 한계는 분명하다.

플라톤은 이미 철학과 현실이 만나기 위해서는 귀를 기울여 줄 사람과의 우정이 존재하는 호기(카이로스)가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서로 간의 논의, “호의를 품은 검토 과정에서 검토가 되고 질투심 없는 물음과 대답을 이용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에크리튀르에는 그러한 램프가 타오르기 위한 조건이 부족하다고 플라톤은 생각하는 것이다.

푸코에게 파레시아란, 문서에 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 내에서 살아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

데리다의 이론에서는 말하는 목소리의 현전성을 중시하는 것이 서양 철학의 전통이라 말하지만, 플라톤이 여기서 에크리튀르를 비판하는 것은 그것에 파롤의 현전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마치 성적인 관계처럼(쉰우시아) 함께 살아야 할 필요가 있으며 진리 그 자체를 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진리와 우정

 

플라톤이 이렇게 디오뉘시오스 2세를 시험해 본 결과, 디오뉘시오스 2세에게는 철학 자체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음이 명백해졌다. 디오뉘시오스는 교육을 받고 있지 않았고 적절한 교제도 하고 있지 않았다. 또한 친구, 특히 덕을 추구하는 동지가 없었다. 그래서는 황폐한 시라쿠사이의 도시를 재건할 수 없고 법률(노모스)과 정치체제(폴리티아)를 통해 도시국가를 결합할 수 없었다. 플라톤은 이러한 결함들을 디오뉘시오스 2세에게 암시한다. 있는 그대로 지적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기 때문에 파레시아로서 간언하는 것이다.

푸코는 플라톤의 비판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디오뉘시오스 2세가 자신의 주인 되기도 충실한 친구 만들기도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고 본다. 디오뉘시오스 2세가 철학을 즐기면서도 플라톤이 바란 철학자 왕이 될 자격을 결여하고 있었던 것은, 이미 지적한 것과 같은 여러 결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디오뉘시오스 2세에게 자기 통제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 자기를 통제하는 것을 배우기 위함이다. 푸코가 주목하는 바는, 플라톤이 서신에서 보여 주는 것처럼, 친구와의 대화라는 실천을 통하지 않고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문자로 쓰여진 책에서가 아니라 친구와의 대화속에서 진리가 살 수 있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진리와 우정의 연결이 얼마나 중요했는지가 여기서 드러난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