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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와 목자/ 나캬야마 겐 / 22장 그리스도교와 사목 초반/ 2017.3.12.() / 닥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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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종교에서 분파의 성립

 

팔레스타인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 아래 들어가면서 헬레니즘화가 진행된다. 이 헬레니즘적 국가의 유대교 내부에서 토라(율법)의 취급 방식을 둘러싸고 분열이 발생해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예수는 이러한 급진적 유대교 유파 중하나의 예언자로 등장했다.

유대 귀족 상류 계급 사두가이파는 토라의의 핵심을 신에 의해 선택된 성소에서 제사를 정기적으로 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철학적으로는 전통 유대 사상의 영혼관과 죽음의 이론에 기초하여 영혼은 소멸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에 비해 중류계급의지지 아래 유대의 헬레니즘화에 저항했던 것은 바리사이파였다. 바리사이는 분리라는 물이며 깨끗함을 중시한다. 법률의 가르침을 사제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준수하도록 했다. 바리사이파는 토라를 백성 각 사람에 대한 도덕적 율법으로서 재파악했다. 그들은 영혼이 불멸하다고 믿으며 이 세상에서 선하게 살았는지 악하게 살았는지에 따라 상벌을 받게 되는데, 선하게 살았을 경우에는 소생하여 다시 살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되고 악하게 살았을 경우에는 영원한 감옥에 갇히게 된다고 믿었다. 영혼이 불멸한다는 사상은 유대 전통 사상에서 벗어나지만 그리스도교의 부활 사상과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사두가이파와 대조적으로 바리사이파는 신이 유대 백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다는 사실이다. 모든 인류의 신으로서의 신을 인정했기 때문에, 그들은 신에 대한 개인의 관계와 책임이라는 교의를 굳게 주장하고 따라서 개인의 영혼이 살아남아 저 세상에서 응보를 받는다는 것을 믿었다.

이 밖의 주요 유파로서 에세네파가 있다. 에세네파는 극단적인 엄격주의에 이르도록 율법을 준수했으며, 이는 안식을 규정을 극히 엄중하게 지켰다는 것으로부터도 알려져 있다. 결혼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쾌락의 추구로서가 아니라 자녀 생산을 위해서 중시했다.

네 번째 철학 유파는 열심당(제로타이)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율법의 규칙을 완벽히 지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처벌하는 데 이상한 열정을 기울인다. 제로타이는 유대 해방 운동에 그 기본적 전투 형태를 제공했다. 제로타이는 다니엘서에서 발견되는 종말론적 환상을 유대의 정치적 공간으로 가져와 실제로 유대 국가의 명망을 야기시킨다. 에세네파도 유대 전쟁에 참가하고 역사에서 사라져 간다. 유대 종교를 휴대에 전하게 되는 것은 타협한 바리사이파 일파이며, 야브네의 땅에 재건된 바리사이파가 후일 유대교 랍비 전통의 단초가 된다.

 

2. 광야로

 

이 유대교의 네 유파는 도시의 정치적 공간에 머물러 있었지만 당시의 급진적인 운동 중에는 광야로 돌아가 고립된 공동체에서 지내는 종파도 있었다.

어떤 집단은 엄격한 규제 하에 계약을 지키는 사제들과 계약에 충실한 공동체의 사람들 다수로 구성되고 모든 소유물을 공유하며, 율법과 소유물과 규칙에 관한 모든 사항이 정해진다. 20세가 되어 선과 악을 분별하기 전까지는 사귀기 위한 목적으로 여자에게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고 정하기도 했다.

테라페우타이라는 집단은 영혼을 신과 연결시키고 한눈도 팔지 않고 명상 속에 사는 것을 바랐다. 이 집단이 상징하는 것은 이 시대에 새로운 감성이 등장하여 그리스적인 것도 유대적인 것에도 없는 어떤 순수성이 추구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광야에서 세례를 하는 예언자 집단도 있었다.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서로 의를 행하고 살 것과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 것을 강조하면서 그렇게 하고 와서 세례를 받으라고 주장했다. 예수는 요한의 세례를 받고 요한의 집단 중 한명으로 활동을 개시했다.

 

3. 예수의 등장

 

이스라엘 종교가 갖는 여러 문제, 바라사이파의 율법주의 비판, 유대교 혁신 등을 끊어 버리려고 등장한 것이 예수다. 예수 사상에 대해서는 역사상의 예수를 이야기 한 것으로 보이는 전승된 예수와 그리스도교단에서 만들어 낸 부활한 예수의 두 예수상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

전승된 예수 상을 메타노이아와 아가페라는 관점에서 고찰해 보자. 메타노이아는 회개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본래는 시선의 방향을 바꾸는 것으로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머리 방향 바꾸기라는 에피스트로페에 가까운 개념이다. (푸코는 에피스트로페는 각성이고, 메타노이아는 자기 및 자기에 의한 자기 포기의 경험으로서의 죽음과 부활이라 지적한다.)

여성, 이방인, 노예 세 유형에 관련된 비유를 통해 예수가 어떤 사상을 품고 있었으며 유대 사상의 한계를 얼마나 돌파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죄 많은 여인의 비유

 

죄 없는 자 이 여인을 돌로 치라는 비유는 애초에 복음서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교에서 간통이 중요한 죄이고 간통을 단죄하지 않는 것이 너무 급진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 비유가 포함된 이유는 간통한 여자를 배교했다가 회개한 자의 은유로서 포착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가 국교로 인정받기 이전에는 극심한 박해가 있었고 많은 신자들이 배교자로서 그리스도교를 부인했다. 후에 회개를 통해 교회에 이러한 자를 받아들일지 말지가 큰 논쟁이 되었다. 확실히 간통은 유대 사회에서 죄이지만, 자신이 완전하게 무고하다고 믿는 자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예수가 도발하자 누구 하나 돌을 던지는 자가 없었다. 예수의 도발로 명백해진 사실은 인간은 원래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 즉 인간은 원초적으로 죄인이라는 인간의 한계이다. 따라서 이 여성은 죄인이 아니며 예수의 마지막 말은 가톨릭 교회가 두 번째 회개를 부정하기 위해 덧붙인 것이다. 예수는 간통한 여자를 회개를 필요로 하는 죄인으로 보지 않는다. 예수는 그녀를 있는 그대로 무조건 받아들였다는 지적이 맞는 것 같다. 다만 이 여성의 영혼의 돌아섬(메타노이아)은 예수나 성직자를 향한 죄의 고백이나 회개로서가 아니라, 그때까지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으로서 행해지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예수의 양발에 눈물과 기름을 붓는 여자의 모습은 이 메타노이아 이후의 한 모습일 것이다.

 

이방인의 비유

 

여기서도 메타노이아가 예수의 힘과는 무관한 형태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자. 유대인이 눈을 뜨게 된 것은 사제, 레위인, 사마리아인 이 세사람의 행동을 봄으로써이다. 예수만이 아니라 여기서는 신의 힘 자체도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유대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시선의 방향을 바꾼 것이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은 나그네이다. 떠돌아다니는 보부상으로밖에는 살아갈 수 없고, 객지를 방랑하며 월경하는 자이다. 이 사마리아인은 모든 이들에게 버림받은 유대인을 돕는다. 사마리아인 자신이 타향에서 지내는 괴로운 입장에 선 자이며 소외된 자로서, 유대인을 돕는 대가 없는 행위를 할 수 있다. 나와 너라는 이웃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일생에 한 번뿐인 기회(카이로스) 어떤 만남을 넘어서 또 다른 상처받은 사람과의 만남을 예감하면서 월경 방랑하는 자이다. 이 이야기는 이웃의 정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타자와 만날 가능성을 묘사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노예의 비유

 

예수가 죄인인 여자와 식사를 하는 것은 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행한 것이고 예수는 율법의 세계에서 일탈하여 사랑을 보임으로써 율법을 지킨 자에게 정당한 평가와 보수가 주어지는 유대의 율법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전승 예수는 이 비유들에서 율법 엄수에만 집착하는 유대의 전통적 교의를 부정한다. 궁극적인 평화의 세계를 지향하는 제2이사야의 환상과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는 다니엘의 종말론적 환상이 지금 여기 실현될 것처럼 말한다. 신 앞에서 그 구제의 대상이 되는 단독의 나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종말론적인 가르침과 예수의 원시 그리스도교부터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신에게 해명하는 것은 단 한명이 나이다. 이 고립과 고독의 감정은 그리스도교의 큰 특징이 된다.

 

예수의 두 개의 목숨

 

예수 이후 그리스도교단에서는 구약의 전체 구원사가 성육신이라는 목표를 지향한다는 인식,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 된다. 예수는 사람의 아들을 자칭함으로써 이미 이러한 조작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예수의 죽음은 절망 속에서의 죽음처럼 보인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 중에는 자신의 죽음을 절망 속에서의 죽음으로 여기지 않고 새로운 교단의 희망으로 여길 수 있는 사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두 개의 목숨이라는 사고방식이다. 그것은 영혼 혹은 생명이 이 세상의 신체에서 소멸하지 않고, 다른 세계에서 새로운 생명을 맞이한다는 사상이다.

역사적 사실로서의 예수가 어디까지 자각하고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여기서 이 세상과 신의 나라의 가치관이 완전히 전도되고 사람들은 영원의 피안에 모든 희망을 걸도록 요구받는다. 바오로는 이윽고 이 두 가지 생명을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라는 개념으로 대비시키게 된다. 외적 인간은 쇠약해져 죽어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바오로는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한다. 이것이 예수의 사상 자체였는지는 의문이지만, 바로 여기서 니체가 통찰한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윤리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상으로부터 다음에 고찰할 구출자로서의 예수상이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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