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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헬레니즘 시대의 현자 (181∼212쪽)


정원의 사상

파레시아와 우정

“항상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친구가 아니며, 도움을 우정과 결부시키지 않는 사람도 친구가 아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호의의 대가로 보상을 취하며, 후자는 미래의 희망을 파괴하기 때문이다”(에피쿠로스). 여기서 ‘친구의 변증법’은 물질적 원조가 아닌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성립한다. 에피쿠로스는 곤란할 때 친구에게서 원조를 받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 또 친구가 곤란을 겪을 때 친구를 원조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이 내일 먹을 빵의 문제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에피쿠로스 ‘정원’(에피쿠로스가 아테네에 연 학원)의 경제는 이 상호적 우정의 원리에 의거하고 있었다. 특히 여기서 우정은 상호적 파레시아의 원리로 구축되었다. “많은 선한 사항이 우정을 통해 태어난다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말하는 사람이 있고 또 동시에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큼 좋은 일은 없다”(필로데모스). ‘정원’은 생활을 지탱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기분을 솔직하게 말하기 위해 필요한 곳이기도 했다. 누구나 꾸밈없는 말로 상대의 결점을 지적하고 자신의 결점을 고백하는 것이 중요했다. 파레시아를 행사함으로써 ‘상호 구제’가 가능하다고 여긴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파레시아

에피쿠로스의 ‘정원’은 서로에게 진리를 말하면서 자신을 고양시켜 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필로데모스에 따르면 파레시아에는 두 종류가 있었는데, 모든 사람을 향하는 파레시아와 친밀한 관계에서의 파레시아가 그것이다. 이 중 친밀한 관계에서의 파레시아, 예컨대 소크라테스식 일대일 파레시아가 좀 더 중시되었다. 이는 ‘정원’에서 비교적 높은 등급의 교사에게만 개인적 파레시아가 허락되었다는 것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에피쿠로스의 교의는 ‘인간’을 위한 파레시아도 동료 간의 파레시아 만큼 중요시했다.

이런 점에서 에피쿠로스의 우정은 플라톤적 소년애를 넘어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삼았다 할 수 있다. ‘정원’에서는 차별이 없었다. 노예는 해방되고 여성이나 외국인도 받아들였다. 이는 실제 현실 정치 참여를 거부하고 ‘정원’이라는 닫힌 장소 안에만 머물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스토아학파의 자기 기술

자기 배려의 황금시대

헬레니즘 시대로 접어들면서 개인은 세계 속에 독립된 코즈모폴리턴으로서 스스로를 상상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개인을 둘러싼 “정치적, 사회적 틀이 약화”된 시대이며, “개인들이 도시국가에 좀 더 느슨하게 편입되어 서로에게서 훨씬 더 격리된 채 자기 자신에게 더 의존”하게 된 시대였다. 이로써 “개인의 존재에 대한 사고방식이 다양화되고, 깊이 숙고된 생활 방식 또한 다양해졌다.” 철학 분야에서도 견유주의 학파부터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학파 등 여러 학파가 그 생활 방식의 다양성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요컨대 이 시대에는 ‘개인주의’의 여러 방식이 탐구되었다. 개인의 절대적 가치를 고찰하는 길도 있었고, 가족과 사회에서 개인의 위치를 고찰하는 길도 있었다. 또 자기와의 순수한 관계를 바탕으로 자기의 구제와 정화를 목적으로 하는 길도 있었다. 즉 제정기 최초 2세기는 자기배려의 ‘황금기’였다고 할 수 있다. 스토아 학파는 이 모든 측면에서 자기배려를 전개하게 된다.

스토아 학파에서 ‘자기’는 작업을 가하는 주체인 동시에 작업이 가해지는 개체이며, ‘아스케시스’의 대상이었다. 지금은 ‘금욕’을 뜻하는 단어인 아스케시스는 그리스도교 시대에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한다는 의미였지만, 고대에는 무엇인가를 획득하는 것을 의미했다. 푸코는 이때 획득되는 것이 ‘자기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아스케시스의 목적은 “자기를 자신의 실존의 목표로 세우는” 것이며, “무엇인가를 몸에 익히는 것”이고 진리와의 유대를 만드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는 자기와 아름다운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목적으로 했으며, 영혼의 평정을 확립하여 자기를 향유하기 위해 자기를 단련했다. 여기서 단련이란 곧 ‘자기의 기술’로, 크게 ‘영혼의 단련’과 ‘신체를 통한 단련’으로 나뉜다.


영혼의 단련

심상의 점검

먼저 영혼에 대한 끊임없는 점검과 경계가 있다. 마음속에 어떤 상이 들어오는지 경계하지 않으면 영혼의 평정은 실현될 수 없다. “우리는 점검하지 않은 인상(판타시아)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우선 ‘잠깐, 당신 누구야, 어디서 왔어?’라고 물어야 한다”(에픽테토스). 특히 이러한 점검은 신성한 싸움의 성격을 띤다. “우선 이 격렬함에 노출되지 말 것. 오히려 ‘심상이여, 조금 기다려다오. 네가 무엇인지, 무엇에 대한 심상인지 보여 다오, 너를 조사할 수 있게 해 다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 만약 자네가 그렇게 해서 훈련에 익숙해진다면 스스로 어떤 어깨, 힘줄, 긴장력을 가지게 될지 알 수 있을 것이네. … 이러한 심상에 대해 자기 자신을 단련하는 자야말로 진정한 수행자(김나존)인 것이다.”

아울러 단련은 ‘지금’ 이 순간을 중시한다. 언제나 이 시점에 자신에게 떠오른 심상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현재의 상황에 경건한 마음으로 만족하는 것, 현재의 이웃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 어떤 것도 검정을 거치지 않은 채 마음속에 몰래 스며들지 못하도록 현재의 인상을 세심하게 분석하는 것, 이것은 네가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일이다”(아우렐리우스).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은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고 미래에 대한 걱정에 얽매이지 않으며 현재의 이 순간을 향유하고, 현재의 이 순간을 향유할 수 있는 자기와의 관계를 구축하는 데 힘썼다. “내가 능동적으로 작업을 가하는 것은 현재에서뿐이다. 현재의 나만이 나의 것이며 내가 살고 있는 것은 현재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검은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자신의 욕망이 동요되지 않았는지 점검하는 일도 포함한다. 아름다운 여성과 소년의 심상에 욕망이 움직였는지, 이해관계에 관련되어 있는 의원의 심상에 욕망이 움직였는지 점검하는 일은 스토아 학파의 기본 원칙(자기 의지에 의존하지 않는 것은 선도 악도 아니라는 것)을 상기하고 재확인하는 일이었다. 이는 “자기에 대한 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중요 훈련이었다.

또 심상의 점검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서도 이루어지기도 했다. 대화 상대가 보여 주는 상황의 심상에 대해, 가능한 한 신속하게 그것이 도덕의 영역의 것인지 아닌지 답하는 훈련이 행해졌다.


상상력 수업

여러 나쁜 상황을 떠올려 보는 일, 극단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떠올려 보는 일도 단련 방법 중 하나였다. “당장이라도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사람처럼 모든 것을 행하고, 말하고, 생각하라”(아우렐리우스). 에픽테토스는 ‘배에서 도중에 내린 사람의 마음가짐’의 예로 들며 죽음의 각오를 설명했고, 세네카는 식탁을 떠날 때 이것이 마지막 식사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고 한다.


세 개의 환원

푸코는 최악의 사태를 예측하는 이러한 상상력 훈련을 세 개의 ‘형상적 환원’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첫 번째 환원은 최악의 사태가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상정하며 마음속에 떠올리는 것이다. “죽음이나 추방 등 무시무시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매일 눈앞에 떠올려 보라, 모든 것 중에서도 특히 죽음을”(에픽테토스). 두 번째 환원은 나쁜 사건이 먼 미래에 일어날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지금까지 살다가 세상을 떠난 듯이 여생을 덤으로 살되 자연에 맞게 살도록 하라”(아우렐리우스). 세 번째 환원은 나쁜 사태를 나쁜 것이 아닌, 그저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푸코가 말하지 않은 네 번째 환원은, 자신의 신체를 구성 요소로 환원함으로써 신체나 삶에 대한 집착을 없애는 사고 실험이다. “잠시 뒤면 너는 재나 유골이 될 것이며, 이름만, 아니 이름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환원은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서도 사용된다. “맛 좋은 요리나 그와 비슷한 다른 음식들을 보고는 이것은 물고기의 사체이고 이것은 새나 돼지의 사체라고 생각하고, … 성교라는 것도 장기의 마찰과 진액의 발작적인 분비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멋진 발상인가”(아우렐리우스).


취침 전의 의식과 해몽

스토아 학파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전통을 이어받아 취침 전에 그날 하루의 일을 점검했다. 세네카는 취침 전의 어둠 속에서 그 날 자신의 행동을 점검한 후에 편안하게 잠에 든다. “하루해가 저물면 그(섹스티우스)는 잠자리에 들면서 자신에게 이렇게 물었다. ‘오늘은 네 마음의 악덕 중에서 어떤 것을 고쳤는가? 너는 오늘 어떤 악덕에 저항했는가? 어떤 점에서 너는 조금이라도 나아졌는가?’ 매일 재판관 앞에서 호출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 너의 화도 그칠 것이고 좀 더 통제가 될 것이다. 하루의 일상을 꼼꼼히 들여다보는 것보다 더 좋은 습관이 있겠는가? 이러한 자기 성출 후에 찾아오는 잠이란 어떤 것일까?”(세네카). 세네카는 취침 전에 그날 자신의 행동을 점검한 후에 편안하게 잠들었따. 그리고 다음 날 눈을 뜬 후에는 자신의 꿈을 해석했고, ‘부끄러운 꿈’을 꾸지 않았다면 또 한 번 영혼의 진보를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기억하기

중요한 원칙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했다. 에피쿠로스의 교설은 간단하고 짧으며 기억하기 쉽게 만들어졌다. 제자들이 이 원칙을 부단히 기억하면서 행동하고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기억이라는 기술은 무용에서 신체적으로 패턴을 기억하는 작업과 비슷한 일었다. 세네카는 체조에서 기본 동작을 습득하면 여러 사태에 준비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이러한 습득을 통해 신체적으로 기억을 해 버리면 어떤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체조가 신체의 아스케시스라면 원칙이나 교의의 기억은 영혼의 아스케시스라 할 수 있다. 기억은 모든 사태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기술인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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