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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산책/참된 곤경
어제 처형이 폰으로 보내온 정보에 의하면, 마스크 등으로도 걸러지지 않는 뇌에 침투한 초미세먼지가 뇌 부위를 파괴해 치매나 파킨슨병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침투 이후의 해결방안으로는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먹는 것과 깊은 잠이 중요한데, 깊은 잠을 잘 때 뇌의 오염물질을 청소하는 기능을 가진 물질인 뇌척수액이 20% 정도 상승하기 때문이란다. 어제 밤 11시에 잠자리에 든 이유다.
오늘 아침에 4시 40분에 눈이 떠졌다. 그때까지 대여섯 시간 숙면을 취한 것이다. 정신이 더 할 수 없이 맑았지만 뇌척수액의 상승을 위해 좀 더 누워 있다가 5시 반쯤 되어 거실로 나와 두 시간 가량 책을 읽었다. 찰스 테일러의 <헤겔>은 천 페이지가 넘는 대작이다. 오늘 아침 4장 ‘의식의 변증법(275쪽)’까지 읽었다. 어제 읽었던 3장 ‘자기 정립하는 정신’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헤겔의 철학에는 뮌히하우젠 남작을 연상시키는 뭔가가 있다. 뭔히하우젠은 말에서 늪으로 떨어지자 자기 머리카락을 잡아 올려 자기 자신을 구출했다고 한다. 헤겔의 신은 뭔히하우젠의 신이다. 그러나 이 어려운 영역에서 헤겔의 공헌이 그 정도로 폄훼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찰스 테일러의 <헤겔> 192쪽
늪으로 떨어지자 자기 머리카락을 잡아 올려 자기 자신을 구출했다니?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는 그림이다. 만약 내가 책의 앞부분을 읽지 않았다면 이 대목에서 고개만 갸우뚱하다가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껄껄껄 웃고 말았다. 그 정도가 아니라 대성통곡의 반대가 뭐지? 파안대소? 그 정도로도 표현이 모자라는 통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실은 그 웃음을 터뜨리기 전까지 나는 내 명석하지 못한 머리로는 잘 포착되지 않는 <헤겔>을 읽으며 마치 변비 증세를 호소하는 환자처럼 진도를 빼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것이다.
<헤겔>에 대한 리뷰를 쓸 생각은 없다. 아직 초입에서 헤매고 있기도 하거니와 책을 완독한들 그런 능력이 아직 내게는 없다. 아마도 완독하고 나면 더 쓰기가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 아직 읽지 않은 뒷부분의 제목과 소제목만 봐도 숨이 턱 막힌다. 다행히도 그 숨막힘이 벅찬 희열로 뒤바뀌는 순간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느낀 희열이 “뭔히하우젠은 말에서 늪으로 떨어지자 자기 머리카락을 잡아 올려 자기 자신을 구출했다고 한다. 헤겔의 신은 뭔히하우젠의 신이다.”라는 앞부분의 탁월한 비유에서 시작되었지만 “그러나 이 어려운 영역에서 헤겔의 공헌이 그 정도로 폄훼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라는 뒷부분의 진술에서 더 풍성해졌다는 사실이다.
이런 표현이 격에는 맞지 않겠지만, 그는 한마디로 ‘어영부영’하지 않았다. 내가 감동한 것은 그의 치열한 지적 탐색의 과정이었다. 그에게는 이 정도면 되겠다는 선이 엄격했다. 왕초보인 나에게도 설득력이 있는 주장을 했음에도 그것을 다시 뒤집는다. 마치 그의 적들이 그에게 빼도 박도 못할 예리한 질문을 던지는 식으로.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하나하나 논리적 근거들을 확보해간다. 그가 탐색한 영역은 흔히들 ‘신의 뜻’이라거나 ‘자연의 섭리’라거나 하며 은근슬쩍 넘어갈 수 있는 것들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처음부터 접근 불가의 영역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헤겔은 이렇게 생각한 듯하다. 설령 그것이 신의 영역일지라도 결국 인간의 유한한 정신으로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그 과정에서 우리의 확신과 진리가 일치하지 않는 '참된 곤경'을 겪게 되겠지만.
오래 전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치에 맞지 않는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난 뒤에 그 목사님께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그때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생각이지요." 그 대답에 이런 질문을 다시 던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럼 목사님은 신의 생각을 하고 계신 건가요?" 목사님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교회 지도자들이나 심지어는 신도들도 그런 식이었다. 그 결과 '역설적이게도' 교회 안에서는 인간들끼리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태극기 집회에 개신교 교인들이 많다는 것과 그들이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을 일삼고 있다는 것이 이런 나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도 같다. 그들의 문제는 성품의 문제가 아니라 논리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들은 '논리'에 취약한 자들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헤겔이 애써 벗어나고자 했던 것은 논리적 비약이었을 것이다. 물론 신앙은 논리를 넘어선 곳에 존재한다. 하지만 신앙이든 진리든 그곳을 찾아가는 여정은 유한한 인간인 '나'의 여정이지 신의 여정은 아닌 것이다. 물론 신앙에는 유한과 무한이 만나는 신비가 있다. 헤겔을 이런 신비의 영역을 철학적 사유로 다가가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헤겔의 사유의 무게중심은 인간에서 정신(Geist)으로 바뀐다. 그의 정신 개념은 유신론의 초월적 신도 아니고, 인간의 정신과 단순히 일치하지도 않는다. 이 정신은 우주적 정신이지만, 이 정신적 담지자는 인간이다. “도대체 그게 뭐라는 거야?” 라는 일종의 ‘비꼼’이 앞에서 언급한 뮌히하우젠 남작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이유다.
어제와 오늘 읽으면서 밑줄을 친 대목들이다. 하도 많이 그어놔서 다 적을 수는 없다. 이 글을 쓰는 첫째 목적은 나 자신을 위해서지만(갈수록 기억력이 감퇴하니 나중에 읽어보려고) 세상과 진리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헤겔에게 배울만한 시사점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헤겔에게 시대적 한계가 없을 수는 없다. 또한, 그의 사유에 빚진 선배가 없을 수 없겠다. 칸트와 헤르더 바로 그들이다. 특히, 헤르더로부터 받은 영향을 지대하다 하겠다. <헤겔>을 통해 헤르더를 조우한 것은 나에게도 행운이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세계가 없으면 신은 신이 아니다.
헤겔의 입장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유신론과 어떤 종류의 자연주의 혹은 범신론 사이의 좁은 마루였다. 그 마루의 정상의 공기는 너무 희미해서 졸도하기 아주 쉬웠으면, 여전히 그렇다.
헤겔은 모든 유한한 존재에게 신성을 무분별하게 부과하는 입장을 기술하기 위해 ‘범신론적’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범신론자가 아니었다.
헤겔에게 유한자는 무한한 삶의 실존 조건이다.
유한한 정신처럼 절대적 주체는 통일로 복귀하기 위해 분리를 겪어야 하는 원환 과정, 그런 드라마를 통과해야 한다.
우주적 주체에서 가장 큰 대립은 인간 안에서 이 대립을 성장시키는 출발점인데,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인간과 우주적 정신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대립은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체와 세계의 일 이차적 대립을 극복하고자 할 때 인간 안에서 성장한다.
그러나 세계와 정신의 대립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인간은 스스로를 교육해야 하며, 이성적 존재가 되어야 하고, 자연에 침잠한, 충동에 지배되는 삶에서 벗어나야 하며, 직접적인 국지적 전망을 넘어 이성의 전망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가운데 인간은 그들 자신 내부에서 분열하며, 그들 자신의 삶에서 정신을 자연에 대립시킨다. 인간이 이러한 대립의 지점을 넘어서 나아갈 때, 그리고 더 큰 합리적 필연성과 이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보게 될 때 양자를 위한 화해가 이루어진다.
정신은 자신의 대립자를 극복함으로써만 실존할 수 있다.
모순은 모든 삶과 운동의 근원이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우리 자신의 사유를 가진) 유한한 주체로서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것보다 더 큰 사유의 담지자로 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의 것보다 더 큰 사유란 어떤 의미에서 전체로서의 우주의 사유이며, 헤겔의 술어로 말하자면 신의 사유이다.
자유는 삶의 형식으로 표현될 때만 현실적이다.
현실에 대한 우리의 관점의 모순들은 이 모순들을 모순이 없는 상으로 해체함으로써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순이 보다 큰 종합 속에서 화해되는 그런 현실의 모순을 반영하고 있다고 봄으로써 해소된다.
왜냐하면 모순은 인간의 목적이 실패했다는 사실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목적을 완성하고자 하지만 그 목적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시기의 사회나 문화에도 모순은 있는데, 이 모순은 이 사회의 술어들로 파악된 인간의 근본 목적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 즉 자기 부정의 운명을 갖는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파악하는 관점의 끝없는 변화의 유희는 역사적 현실의 변화만큼이나 역사적 변증법에 본질적이다.
세련되지 않는 유한한 주체가 가지고 있는 일상적 지식관에서 출발하는 헤겔은 몇몇 단계를 거쳐 더 이상 모순에 희생되지 않고 자기 내부에서 화해된 채 머물 수 있을 의식의 형태까지 올라가고자 한다. 이것이 참된 혹은 절대적 지식이다.
저런 여정이 정신의 현상학일 것이다. 정신의 현상학에서 의식은 낯선 것에 붙들려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하는 관점들과 싸워서 궁극적으로 그 관점들을 극복한다. 그리고 이 의식은 자기 자신을 정신의 자기 지(知)로 보게 된다. 고립된 의존적 존재가 이런 가상을 통과하고 넘어가는 도정은 곧 현상학이며, 그 단계들은 일련의 의식 형태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이때 주체란 의식이 자기 자신을 본다는 의미이며, 의식이 형성되어 간다는 의미이다.
헤겔의 사유의 표현주의적 토대로부터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외적인 구현물을 갖고자 한다. 그리고 그는 존재하기 위해 자신이 의존하고 있는 현실들이 자신에게 낯선 어떤 것을 반영하고 있을 때 목표에서 좌절을 겪는다. 자기 확신은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모든 것이 낯선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며, 우리가 그것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평안하게) 머문다는 확신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자기 확신을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우리의 온전함에 대한 정의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자기 확신이라는 주어진 관념이 충족되지 않을 뿐 아니라 사물의 본성에 내재해 있지도 않다면, 상황은 어떻게 되는가? 그렇다면 이런 이념에서 생겨난 행위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모순적이다. 이러한 행위는 이 행위가 이뤄야 하는 것을 좌절시킨다. 헤겔이 우리의 참된 곤경이라고 부른 것처럼, 우리의 ‘진리’는 우리의 확신과 일치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기 확신이 척도의 역할을 하고 우리의 ‘진리’가 이 확신에 대립하여 나타나는 변증법을 가지게 된다. 그것들이 궁극적으로 서로 통일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날 경우에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척도가 바뀌어야 한다.
이 변증법은 인간 이성은 스스로를 세계 안에서 만날 것‘이라는 확신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의식의 또 다른 변증법 이후에 우리는 개별성의 관념 속에서 보다 높은 종합을 이룬다. 그리고 이런 종합은 훨씬 더 풍부한 또 다른 변증법으로, 즉 정신의 변증법으로 넘어간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절대자에서 유출된 것으로 드러나지만, 논의를 출발함에 있어서 사람들은 소여된(주어진) 어떤 것을 취해야 하며, 그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헤겔은 자신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의 종착점과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는 그런 현실이나 범주 혹은 이념을 자신의 출발점으로 선택한다. 하지만 적어도 그 체계가 이끌려 나오기 전까지는 (출발점과 종착점 사이의) ‘거리’에 대한 그의 판단은 대략적이고 직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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