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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철이 되자 어김없이 한반도 전쟁위기설이 대두되고 있다. 지금의 상황은 과거와는 다소 다른 양상이긴 하다. 어쨌거나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각당 주자들은 안보 대통령이라는 프레임으로 가닥을 잡은 양상이다. 자유한국당 후보가 평균 이하의 인물이 아니었다면 어찌되었을까? 아찔한 생각마저 든다. 지금은 "대의제에 안녕을 고해야할 시간"이며 "선거에 너무 큰 기대를 걸면 안된다"는 한겨레 조한혜정 칼럼에 일면 공감하면서도 대통령 탄핵과 구속이라는 역사적 성과를 일궈낸 촛불민심의 향방에 무감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정치적 무관심은 어리석은 자의 통치를 받아야하는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는 누군가의 말이 실감 나는 요즘이다. 아래의 인용문은 오늘 아침에 읽은 책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왜 전쟁에서 국가의 본질이 나타날까?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

 

주권국가로 국가의 본질은 국가의 내부에서 보는 한 보이지 않지만, 전쟁에서 현재화 된다. 그러므로 칼 슈미트는 주권자를 예외상태에서 보려고 했다. 왜 전쟁에서 국가의 본질이 나타나는 것일까? 국가는 무엇보다도 다른 국가에 대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그와 같은 대외적인 면에서 내부에서 보이는 것과는 다른 양상을 드러낸다. 시민형명 이후 주류가 된 사회계약론의 관점에서 국가의 의지란 국민의 의지이고, 그것은 선거를 통해서 정부에 의해 대행된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국가는 정부와는 다른 것이며, 국민의 의지로부터 독립된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전쟁과 같은 예외상황에서 노출되는 것이다.

 

국가가 자립적이고 독자적인 의지를 가진다는 것은 국가의 내부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는 많은 세력이 항상 싸우고, 많은 의견, 이해, 욕망이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국가에 대해서는 그것이 어떤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보인다. 즉 국가는 바깥에서 보았을 때 국민과는 다른 자립적인 존재로서 등장한다.

 

국가를 그 내부에서만 보는 관점에서는 국가를 지양하는 것이 그렇게 곤란하지 않다. 프루동도 초기 마르크스도 근대국가를 시민사회의 자기 소외로서 파악했다. 즉 거기서는 공공적인 것이 국가로서 소외되고, 시민사회는 사적인 부르주아적 세계가 된다. 그렇지만 여기서 시민사회 그 자체에 공공성을 되돌려주면, 또는 시민사회에서의 계급적 모순을 해소하면, 국가는 소멸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은 사고는 지금도 유력하다. 하지만 국가를 용이하게 지양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다른 국가에 대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전쟁에서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도 상관없다. 적국이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252-254)

 

또 최근 국가의 상대적 자립성을 강조하는 한편, 권력을 국가로만 한정하는 견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원래 그것은 국가를 부르주아계급의 지배를 위한 폭력장치로 보는 일반적인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안토니오 그람시가 제출한 시점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는 폭력적 강제인 권력과 피지배자가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하는 헤게모니를 구별했다. 바꿔 말해, 그는 국가의 질서는 폭력적 장치가 아니라 그 성원을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가족, 학교, 교회, 미디어 등)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와 같은 연장선상에서 미셸 푸코는 개개의 주체가 discipline(규율훈련)에 의한 권력의 내면화를 통해 생긴 것이고, 또 권력이란 중심에 있는 실체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네크워크로서 편재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의견은 국가권력을 부르주아의 계급지배를 위한 폭력장치로 보는 낡은 타입의 마르크스주의자에 대한 비판으로서 유효하다. 하지만 어쨌든 국가를 그 내부만으로 본다는 점에서, 즉 국가가 다른 국가에 대해서 존재한다는 위상을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같다. 국가를 그 내부만으로 보면, 국가 특유의 권력은 보이지 않게 된다. 거기에서는 국가의 권력보다도 시민사회의 헤게모니, 즉 공동체나 시장경제가 가진 사회적 강제력이 중시된다. 그 결과 국가의 권력이나 국가의 자립성이 경시된다. 하지만 되풀이 하자면, 국가의 자립성은 그것이 다른 국가에 대해서 존재한다는 위상에서만 발견되는 것이다. (256)

 

사회계약이라는 생각에 따르면, 국가는 인민의 의지결정에 근거한다. 그런데 그것은 국가를 정부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한편 마르크스주의자는 국가를 경제적 계급(부르주아)이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아왔다. 이것은 국가의 자립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회계약론자와 같다. 마르크스주의자는 계급대립이 해소되면, 국가는 스스로 해소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경제를 폐기하기 위해 국가권력을 잡는 것은 일시적으로 허용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국가는 자립적인 존재로서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국가를 수단으로 간주하는 자는 역으로 국가의 수단이 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혁명은 기존의 국가기구를 폐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바깥의 간섭을 불러오기 때문에, 혁명의 방위를 위해 기존의 군 관료기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기존의 국가기구가 보존되고 재강화되게 된다. 국가를 그 내부에서만 보는 사고에서는 국가를 지양하기는커녕 오히려 국가를 강화하는 것에 그치고 만다. 예를 들면, 국가의 측면에서 보면, 러시아혁명은 구 러시아제국이 국민국가로 분해되는 것을 저지하고, 그것을 새로운 세계=제국으로 재건하는데 공헌한 셈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 대해 깊은 고찰을 남겼지만, 국가에 대해서는 충분히 그렇게 하지 않았다. (257)

 

나폴레옹의 조차라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던 보나파르트가 대통령이 되고, 또 황제가 되어간 이 사건에 존재하는 꿈이 가진 기괴한 특색, 이상함, 혼란(프로이트)을 마르크스는 대표제의 위기를 통해서 본 것이다. 이 경우 보나파르트를 그저 대통령에 머물게 하지 않고 황제로 삼은 원인 중 하나는 인구면에서 최대이면서 자신들의 계급을 대표할 담론도 대표자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농민층에 있다. 그들은 보나파르트를 자신의 대표자가 아니라 우러러볼 무제한의 통치권력으로서 발견했다. 바꿔 말해, 대통령이라기보다는 황제로서 말이다. (261)

 

사실 이런 과정은 이미 제1차 프랑스혁명에서 일어난 것이다. 1차 프랑스혁명은 부르조아혁명이었다고 이야기된다. 하지만 이 혁명은 실제로 담당한 것은 도시의 소생산자·직인들이었으며, 또 총체적으로 권력을 잡은 것은 부르주아가 아니라 황제 나폴레옹이었다. 바꿔 말해, 나폴레옹을 통해 국가가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프랑스혁명은 영국의 산업자본에 압도되어 위기적 국면에 놓여 있었던 프랑스 국가의 대항을 초해하는 것으로 존재했다. 그것이 1848년에도 되풀이 된 것이다.

1848년 프랑스를 시작으로 하는 유럽혁명 직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예견, 세계가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라는 이대계급의 결전이 될 것이라는 예견을 빗나갔다. 프랑스 보나파르트나 프로이센 비스마르크의 등장을 국가가 자립적인 존재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그것을 놓치지 않고 본질적은 고찰을 한 것은 이상으로부터도 명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경제적 계급대립이 지양된다면, 상부구조인 국가는 자연스럽게 소멸될 것이라는 관점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후 사회주의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262)

 

근대국가를 생각할 때, 국민국가가 아니라 절대주의왕권에서 고찰해야한다. 절대주의국가에서는 군과 관료라는 국가기구가 주권자인 왕의 의지를 이행하고 있다. 그런데 부르주와혁명 이후 국가는 주권자인 국민의 의지를 대행하는 정부와 같은 것이 된다. 하지만 국민주권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위기적 상태에서는 주권자, 즉 절대주의적 왕과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국민의 갈채와 함께 출현한다. 그런 의미에서 유럽에서 절대주의왕권이 걷게 된 과정은 보편적이다. 그것은 반드시 이 아니어도 좋다. 사회구성체 내의 분열을 정치적으로 통합하는 자라면, 그리고 이것은 근대세계시스템에서 주변에 놓인 지역이 독립과 산업화를 꾀했을 때, 어떻게 했는지를 보면, 참고가 될 것이다. 예를 들면, 개발형 독재정권이나 사회주의적 독재정권은 절대주의적 왕권에 상당하다고 해도 좋다.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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