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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연170420() / 헤겔 세미나 / 헤겔 25,6/ 화니짱

 

헤겔 2부 5장,6장(17.04.20).hwp

2부 정신현상학

5장 자기의식

1. 자신에게 어떤 실제적인 저항도 하지 않는 세계에 직면해 있는 주인은 무감각한 자아 동일성에 빠지고 만다. 주인은 나는 나다라는 정제된 극단에 도달한다. 그는 소비자일 뿐이다. 그러나 노예는 사물들과 투쟁하여 그것들을 변화시켜야 하며, 이후에는 이 사물들을 지배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생각들을 그 사물에 각인한다. 따라서 인간이 만든 환경은 이 노예를 반영하게 되며, 그의 창조물이 된다. 따라서 노동은 통합을 위한 인간의 투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291)

통합에 가장 본질적인 것은 궁극적으로 상호인정이다. 하지만 그 궁극적 통합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제한된 개별성으로부터 보편자의 자기 의식적 구현체로 변형시켜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노동의 두 번째 중요한 기능에 도달한다. 즉 사물을 변형시키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킨다. 우리 자신을 보편적 존재로 지속적으로 반성해 가는 가운데 우리는 그런 존재가 된다.

주체는 필연적으로 육화된다. 주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그의 체현물 속에서의 변화에 의해 매개된다. 따라서, 인간의 사유양식의 성장은 우리가 문명의 발전이라고 부르는 삶의 양식의 발전과 맥을 같이 하게 된다.(292) 사물들을 개념 속에서 지성적으로 붙잡는다고 하는 것(개념이란 독일어에서도 영어에서도 붙잡다와 어원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노동 속에서 사물들을 물리적으로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물질적 실재의 세계를 배워가며, 이 질료들을 우리의 살계에 따라 변형시켜 감으로써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의 정신을 알아 간다.(293) 노예는 예속의 과정을 통해서만 자신의 원래 한계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노동에 착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우리는 1790년대에 쓰인 헤겔의 종교 관련 저술들의 주제에 대해, 특히 분리라는 주제에 대해 알고 있다. 이 저술들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상실된 통일성을 초월적 정신에 투사하여, 그에게 인간이 스스로 절대적으로 복종하게 되었다고 한다. 바로 이런 현상을 헤겔은 분리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그는 아브라함의 종교에서 그런 현상을 본다.(298)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불행한 의식을 깊이 분열된 자의 의식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이 의식은 사유라는 변화될 수 없는 자기 동일적 주체이면서 동시에 변화 가능한 종속되는 개별자이기 때문이다.(298) 그러나 자신의 삶이 처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주체는 특수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비본질적이고 가변적인 것과 등치시킨다. 불변적인 것은 초월적인 것으로 투사된다. 그는 자신이 초월자와 통일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실감 속에서만, 즉 자신은 현재의 상태를 어느 정도 초월하여 이 불변자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감각 속에서만 느끼게 된다. 그러나 현재의 단계에서 특수자와 불변자는 서로 상응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시도는 영구히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299) ‘자기 의식에서 우리는 타자와 대립해 있는 특수한 개별자라는 가장 원시적인 단계로부터 그의 보편적 본성을 실현하는 데로 행위자를 이끌어 갔다. 여기서 보편적 본성이란 세계의 근저에 놓인 보편적 사유와 다를 바 없다. 따라서 행위자와 세계의 상호 이질성은 극복된다. 하지만 1부에서처럼 이곳에서도 통일의 원리는 단순히 확립되어 있을 뿐이다. 이 통일의 원리는 이어지는 부들에서 계속 전개되어 갈 것이다.

3. ‘정신현상학3부를 이루는 이성의 출발은 다음과 같다. “이성은 자신이 모든 실재라는 의식의 확신이다.”(301) ‘이성은 개별적 의식을 정신의 부적합한 담지자로 드러냄으로써 그 다음의 단계로 이행하는 것으로 끝난다. 처음에는 정치적 사회(6), 그 다음에는 종교(7)가 따라 나온다.

I. ‘이성은 세 개의 절로 이루어져 있다. 첫번째 절을 이끌어 가는 의식의 근본 모티브는 우리는 철저하게 합리적으로 규정된 사물의 비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이성의 약속을 시행하고자 하는 시도이다.(302) 그러나 관찰하는 이성은 인간을 행위자로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의식과 평행을 이루는, 합리적 행위자로서의 인간을 그리는 이성의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II. ‘자기의식의 욕망의 변증법에서는 주체가 외부 실재를 소비하고자 했다면, 외부 실재와 즉자적으로 통일되어 있다고 확신하는 여기서의 주체는 이 외부 실재에서 타자 존재의 형식을 제거한다. 쾌락의 대상은 독립적 존재로 남아 있다.(304) 여기서의 변증법의 패러다임은 성적인 쾌락에 있다.(305) 헤겔은 특수자의 쾌락 속에서 개별자의 완성을 보는 것과 개별자의 죽음 사이에는 내적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수자로서의 자신이 경험한 쾌락을 자신의 완성으로 정의하는 인간은 총체적 무화로서의 죽음에 불가피하게 직면하게 된다.

III. 이제 우리는 사회적 전체를 중심으로, 개별자를 그 전체의 표현으로 봐야 한다. 자기의식은 실체의 현실이자 규정된 현존이며, 실체의 자아이자 의지이다. 따라서 민족정신은 개별자의 주관성 속에서 현실에 이를 수 있다.(313) 참으로 도덕적인 인간은 순수하게 내적인 의식으로부터 자기 자신에게 법칙을 부여하고자 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사회로부터 자신의 의무를 이끌어 내는 자이다. 순수하게 자기 내부에서 추론하고자 하는 것은 기준 없이 추론하는 것이고, 따라서 자의적이다. 따라서 헤겔은 자율성을 모든 도덕성의 중심으로 삼는 칸트의 명령을 완전히 역전하고자 한다.(316) ‘그래야 한다고 하는 당위로만 가득한 칸트와 피히테의 윤리는 헤겔에게 경멸받을 뿐이다. 헤겔에 따르면 인민 속에 살아 있는 정신은 동시에 존재인, 즉 실제 현존인 그런 법률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여기서는 신앙을 위한 여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의식은 정신의 실재 내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막 그런 실재를 보편적 이성과 일치한 형태로 재발견하려고 한다.(317)

 

6장 정신의 형성

우리는 이제 헤겔이 나중에 객관 정신이라고 부른 정신(geist)의 영역에 들어간다.(318) 우리는 이후의 엔치클로페디에서 절대 정신이라고 불리는 곳에 다가갈 것이다.

 

1. ‘정신장의 첫 부분은 그리스 도시 국가의 원본적 통일과 그 멸망을 다루고 있다.(320) 개별자는 그의 공동체와 완벽하게 통일되어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보다 큰 주체와, 자신이 그 일부라고 느끼는 보편자와 합치되어 있다. 그런 보편적 합치는 개별자의 당위적 삶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자가 완전히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그 보편자는 많은 민족들 중 한 민족의 정신으로 있다. 따라서 인간 안에서 참된 보편성에 대한 직관은 점진적으로 인간을 그 공동체에서 분리시킨다. 보편자에 대한 이 공적 표현이 그 표현의 근거가 되는 보편자를 향한 사명과 갈등 관계에 들어설 때, 인간 안에서,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투쟁이 일어난다.(321) 지역적인 의식으로서의 도시 국가의 삶은 몰락하고 타자 속에서 자신이 지양되는 것을 본다.” 인간의 법은 시민들이 스스로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국가의 명백하고 의식적인 윤리이다. 참으로 보편적인 것으로서의 신의 법은 개별자 그 자체에 관심을 갖지, 그가 국가와 맺는 관계에는 관심이 없다. 따라서 이 법의 수호자를 자청하는 제도는 직접적 통일의 영역인 가족이다. 여기서 헤겔은 성의 역할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 낸다. 즉 남성은 주로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며, 여성은 신적이고 가정적인 것에 관심을 가진다.(322) 매장은 인간의 참된 보편성이 가져야 하는 표현이며, 따라서 신성하다. 여기가 바로 안티고네의 비극이 드러내는 바이다. 국가와 가족에게 신의 법과 인간의 법은 갈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전에 국가는 사회를 보호하고 가족을 방어한다.(323) 이에 반해 가족은 국가를 위해 시민을 형성한다. 그러나 현실로서 이 두 법은 갈등관계에 있다. 원죄 사상에 대한 헤겔의 해석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인간은 특정한 시공간에 몸을 입고 있는 유한한 정신이 때문에, 특수자로 행위할 수밖에 없다는 바로 그 이유로 죄는 필연적이다.(324) 우리는 죽음이 그것을 극복하는 하나의 길임을 보았따. 정신은 완벽한 보편적 의식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속죄를 위해 필연적인 죄로부터 진행해야 한다. 따라서 행위하지 않고 움츠러드는 퇴각은 거부되어야 한다.(325) 무반성적 인륜성의 단계에 속하는 비극적 인물(안티고네, 크레온)은 위태로움을 반쯤만 의식하는 사람이다. 그는 하나의 법을 볼뿐 이 법과 묶여 있는 다른 법을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법을 위반하는 것은 저 다른 법의 실현에 달려있기 때문이다.(327)

 

2. 그리고 그 결과는, 변증법의 발전에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체가 자신의 통합을 자기 밖의 어떤 것에 놓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바로 그 외부의 것에 종속되어 있다고 느끼며, 그 외부의 것을 열망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자신의 통합을 소외시킨다. 이런 소외를 수행하는 가운데 그는 보다 높은 단계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한 초석을 놓는 도야를 겪는다.(331) 이제 소외 아래서의 발전의 본질은 인간이 그것을 극복하도록 형성되어 간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러한 소외로부터 외적 실재를 관통하여 보는 의식의 생성이다. 이러한 통찰은 처음에 거짓된 요청을 폭로하기에 계몽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 모든 외적 실재는 객체화되고, 정신적 의미를 탈취당하며, 보편적 과학의 의식 앞에 놓인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물질의 세계로 간주된다. 국가와 종교적 구조는 더 이상 인간이 순응해야 하는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실재가 아니라, 과학적 의식의 처분에 맡겨진 물질 세계의 일부일 뿐이다.(334) 근대의 과학적 의식은 이렇게 계몽의 근거가 된다.(335)

헤겔이 볼 때 계몽을 믿었던 유물론자들은 초감각적 실재를 믿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특수한 서술이 없는 정신적 실체는 순수한 존재와 구별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헤겔의 논리학에 등장하는 유명한 변증법, 즉 존재와 무의 변증법의 반향을 보게 된다. 모든 추상은 결국에 동일하다는 것이다. 실제 정신성 또한 물질적이다.

계몽의 이데올로기의 두번째 개념은 헤겔이 정신 장의 중심 주제들 중 하나로 삼은 것인데, 공리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개념인 유용성 개념이다. 어떤 것을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을 내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336) 공리주의는 계몽의 윤리이다. 공리주의는 행위를 그 결과에 따라 판단하는 윤리, 유용성에 따라 판단하는 윤리이기 때문이다. 계몽은 물질적인 실재와 이것의 법칙 연관성만을 수용하며 덕과 같은 규범적 속성들이나 자연법의 근거라고 하는 규범적 질서를 위한 여지를 갖지 않는다.(337)

신앙은 계몽과 대칭적이다. 왜냐하면 신앙은 계몽이 결여하고 있는 절대 정신과 이 정신에의 우리의 의존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은 계몽이 중심적 이념인 인간 주체성의 본질적 역할을 보지 못한다. 계몽은 자연 세계를 명료화하고자 하지만, 이성은 이 고착된 세계를 쉽게 관통해 갈 수 없다. 따라서 신앙과 계몽은 보충적이다. 하지만 이 두 견해는 이러한 사실에 무지한 채 서로 갈등 관계로 들어간다.(339)

 

3. 칸트와 피히테의 세계관은 도덕적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세계관은 도덕성에 기초해 있으며, 이들의 도덕적 견해에서 이끌려 나온다. 하지만 반대로 이들의 도덕성이 완성되려면 하나의 세계관이 필요하다.(351) 그 배경에 있는 이원적 인간관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인간에게 본질적인 것, 즉 도덕 의지를 자연본성에 대립시켜 정의한다. 우리는 극단적인 분열의 지점에 서 있다. (355) 그런 점에서 헤겔은 많은 곳에서 칸트의 형식적 기준이 어떤 확정적인 결론을 산출하는데 실패한다고 주장한다.(356) 그것은 자율성과 자연 사이의 이원론에서 나온다. 칸트는 의지의 자율성을 보호하기 위해 기준이 형식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의지는 자신의 안내자로서 이성에만 의존한다. 그러나 이성에 대한 칸트의 생각에 따르면 이념은 자신의 대립자인 자연으로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이념 자신을 자신의 구현체로 변화시켜 표현하는 참된 이념이 아니다. 따라서 칸트의 이성 개념은 추상적이고, 순수하게 형식적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이성에의 호소는 어떤 행위 지침도 제시할 수 없다. 여기에서 도덕적 세계관의 주창자들은 이런 간극을 메우기 위해, 신에의 귀의를 주장한다.(357) 이 모순의 결과는 자율성의 원리를 그 중심 이념으로 삼아 출발하는 이 도덕성이 엑스 마키나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358) 헤겔은 보편자와의 직접적 통일을 말하는 낭만주의적 사고를 수용할 수 없었다. 이러한 통일은 이성에 의해서만 산출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성은 통일안에 부정과 분리를 간직할 수 있으며, 따라서 명쾌한 비전을 유지하기 때문이다.(360) 순수함의 딜레마는 특수한 실존으로서 우리가 보편자와 맺는 관계로부터 발생한다. 인간은 개별자로 행위하며, 그의 개별성은 불가피하게 그의 행위 속에 섞여 나온다.(361) 보편자가 자신의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해 특수자와 상관없이 자신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비실존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특수한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본질적인 것이 보편적 정신을 체현하는 것임을 인정해야 하며, 자신의 삶에 체현되어 있는 특수한 형태는 비본질적인 것, 따라서 지나갈 운명에 놓인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보편자와 특수자가 서로 희생할 수밖에 없는 이런 필연성을 헤겔은 정신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두 단계 사이의 대화형식으로 보여준다.(362)

인간을 신과 분리시키는 것은 죄의 본질이다. 따라서 신과 인간의 통일은 죄의 상태에서 발생하는 화해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특수한 실존은 악은 있을 수밖에 없지만 악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인간을 통해 극복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정신의 보편적 삶을 향유하며, 따라서 용서받는다.(363) 이제 우리가 해야 할인은 체현되고 다시 자기에게 돌아와야 하는 정신의 이런 존재론적 상을 그려보는 것이다. 이 상은 종교의 형식 속에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결론에 앞선 마지막 장에서는 종교를 다뤄야 할 것이다.(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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