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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연170420(목) 헤겔 세미나/찰스 테일러 제6장 정신의 형성/낭만쌤
헤겔이 나중에 ‘객관정신’이라고 부른 ‘정신(Geist)의 영역에서 처음으로 실제 역사적 형태들을 다룬다. ‘정신’의 장은 그리스에서 출발한다. 그리스는 시민과 사회의 완벽한 통일을 이룬 완벽한 ‘자기 충족적(자유로운) 사회다. 그러나 도시국가라는 편협한 장벽으로 인해 완벽한 보편적 개인에는 도달할 수 없었던 초기의 이 통일을 깨어져야 하며, 이로부터 오랜 기간의 소외가 따라 나온다. 하지만 이 기간은 형성의 기간이다. 이로부터 보다 높은 단계가 출연할 것이다. 역사철학에서 이 단계는 근대의 법치 국가로 정의된다. 그러나 『정신현상학』에서는 당대 독일 철학의 새로운 도덕의식으로 진입한다. 이 단계는 새롭게 철학적으로 해석된 종교의식의 전주로 간주된다.(318-320)
1.
헤겔은 ‘정신’의 장 첫 부분에서 그리스 도시 국가의 원본적 통일과 그 멸망을 다룬다. 그의 시적 이미지의 힘은 소포클래스의 비극을 매개로 그리스 사회의 내적인 긴장과 갈등을 표현하고 있다.(302) 개별자와 공동체는 완벽하게 통일되어 있고, 인간은 자신이 그 일부라고 느끼는 보편자와 합치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자가 완전히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그 보편자는 많은 민족들 중 한 민족의 정신으로 있다. 따라서 인간 안에서 참된 보편성에 대한 직관은 점진적으로 인간을 그 공동체에서 분리시킨다. 그리고 보편자에 대한 공적 표현으로 인해 인간과 공동체 안에서 투쟁이 일어난다. 특수한 실존으로서의 도시국가는 몰락해야 한다. 도시 국가가 참다운 보편적 의식의 표현이라면 바로 그 보편적 의식은 도시국가보다 더 오래 지속될 것이며, 이 도시 국가를 초월해서 존재할 것이다. 이 보편적 의식은 자신의 이 표현물을 파괴함으로써 자신으로 남는다. “타자 속에서 자신이 지양되는 것을 본다.” 헤겔은 이 장에서 사회의 인륜적 삶의 변증법을 다룬다. 그가 사용하는 용어들은 그리스 비극에서 가져온 것이다. 두 보편자 사이의 갈등은 이제 인간의 법과 신의 법 사이의 갈등으로 간주된다. (321-322) 그러고 나서 헤겔은 고대 그리스의 장례 의식에 대한 뛰어난 해석을 제시한다. 죽음은 자연적 부정으로,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마주해오는 것이다. 장례의식의 목표는 인간에게 우연히 발생한 어떤 것으로부터 정신에 의해 행해진 어떤 것으로 죽음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육체를 매장함으로써 그의 죽음을 의미 있는 행위로 만든다. 따라서 죽음조차도 자기의식을 위해 재발견된다. 이 단계에서 자신의 죽음을 초월한 개별자의 존재는 그를 매장하는 가족의 행위에 의존한다. 매장은 인간의 참된 보편성이 가져야하는 표현이며, 따라서 신성하다. 여기가 바로 안티고네의 비극을 준비하는 단계이다.(323)
국가와 가족에게 신의 법과 인간의 법은 갈등으로 나타난다. 국가는 사회를 보호하고 가족을 방어한다. 이에 반해 가족은 국가를 위한 시민을 형성한다. 이 두 법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러한 갈등은 역사적 행위로 표현된다. 여기에서 죄는 인간에게 필연적이라는 의미에서만 ‘본래적’이라는 또 다른 근본적 주제와 마주한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재해석된 원죄에 대한 해명이다. 정신이 존재하기 위해 정신은 필연적으로 몸을 입어야 한다. 인간은 특정한 시공간에 몸을 입고 있는 유한한 정신이기 때문에 죄는 필연적이다. 그것은 극복되어야 하고, 죽음이 그것을 극복하는 하나의 길임을 보았다. 정신은 완벽한 보편적 의식을 요구한다. 죄는 구원을 위해 필연적이다. 이러한 설명은 ‘정신은 자신의 구현물로부터 자신에게 되돌아옴으로써만 실존할 수 있다’는, 혹은 ‘외면성 혹은 소외는 정신의 자기실현에 있어서 본질적 단계’라는 그의 기본 주장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유한한 정신으로서 특수한 실존으로 운명지어져 있다. 우리는 속죄를 위해 필연적인 죄로부터 진행해야 한다. 죄 그 자체는 불가피하다. 따라서 행위하지 않고 움츠러드는 퇴각은 거부되어야 한다. 『정신현상학』은 이 주제를 수차례 반복한다. 헤겔은 여기서 “돌과 같이 행위하지 않은 존재만이 무죄다. 하지만 어린아이조차도 행위한다.”고 말한 바 있다. (324-325)
두 개의 선이 충돌할 때 우리는 갈등으로 고통을 받지만 그 갈등에 붙들려 있지는 않는다. 양자를 포용할 수 있는 보편적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극적 주인공의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그는 이 투쟁에서 한 편에 서 있어야 한다. 즉 그는 인간의 법이나 신의 법 편에 서 있어야 한다. 그는 타자를 볼 수 없는 지점에 서 있으며, 그 타자를 정당성이 없는 현실로만 본다.(326) 무반성적 인륜성의 단계에 속하는 비극적 인물은 위태로움을 반쯤만 의식하는 사람이다. 그는 하나의 법을 본다. 그는 이 법과 묶여 있는 다른 법을 보지 못한다. 낯선 자에게서 자신의 아버지를 보지 못하고, 자신이 결혼한 왕비에게서 어머니를 보지 못한 오이디푸스처럼, 그는 눈을 가지고 있지만 보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연결점이 있다. 그가 자신의 행위의 전체적 의미를 볼 수 없었다 하더라도 그 행위를 스스로 완벽히 수행했기 때문에 그는 그의 행위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결과는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발생한 사건을 운명으로 경험한다.(327)
종교철학에서 헤겔은 동일한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한다. 그리스 신은 신적 형상과 인간적 형상의 완벽한 결합물이다. 인간은 참된 보편자와 화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동일하게 신들은 인간적인 존재가 됨으로써 다향하고 특수한 존재가 되는 대가를 치렀다. 반대로 정신의 보편성을 완벽하게 파악한 사람들인 유대인은 신적인 것에서 완전히 소외되었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보편정신은 표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신들이 특수자이기 때문에 보편자는 신들도 그에 복종해야 하는 운명의 필연성으로 다시 나타난다. 이 필연성의 경험으로 인해 자신의 모순으로 인해 파괴되는 경험을 한다. 모순을 경험함으로써 자발적 동맹관계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이것은 도시 자체의 쇠락을 의미한다. 그 대신 이제 개인들은 자신을 보편자로 보며, 하지만 동일하게 자신의 사회에서 소외된 자로 본다.(328)
현실적인 이런 몰락이 어떤 구체적인 역사 형태를 취하는지는 ‘정신’장에서 모호하게 남겨져 있다. 역사철학과 철학사에서 헤겔을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를 다루면서 보편적 의식의 흥기를 다룬다.(329) 어쨌거나 정확한 단계들에 의해 인륜적 정신을 몰락해 가고 소외의 시대에 길을 내준다. 이 전에 개별자에 의해 그림자로 표현되었던 신의 법은 이제 자기 의식의 보편적 ‘나’로서 낮의 빛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이 보편적 개인은 이제 결코 그를 반영하지 않는 사회, 순수한 외적 권력인 사회 안에 존재한다. 권력은 정확하게 실행되기 위해 어느 곳엔가 집중되어야 한다. 따라서 국가의 정점은 황제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보편적 국가는 인륜적 실체와 단절되며, 개별자가 자기와 철저히 동일시했던 영역에 대한 근본적 감각과 단절된다. 황제의 지배는 통제되지 않는 탐욕스런 의지의 지배이다. 보편적 성취는 정치적 인륜성을 대가로 지불하고서 얻은 것이다.(330) 로마시대의 개인은 재산권의 발전을 진전시켰다. 그러나 주체로서 이 개인은 국가의 자비 안에 거했다. 그는 자신이 외부의 것에 종속되어 있다고 느끼며, 그 외부의 것을 열망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자신의 통합을 소외시킨다. 이런 소외를 수행하는 가운데 그는 보다 높은 단계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한 초석을 놓은 도야를 겪는다. 331)
2.
‘정신’의 다음 절은 로마 제국에서 당대 시기에 이르는 소외와 도야의 시대를 다룬다. 그의 관심은 18세기, 즉 계몽과 혁명에 맞춰져 있다. 소외는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순수한 사유로 정의하고자 하지 않는 데서 기인한다. 소외된 동일화는 그리스의 행복한 동일화와 달리 자신과 사회적 실제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열망해야 하며, 자신의 개별적 특수성을 포기하고 국가와 같은 보다 넓은 원인에 봉사하는 가운데 자신의 삶의 본질적 실체에 다가가야 한다는 감각에서 도출된다. 그들의 삶의 실체가 그들 외부에 놓여 있다는 하는 이런 감각은 소외의 본질이며, 이런 사실을 통해 생성된 봉사(예배), 훈육, 그리고 자기 변형은 인간을 다음 단계를 위해 형성하는 것이다.(332) 인간은 자신과 정신의 통일을 완전하게 반영하는 보편적 의식에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 다른 세계에 투사된 통일로서의 의식은 따라서 참된 사실의 왜곡된 이미지일 뿐이며, 따라서 인간은 이런 통일을 완벽하게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 변형시켜야 한다. 소외의 기능은 이런 변형을 위한 동기를 부여한다. 그것은 일종의 교육으로서 인간은 이 교육 기간 동안에 그것을 극복하도록 변형된다. 소외는 근본적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실체가 자기 밖의 어떤 것에 놓여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특수성을 극복하고 이 실재에 순응함으로써만 스스로를 실현할 수 있다고 느끼게 한다. 이런 필연성은 그것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과(고귀한 의식) 그것을 거부하려고 밀치는 사람들(비천한 의식) 모두에게 나타난다.(333)
인간은 자신의 현재 본질을 위해 존재하는 이런 실재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발전하며, 이러한 ‘통찰’은 처음에는 거짓된 요청을 폭로하기에 계몽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334) 계몽은 소외의 종말의 시초를 알린다. 모든 외적 실재는 객체화되고, 정신적 의미를 탈취당하며, 보편적 과학의 의식 앞에 놓은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물질의 세계로 간주된다. 국가와 종교적 구조는 더 이상 인간이 순응해야 하는,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실재가 아니라 과학적 의식의 처분에 맡겨진 중립적 물질 세계의 일부일 뿐이다. 중요한 실재는 세계를 지성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보편적인 과학적 의식이 된다.(334)
외부 실재에 대한 아무런 고려를 하지 않았던 스토아주의와는 달리 과학적 의식은 이러한 실재를 철저히 관통하여 보기를 요청하며, 이 세계를 지성적으로 지배하기를 요청한다. 근대의 과학적 의식은 계몽의 근거가 된다. 이런 계몽관으로부터 헤겔은 두 양태의 이데올로기를 추출해낸다. 첫째, 절대자 혹은 신은 더 이상 다른 서술이 적용될 수 없는 최고 존재라는 공허한 개념으로 환원된다. 따라서 신은 아버지·창조자 등으로 서술하여 신에게 역사의 행위자의 자격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신 개념을 채워 넣은 모든 시도는 철저히 무지한 것으로 드러난다. 계몽의 신은 일종의 이신론(Deism)적 신으로, 숭배되어야할 최고의 존재로 표시할 뿐이다. 두 번째는 공리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유용성 개념에 바탕하고 있다. 어떤 것을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을 내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의 의미는 어떤 다른 것의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세계 안의 사물들은 중립적인 것으로, 인간의 어떤 목적에 봉사함으로써만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 이런 중립적 사물들이 인간과 관련하여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 유일한 범주는 유용성이다. (335-336) 그러므로 공리주의는 계몽의 윤리이며, 주어진 덕을 채현하고 있는 지, 혹은 어떤 도덕법에 순응하는지에 따라 판단하는 윤리와 구별된다. 그런 내적 속성들은 계몽에 의해 무의미한 것으로 일소된다.
그러나 헤겔에 따르면 여기에 숨겨진 모순은 유용성의 범주가 멈춰야할 어떤 지점도 모르며, 보편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계몽의 근본 실수는 진리를 절반만 포착한다는 것이다. 계몽이 궁극적으로 세계의 근저에 합리적 주체가 지배한다고 지각한 것은 옳다. 하지만 이런 주체성이 단순히 인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여 최고 존재라는 공허한 구멍을 제외하고 우주적 정신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지 않은 것을 틀렸다. 인간은 자신 밖에 중요한 실재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역으로 인간은 자신을 인간으로서만 동일화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절대적 주체의 담지자라로 볼 경우에만 자기 자신으로 머물러 있음을 완전하게 느낄 수 있다. 계몽은 이와 대칭되는 또 다른 관점과 대응한다. 헤겔은 이를 신앙이라고 부른다. 신앙은 자신의 대상을 사유로 의식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신앙은 절대자를 은유와 이미지를 통해 이해하는데, 이것들은 헤겔이 표상이라고 부른 일종의 인식 양태이다. 인간의 주체성을 초월해 있는 세계는 고착되어 있어서 활동적인 인간의 이성의 침투를 허락하지 않는다. 계몽은 자연 세계를 명료화하고자 하지만, 이성은 이 고착된 세계를 쉽게 관통해 갈 수 없다. 따라서 이 두 견해(신앙과 계몽)은 서로 갈등 관계로 들어간다.(338-339)
헤겔에게 종교에 관한 결론은 ‘계몽된’ 신학이다. 여기서 신은 희미한 최고 존재가 된다. 하지만 여기서 이 신학은, 믿지 않는 계몽과는 달리, 신을 발견하고 신과 연합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다. 반면에 계몽은 인간 밖의 중요한 실재를 인지하지 못하며, 결과적으로 이런 모순은 엄청난 재난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헤겔은 여기서 루소의 일반의지 이론을 거론하고 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입법 과정과 관련이 있는 한 시민들 사이에는 어떤 구별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모두가 동등하게 평등하게 참여해야 한다. 루소의 국가에서는 어떤 입법적 구조도 없다. 하지만 헤겔에 따르면, 이것은 그렇게 기능하는 어떤 국가도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기능하고 있는 국가는 사람들이 상이한 기능을 수행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더 나가 상이한 기능들이 적절하게 수행될 수 있기 위해 신분의 분화, 즉 계층의 분화가 있어야한다고 믿는다. 다른 말로 하면 역사 속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 즉 정치적 인간 공동체(이것은 일반의지로부터도 발생하는데)는 어떤 제도 속에 구현되어야 한다. 하지만 제도들은 권력과 상이한 방식으로 관련을 맺는 인간들 사이의 분화와 상호 관계를 의미한다.(345)
헤겔은 절대적 자유에의 열망이 결국 공포정치(terror)를 발생시키는 필연성을 본다. 일반의지의 유일한 행위는 파괴적이기 때문에 이런 특수의지를 파괴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일반의지 이론의 전제조건은 만인이 국가의 행위를 의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화국을 이탈하는 것조차 범죄가 된다. 이런 이탈은 숨겨질 수 있으며, 따라서 정권은 명백한 대립이 없는 상황에서 단지 의심만으로도 사람들을 들볶을 수 있다.(그래서 헤겔은 유명한 혐의자의 법을 도출하고자 한다.) 스탈린주의의 공포정치는 헤겔이 자코뱅의 공포정치에서 본 특성과 동일한 특성을 갖는다. 어떻든 절대적 자유를 향한 열정은 공포정치라는 모순으로 끝이 난다. 그 결과 (나폴레옹의 치세 아래) 조직적으로 구조화된 국가가 재건되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은 시민들이 죽음에 다가가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본것처럼 이런 경험은 그들을 보편자로 데려간다. 여기서 헤겔을 보다 높은 형태의 국가를 전개 시킬 수 있었지만 이것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347-348)
공포정치는 소외와 도야의 최종적 종점으로 간주될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의 실재인 자아를 단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자아를 특수자에서 국가의 종복으로 변환하는 것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자 자체의 억압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 모순을 넘어가기 위한 과정에서 역전이 발생한다. 자신의 개별적 의지가 보편자 속에서 효과적으로 작용하게 하는 대신 자신을 철저히 보편적 의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계약론』의 정치적 도덕성으로부터 『실천이성 비판』의 순수의지의 도덕성으로 나아간다. 절대적 자유는 “자기 의식적 정신이라는 또 다른 나라로” 이행한다.(350)
3.
‘자기를 확신하는 정신. 도덕성’ 절은 독일, 특히 칸트에서 출발해 피히테와 독일 낭만주의로 발전해가는 사유 운동과 관련이 있다. 여기에서 이성에 관한 장들에게 다룬 것과 유사한 것을 다루지만 이 문제를 좀더 높은 단계에서 다룬다. 여기서 종교적 의식을 가진 개별자는 절대적 주체의 담지자로 간주되며, 자신의 근본적 정체성(동일성)에 도달한다. 이런 동일성은 사회와 민족의 구성원으로서의 자신의 동일성보다 더 근본적이다. 도덕성을 다루는 이 절에서 개별자가-아마도 부지불식간에- 보다 큰 자기 의식의 담지자가 되는 그런 세계관들을 보고 있다. 우리는 종교의 문지방에 서 있다. 칸트에게는 이성의 실천적, 즉 도덕적 용법이 우세했다. 피히테는 더 근본적으로 사물들의 전체 구조를 실천이성의 요청으로부터 도출했다. 도덕성이 완성되려면 하나의 세계관이 필요하다. 칸트는 신의 실존과 영혼의 불멸성에 관한 실천이성의 요청이 불가피하며, 이러한 것들이 도덕성의 요청에 의해 요구된다고 주장했다. (350-351)
(칸트의 피히테에 따르면) 도덕적 추론은 완전히 자율적이어야 하고, 세계에 관한 사실들이나 신의 의지에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급진적인 도덕적 자율성을 아주 편향된 형식에 가두는 칸트-피히테적 열망인데, 여기서는 어떤 양보도 자연과의 통일에 대한 열망을 만들어 낼 수 없다. 헤겔은 이러한 사유와 단절하는데 이런 논의는 칸트의 도덕철학의 뿌리 깊은 이분법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최고선을 행복 혹은 지복이 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태는 사악한 자들이 줄곧 번성하고 선이 고통 받는 곳에서는 도달될 수가 없다. 보다 높은 권력으로서의 신만이 마무리와 보상으로 이런 조화를 산출할 수 잇기 때문에 도덕성은 신에 대한 믿음을 요청한다. 청년 헤겔을 불쾌하게 했던 것도 이런 비그리스적 이분법이다. 고대의 전사는 자기 도시를 위해 죽음으로써 이 도시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기꺼워했다. 이에 반해 근대의 전사는 선을 위한 죽음을 참혹한 상실―사후에나 보상받는―로만 이해할 수 있을 따름이다. 행복과 덕의 조화라는 개념이 뿌리 깊은 분열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353)
분열은 도덕성과 내 밖에 있는 자연 사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나의 도덕 의지는 내 안에 있는 자연, 즉 나의 욕망이나 경향상 등과 대립해 있다. 이것 역시 극복해야할 대립물이다. 헤겔에 따르면 바로 이곳이 모순이 전면에 등장하는 장소이다. 여기서 불멸성의 요청은 반드시 필요한데, 도덕 의지가 자연적 욕망과 섞일 경우 이 도덕 의지는 사라진다. 도덕성은 부정적 본질로서의 도덕 의식일 뿐이기에 도덕 의지와 욕망이 완벽하게 조화될 경우 도덕의식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354) 이런 도덕 의식 앞에서 순수한 의무감은 부정적 의미, 즉 바로 이런 도덕 의식에 순응하지 않은 그런 의미만을 갖는다. 우리가 결코 도달하지는 못해도 끝없이 전진해 가야 할 그 무한한 미래에 타협점에 놓이게 된다. 이것은 이원론적 인간관의 모순이다. 주체는 본질적으로 몸을 입고 있으며, 따라서 도덕 의지는 이런 몸과 화해해야 하고, 외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칸트는 어렴풋하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의 최고선 이론과 실천이성의 요청 이론은 이를 반영한다. 하지만 그 생각을 구체화시키지는 못했다.(355) 도덕성의 실현을 위한 노고는 모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는 ‘오성’의 완고한 사유의 결과이다. 오성은 구분에 확고하게 얽매여 있어서 분리된 술어들 속에서 자신의 통일성을 발견할 수 없다. 이성만이 분리가 어떻게 동일성에서 출현하고 다시 동일성으로 되돌아가는지를 볼 수 있다. 칸트의 사유는 가장 비타협적인 형태의 오성을 대표한다. 칸트는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 도덕 의지가 자기 스스로 결정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도덕 의지는 자신의 준칙을 외부의 권위가 아닌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부터 인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도덕성을 자연과 분리시키는, 존재에 기초하지 않고 당위에만 관심을 갖는 모든 도덕적 비전에 나타나는 운명이다. (356)
헤겔은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낭만주의적 양심이론으로 나아간다. 낭만주의자들은 경향성과 도덕성 사이의 칸트적인 엄격한 분리를 포기하고, 마음의 법칙과 인륜의 법칙이 합치된 자발적인 도덕적 직관이라는 비전으로 나아갔다. 낭만주의적 양심은 종교적 양심이다. 이 양심은 경향성과 도덕성 사이의 간격뿐 아니라 인간과 신의 간격도 극복한데서 즐거움을 느낀다. 이러한 양심의 공동체는 신의 삶의 장소이다.(359) 하지만 헤겔은 보편자와의 직접적 통일을 말하는 낭만주의적 사고, 신과의 형언할 수 없는 조우를 열망하는 직관에 대한 신념 등을 수용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통일은 이성에 의해서만 산출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성은 통일 안에 부정과 분리를 간직할 수 있으며, 따라서 명쾌한 비전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360) 양심의 범례적 표현은 말(언어)로 이행한다. 말(언어)은 헤겔이 반복해서 말하듯이 정신의 외적 실존의 형식이다. 말(언어)는 자아의 투명한 표현이고, 자아와의 순수 동일성이지만, 객체로 정립되어 있다. 따라서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한 순수한 양심은 행위에서 말로, 자신의 내적 확신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돌아서지만, 이 양심은 자신의 순수성과 보편성의 의미를 상실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행동할 수 없다.
이것이 아름다운 영혼의 형상이다. 아름다운 영혼은 자신을 무화시키며, “공기 중으로 해체되어 버리는 형태 없는 수증기”로 사라져 버린다. 이런 순수함의 딜레마는 특수한 실존으로서 우리가 보편자와 맺는 관계로부터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아름다운 영혼이 그러하듯, 보편자가 자신의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해 특수자와 상관 없이 자신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비실존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보편적 가치들을 말하자면 실현될 수 있기 위해 특수한 삶 속에서 채현되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모든 특수한 사물은 죽거나 사라진다. 그러나 특수한 인간은 말하자면 보편자에 이르기 위해 내적으로 죽어야 한다. 악은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정신은 체현되어야 하고, 이것은 곧 특수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악의 필연성)은 원죄설에 대한 헤겔의 해석의 근간이 된다. 이때 이 원죄는 준-역사적 의미가 아니라, 유한한 정신에는 반드시 특수한 실존이 따라오며, 정신이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유한한 정신들이 있어야 하지만, 이 정신들의 유한성은 극복되어야 할 분열을 산출한다는 의미에서 죄이다. 인간을 신과 분리시키는 것이 죄의 본질이다. 따라서 신과 인간의 통일은 죄의 상태에서 발생하는 화해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363) 특수한 행위자는 용서를 구해야 한다. 즉 그는 자신의 특수성을 더 이상 실체화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동시에 보편자는 이를 용서해야 한다. 즉 보편자는 이러한 특수자 없이는 자신이 있을 수 없음을, 따라서 용서해야한다는 사실을 수용해야 한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체현되고 다시 자기에게 돌아와야 하는 정신의 이런 존재론적 상을 그려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상은 또한 좀 덜 투명한 종교의 형식 속에서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결론에 앞선 마지막 장에서는 종교를 다뤄야 할 것이다.(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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