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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고고학》 서문 발제
알료샤
역사가들의 관심이 장기적인 기간에 돌려진 지도 몇십 년이 지났다. 그들은 정치적 돌발사건과 그것의 일화, 안정적이고 깨지기 어려운 평형과 과정들, 항상적인 조절, 오랫동안 정상에서 지속됐다가 전복되는 일정한 경향의 현상, 축적과 느린 포화의 운동, 전통적인 이야기들의 연쇄가 사건들의 모든 두께로부터 복구해 낸 말 없는 커다란 주춧돌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러한 분석을 사용하기 위해 역사가들은 다른 과학의 도구를 받아들였다 ; 경제적 성장의 모델, 교환유통의 양적 분석, 인구통계학적 성장과 퇴보의 단면도, 풍토와 그 진동에 관한 연구, 사회학적 상수들의 지표, 기술들의 배분과 그들의 확산 및 존속에 대한 글 등이 있다. 이 도구는 역사가들이 역사의 장에 있어 다양한 침적층을 구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정치적으로 같은 성질로부터 <물질문명>에 고유한 완만함들로 분석의 수준이 복수화되었다. 각 수준들은 각자에 특이한 비약들을 가지며 각자에게만 속하는 마름질을 지닌다. 그리고 가장 깊은 주춧돌로 내려감에 따라 분절들의 크기는 점차 증가하는 것이다. 정치적 지배, 전쟁, 기근으로 시끄러운 역사의 이면에서 거의 움직임이 없고 완만한 경사를 그리는 제역사가 드러난다. ; 항로, 금광, 가뭄과 홍수, 윤작, 굶주림과 풍요 사이에서 인류에 의해 획득된 평행의 역사가 그렇다. 이렇게 전통적인 분석들이 제기해 온 오래된 질문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대체되었다. ; 어떤 층을 서로 분리시켜야 할까? 어떤 유형의 계열을 수립해야 할까? 이들 각자를 위해 주기화에 대한 어떤 규준들이 채택될 수 있을까? 어떤 관계들의 체계를 하나씩 기술할 수 있을까? 커다란 연대기를 어떤 표 속에서 사건들의 구분적인 계기를 규정할 수 있을까?
그러나 같은 시기에 우리가 지성사, 과학사, 철학사, 사상사, 문학사로 부르는 분야들은 역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역사가들의 작업과 방법을 비켜갔다. 이 분야들은 <시대>나 <세기>로 기술되는 방대한 단위에서 비약의 현상으로 관심이 옮겨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위와 본성이 매우 다양한 차단들, 차단의 우발사건들을 추적할 것이다. 바슐라르에 의해 기술된 인식론적 활동과 문턱 ; 이들은 인식들의 무한한 축적을 의심하고 그들의 느린 성숙을 잘라버림으로써 그들을 새로운 시간 속에 들어가도록 했으며(과학사의 불연속), 그들을 경험적인 시원과 최초의 동기로부터 절단시켰고(인식론적 단절), 그들을 상상적인 공모성으로부터 정화시켰다.(이전의 과학적 정신의 정신분석) 따라서 이들은 새로운 유형의 합리성과 그의 다양한 결과들에 대한 지표화라는 과제를 부여한 것이다.
캉길렘의 분석이 개념들의 변위와 변환의 모델을 제공할 수 있다. 한 개념의 역사란 그것의 의미가 점차 세련되고 계속 합리적으로 변하는 역사가 아니다. 오히려 개념의 구성과 유효성의 다양한 장, 잇따라 일어나는 규칙, 그리고 정교화가 추구되고 성취되는 복수적이고 이론적인 환경의 역사라는 것이다. 역시 캉길렘이 수행하여 사건과 결과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배분되는 과학사의 미시, 거시적 계단 사이의 구분을 알아보자. ; 하나의 발견, 성공, 과학자의 작품과 좌절까지 같은 결과를 가지는 게 아니며 이곳저곳에서 논의되는 역사는 동일한 역사가 아니다. 그 현재가 수정되는 한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과학내부와 다양한 과거와 연쇄들의 형태, 중요성에 있어 다양한 위계, 규정성에 있어 다양한 그물망, 다양한 목적론을 나타나게 하는 반복적 재분배가 있다. 그래서 역사적인 기술들은 필연적으로 지식의 현재에 맞춰 조절되며 또 지식의 변환에 의해 복수화되고 그 결과를 다시 절연된다.
우리는 마치 데카르트와 헤겔이 하나의 연속적인 전개 과정이라고 이해한다. 데카르트는 칸트의 예고편이고 칸트는 헤겔의 예고편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게루는 철학자의 저작들이 가지고 있는 건축학적 통일성을 구조주의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위와 같은 신화적 이해를 철학사에서 해방시켰다. 즉 그는 철학사를 요철화(복수화)시켰다.
그는 전통과 문화적인 연속성의 기술보다 내적인 정합성과 공리, 연역적 연쇄, 체계들의 건축학적 통일성을 중요시했고, 의심할 바 없이 가장 급진적인 분절은 <하나의 과학을 그의 과거의 이데올로기를 분리시킴으로써, 동시에 이 과거를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드러냄으로써 기초지을 때> 같은 이론적 변환 작업에 의해 생겨나는 절단이다. 여기에 하나의 작품, 문학, 텍스트에 고유한 구조를 제시하는 현대의 문학적 분석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푸코는 모리스 블랑쇼, 조르주 바타유, 피에르 클로소프스키에 대한 이해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역사적 분석들에 대해 제기될 문제는 전통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절단과 극한인 것이다. 더 이상 항구적인 토대의 문제가 아니라 토대로서, 토대의 쇄신으로서 기능하는 변환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물음들의 모든 장이 펼쳐지는 것을 본다. ; 불연속(문턱, 비약, 단절, 변이, 변환)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상이한 개념들을 어떻게 특이화할 것인가? 문제적 단위들을 어떤 규준에 의해 분리시킬 것인가? 하나의 과학, 하나의 개념, 하나의 텍스트란 무엇인가? 등등.
요컨대 사유, 인식, 철학, 문학의 역사는 비약들을 복수화시키고 불연속의 모든 직립을 추구하며, 따라서 좁은 의미의 역사, 매우 짧은 역사는 불안정성이나 사건들의 파열이 없는 구조들을 위해 사라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좁은 의미의 역사와 지식의 역사 사이의 교차가 환상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어떤 역사적 분야들이 연속에서 불연속으로 간 반면 다른 분야들은 불연속들의 혼잡함으로부터 간단없는 거대한 통일성으로 갔다고 상상하지 않는 것, 기술의 이 거대한 두 형태들이 서로를 인지함 없이 교차되었다고 믿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이 문제들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 문서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오해가 있으면 안 되는데, 역사학이라는 분야가 존재한 이후부터 사람들은 문서를 이용하고 조사했으며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 모든 물음들, 이 모든 비판적 불안은 하나의 동일한 목적으로 향한다. ; 이 문서들이 말해 주는 바에서 출발해 그들 뒤에서 펼쳐나오고 그들 뒤에서 소멸돼 가는 과거를 재구성하는 게 그것이다. 문서는 언제나 침묵으로 환원된, 희미하지만 해석은 가능한 목소리의 언어로 취급됐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탈바꿈에 의해 역사는 문서에 대한 입장을 바꾸었다. ; 역사는 문서를 해석하고 그의 참 여부를 결정하고 표현적 가치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내부로부터 그를 가공하며 정교화시키는 것이다. 역사는 이것을 최초의 과업을 부여받는다. 역사는 문서를 조직화하고 마름질하고 분배하며 질서지우는 동시에 여러 수준들로 분배하고 계열을 수립한다. 그러므로 문서는 사람들이 말하고 행했던 바를, 발자국만 남아 있는 것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관성적 물질이 아닌 것이다. ; 이제 역사로 하여금 오랫동안 스스로 만족하게 했던 스스로의 인간학적 정당화를 찾도록 했던 이마쥬(역사에 어떤 폭력을 가하여 인간중심적 관심에서 나오는 목적론에 역사를 종속시키는 것)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간단히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역사란 문서를 기념비로 변환시키는 작업이며, 사람들에 의해 남겨진 기록들을 펼치는 작업이다. 기념비, 흔적, 문맥 없는 대상과 과거에 묻힌 사물들에 대한 연구로서의 고고학이 역사를 지향하고, 역사적 언설의 재건에 의해서만 의미를 취했던 날이 있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시대에 있어 역사란 고고학을 기념비의 내재적인 기술을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우선 우리가 이미 지적한 표면의 효과가 있다 ; 지성사(인식론)에서 비약들의 복수화와 좁은 의미의 역사(역사학)에서 장기지속의 대두가 그것이다. 좁은 의미의 역사는 사실에서 유래된 사건들의 제관계(인과, 순환적 결정, 대립, 표현)을 정의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지금의 과제는 계열을 구성하는 것이다. ; 그 각 요소를 정의하고 경계선을 고정시키는 것, 특이한 유형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 그들의 법칙을 공식화하는 것이 그렇다. 이로부터 희박한 사건이나 반복적 사건에 의해 구성된 거대한 지표들의 계열들이 나타나도록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나온다.
오늘날의 역사에 있어 장기지속의 출현은 여러 형태의 역사철학을 향해, 세계사의 위대한 시대를 향해, 문명의 운명에 의해 새겨진 단계들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방법론적으로 집약된, 계열들의 구축이다. 그러나 개념의 역사, 사유의 역사, 과학의 역사는 동일한 탈바꿈이 상반된 결과를 야기시킨다. ; 그것은 의식의 진보에 의해 구성된 긴 계열이나 이성의 목적론, 인간 사유의 진화에 의해 구성된 긴 계열을 해체시킨다. 그것은 수렴과 성취의 테마를, 총체화를 의심하며 하나의 선형적 도식으로 환원될 수 없도록 서로 교차하는 상이한 계열들의 개별화를 가져온다. 이렇게 해서 종종 급박한 계단들이, 접근불가능한 시원과 정초지우는 개현으로 언제나 되돌려 보내지는 이 이성의 연속적인 연대기를 대신해서 나타난다.
2. 두 번째 결과 : 불연속의 개념은 역사학적 탐구들에 있어 주요한 자리를 점하게 된다. 이전 역사학에서는 불연속이란 주어진 것이면서 동시에 사유불가능한 것이었다. 그것은 분산된 사건의 범주 아래에서 주어진 것이었고 사건들의 연속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배제돼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역사적 분석의 기본적인 요소들 중 하나가 되었다. 불연속의 개념은 하나의 역설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탐구의 도구이자 동시에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역들을 개별화할 수 있도록 해주나 오직 그들 사이의 비교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새로운 역사의 본질적인 특징 중 하나는 불연속의 이러한 위상 변화이다. 불연속이 더 이상 역사적 독해의 부정이 아니라 그의 대상을 규정해 주고 분석을 유효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긍정적 요소가 있는 것이다.
3. 세 번째의 결과 : 전체사의 테마와 가능성이 소멸되기 시작하고 그와는 다른 일반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초벌그림이 소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체사의 기획은 한 문명의 총체적 형태와 한 사회의 물질적, 정신적 원리, 한시대의 제현상에 공통되는 의미작용과 정합성을 설명해주는 법칙을 찾는 것이다. 이런 기획은 몇 가지 가설에 의존한다. 첫째는 잘 정의된 시공간적 영역에서 모든 사건들 사이에 등질적인 관계의 체계를 수립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인과 망을, 그들이 서로를 어떻게 상징화하는지 보여주는 유비 관계들을 수립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역사성이 경제적 구조와 사회적 안정성, 정신의 관성, 기술적인 습관, 정치적 행위를 운반해야 하며 이들을 동일한 유형의 변환에 복속시켜야 한다. 셋째, 역사 자체가 각자 정합성의 원리를 소유하는 거대한 통일성으로 분절될 수 있어야 한다. 반대로, 일반사의 과제를 정의해 주는 문제는 이 상이한 계열들 사이에서 어떤 형태의 관계가 합법적으로 기술될 수 있는가, 이 계열들이 어떤 수직적 체계를 수립할 수 있는가, 계열들 서로에 있어 상호관계와 영역들의 작동이 무엇인지, 어떤 구분적인 집합들 내에서 동시적으로 모양지어질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전체사의 기술은 모든 현상들을 하나의 유일한 중심의 주위에서 포착하나 일반사는 분산의 공간을 전개시키는 것이다.
4. 마지막 결과 : 새로운 역사는 일련의 방법론적 문제들을 만난다. 문서들로부터의 등질적이고 정합적인 문집의 구성, 선택원리의 수립, 분석수준과 그에 관여적인 요소들의 정의, 분석방법의 특이화, 하나의 집합을 특성화할 수 있게 해주는 관계들의 규정이 그것이다.
이 모든 문제들이 이제 역사의 방법론적 장을 형성하고 있다. 첫째로 최근까지도 역사철학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 역사철학이 제기했던 물음들이 크게 개선되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 장이 다른 곳에서 유래하는 문제들의 어떤 점들을 다시 재단해준다. 원한다면 이 문제들에 구조주의라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다.
역사의 인식론적 탈바꿈은 오늘날 아직 완성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어제로부터 유래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최초의 순간을 마르크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며 이 탈바꿈이 그의 성과들을 획득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특히 사유의 역사에 있어 이 탈바꿈은 최근의 다른 변환에 있어서처럼 등록되지도 반성되지도 않았다. 이에는 하나의 이유가 있다. 사유의 역사가 간단없는 연속성의 장소로서 존속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의식의 지고함을 위해서는 하나의 특권적인 도피처였을 것이다. 연속의 역사는 주체의 정초하는 행위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주체가 언젠가는 차이에 의해 멀리에서 존속되어 온 이 모든 것들을 다시금 전유하고 그들에 대한 주체의 지배를 재건하며 그들에게서 우리가 그들의 머무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을 되찾아내리라는 약속,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모든 생성과 실천의 시원적인 주체를 이끌어내는 것, 이는 사유의 동일한 하나의 체계가 가지는 두 얼굴일 뿐이다. 이런 사유 속에서는 시간이란 총체화에 의해 이해될 뿐이며 혁명이란 의식의 포착으로만 이해될 뿐이다.
이상의 테마는 여러 상이한 형태에서 19세기 이래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 모든 형태의 탈중심화에 대항해 주체의 절대성을 세우고 인간학(인간중심주의)과 휴머니즘이라는 쌍둥이를 구해냈다. 이 테마는, 마르크스에 의해 수행된 탈중심화(생산관계, 경제적 결정, 계급투쟁에 대한 역사적 분석)에 대항해 19세기 말에 한 사회의 모든 차이를 하나의 유일한 형태로 집약시키는 전체사, 즉 문명의 정합적인 유형을 나타나게 할 것이다. 또 이 논제는, 니체 계보학에 의해 수행된 탈중심화에 대항해 합리성으로부터 인류의 목적을 주조해 낸 시원적인 정초의 탐구를 내세우고, 사유의 모든 역사를 합리성의 보호 아래 둘 것이다.
마지막으로 민속학, 언어학, 정신분석학의 연구가 주체를 신화적, 우화적 언설의 놀이에 관련시켜 그의 욕구 법칙을 탈중심화시켰을 때 , 이제 그가 무엇이었던가에 관련해 의문을 제기받은 인간 자신이 그의 허구들의 규칙성과 그의 성과 무의식을 설명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새로이 역사에 대한 연속의 테제가 재활성화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분절이 아닌 생성의 역사이며 관계들의 유희가 아닌 내적 역동성의 역사이다. 동시에 모든 극한들을 파괴하게 될 운동의 생생함이자 간단없는 긴 인내이기도 한 역사이다. 이런 역사와 대립되는 사람들은 불연속의 사용을 부정했고 차이들의 모든 놀이 시도를 부정했다. 그들은 마르크스를 인간학화하고, 그를 총체성의 역사학자로 만들어버렸으며 그에게서 휴머니즘의 논제를 되찾아내었던 것이다.(루카치와 사르트르를 지칭하는 듯하다.)
문화적 총체성이라는 논제, 시원적인 탐구라는 논제들에 있어 작동하고 있는 보수적 기능은 동일한 것이다. 사람들은 역사 분석에 불연속, 차이, 개념의 비약과 변환 등의 범주가 사용되는 것을 보면 비분강개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의 소멸이 아니다. 그것은 비밀스러웠지만 결국 주체의 종합적인 활동에 연결돼 있었던 역사 형태의 소멸인 것이다.
《광기의 역사》, 《임상의학의 탄생》, 《말과 사물》이 매우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하나의 도안을 그린 바 있는 시도로 규정할 수 있다. 그것은 역사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탈바꿈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것, 이를 통해 지성사의 고유한 방법과 한계, 테마가 의문에 부쳐진다. 또한 마지막 인간학적 구속들이 해체되고 그 대신 어떻게 이 구속들이 형성될 수 있는가를 드러나게 해준다. 이런 시도의 결과, 그것이 여기 이 책이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몇 가지 언급을 해야 할 것 같다.
1. 여기에서 문제되고 있는 것은 다른 여러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구조주의적 방법을 역사의 영역과 인식의 역사에 이전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역사적 지식의 영역에서 성취되고 있는 토착적인 변환의 원리와 결과를 전개시키는 것이다.
2. 여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역사에 -구조주의적 분석 형태를 부과하기 위해- 문화적 총체성의 범주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기술된 계열, 고정된 극한 등 상호관계들은 전통적인 역사철학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목적론적인 총체화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3. 인간학적 테마를 쇄신한 분석방법을 정의하는 것이 문제되는 한에서, 이제 소묘하고자 하는 이론은 이미 수행된 탐구들(푸코의 이전 저작들)과 이중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탐구들이 도중에 사용했던 혹은 원인의 요구에 부합하기 위해 만들어냈던 도구들을 공식화하고자 한다.
─ 이후부터 푸코의 다른 저작과 비교하는 내용이 기술되며 서문이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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