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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고고학 3장 2절 발제.hwp

지식의 고고학32절 발제

알료샤

2. 언표의 기능

 

언표란 기호들의 집합들을 존재하게 하는 것, 그리고 이 규칙들 또는 형태들이 현실화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언표가 이들을 존재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단일한 양식에 있어서이다. 우리가 탐구해야 할 것은 언표인 기호들의 모든 계열에 특징적인 단일한 존재양식이다.

 

1) 규정된 물질성 속에 도안돼 있고 임의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양식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문법적이지 않은 기호들의 예를 들어보자. 타자기의 문자판, 한 줌의 인쇄활자. 이들이 언표를 구성하는 데는 그렇게 주어진 기호들이 종이 위에 새겨지는 것으로 충분하다. 글자를 새기는 것을 용이하게 하는 질서로 씌어진 알파벳 문자들의 언표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언표가 존재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타자기의 문자판은 어떤 모델 전체를 복사하는 것이며 언표가 아니다. 한 기호들의 계열은 그것이 다른 존재와 어떤 특이한 관계를(그 계열 자체와 관련되는, 그의 원인도 요소도 아닌) 가질 때, 언표가 된다.

물론 이 관계에 어떤 수수께끼 같은 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언표가 언표된 것과 가지는 관계는 이러한 관계들 중 그 어느 것에도 중첩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언표는 그것이 언표하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지시하는 것과 의미하는 것, 가지는 관계와 동일한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이름은 문법적 요소들 속에서 상이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하나의 언어적 요소이다. 그의 의미는 사용규칙에 의해 정의되고, 하나의 이름은 그의 반복가능성에 의해 정의된다. 그러나 하나의 언표는 재출현의 모든 가능성의 바깥에 존재한다. 언표가 그것이 언표하는 바와 맺는 관계는 어떤 사용 규칙의 집합과도 동일하지 않다. 하나의 동일한 언어표현이 재출현한다 해도 그것은 결코 동일한 언표인 것은 아니다. 또한 언표와 그것이 언표한 것 사이의 관계를 명제와 그의 지시대상간의 관계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황금산은 캘리포니아에 있다와 같은 명제는 그것이 지시대상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검증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하나의 언표는 그것이 존재케 한 명제가 지시대상을 가지지 않는 경우, 아무것과도 관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차라리 그 반대를 주장해야 할 것이다. 한 명제가 지시대상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를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이 언표의 상관자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명제에 관해 일정한 방식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언표인 것이다. 따라서 위 언표가 지리학자의 수고본이나 여행가의 이야기 속에서 발견될 수 없다 해도 소설 속에서 우리는 그의 참과 거짓 값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 명제가 지시대상을 가지는지의 여부를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언표가 무엇과 관계하고 그의 상관관계의 공간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언표란 명제와 같은 수준에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에 앞서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어구와 그의 의미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와도 다르다. 이 두 가지 형태의 관계들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은 완전히 올바른 문법적 구조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어구들에 관한 유명한 예들에 있어 뚜렷이 나타난다. “무색의 푸른 관념들이 광폭하게 잠잔다.” 이와 같은 어구는 일련의 가능성들이 배제되어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 경우 위 문장이 꿈속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시적인 텍스트 속의 문장이 아니라는 것, 코드화된 전언이 아니라는 것을, 위의 문장은 일정하게 정의된 양식으로 가시적 현실에 관련되어야 하는 유형의 언표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한 어구의 그의 의미에 대한 관계가 부과될 수 있는 것은 규정되고 안정화된 언표적 관계 안에서이다.

언표를 고유하게 특성화해 주는 이 관계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황금산은 캘리포니아에 있다와 같은 언표의 경우 그 상관자는 주체의 기능을 하는 명사적 언어계열소에 의해 지시된 가능한, 부조리한 조어가 아니다. 반대로 언표의 상관자로서 정의될 수 있는 것은 어떤 대상들을 나타나게 할 수 있고 어떤 관계들이 부과되도록 할 수 있는 어떤 영역들의 집합이다. 이는 확인 가능한 물리적 크기들, 지각가능한 크기의 관계들을 소유하는 물질적 대상들의 영역일 수 있으며 또는 반대로 임의적인 성질을 부여받은, 실험적인 또는 지각적인 검증의 심급이 결여된 허구적 대상들의 영역일 수 있다. 이는 공간적이고 지리학적인 위치지음들의 영역일 수도 있으며 역으로 상징적이고 비밀적인 친족관계들의 영역일 수 있다. 언표는 한 고유명사가 한 개인을 지시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일대일 대응적인 하나의 상관자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언표는 사물도, 사실도, 현실도, 존재들도 아닌 가능성의 법칙들, 존재의 규칙들로 구성된 하나의 좌표계에 연관된다. 언표의 좌표계는 언표 자체에 의해 작동되는 개인들이나 대상들, 사물의 상태들이나 관계들의 장소, 조건, 출현의 장, 분화의 심급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구에 의미를 주는, 명제에 그의 진리가를 주는 존재의 출현과 제한의 가능성을 정의한다. 결국 우리는 이 언표적 수준에 관한 기술을 형식적 분석에 의해서도, 의미론적인 탐구에 의해서도, 검증에 의해서도 수행할 수 없으며, 언표와 분화의 공간들 사이의 관계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2) 언표는 그것이 주체와 일정한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에 의해 어떤 언어적 요소들과도 구분된다. 언표의 주체를 그 어구 안에 현존하는 일인칭의 문법적 요소들로 환원시킬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언표의 주체는 언어적 계열소의 내부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인칭을 포함하지 않는 언표도 역시 하나의 주체를 가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고정된 문법적 형태를 가지고 있는 모든 언표는 그 언표의 주체와 유일하고 동일한 유형의 관계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관계가 땅거미가 진다.”모든 결과는 어떤 원인을 가진다가 같은 유형의 언표에 있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오랫동안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와 같은 유형의 언표에 있어서는 우리가 이 문장을 대화의 과정에서 들었을 경우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머리에서 읽었을 때 언표하는 주체와의 관계는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어구에 외재적인 이 주체, 주지하듯이 기호들을 말하는 어떤 사람 없이는, 아니면 발화자로서의 어떤 요소 없이는 기호란 존재할 수 없다. 기호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인과성의 체계를 따라 어떤 저자나 생산적 심급이 필요하다. 그러나 저자는 언표의 주체와 동일하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언어표현과 맺는 생산관계는 언표하는 주체와 그가 언표하는 것을 묶어주는 관계에 중첩되지 않는다.

일반적인 방식에 있어 언표의 주체는 정확히 의미 작용의 의도 속에서 언표의 상이한 요소들을 생산해 낸 사람들로 보이나 사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어떤 소설의 경우 그 언어표현의 저자는 그 책의 표지에 이름이 새겨져 있는 현실적 개인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개인으로서의 저자와는 다른 이 언어표현의 심급들의 바깥에서조차도 소설의 언표들은 동일한 주체를 가지지 않는 것이다. 이 언표들은 그들의 저자가 동일한 경우에 있어서도 그가 그 자신과 그가 읽는 텍스트 사이의 보조적인 연결을 발명하지 않는 경우에 있어서조차도, 언표하는 주체에 대해 동일한 특성들을 전제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이 주체와 그가 언표하고 있는 바 사이에 동일한 관계를 함축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입장에 대해 언제나 그랬듯 문학적인 텍스트의 예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아니면 내 논거는 문학의 본질에 관해 논한 것이지 일반적인 언표에 있어서의 주체의 지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저자가 부재하는 것은 문학에 고유한 현상이다. 이러한 분리로부터 언표의 주체는 언어표현의 저자와 모든 점에서 구분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어긋남은 문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언표의 주체가 규정된 기능인 한에서 그리고 한 언표에 있어서와 다른 언표에 있어서 결코 동일하지 않은 한에 있어서, 상이한 위치들을 차지할 수 있고 상이한 주체들의 역할을 행할 수 있는 한에서, 절대적으로 일반적인 것이다.

수학으로 예를 들어 보면, 수학적 저술의 서문 속에는 저자가 자신이 왜 이 책을 썼고 어떤 환경에서 쓰게 됐는지, 어떤 교육학적 염려와 어떤 시도와 좌절, 방법 속에서 썼는지를 보면 언표적 주체의 위치는 그 언어표현의 저자와 저자들에 의해서만 취해질 수 있다. 그래서 위치는 언표들의 유한한 집합에 의해 구성된 한 영역의 내부에 고정된다. 그것은 이미 나타났어야 할 일련의 언표적 사건들 속에 위치지어진다. 앞선 순간들이 서로 길을 잃지 않는, 그리고 따라서 새로운 현재들에 주어지기 위해서 동일하게 재개되고 반복될 필요가 없는 논증적 시간 속에서 수립된다. 그것은 일련의 효과적인 저작들이 선행함에 의해 규정된다. 우리는 이러한 언표의 주체를 그의 요구와 그의 가능성들에 의해 정의할 것이다.는 조작의 주체이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우리는 <나는 ~한 점들의 모든 직합을 직선이라 부른다> 또는 <어떤 요소들의 유한한 집합이 있다고 하자>와 같은 어구들에 있어 언표하는 주체의 특이한 위치는 무엇인가를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와 저기의 언표 주체는 규정되어 있으면서 현실적인 어떤 조작의 존재에 연결돼 있다. 그리고 여기와 저기의 언표 주체는 그의 언표들과 미래의 조작들을 연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차이가 존재한다. 첫 번째 경우, 언표된 것은 언어에 관한 관습이다. 따라서 언표하는 주체와 언표된 것은 동일한 수준에 놓여 있다. 반면 두 번째 경우에 있어서 언표하는 주체는 그의 바깥에 이미 정의된 어떤 영역에 속하는, 가능성의 법칙들이 이미 확실시된 그리고 그 특성들이 그를 수립하는 언표행위에 앞서는 한 대상을 존재케 하고 있다. 우리는 앞에서 언표하는 주체의 위치는, 그것이 참된 명제를 긍정해야 할 때, 언제나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이제 언표의 주체가, 언표 자체 내에서 하나의 조작을 실행할 때 역시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언표의 주체를 실제적으로나 기능적으로나 언어표현의 저자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상이한 개인들에 의해 유효하게 점유될 수 있는, 그리고 비어 있는 자리인 것이다. 그러나 이 자리는 단번에 정의되어텍스트, 책 또는 작품에 따라 그러한 것으로서 존속되는 것이 아니라 변이한다.

따라서 하나의 명제, 하나의 어구, 기호들의 한 집합이 <언표>라고 불릴 수 있다면, 그것은 언젠가 그들을 말해 줄 또는 그들의 어떤 부분들로 잠재적인 흔적을 배열할 수 있을 어떤 사람이 존재하는 한에서가 아니다. 그것은 주체의 위치가 부여될 수 있는 한에서인 것이다. 언표인 한에서 언어표현을 기술한다는 것은 그의 주체이기 위해 모든 개인이 차지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위치가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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