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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 미셸푸코 / 니체에 관한 강의 / 2017.12.26.() / 닥홍

어떻게 니체와 더불어 진리에 의거하지 않고 진리의 역사를 사고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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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에는 기원이 없고 하나의 역사가 있다. 진리 역시 발명됐으나, 훨씬 뒤에 발명됐다지식과 진리의 함축을 해체하는 니체의 거침없음주체-객체, 인식의 토대가 아닌 산물표식, 기호, 단어, 논리: 인식의 사건아 아닌 도구위반 공간에서 펼쳐지는 인식, 표식, 단어, 의욕의 게임. 기만으로서의 인식도덕으로서의 진리. 의지와 진리를, 자유 또는 폭력을 절합하는 것은 무엇인가?진리의 의지의 역설. 진리의 존재론은 없다. 참이 아닌 진리의 분배 범주로서의 환영, 오류, 기만아리스토텔레스와 니체: 지식의 의지의 두 패러다임

 

I. 인식의 발명

 

인식이 하나의 발명이라는 것은 다음을 뜻한다.

1/ 인식은 인간 본성에 새겨져 있지 않다. 인식은 자신과 전혀 다른 것(이성, 지식, 경험이 아니라 본능; 긍정, 평온이 아니라 의심, 부정, 파기)이 문제되는 게임 공간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인식의 본능은 없다. 지성은 다양한 본능에 봉사한다.”

2/ 인식에는 모델이 없다. 인식은 신적 지성 같은 어떤 것에서 위부 보증을 얻지 않는다.

3/ 인식은 독해, 해독, 지각, 자명한 이치로서 세계의 구조에 절합되는 것은 아니다. 사물은 보이거나 인식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사물은 해독해야할 숨은 의미를 갖지 않는다.

4/ 인식은 복잡한 조작의 결과이다.

이 복잡한 조작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좀 더 명시할 필요가 있다

a 그것은 우선 악의(비웃기, 무시하기, 저주하기)와 비슷하다. 그것은 사물에서 자신을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거리를 두고, 비웃음을 통해 사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가치절하를 통해 사물과 차이를 두며, 사물을 물리치거나 파괴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b 그것은 인식하는 자를 향하는 악의이기도 하다. 의심과 지체를 도입한다.

 

인식은 유용성에 대립한다. 왜냐하면 인식은 찬성과 반대에 자리를 내주는 것이 관건인 게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게임은 악의를 전치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 지적인 투쟁, 경쟁의 출현. 인식은 행복을 포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악의는 사물 표면 뒤에서 비밀을 찾으려 하고 가상 뒤에서 사물의 본질을 일시적인 반짝거림 뒤에서 힘을, 지배를 캐내려 한다. 인식하는 인간은 여전히 그리고 늘 가상임을 깨닫는다. 인식은 가상의 구명에 가상의 새로움을 무한정 구성한다. 가상을 파괴하고 가상을 문제시한다.

현상의 친절한 부드러움에 맞서 기식의 살인적인 가차 없음을 세워야 한다. 이 작업을 통해 존재나 본질에 대한 접근으로 보상받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가상을 낳는다. 이로부터 몇 가지 귀결이 따른다.

a 본능, 이해, 게임, 투쟁은 인식이 모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b 인식은 항상 관점주의적[원근법적]이며 미완성이다. 인식은 늘 사물자체와 분리된다.

c 그로부터 전체적으로 두 가지 커다란 단절이 생긴다. 존재와의 단절, 그리고 선과의 단절.

 

인식하기와 진리를 인식하기

 

인식은 발명됐다. 하지만 진리는 훨씬 뒤에야 발명됐다.

진리와 인식 사이에 기원상의 귀속이 있다.

- 진리는 인식의 대상이다.

- 진리 없는 인식은 참된 인식이 아니다.

- 진리, 그것은 인식의 진리이다.

니체는 거침없이 이 함축을 풀어버렸다 진리는 인식 뒤에 생겨난다. 인식이 진리가 되도록 정해져 있지 않더라도, 진리가 인식 활동의 본질이 아니더라도.

니체는 인간도 사물도 세계도 인식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인식은 나중에 온다. 인식을 보장하는 어떤 권력도 없다. 또 인식은 진리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진리는 나중에 온다. 참이 아닌 것이 진리에 선행하며, 오히려 참이라고도 말할 수 없고 참이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진리에 선행한다.

 

II. 진리 이전의 인식이란 무엇인가?

 

니체가 세운 두 대립을 통해 두 대답이 구체화 된다.

a 진리와 연결되지 않은 인식. 니체는 그것을 참인 것으로 향하는 인식의 도식화, 단순화에 대립되는 순수한 인식 의지로 묘사한다.

b 니체는 앞서 언급한 대립의 역방향에서 다른 대립을 이용한다. 모든 진리에 앞서고 욕구에 온통 지배당하는 일차적, 신체적 인식.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식이 아니라 삶, 투쟁, 사냥, 음식, 경쟁이다.

, 욕구와 직접 연결된 현실적 인식과 역사적으로 실효적이면서 환영적인 역설적 인식 사이의 대립이 명확히 드러난다. 금욕적 학자의 대립, 칸트의 대립.

인식의 제 1본성이 무엇인지 자문하는 것은 인식이 주체와 객체 사이의 어떤 관계 유형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관계가 무엇인지 자문한다. 그런데 인식을 발본적으로 묻는 것은 인식을 정의하는 출발점이 되는 이 주체-객체 관계를 존속시키는 것이 아닌가? 인식이 주체-객체 관계를 구성하는 데도 말이다.

니체가 인식 자체는 없다고 말할 때, 이는 즉자의 인식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인식의 폭력 속에 인식 활동이 전개하면서 시행해야 할 불변의, 본질적이고 사전적인 관계는 없다는 말이다. 인식 자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곧 주체-객체 관계가 사실상 인식의 토대 구실을 하는 게 아니라 인식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a 인식은 관계들의 망에 바탕을 둔다.

b 이 관계들은 여러 차이를 억지로 모은다. 강제로 차이들에 유사성의 유비를, 공통의 유용성이나 귀속의 유비를 부과한다. 이것은 권력의 의지, 관계의 식별자를 가리킨다. 이 의지가 현실의 필연적 토대라고 말할 수 있다.

α. 주체는 의지가 발생하는 지점이자 관점의 체계, 지배의 원리이다.

β. 객체는 표식, 기호, 단어, 범주가 적용되는 지점이다.

그러므로 니체는 인식의 핵심에 코기토 같은 어떤 것, 순수의식을 두는 것을 끈질기게 거부한다. 니체는 주체와 객체를 최대한 떼어놓으며 인식을 해명하고자 했다. 주체-객체 관계가 인식을 구성하기는커녕 인식이 만들어낸 첫 번째 주된 환영이 바로 주체와 객체가 존재한다는 환영이다.

- 기호. 그것은 유비의 폭력이요, 차이를 제어하고 지우는 것이다.

- 해석. 그것은 기호를 설정하고 부과하는 것이요, 기호들을 가지고 노는 것이며, 혼돈 상태에 있는 근본적 차이들에 급진적 차이를 도입하는 것이다. 해석이 혼돈에 사물의 기만을 도입하는 만큼, 기호는 해석이다. 그리고 해석은 기호를 사물화하는 게임을 통해 혼돈에 가해진 폭력이다.

결 론

 

a 인식은 두 가지 의미에서 기만이다. 인식은 현실을 왜곡하고, 차이를 지우고 유사성의 과도한 지배를 도입한다.

b 인식 형태는 관점, 지배, 욕구에 의해 왜곡된 해석적 폭력의 결과라는 것.

c 우리가 진리에 대해 말하기도 전에 우리는 인식의 중심에서 현실, 인식, 기만의 원환을 발견한다. 그로부터 도덕으로서의 진리가 도입될 수 있게 된다.

위와 같은 분석은 더 일반적으로 다음의 것들을 가능케 해준다.

- 현상학과 별개로 기호와 해석에 대해, 그것들의 분리 불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기.

- 그 어떤 구조주의와 별개로 기호에 대해 이야기하기.

- 근원적 주체에 대한 참조와 별개로 해석에 대해 이야기하기.

- 기호 체계 분석을 폭력과 지배의 형태 분석에 절합하기.

- 주체-객체 관계보다 더 근본적으로, 진리에 관한 모든 문제틀에 앞서는 역사적 과정으로 인식을 사고하기. 주체-객체 관계에서 해방된 인식, 그것이 지식이다.

 

III. 진리의 사건

 

진리 이전의 인식이 있다. 진리는 인식의 규범도 아니고 인식의 본질도 아니다. 진리는 인식의 진리가 아니다.

 

1. 진리의 의지

니체는 진리의 뿌리와 존재 이유를 의지에 둔다.

a 의지는 자신의 개별적 성격 일체, 욕망 일체, 폭력 일체를 제거해야 했다. 순수한 의욕. 중지된 의지, 왜냐하면 그 의지는 어떤 대상도 미리 결정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동시에 거세된 의지, 왜냐하면 그 의지는 자신의 고유한 결정 중 어떤 것도 존속하게 놔둬서는 안 되기 때문에. 따라서 진리의 의지는 주의의 형태로만 사고될 수 있었다. 신체의 제어, 욕망의 중지, 욕구의 차단의 형태로만 말이다.

b 니체에게 의지-진리 관계는 전혀 다르다. 진리가 의지의 요소 안에 있는 것은 진리 자체의 독특한 성격과 가장 명확한 결정에 근거해서 일 뿐이며, 그리고 구속과 지배의 형식 아래에서일 뿐이다. 진리와 의지를 절합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폭력이다.

 

2. 진리의 의지의 역설

진리가 사물에 가해진 폭력임이 사실이라면, 진리는 당연히 인식의 노선에 있다. 진리는 인식의 산물 내지 효과이다. 진리는 인식의 규범도 조건도 토대도 정당화도 아니다. 진리는 진리 배후에 참-아닌 것이 솟아나게 만든다. 진리는 환영의 바닥에서 환영에 가해진 폭력으로서 출현한다.

-진리는 그것이 인식이라면 참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식은 하나의 환영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그것이 인식이라고 자처할 때 참이 아니다. 진리는 기만이다.

이로부터 다음의 것이 가능하다.

니체는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회의주의적 언명을 진리는 참이 아니다라는 명제에서 파생된 일련의 역설로 변환한다.

- 환영, 인식 방식으로서의 진리.

- 오류, 인식에 가해진 폭력(-인식)으로서의 오류

- 기만, 이 비-인식이 자기도 인식이면서 모든 인식의 환영을 일소하겠다고 자처하는 한에서의 기만.

우리는 이로부터 니체의 과제를 보게 된다. 진리의 역사를 진리에 의거하지 않고 사유하기.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 요소는 가상이다.

가상, 그것은 진리가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참-아닌 것의 요소이다. 모습을 드러내면서 진리는 가상을 환영, 오류, 기만이라는 하위 범주들로 재분배한다. 가상, 그것은 참의 무한정이다. 환영, 오류, 기만은 진리가 가상의 게임에 도입한 차이들이다. 이 차이들은 진리의 효과들이 아니라 진리 자체이다.

진리는 가상을 환영, 오류, 기만으로 출현시킨다. 환영 또는 진리의 뿌리, 오류 또는 진리의 체계, 기만 또는 진리의 조작.

진리의 포기에 관하여, “아무런 진리도 없다는 믿음, 허무주의자의 믿음은 인식의 전사로서 오직 추할 뿐인 진리들과 끊임없는 투쟁을 벌이는 이에게는 중요한 휴식처이다.”

어떤 시대도 갖지 못했던 신념. 우리에게 진리가 없다는 신념. 옛날 모든 인간은, 회의주의자라도 진리를 가졌다.

가상에 관하여, “내가 이해하고 있는 바의 가상은 사물에 대한 실제적이고 유일한 현실이다. 나는 현실의 반대물로서 가상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상상적인 진리 세계로의 변화에 저항하는 현실로서 가상을 받아들인다.”

요약하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식에 대한 의지는 인식의 선행성에 붙들렸다. 니체에게, 인식은 진리라는 허위 언명이 야기하는 환영 효과이다. 인식과 진리를 한꺼번에 짊어지는 의지는 다음의 두 가지 성격을 띤다. 인식에 대한 의지가 전혀 아니라 권력 의지. 인식과 진리 사이에 상호 잔혹 및 파괴의 관계를 수립하기.

권력 의지는 진리와 인식의 관계가 끊어지고 서로가 서로를 파괴하는 폭발지점이다. 하지만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이 권력 의지란 무엇인가? 그것은 (불변하고, 영원하며, 참된) 존재에서 해방된 현실, 즉 생성이다. 그리고 생성을 드러내는 인식은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진리 없는 진리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진리 없는 진리가 두 가지 있다.

- 오류, 기만, 환영인 진리. 참이 아닌 진리

- 이 진리-기만에서 해방된 진리. 진실한 진리, 존재와 상호성을 갖지 않는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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