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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의 지식.hwp

미셸 푸코 : 오이디푸스의 지식 후반부 P.332~356

 

이런 위업[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의 퀴즈를 풀고 도시를 재건한 것]은 한동안 권력을 행사하고 전통을 깨뜨리고 희랍 사회의 상고기적 구조를 뒤엎었던 참주 내지 입법자의 역사적-전설적 형상에 특징적이다. 그는 시련을 극복함으로써 자신에게 속하지 않던 권력을 쟁취한다. 도성을 재건하고 쇄신하고 바로세운다. 그리하여 자신의 신민들과 감사, , 애정이라는 출생의 특권과 아무 상관없는 관계를 수립한다. 구원의 위업이 시민과 시민의 주인을 연결한 것이다.

테바이에서 오이디푸스의 권력은 plethos[대중]의 애정 못지않게 이오카스테와 결혼하면서 세워진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시련이 끝나고 결혼을 통해 권력을 수립하는 전설적인 영웅의 형상에 참주나 개혁자의 인물상을 중첩시킨다.

하지만 그 이상이 있다. 오이디푸스 또한 참주가 지닌 전통적으로 부정적인 특징 몇 가지를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을 도성과 동일시한다. 자신이 그 도성을 전유했기 때문이다. 크레온은 오이디푸스가 그런 태도를 갖는다고 비난한다. 그래서 코로스는 참주의 초상을 그리고 그의 과도한 특징을 제시할 때 참주가 Dike[정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오이디푸스의 운명이 추락하자 코로스는 그때까지 참주에게 부여했던 긍정적 이미지를 뒤집는다. 불행이 일단 끝나면 코로스는 한순간 도성에 숨을 돌릴 수 있게 해줬던 자를 동정할 것이다.

이상이 바로 참주의 운명에 고유한 불확실성이다. 사랑받다가 버림받고, 그 다음 동정을 받는다.

그는 도시에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 시민을 구원한 것이 그 자신이기는 하지만 그는 평범한 시민이 아니다. 시련을 극복할 때만큼은 신들의 도움을 받지 않았지만 그는 도성에 신들의 법령을 퍼뜨리지 않는다. 오이디푸스는 적의를 가진 신성이 대지를 황폐화시킬 때, 죽어가던 도시 사이에서 탑처럼 자리 잡았다. 그는 도시를 구원 가능케 해주는 신들의 도움 없이 그 일을 해낸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는 신들에 맞서는 도시의 성벽인 동시에 신들이 도시에 보낸 자인 것이다.

반면 거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신들이 도성에 보낸 역병은 오이디푸스 자신이다. 신들이 질서를 복원할 수 있도록 도성은 오이디푸스를 쫓아내야 할 것이다. 그가 공식적으로 도성을 더럽히는 살해자를 쫓아내야 한다고 얘기할 때, “나를 위해, 신을 위해, 나라를 위해그리 해야 한다고 이야기할 때, 오이디푸스는 본의 아니게 알지도 못하고 그렇게 전면에 나섬으로써 신들과 대지 사이에 있는 참주의 위태위태한 위치를 가리키고 있다.

이 특이하고 취약한 위치에서 오이디푸스의 권력은 하나의 지식과 연결된다. 그가 테바이에서 권력을 쥔 까닭은 그가 인식의 시련에서 성공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와 코로스는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들을 묶고 있는 끈이 지식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그것도 이중의 지식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여러 차례에 걸쳐 서로에게 상기시킨다.

그가 등장해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 때마다 그것은 아는 자의 형태로 이뤄진다.(나는 안다. 나는 봤다.) 오이디푸스는 끊임없이 자신의 지식과 자신의 권력이 굳게 결속되어 있음을 표현한다. 오이디푸스가 찾던 것은 도성의 구원 못지않게 자신의 구원이다. 그런데 바로 그가 또 한 번 이 수수께끼를 풀 것이다. 그는 누구도 몰랐던 것을 스스로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권력을 잃을 것이다. 권력 쟁취와 행사에 연결된 이 지식은 도대체 무엇일까?

오이디푸스 자신은 gnome[식견]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스핑크스, 그녀의 비밀, 그녀의 잔혹함을 오이디푸스는 식견으로 제압한 것이다. 크레온과 테이레시아스에게 위협받고 여기는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권력을 환기하며 이렇게 외친다. “오 부여, 왕권이여, 기술을 넘어서는 기술이여.” 권력은 여기서 그것의 주요 속성 둘을 동반하며 등장한다. 그것은 권력의 도구, 조건, 현시라고 볼 수 있다. techne technes[기술을 넘어서는 기술]. 여기서 이 두 단어, 기술과 식견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까?

기술과 식견은 매우 분명하게 누군가에게 뭔가를 배우는 지식의 방식에 대립한다.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었노라고 자찬한다.

오이디푸스 왕의 지식은 청각의 차원, 청취인 동시에 굴복인 차원에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오이디푸스를 권력으로 이끈 식견은 점쟁이가 신들에게 보이는 청취-복종, 인민이 자신이 받는 명령에 대해 보이는 청취-복종에 대립한다. 이오카스테 역시 청취-굴복을 거부한다. 그들은 예언을 들었고 이해했고 믿었다. 하지만 예언을 청취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예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국왕 부부는 똑같이 두 지식 절차(청취-복종)를 거부한다.

오이디푸스의 담론에서 그의 권력 행사 및 그의 지식 찬양과 상관해 가장 자주 반복되는 단어 중 하나는 heuriskein[찾아내기]이다. 오이디푸스는 찾아내는 사람이다. 점쟁이가 신들이 그에게 파종한 진리가 자라는 장소라면 왕은 찾아내는 능력을 보유한다.

찾아내기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사람들은 혼자서, 스스로의 힘으로 찾아낸다. 오이디푸스는 해결책을 찾기 위해 자신의 생각 속에 틀어 박혀 고민을 거듭한 뒤, 자신이 찾아낸 것을 곧바로 실행에 옮긴다.

발견의 또 다른 특징. 혼자서 발견할 수 없는 경우, 자신이 보거나 몸소 들은 것, 또는 그 자리에 있던 증인이 보거나 들은 것에 의거할 수 있다. 라이오스 살해를 두고 오이디푸스가 골머리를 썩인 것도 자신이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사건과 관련 없는 자로서 스스로 죄인을 찾을 수 없다. 필요한 것은 불행을 목격했을 누군가이다.

현전에서 현전으로 추적하듯 현재의 무지에서 과거의 인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왕 본인이 직접 목격하지 않은 것의 '발견'은 표식과 흔적의 탐색을 통해 이뤄진다.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에게 현재를 과거에 따라 설명하려 하지 않고 마지막에 입을 여는 사람의 이야기를 믿는다고 비난한다. 오이디푸스는 결국 마지막에 이야기하는 사람의 말을 믿음으로써 과거 속에서 현재의 불행을 찾아내는 데 이른다.

오이디푸스의 기술은 운명을 구성하는 평탄치 않음, 우여곡절, 높은 곳과 낮은 곳에 주의를 기울인다. 오이디푸스의 지식은 Tuche[]의 편에 있다. 그의 지식에서 기술-운의 근접성은 이중의 효과를 낳는다. 하나는 지나간 일만 믿게 되고, 모든 예견을 헛된 것으로 본다. 다른 한편으로 신탁을 대수롭지 않게 본다는 것은 곧 신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점쟁이가 인간에게 예정해놓은 듯 보이는 moira[운명]를 다른 운명으로 대체하는 것이 항상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오카스테가 언명하는 것이고 이오카스테가 아기 오이디푸스를 유기하며 행동으로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아마도 이오카스테는 이렇게 말할 때 참주가 자신의 지식과 자신의 운명과 맺는 관계를 잘 표현한 것 같다. ,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운수에서 비롯되는 것들이라고 말할 때, 그저 어떤 것에 대한 권력을 가진 만큼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고 가장 강하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오만하게도 자신이 운의 아들이라고 큰소리치게 된다. 이 점에서 역시 오이디푸스는 전통적인 참주의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형상에 합류한다.

 

따라서 대립하는 두 계열이 있다. 각 계열은 어떤 유형의 지식과 어떤 유형의 권력을 특징짓는다. 한편으로 점술의 계열. 점술은 시간 위로 솟아올라 예견의 차원에서 전개되며, 따라야 할 법령-예언을 사자를 통해 청취하는 것이다. 이 지식은 종교적이고 지고한 자의 권력과 연결된다.

다른 한편으로 식견의 계열. 식견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전개된다. 보고 목격하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거해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 구제책을 찾아낼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은 참주의 지식이다. 둘 모두 Anax라고 떠받들어지는 참주와 점쟁이는 각자 자신의 지식이라는 무기를 들고 대결한다. 오이디푸스는 무지한 자가 아니라 신탁, 예언, 점술 등 자신을 추적하고 단죄하던 지식의 양식에 맞서 다른 유형의 지식을 선택한 사람이다.

신탁의 지식과 조사의 지식은 <오이디푸스 왕>에서 규칙을 갖춘 두 절차의 효과로 제시된다. 한쪽은 종교적 참조 절차로서 두 단계로 진행된다. 첫 단계에서는 신탁을 받아오라고 사자를 신의 근거지에 보낸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신을 섬기는 자에게 신탁을 보충하고 신의 명령을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게 실행하면 좋은지 결정해달라고 요구한다.

다른 절차는 본질적으로 사법적이다. 증인이 있는지 알기 위해 사람들을 통해 탐문한다. 그렇게 지목된 자를 소환하고 신원을 밝히고 그들을 탐문한다. 증인에게 질문하고 그들이 답변을 거부하면 고문을 하겠다고 위협한다.

이 모든 것은 기원전 5세기에 적용되던 조사 의례의 재현이다. 첫 번째 절차를 종교적이라고 규정하고 두 번째 절차를 사법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 수는 있다. 관건이 되는 것은 도시 내에 오점이 어디 있고 그 오점을 지닌 자를 쫓아버릴지 결정하기 위해 동원되는 종교, 정치, 사법적 절차들이다. 첫 번째 절차는 상고기의 것에 가까우며 두 번째 절차는 더 최근의 것인데 기원전 6~5세기에 필시 도시가 완전히 재조직됨에 따라 확립됐다.

<오이디푸스 왕>에는 세 번째 절차의 흔적도 발견된다. 그것은 지옥 맹세 절차이다.(시련 재판) 그대는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맹세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거짓일 경우 그대가 내세운 신들의 복수에 노출될 것을 받아들이는가? 크레온이 오이디푸스에게 음모를 꾸몄다고 고발당할 때 오이디푸스와의 계쟁을 종결지으려고 이오카스테와 코로스를 증인으로 두고 크레온은 엄숙히 선서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술의 정직성을 신용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시련을 신용하지 않는다. 점술의 절차나 이 맹세 절차가 자신의 권력을 위협한다고 느낀 것이다.

<오이디푸스 왕>은 오점을 제거하고 죄인을 수사하기 위해 선-법과 희랍의 법에서 쓰이던 세 가지 주요 절차를 무대에 올리고 있다. 신탁 참조, 지옥 맹세, 그리고 시대착오적 표현을 사용한다면 '지역 조사' 이 세 가지 절차는 거기에 연루된 등장인물들의 위엄과 지위에 따라 각자의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신에게 호소할 때는 참조, 두 수장이 대결할 때는 지옥맹세, 평민이나 노예의 경우에는 심문이나 증언을 통한 조사를 한다. 각각의 지식 형태는 의례에 따라 시행되는 권력 행사와 연결된다.

그러므로 소포클레스 비극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오이디푸스의 무지나 무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전면하는 것은 다수의 지식들, 그 지식들을 산출하는 다양한 절차들, 지식들의 대결을 통해 이뤄지는 권력 투쟁이다.

<오이디푸스 왕>에는 지식들이 너무 많다. 지식의 과잉, 그리고 오이디푸스는 무지에 의해 억류된 자가 아니라 다수의 지식을 다루려고 시도하는 자이다.

이 세 절차와 그것의 특정 효과들인 지식들 사이에서 오이디푸스와 그의 권력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오이디푸스의 지식, 통치하고 조종하는 자의 지식은 식견과 기술의 지식이다. 그것은 현재를 과거와 연결함으로써 보인 것에 의거함으로써 스스로 발견하는 지식이다. 이 조건 속에서 신들의 이름으로 오이디푸스에게 이야기하려고 온 자들과 오이디푸스 사이에 애초부터 불신의 관계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비극에서 처음 진리를 언표한 것은 점술이지만, 오이디푸스에게 점술은 마지막 해결책일 뿐이다. 그는 끊임없이 점술과 자신의 식견을 대립시키려 한다. 오이디푸스가 신탁 절차에 등을 돌린 것은 오만과 과도함 때문이다. 이 불경에 대해 코뤼페는 참주의 오만, 참주의 건방진 행동과 말, Dike[정의]를 업신여긴 죄를 연관 짓는다.

<오이디푸스 왕> 전체에 걸쳐 청취와 복종이라는 두 단어가 끊임없이 반복된다. 하지만 그 의미는 이동한다. 즉 모든 것을 보는 신들의 법령에 대한 굴복에서 현장에 있었던 자들의 이야기를 듣기로 말이다. 그런데 다르게 듣고 다른 식으로 보는 이 새로운 절차는 신들이 봤던 것과 똑같은 것을 보게 하고 신들이 언명했던 것과 같은 말을 인정하게 만든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에게 친 덫, 신탁에 맞서 심문에 근거한 절차를 작동시키기, 그리고 자신이 저쪽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을 여기에서 발견하기. 이 지역 조사의 첫 번째 효과는 신들과 점쟁이들의 말이 규정하고 예언했던 것을 하나하나 확증하는 것이다. 신탁의 말과 평민들이 언급한 모든 것은 정확히 대응하며 빈틈없이 부합한다.

신들의 법령과 도시의 법이 정확하게 부합하는 가운데 참주의 자리는 폐지되기에 이른다. 그것이 폐지되는 까닭은 참주가 신탁에 등을 돌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고문의 위협 아래에서 노예가 내뱉는 목소리가 델포이 근거지에 있는 포이보스와 똑같은 말을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절차에서 유래한 것이 신의 법령에서 발생한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신탁의 길에서 등을 돌려 조사의 길로 나아간 오이디푸스는 조사를 통해 처음 길로 돌아오게 된다. 제 자신의 눈으로 보기를 원했던 군주가 증인들에 의해 죄인으로 보이게 되는 위치에 놓인 것이다. 이런 참주의 시선은 사라져야만 한다.(신의 명령, 신의 사자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던 참주적 지식의 도구이자 상징) 이제 오이디푸스는 죽을 때까지 들어야만 하는 운명이다. 따라서 복종해야 할 운명이다. 오이디푸스는 처음으로 크레온의 명령을 듣는다.

 

오이디푸스 그는 무의식의 문장, 자기 자신에 대해 무지한 주체의 형상이 아니다. 그는 과도한 지식을, 적도와 멍에에서 벗어나길 원하는 지식을 담지한 군주의 형상이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공연된 것은 지식과 권력의 투쟁이요, 권력-지식의 형태들 사이의 투쟁이다. 오이디푸스의 실추와 함께 사라진 것은 알고 있는 왕, 자신의 지식으로 도시를 장악하고 조종하고 재건하며 도시에서 재난이나 역병을 쫓아내는 왕이라는 오래된 오리엔트적 형태이다.

 

우리의 사유 체계 안에서 지식을 권력의 관점에서, 그러므로 과잉과 위반의 관점에서 생각하기란 대다히 어렵다. 우리는 지식을 정의, 순수한 무관심성, 인식에 대한 순수 열정의 관점에서 생각한다. 우리는 지식을 의식의 관점에서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오이디푸스와 오이디푸스의 우화를 부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의 무지, 죄의식, 무의식, 욕망에 대해 말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오이디푸스를 지식의 결함 쪽에 놓는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에 관한 모든 것,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은 과잉이다. 그 자신이 불행의 과잉 속에 있으며 바다에 스스로 몸을 던져야만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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