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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12강
1. 기원전 7~6세기 이후 범죄와 정(淨)함의 문제가 점차 중첩되기 시작했다. ‘부정함’은 개인에게 부여할 수 있는 속성이자 도시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 결과 범죄 발생 여부를 판단하고 범죄자를 색출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이로써 ‘진실’을 입증하는 일, 그것은 부정함과 그 효과를 탐구하는 일이 된다(<오이디푸스 왕> 참조).
1) 반면 상고기 당시 소송 절차의 핵심 문제는 범죄 발생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도전’과 ‘복원’을 절차대로 진행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왕>에서처럼 증인을 찾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진 않았다.
2) 이제 소송에서 ‘범죄가 저질러졌는가, 누가 저질렀는가, 어떻게 저질렀는가’ 등을 아는 일이 중요해진다.
① 드라콘법은 범행 사실 확정의 필요성, 비고의적 범죄 발생 시 조사의 필요성을 명시한다. 이 당시까지도 소송은 투쟁의 형식을 띠고 있었지만, 판결은 ‘사실의 진상’을 근거로 이루어진다.
② 이때 소송 당사자들은 ‘정함의 징표’를 바탕으로 본인 증언의 진실성을 주장했다. 고전기 변론에서 피고는 종종 이렇게 얘기했다. “나에겐 죄가 없다. 나는 아고라 입장을 금지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에겐 죄가 없다. 나는 난파 사고를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등등. 부정함의 효과(또는 그 효과의 부재)는 사실의 진상을 확증 또는 반증해 주었다.
③ <오이디푸스 왕>은, 인간의 사건(살해, 역병)과 신들의 수수께끼 같은 위협을 ‘사실’로 변환하기 위한 도시 전체의 노력으로 읽을 수 있다. 부정한 일이 발생했고, 이와 관련된 수수께끼가 제시되며, 이에 대한 답(지식)이 모색된다. 이때 답(지식)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누구인가”에 대한 것이다. 이 ‘누구’를 이유는 정화 의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배제(추방 또는 사형)하기 위해서다.이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자들이 ‘예언자’가 아니라는 점도 중요하다. 오이디푸스의 탄생을 봤던 하인, 어린 시절 오이디푸스를 봤던 사자가 결정적 ‘증인’이다. 즉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데에는 어떤 지혜도 요구되지 않는다.
3) 이처럼 오점은 진실과 연결된다. 오점을 한 요소로 삼는 법적·사회적 실천의 핵심에 ‘사실의 수립’이 자리 잡는다. 상고기 당시에는 범죄가 저질러졌을 때 복수의 책임이 신들에게 양도됐다. 반면 이제는 사실의 진실이 (인간에 의해) 정립되어야 한다. (인간이) 진상과 사실을 매개로 ‘범죄에서 처벌’을 이끌어 낸다. ‘사건’은 ‘사실’로 변환된다.
4) 진실은 정화의 중요 조건이자 의례의 일부가 된다. 부정함은 다시 정함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부정함은 진실의 매개를 통해 정함에서 분리된다. 곧 진실이 정화 기능, 배제 기능을 한다. 위험하게 섞여 있는 것을 분리하고, 내부와 외부를 합당하게 분배하고,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의 경계를 긋게 해 준다.
2. 정함의 법적-종교적 구조는 진실과 다음처럼 연결되기도 한다.
1) 부정한 자는 자기 주위의 모든 사람을 위협한다. 부정한 자가 있는 “도성은 피의 파도로 휩쓸린다. 도성은 죽어 간다. 땅 속의 씨앗도 그렇고, 소 떼도 그렇고, 유산으로 고통받는 여자들도 그렇다”(<오이디푸스 왕>). 죄인의 오점은 사물과 인간의 진서를 위태롭게 한다.
2) 그러므로 죄인을 이 ‘노모스’에서, 즉 도시를 정의하는 ‘사회 공간’에서 배제해야 한다. “누구도 그자를 손님으로 맞이하거나 말을 걸어서는 안 되며, 신들에게 기도하거나 제품을 바치는 데 그자를 참여시켜도 안 되며….”(<오이디푸스 왕>).
3) 그런데 부정한 자는 어떤 점에서 부정한가? 이 부정함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부정한 자는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노모스’에 무지한 자다. 즉 부정한 자는 무법(anomos)하기 때문에 부정하다.
4) 노모스에 무지해 부정해진 사람은, 이후에도 노모스를 지각할 수 없다. 노모스는 부정한 것에 개방되지 않는다. ‘사물의 질서’는 부정한 자에게 접근 불가능하다. 정한 자만이 노모스에 접근할 수 있고, 사물의 질서를 볼 수 있고, 노모스를 발설할 수 있다. 정리하면 이렇다.
- 부정함은 노모스의 공간에서 효과를 발휘한다.(추방은 그 자체로 정화다)(나눔, 분리, 비혼합)
- 부정함은 노모스에서 배제되어야 하며, 이는 노모스 자체에 따라 이뤄진다. 배제를 말하는 것은 바로 법 자체다.
- 그런데 부정함은 어떤 사람이 노모스에 무지하여 이미 배제된 탓에 발생한다. 그 누군가가 노모스에 무지하다면 이는 그가 부정하기 때문이다.
- 부정함과 법은 지식을 매개로 관계를 맺는다. 법을 언표할 수 있는 자는 부정하지 않는 자인데, 부정하지 않은 자가 되려면 법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아직 벗어나지 못한 진실의 모든 윤리가 여기서 짜이고 있다.
*
희랍 사유에서 중요했던 몇 형상들을 ‘정함’과 ‘질서의 드러냄’의 귀속 관계를 바탕으로 논하면 다음과 같다.
1. 현자의 형상
이 형상은 정치권력의 분배 원리에 위치한다. 이 형상은 정치권력이 폭력이나 강제에 의해 행사되는 곳이 아니라 정치권력의 법이 정식화되는 곳에 있다. 현자는 중간에 자리한 자다. 아울러 현자는 사물의 질서를 아는 자이며, 어떤 범죄에 의해서도 오점이 묻지 않는 자다.
그 결과 어떤 자리가 정해진다. 정치권력의 소유자라기보다는 정치권력의 창설자의 자리, 전통적 규칙의 보유자라기보다는 세계의 질서를 아는 자의 자리, 복수의 도전에 무한정 응수하는 자라기보다는 정한 손을 가진 자의 자리다.
그러나 이것은 허구적 형상이다. 이 형상의 가면 아래에는 경제적이고 정치적 조작이 있다.
2. 인민권력의 형상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부정적으로 그린 (인민)권력이라는 형상은 노모스를 준수하지 않고 연설, 토론, 투표, 유동적 의지에 의해 노모스를 변화시키는 권력이다. 인민권력은 노모스에 무지하다. 인민권력은 지식에서(정치적 지식, 사물에 대한 지식)에서 배제된다. 소송 절차가 권세가의 수중에만 머물지 않게 되었지만, 도시의 좋은 질서에 관한 지식은 현자만이 차지할 수 있는 허구적 장소에 위치한다.
나아가 인민권력은 ‘무법’하기 때문에 부정하다. 인민권력은 이혜관계와 욕망에만 귀를 기울인다. 인민권력은 본질적으로 범죄적이다. 인민권력은 노모스에 대해, 도시 실존의 토대가 되는 법에 대해 죄를 범한다. 인민권력은 도시 본성 자체에 반하는 범죄다.
‘지식과 노모스의 정한 보유자’인 현자는 도시를 도시 자체에 맞서 지켜야 하고, 도시가 도시 자체를 스스로 통치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3. 현자와 인민권력 사이에 있는 참주
이 권력 실세의 형상은 인민권력에 접근해 스스로를 구현한다면 부정적인 것이, 현자에게 설득된다면 긍정적인 것이 되는 형상이다.
정함은 세계의 질서 자체를 인식하는 데 본질적인 것이다. 부정한 자는 사물의 질서를 인식할 수 없다. 이는 참주에게도 해당한다. 예컨대 오이디푸스는 도시를 바로 잡고 똑바로 세운 자이지만, 한편으로 가장 근본적인 노모스(아버지와 어머지)에 무지했기에 부정해진 자다. 이제 오이디푸스는 사물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가 무엇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그래서 신에서 목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알 만한 사람에게 모조리 호소한다. 오이디푸스는 지식의 원천에, 도시의 가운데 있지 않다. 지식의 단편의 조금씩 드러날 때마다 오이디푸스의 권력은 조금씩 잠식당한다.
*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희랍에서 진실에 부여된, 그리고 희랍에서 진실이 권력 및 부정함과 맺는 관계에 부여된 어떤 형태의 특징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본능이나 욕망의 운명이 아니라, 희랍 이래 서구 사회에서 진실이 담론이 따라 왔던 어떤 구속 체계를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오이디푸스적 규정은 서구 사회에서 기능하는 참된 담론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원전 7~6세기에 정치가 대대적으로 재조직·재분배되는 가운데 ‘허구적 자리’가 고정되었다는 점이다. 권력은 그 자리에서, 정함이 보증되어야만 접근 가능한 진실에 바탕을 두고 세워진다. 이 허구적 자리는 그 당시 계급투쟁, 권력 이동, 결탁과 타협의 게임을 고려하면 눈에 드러난다.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담론이 성립했다.
- 세계와 사물의 질서를 사실의 특이성에 이르기까지 드러내는 담론(내용/대상 차원)
- 사람들 사이의 정치적 관계를 규제하고 모델 노릇을 하며, 아노미적인 것이라면 뭐든 배제할 수 있게 해 주는 공정한 담론(기능/역할 차원)
- 무결함과 덕을 대가로 해서만, 즉 권력과 욕망의 장 바깥에서만 접근 가능한 담론(진술 주체 차원)
*
1. 지금까지 ‘담론적 사건’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을 분석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즉, (정치적-법적) 담론의 저유 방식, 담론의 작동 방식, 사회적 투쟁에서 담론이 맡은 역할을 담론으로부터 부여받은 지식의 형식과 내용에 관한 사건으로 분석하는 것.
담론적 사건이란 담론에서, 텍스트에서 일어날 수 있었을 사건을 뜻하지 않는다. 담론적 사건은 제도, 법, 정치적 승리와 패배, 요구, 태도, 발란, 반동 사이에 분산되는 사건이다. 담론적 사건은 텍스트적인 것이 아니며, 그것이 발견되는 곳도 텍스트 안이 아니다.
2.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발견되는 진리의 출현을 담론적 사건으로 취급할 수 없을까? ‘기원에 대한 탐구’ 바깥에서, 일련의 사소한 외부 기원(예컨대 농민의 채무, 화폐 확립에 쓰인 책략, 정화 의례의 이동 등)에서, 서로 대립하는 사회 계급이 정치권력을 둘러싸고 벌이는 투쟁의 역사와는 다른 역사에서 출발해 이를 분석할 수는 없을까. 요컨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를 이들 투쟁이 담론적 실천 수준에서 야기한 효과로 기술할 수는 없을까.
3. 그러면서도 이들 투쟁과 그것이 담론에 미친 효과를 표현-반영 관계로 기술하지 말 것. 반대로 다음을 보여 주는 것이 중요하다.
- 어떤 시기에 계급투쟁이 어떻게 어떤 유형의 담론들(오리엔트의 지식)에 호소하게 되는지
- 이 유형의 담론들이 어떻게 전유 투쟁의 쟁점이 되는지
- 계급투쟁이 어떻게 담론의 허구적 장소, 그리고 담론을 진술할 수 있고 진술해야 하는 자의 속성을 정의하게 되는지
- 그런 유형의 대상들이 어떻게 이 투쟁의 도구로서 담론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 이 담론이 어떻게 그것을 가능케 했던 투쟁과 관련해 은폐되었는지 등
이 관계들의 총체를 가능성의 조건, 기능, 전유, 코드화 같은 용어로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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