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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의지_7강 후반부_8강_171126.hwp


<지식의 의지> 7강 후반부(157~165쪽)



점차 측정-판결이 맹세를, 진리-지식이 진실-도전을 대체하게 된다.


1) 공정한 판결, 곧 krinein(분할/분리) 문제를 도입한 dikaion(정의)는, 다음 조건을 필요로 한다.

- 판결은 ‘시기의 정확한 회귀’, ‘사물의 정확한 측정’에 바탕을 둬야 한다. 이때 규칙의 기억과 암기 대신 계절과 시기를 기억하고 재산을 측정해 두는 것이 중요해진다. 또 ‘척도’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해졌는데, 특정 시기가 돌아왔을 때 동일한 측정을 되풀이하기 위해서다. (반면 맹세-결정의 재판에서는 규칙과 관습을 알맞은 때에 기억하여 호기에 적용하면 됐다.)

- 선고가 공정하려면 응당 그래야 하는 바(배분이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와 실제로 그런 바(동일한 요소들, 되돌아오는 날짜들, 시기의 회귀)를 ‘동시에’ 이야기해야 한다. 

- 측정-판결은 사건의 주역을 지목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태를 폭로한다.

- 측정-판결에서 참의 폭로와 최고권의 행사는 맞물린다. 


2) 이로써 선고의 규칙 노릇을 하는 ‘dikaion kai alethes(공정하고 참된)’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이어지게 된다. 즉 측정/척도와 시기를 고려하는 것이 ‘공정’이라면, 측정/척도와 시기를 고려하는 모든 ‘사람’과 ‘행위’는 공정하다 할 수 있다. 

- 이제 왕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공정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든 주의를 기울이고 귀를 기울이며 공정한 것을 기억해 둘 수 있다면, 그는 공정한 사람이다. 예컨대 셈이 정확한 채무자, 만사를 제때 처리하는 농부, 해야 하는 때에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한 것을 아는 자는 모두 최고권을 상징하는 지휘봉을 쥐지 않더라도 공정한 사람이다. 

- 사물의 참된 순환, 사물의 실제 크기, 달력의 회귀, 이 모든 것은 ‘정의’ 그 자체가 된다. ‘공정한 세계’는 기원전 6세기와 5세기의 시와 철학적 산문에서 꾸준히 발견된 테마다. 


재판과 관련된 dikaion은 이처럼 재판 영역을 훌쩍 넘어서는 화두가 된다. dikaion은 일상생활 규칙, 세계의 배열 방식이다. dikaion는 날마다 해야 하는 것을 규정하고 사물의 추이를 추적한다.

이로써 dikaion는 지식의 형태와도 관련된다. 정의는 언명된 진실, 위험을 감수한 진실에 따라 진서를 갖추는 것이 아니다. 정의는 오히려 우리가 아는 진리와 연결된다. 공정하다는 것은 이제 규칙을 적용하고 진실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는 진리를 잊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개인으로서 ‘헤시오도스’는 심판/정의의 담론을 늘어놓을 수 있다. 그는 공정함을 말할 수도 있고, 선고에 대한 선고, 결정에 대한 의견을 표할 수 있다. 재판관도 평가할 수 있다. 헤시오도스는 제우스에게 이야기한다. “그대는 정의로 법도를 바꾸소서. 나는 페르세스에게 진리를 알리고자 하나이다.”(<일과 날>).


3) 그런데 이러한 지식의 형태에서 진리, 곧 krinein의 필요조건이나 준거점이 되는 진리란 무엇일까? 헤이오도스와 그 계승자에 따르면, 그것은 어떤 우주론적 지식(날과 날짜, 적절한 때, 별의 이동과 합, 기후, 바람, 계절 등의 진리)이다. 또 신들의 계승과 상석의 질서, 세계의 체례로서 신들의 조직화의 진리이자, 신들의 계보, 달력과 기원에 관한 지식, 순환과 시작에 관한 지식이다. 

이 두 지식은 유프라테스와 오리엔트의 대제국들에서, 히타이트인과 앗시이라인들에게서, 바빌론에서 형성되고 발전한 것들이다. 즉 두 지식은 정치권력과의 직접적 관련 속에서 구성됐다. 이들 국가 구조와 행정 체제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a) 공식 달력을 준수했다. 그 달력에는 결정, 작업, 전투, 파종을 위한 길일과 액일이 표시되어 있었다. (b) 세금 징수, 용역과 사용료 진수를 위한 도량 및 등가 체계를 확립했다. (c) 낭송을 포함하는 의식을 통해 정치적이면서 주술-종교적인 왕권에 주기적으로 활력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우주론적, 주술적 지식 체계가 오리엔트에서 희랍으로 이식됐을 때, 그 지식은 즉각 새로운 형태를 띠었다는 사실이다. 그 지식은 이제 사회에서 정치권력을 보유하고 위임을 받아 그 권력을 행사하거나 그 권력의 도구 노릇을 하는 자들에게 더 이상 국한되지 않는다. 희랍에서 그 지식은 권력에 봉사하는 관리, 서기, 회계원, 천문학자의 지식이 아니다. 그 지식은 모든 인간이 정의롭기 위해, 저마다 정의를 주장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지식이다. 지식은 권력의 행사에서 정의의 통제로 이동한다. 동시에 지식은 비밀 영역이 아니라 공적 장소에 놓이기 시작한다. 

어쨌든 오리엔트의 지식은 이후 희랍과 서구의 지식 전개 방향에 얼마간 영향을 끼쳤다. 

- 기원, 발생, 계승에 관한 지식. 우주론, 철학, 역사의 지식

- 양, 산술, 측정에 관한 지식. 수학적 지식, 물리학적 지식

- 사건, 기회, 때에 관산 지식, 농학, 의학에 관한 전문 지식, 주술적 지식.



<지식의 의지에 대한 강의> 8강(167~186쪽)


두 가지를 다시 정리하자. 

1. 먼저 헤시오도스가 말하는 dikaion(정의)의 본성. 

1) 그것은 셈이 정확한 반환의 정의다. 받은 것은 정해진 날에 정확히 돌려주어야 한다.

2) 그것은 또한 측정의 정의다. 똑같이 주고받기 위해서는 정확한 측정이 필요하다.

3) 그것은 상호 협의 또는 동의의 정의다. 두 당사자는 동일한 척도, 동일한 달력을 사용한다.

4) 그것은 세계 질서에 부합하는 정의다. 기회, 적절한 시기, 길일과 액일을 준수한다.


여기서 정의는 ‘시비’에서의 정의와 사뭇 다르다. 이때 정의는,

- ‘매일매일’ 실행되는 것이다. 최고권이 행사되는 특정 시점에 국한되지 않는다.

- 평등을 유지하는 양, 시기, 몸짓을 기억하는 것과 관련된다. 

- 준수와 측정의 형태를 띤다. 한쪽이 던지고 다른 쪽이 받는 진실-도전의 형태와 다르다.

- 인간의 진리와 제우스의 정의를 등가로 놓는다. 인간의 정의는 사물의 진리를 따르므로, 이는 제우스의 법령과 매한가지다. 


즉 헤시오도스의 정의는 달력과 자연 연표에 관한 지식으로 구성된 정의, 교환, 복원의 측정, 화폐 같은 어떤 것으로 구성된 정의, 최고권의 새로운 분배로 구성된 정의다. 새로운 유형의 정치권 권위, 화폐 측정, 사물과 시간의 지식에 대한 탐구가 여기서 전면화된다.


2. 희랍인들의 이러한 지식과 화폐 측정 방법, 정치적 모델은 오리엔트를 참고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참고는 몇 가지 수정을 겪으며 이루어졌다. 

- 먼저 정치 형태와 관련해 희랍인들은 아시아로부터 절대 권력의 일반적 형태만 차용했다. 절대 권력은 귀족적과 다두 지도 체제의 권력에 부과되었는데, 이는 과도기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차용의 목표는 귀족정을 파괴하고 도시-국가를 창설하는 것에 있었다. 

- 희랍은 아시아에서처럼 세금과 토지 사용료 책정을 위해 화폐를 차용했지만, 곧 상업적 목적, 식민지와의 관계에서 화폐를 사용하게 된다. 

- 오리엔트식 지식은 국가의 업무요, 정치 도구였다. 지식은 비밀이어야 했으며, 유통되거나 퍼져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 희랍에 와서 변환이 일어난다. 지식은 국가 기구와 직접적 권력 행사에서 분리된다. 지식은 자연적, 신적, 인간적 질서로서의 ‘공정’의 상관물이 된다.


요컨대 희랍에서 두 가지 변형이 일어난다. 첫째, 진리가 사물, 시간, 질서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게 된다. 둘째, 권력의 영역에서 정의의 영역으로 지식이 이동한다. 

이런 변환은 희랍 문명 형성에서 중요 현상이었다. 이제 진리는 정확한 질서이자, 적절한 분배, 엄격한 순환과 회귀가 된다. 정의는 바로 이러한 진리와 관계를 맺고 진리에 고정된다. 또 지식의 일차적 역할은 정의로운 관계를 보장하고, 질서를 복원하고, 사물을 제때 제자리에 되돌려놓는 것을 돕는 것이 된다. 지식은 승리하고 제압하고 통치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환할 것을 되돌려줄 수 있게 하고 심지어 강제하는 것이 된다. ‘참 안에 있다’는 것은 권력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정함 안에 있다는 것이다.

진실-도전 또는 지식-권력의 관점은 이로써 점차 억압된다. 


A. 기원전 7~6세기의 농지 위기

도리에이스인의 잇따른 침략으로 그리스 본토의 토지가 불균등하면서 양도 불가능한 부분들로 분할됐고, 이 불균등이 격렬한 갈등을 낳았다. 인구 압력으로 인한 극빈층의 빈곤화, 재산 상속 시 토지 분할 문제가 생겨난다. 이런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개인의 이주, 식민지 개척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식민지 개척으로 인구 문제는 완화됐지만 빈자의 상황은 악화된다. 희랍의 선-법에서 계약의 인격적 성격 때문에, 또한 지급 불능의 경우 소유주와 소유물 사이에 존재하는 상징적인 동시에 실체적인 관계 때문에, 토지에 빚이 붙거나 채무자가 노예로 전락하거나 했다.

그 결과 빈자들은 다음과 같은 방어 수단을 요구하게 된다. 

a) 수확과 파종을 위한 최선의 시기가 언제인지, 빚을 갚을 적합한 만기일이 언제인지 알 수 있는 시간 계산 체계의 확립

b) 수확물을 숫자로 나타내고, 일정한 교환율을 유지하며, 빚진 것을 셈할 수 있게 해 주는 도량형으리 확립. 

c) 빈자의 소유물을 보호하고 부자의 폭력을 저지하는 새로운 권력 형태의 확립.


그런데 빈농층은 어떻게 이러한 지식의 구성, 도량형 수립, 새로운 유형의 최고권 형성을 획득할 수 있었을까.


B. 군대

소농이 이러한 상황에 부분적으로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 요인 덕분이었다.

1. 식민지가 개척되고 새로운 금속 자원이 확충되면서 철제 문건의 값이 떨어졌다. 왼손에는 방패를, 오른손에는 창이나 검을 쥔 보병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유형의 군대가 출현했다. 이는 많은 수의 병사들이 나란히 줄을 맞춰 서는 밀집대형 전략의 발명을 수반했는데, 이는 도시 세력 간 관계, 정치체 내부 세력 간 관계를 급격히 변화시켰다.

a) 기원전 669년 아르고스는 스파르타를 제압했는데, 이는 참주의 통솔 아래 중장보병을 운용한 덕분이었다. 

b) 인민이 공동체 방위에서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된다. (물론 ‘인민’이 문구를 구입하고 보수, 교체하려면 꽤 부유해야 했다. 농부가 군인이 되지 못할 수준의 경제적 문턱이 있었던 것이다.) 또 밀집대형 전략은 군인들 사이의 친목과 끈끈한 조화 관계를 함축했다. 조력과 도움의 상호성, 움직임의 동기화, 궁극적 조화에 도달하기 위한 전체의 자발적 조절이 중장보병 전략에 함축되어 있다. 각자가 수용하고 모두가 자발적으로 실현하는 공동의 질서, 상호 조정을 통해 가능한 한 빠르게 획득되는 공통의 질서가 도시국가의 힘을 보장한다.

2. 신생국의 힘은 인간이 자발적으로 수용하고 실현한 질서 속에, 전투 대형 속에 구현된다.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게 보장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개인의 용기인 동시에 질서의 수용, 즉 arete(도덕적이면서 지적인 덕, 명예, 탁월함)이다.


C. 장인 계급의 출현

무장은 장인 계급의 성장을 야기한다. 식민지 교역과 같은 상업적 맥락도 장인 계급 성장에 기여했다. 부자들은 원재료, 도구, 생필품을 투자했고, 빈농들은 수출품을 만들어 투자금을 갚았다. 그 물건은 출자자가 명확히 정하고 규정한 견본에 부합해야 했다. 채무, 소작, 노예화가 아니라 사업가가 노동자에게 투자하는 것에 바탕을 두는 생산 관계가 구성된 것이다. 제조업 상인들이 점차 부를 축적하게 되고, 귀족정의 한 분파와 장인-농민이 지주 귀족과 상인에 맞서 계급 동맹을 맺게 된다. 이로서 귀족정에 균열이 생긴다.

노예제 찬성-반대 여부가 정치 투쟁의 중요 요소로 떠오르기도 했다. 일부 지주는 농촌 노예를 노동자-장인으로 변모시켜 제조업자와 경쟁하려 했다. 

한편, 장인 계급과 더불어 희랍과 이오니아 지역에 특정 유형의 지식이 출현한다. 아시아 국가에서 금속 채굴과 세공, 귀중품 제조는 관료의 지도와 책임 아래 노예 집단이 전담했다. 반면 희랍의 장인은 가공 기술에 직접 접근했다. 남에게 배워서 알거나 몇 가지는 손수 발견했다. 남에게 전수해 주기도 했다. 즉 희랍의 장인은 실체와 시기, 성질과 상황, 기회와 변화에 관한 지식을 보유하게 됐다. 


D. 기원적 7세기와 6세기의 정치 변환

일부 귀족 분파와 장인-농민 집단의 동맹 체계가 형성되면서 정치적 대격변이 일어났다. 이에 대한 구체적 사료는 적지만, 몇몇 근본 특징들을 파악할 수는 있다.

a) 이러한 변환은 두 집단, ‘빈자’와 ‘부자’의 대면과 투쟁을 특징으로 한다. 참주는 권력을 장악할 때마다 가장 비천한 자, 빈자에게 기댔다. 이러한 대립은 그 뒤로도 오래 지속됐다. “국가에서 가장 구분되는 두 계급이 부자와 빈자이다. 그들은 서로 국가의 가장 대립되는 부분이다.”(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b) 중장보병에 힘입어 귀족들을 축출하고 새로운 권력 형태가 출현했다. 

c) 이러한 변환은 농민과 장인에게 유리하게 이루어졌다. 

- 농민에게 유리한 토지 제도가 생겨났다. (귀족의?) 목축지를 회수하고, 추방 조치를 통해 토지를 몰수하고, (농민의?) 부채를 탕감해 주고, 균등한 방식으로 토지를 재분배하거나 새로 분할했다. 

- 장인 계급은, 노동자의 경쟁 상태였던 노예제가 제한되면서 이익을 얻었다. 또 대규모 수로 건설, 도시 정비, 토모 공사가 진행됐다. 수출 장인 계급이 확립하고 생산이 균질화되었으며 도기가 대량 생산됐다. 장인 계급에 대한 장려책도 나왔는데, 솔론은 가족과 함께 아테나이에 정착한 모든 장인에게 시민권을 줬다.


기원전 7~6세기에 희랍에서 일어난 정치 변환은 농민과 장인이 거둔 부분적 승리, 일시적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귀족정의 소수파는 장인들과 농민들과 이해관계로 묶였다. 이 동맹은 이러한 변환에서 생긴 정치 형태를 설명해 준다. 참주정 또는 성문법의 지배를 수림하는 한 명의 개혁가나 개혁자 집단의 개입이 그것이다. 참주들은 대개 법적 틀 내에서 통치했고, 그 틀을 보존하기 위해 통치했다. 더 나아가 완숙기에 이른 참주정은 성문법을 조직했고, 민주주의를 여는 매개 역할을 했다. 


결론

지금까지 희랍 사회에서 정의 담론과 지식 담론의 관계(공정, 측정, 질서, 참 사이의 관계)가 재분배되는 것을 봤다. 

희랍 전통을 계승한 진실-도전과 오리엔트에서 이오니아를 거쳐 전수된 지식-권력은 서로 순응해 어떤 진리-지식으로 변형된다. 이 진리-지식은 그 뿌리에서 정의, 분배, 질서와 연결되고 arete의 도덕과 교육 기술에 의거한다. 이는 다음의 세 요점과 관련 있다.

- 화폐 제도. 화폐는 단지 교환의 척도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분배, 배분, 사회적 조정 수단으로서 수립됐다.

- nomos. 즉 성문법 제정. 성문법은 단지 정치적 정체가 아니라 사회 질서 담론 자체다.

- 종교적 모델에 따른 심판 제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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