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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6강.hwp


미셸 푸코 :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6강 발제

 

알료샤

 

헤시오도스 / 호메로스와 사법 담론에서 진실 발언의 성격 규정 / 희랍의 시련 재판 의례와 그리스도교의 종교 재판 / 마조히즘에서 쾌락과 진실의 시련 / 뇌물 먹는 재판관-왕의 dikazein에 맞서 krinein을 예찬하는 헤시오도스 / 헤시오도스에서 dikaiondike / 희랍의 법 공간에서 krinein의 확대, 그리고 진실 단언의 새로운 유형 / 드라콘의 입법과 배상 / dikaion과 세계 질서

 

호메로스의 텍스트에는 두 가지 유형의 판결이 있다. (1) 전사 무리에서는 판결이 문제가 안 되고 오히려 맹세와 진실 도전의 게임으로 끝나는 시비가 중요하다. (2) 도시나 촌락의 환경에서는 당국의 개입이 중요하다. 하지만 당국은 이차적 수준에서, 주도권이 오직 개인에게 있는 배상 절차에 대해서만 개입한다. 당국은 배상이 이뤄졌는지 신경 쓰지 않고 배상이 진행되면 그 진행이 규칙에 맞는가만 신경 쓴다. 이 두 유형의 절차는 두 유형의 사회 집단과 어쩌면 두 상이한 두 시대에 상응한다.

지적해야 할 것은 진실의 언명은 기원에서부터, 혹은 의고전적인 형태부터 사법 담론에 현전했다는 것이다. 진실의 언명은 외래 부품처럼 사후에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어떤 언표들은 진실의 발언이어야 하는 것으로서 제도화됐다. 진실과 관련을 맺는 발언, 진실을 작동시키는 발언, 더구나 진실과 공개적이고 불확실하며 위험한 게임에 들어가는 발언으로서 말이다.

진실이 그 안에 맴돌지 않는 사법 담론은 없다. 이런 뜻에서 조르주 뒤메질이 <세르비우스와 포르투나>에서 말했던 것에 동의할 필요가 있다. "인류의 행동과 관련해 가능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참된 발언'은 그에 저항할 만한 세력이 거의 없는 힘이다. 진실은 가장 유효한 언어적 무기 가운데 하나, 가장 생식력이 뛰어난 힘의 씨앗 가운데 하나, 인간의 제도를 위한 가장 견고한 토대 가운데 하나로서 아주 일찍이 인간에게 나타났다."

하지만 참된 발언은 근원적으로 야생 상태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참된 발언은 하나의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직접적이고 보편적이며 간결한 형식을 갖추고 있지 않다. 사법 제도가 그것의 토대, 규범, 정당화의 명목으로 제도 밖에서 참으로 확인되거나 될 수 있는 것의 집합에 호소한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사법 담론에서 진실과 맺는 관계는 사법 담론에 고유한 형식과 규칙에 따라 수립된다.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진실은 사실을 확인하지 않는다. 진실은 서약된다. 맹세와 저주.

- 참된 발언은 봤던 것 또는 경험했던 것에 의거하지 않는다. 참된 발언은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신들의 분노에 노출된다.

- 참된 발언은 일어난 것을 밝히지 않는다. 사태를 겨냥하면서, 참된 발언은 위험을 감수하는 자를 지목하고, 위험을 거부하는 자를 떼어낸다.

- 마지막으로, 참된 발언은 공정한 결정의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참된 발언은 제 고유의 유효성을 통해 결정을 가져온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체계, 희랍 고전기에 이미 확립된 체계에서 참된 발언은 무엇보다 증언의 발언이다. 참된 발언은 사실 확인의 형태를 띠며, 일어났던 것에 의거하고, 일어났던 것을 드러내는 기능을 한다. 참된 발언의 모델, 오히려 그것의 비언어적 등가물은 지각이다. 참된 발언은 우리가 있었던 대로, 우리가 봤던 대로 사물을 현시하는 것이다. 증인의 발언은 현전의 대체물이다.

호메로스 시기, 우리가 거론하는 체계에서, 참된 발언의 비언어적 등가물은 시련 재판, 육체적 시련이다. 무한정한 위험에 스스로를 노출하거나 누군가를 노출시키기, 진실의 맹세를 하거나 타격, 벼락, 바다, 야생 짐승의 위험에 몸을 내맡기기. 이것들은 동일한 형태와 동일한 조작적 효력을 갖는다.

진실 발언의 역할이 이렇다는 증거는 시련 재판이 제도적으로 맹세의 대안으로 사용됐다는 사실에 있다. 두 상대가 신분이 동등하지 않은 경우, 어느 한쪽의 맹세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경우, 그는 시련 재판에 처해졌다. 여성, 유기된 아이, 노예들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육체적 위험, 그들이 당하는 신체 형벌이 그들의 진실 맹세였다.

노예들에게 체형을 가하는 진실의 시련이 어떻게 희랍의 사법 실천 내내 보존되고 조금씩 다른 역할을 맡는지 보는 것도 흥미로운데 기원전 4세기에는 자기 주인이 한 행위의 증인이 될 수 있었지만 노예라는 처지 때문에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할 수도 있는 노예에게서 자백을 받아낼 때 진실의 시련이 쓰였다.

체형은 진실-증언의 영역에 들어가지만 주인에게는 자신의 노예에게 가해지는 시련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그런 거부는 다소 시련 재판을 거부하는 효력이 있지만, 주인의 소송에 불리한 지점, 불리한 징표가 된다.

귀스타브 글로츠의 관점에서 종교재판, 진실의 시련은 그리스도교인의 고백 행위 때문에 복잡해지는데, 그러나 종교 재판에서 관건은 고백을 얻어내기 위한 그저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 너는 시련에 저항하며 네가 마법사임을 고백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악마가 너로 하여금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게 만든 것이다. 따라서 너는 악마의 수하다. 따라서 너는 악령에 지배당한 이 육신과 육체적 세계에서 네 혼을 뗴어낼 최후의 체형까지 받아야 한다.

- 너는 시련에 저항하지 않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니 너는 사탄의 수하다. 따라서 너는 천벌 받아 마땅하다. 고백하면 처벌을 면하게 될 거라고 우리는 약속했다. 고백해서 너는 용서받았고 너는 죄를 사함 받은 채 죽을 것이다. 우리는 죽을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재판정으로 조용히 보내는 자는 회개하지 않은 죄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광기 때문에) 진실과 체형이 역사적으로 과중한 관계를 맺어 왔기 때문에, 시체부검, 즉 생명과 질병의 진실을 수립하기 위한 사후의 체형이 상당한 난점을 보인 건 무리가 아니다.

 

마조히즘 : 마조히스트는 고통 속에서 자신의 쾌락을 구하는 자가 아니다. 마조히스트는 오히려 진실의 시련을 받아들이는 자, 자신의 쾌락을 그 시련에 들게 하는 자일지 모른다. 진실의 시련을 끝까지 견딘다면, 나는 당신의 담론을 이긴 것이며 내 언명은 당신의 언명보다 더 강한 것이 되리라. 마조히스트와 파트너 사이의 불균형은 파트너가 명제학적 용어로 물음을 던진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네 쾌락이 무엇인지 말해봐, 네 쾌락을 보여 봐, 내가 네게 던지는 물음의 틀에 맞게 네 쾌락을 나열해봐. 역설의 활용.

마조히스트는 시련 재판 용어로 답한다. 나는 당신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늘 더 많이 견딜 것입니다. 내 쾌락은 항상 전치되고 결코 채워지지 않는 이 과잉에 있습니다. 내 쾌락은 당신이 하는 것에 있지 않고 당신의 몸짓 하나하나가 내 쾌락 앞으로 던지는 이 텅 빈 그림자 속에 있습니다.

자기 파트너의 명제학적 물음에 마조히스트는 대답이 아니라 시련 재판의 도전으로 응수한다. 당신이 나라는 존재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것의 극한에서 나는 내 쾌락을 언명하노라고.

 

변환 : 새로운 유형의 판결, 소송 절차, 선고가 이전의 원초적인 형태 옆에서 출현한다. 이것이 변환의 주요 핵심이다. 두 단어, dikazeinkrinein의 존재가 이 대립을 표시한다. 헤시오도스의 텍스트에서 작동하는 이 대립은 한편으로 상이한 두 법제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 같고, 다른 한편으로 좋은 재판과 나쁜 재판의 대립과 일치하는 것 같다.

"제우스께서 보내주시는 최선의 곧은 판결에 따라 우리의 분쟁을 해결하도록 해요. 그대는 이미 타인의 재산에서 많은 것을 낚아채 갔소. 왕들을, 뇌물 먹은 자들을 많은 뇌물로 매수해서 말이오. 그래서 그들은 그런 재판에 따라 판결을 내리려고 하는 것이라오."

이 텍스트에서 여러 가지를 기억해둬야 한다.

a : 두 재판이 원용되고 대립되는 대상은 재산과 소유와 관련된 농민 분쟁이다. 나쁜 재판은 소송인에게 속하지 않는 것을 소송인에게 귀속시키는 반면 좋은 재판은 각자가 자기 소관인 것을 획득하고 지키도록 해준다.

b : 두 경우 모두 권위에 대한 호소가 있다. 좋은 재판의 경우, 이 호소는 사전 합의를 함축하는 듯한데, 그 호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권위 앞에서 이뤄진다. 나쁜 재판의 경우, 그 호소는 왕의 권위 앞에서 일어난다.

이 수장들은 부패에 취약하다. 다른 재판이 제우스의 이름으로 주어진다. 이는 권위를, 어쨌든 다른 보증 체계를 지시하는 것 같다.

이 대립은 고르튄의 새김글에 분명하게 표명된 대립과 두드러진 유사점을 보여준다.

* 푸코는 뇌물에 좌우되는 왕들의 잘못된 판결을 가리키는 dikazein과 분쟁을 해결하기로 양측이 합의한 상태에서 제우스의 이름으로 권위가 행하는 좋은 판결을 가리키는 krinein은 구분한다. / 결정적 증거에 따라 소송 당사자들 중 한 편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이 dikazein이고, 증거가 없거나 양측의 증거가 팽팽히 맞설 때 재판관이 맹세를 하고 자기 권한으로 판결을 내리는 것이 krinein이다.

고르튄 법은 두 유형의 판결에 자리를 마련한다.

A. 첫 번째 유형인 dikazein은 소송인들만 맹세한다. 각 소송인은 자신의 증인과 함께 입회한다. 하지만 증인은 알거나 본 사람이 아니다. 증인은 소송인의 지지자이다. 증인도 서약한다. 그러나 증인은 진행될 소송에 관해 진실을 이야기하겠다고 서약하지 않는다. 증인은 진실일 수 있는 제3의 요소에 입각해 두 상대 중 누가 옳은지 판별하는 역할을 맡지 않는다.

선고는 소송 중인 사실이나 권리에 관한 자유로운 결정이 아니다. 선고는 소송 절차가 적법하게 시작되고 이어졌는지를 기록한다. 특히 선고는 증인의 수와 맹세가 갖는 무게로부터 기계적으로 내려진다.

소유 재산을 둘러싼 갈등에서는 증인 아홉 명을 모은 진술이 승리하게 된다. 재판관은 이 증언들에 구속된다. 지지하는 편의 맹세가 결정을 가져온다. 하지만 여기서 사라진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일대일 도전이며, 즉각적으로 결정되는 거부와 수용의 게임이다.

- 평등한 대결은 개인, 그의 소속, 그의 지지자의 사회적 분화로 대체된다.

-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던지는 도전은 두 사회 집단의 맞대결로 대체된다.

- 마지막으로 응수하거나 응수하지 않은 도전의 즉각적 결정 효과는 제3의 권위의 원리상 기계적인 결정으로 대체된다.

이 소송 절차의 진실은 함께 서약하는 자들의 맹세 속에서 위험 감수의 형태로 언명된다. 참을 이야기하지 않을 경우 신들의 복수에 노출되겠다는 위험 감수. 하지만 진실은 또한 선고에서 기억의 형태로 단언된다. 규칙이 잘 준수됐다는 기억, 뇌물을 바치는 매수꾼들은 왕을 이 기억의 요청에서 떼어놓을 수 있다.

모든 모욕을 기억하는 신들의 위협, 모든 규칙을 상기해야만 하는 자들의 언제나 틀릴 위험이 있는 기억. 이 기억의 이중 요소에서 이런 종류의 판결의 진실이 작동한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시간적 형상이 있다.

- 인간이 한 현재의 맹세에 대해 신들이 갖는 미래의 기억.

- 가장 오래된 규칙들에 대해 왕들이 갖는 현재의 기억. 이 두 형상과 진실이 맺는 관계는 똑같지 않다.

- 진실은 신들의 미래의 기억에 인간을 노출시킨다.

- 진실은 왕의 현재 기억에 바탕을 둔다.

- 전자의 경우, 맹세에서 진실과의 관계를 수립하는 것은 서약자이다.

- 후자의 경우, 선고에서 진실한 심판을 하는 자는 재판관-왕이다.

두 경우에서, 진실은 망각의 형태를 띤다. 인간은 자신들이 신들의 비-망각에 노출된 이상 왕의 비-망각을 요청한다. 이 진실은 은폐 또는 비-은폐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B. krinein. 고르튄 법은 이 판결 형태 곁에 다른 판결 형태인 krinein의 자리를 마련한다. 이 판결 형태는 주로 대응의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 관례에 아무런 규정이 없거나 불충분한 경우, 아마도 피해를 예측해야 하는 경우, krinein이 대신 쓰였다.

그런데 이 판결은 급속도로 확대되어, 첫 번째 판결 형태인 dikazein이 명시적으로 요구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정식으로 자리 잡게 됐다.(법에 추가되는 형식) 바로 이 krinein이 희랍의 사법 실천 공간 전체를 차츰 차지하게 된다. 겉보기에는 간단한 치환이나 배가로 이뤄지는 것 같다. , 재판관은 소송 당사자들이 맹세를 하지 않을 경우 맹세를 하거나, 양편이 맹세를 했는데도 추가로 자신도 맹세를 한다.

B-1 : 이 맹세의 본성과 기능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주 약속의 맹세로 해석됐다. 재판관은 법을 준수하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고르튄 법에 따르면 재판관은 적어도 몇몇 경우에 그 사실이 진실임을 서약해야 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확연적 맹세인가. 유산 분할처럼 많은 경우 확연적 맹세는 의미가 없을 수 있다. 그것은 특히 재판관이 자신을 노출하고 위험을 무릅쓰게 만드는 맹세이자 자신의 운명을 제 자신이 내리는 선고의 가치와 연결하는 맹세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훗날 델포이의 암픽튀오네스가 어느 계쟁에 대해 발언하기에 앞서하는 맹세와 약간 비슷하다.

"아폴론의 재산과 소유지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도록 소환된 나는 가능한 한 만사를 진실에 따라 분노와 증오 없이 판결할 것이며 (...) 내가 맹세를 어길 시에는 나를 비참하게 죽여 내게서 모든 구원을 앗아가기를." 재판관은 진실을 이야기해야 하고, 이렇게 진실과 관계 맺으면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소송인들과 똑같이 신들의 복수에 노출된다. 진실의 언명은 이제 제3자의 위치에서, 소송 당사자들의 위치에 포개지고 그 위에 정리되면서 나타난다. 재판관이 하는 맹세의 출현은 보충적인 요식 행위가 아니라 사법 담론과 실천의 전혀 새로운 배치이다.

B-2 : 이 새로운 배치가 함축하는 것은 무엇인가?

a) 소송인들의 맹세의 치환과 기능 저하. 알다시피 맹세는 거짓일 수도 참일 수도 있다. 나중에 플라톤이 "둘 중 하나는 거짓이어야 한다. 참이면서 거짓일 수 있는 맹세는 더 이상 증거 구실을 할 수 없다."고 본 것처럼 말이다. 헤시오도스도 "약한 자가 더 나은 사람을 굽은 말로 모함하고 거짓 맹세로 이를 뒷받침 할 것이오." 라고 말했다. 이제 소송 당사자들은 진실을 소지한 자로서는 실격이다. 하지만 이 기능 저하는 치환에 의해 배가된다. 맹세는 사실 소송 당사자들에게 존속하지만 소송을 개시하는 의례로 기능한다. 맹세를 통해 소송 당사자들은 자신들이 재판관에 호소하고 있음을 표명한다. 소송 당사자들은 각자가 모순되는 두 테제를 지지하고 있으며, 자신들이 동시에 소송을 청구하기로 했음을 알린다.

"나는 내가 죽이지 않았다고 서약합니다." 혹은 "나는 그가 죽였다고 서약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진실을 언표하는 것이 아니라 소송을 의례적으로 개시하는 것이다.

이런 판결 형태에서 소송 당사자들의 맹세는 더 이상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소송의 조직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이제 우리는 맹세의 힘이나 무게만 갖고는 상대를 이길 수 없고, 자기 쪽에 재판관의 결정을 수반할 때에만 상대를 이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송 당사자들의 맹세는 새로운 투쟁 공간을 의례적으로 여는 구실을 한다. 그 공간에서 투쟁은 상징적으로 전개되며, 재판관의 최고권을 받아들인다.

b) 하지만 재판관의 맹세는 선고의 새로운 기능을 함축하기도 한다. krinein에서 재판관의 선고는 상대 중 한쪽의 승리를 기록하는 데, 출석한 힘들을 비교하고 승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선고는 승리를 부여한다. 무엇에 의거해서 그렇게 하는가? 어떤 측정 원리를 참조해 그리 하는가? 이 선고를 정당화하는 건 무엇인가?

희랍의 사법 실천이 확실한 실마리가 된다. 고전기 말까지 발견되는 한결같은 사법 실천 원리 가운데 하나에 따르면 모든 행위는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의도한 것이어야 한다. 검사, 검찰, 공적인 판사 따위는 희랍 법에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두 상대가 있고 그 중 한쪽이 다른 한쪽을 고소하고, 고소당한 쪽은 자기변호를 해야 한다.

형사소송에서 피의자를 고발하는 건 도시나 국가나 사법 기관의 소관은 아니다. 그런 고발은 피해자나 그의 친지가 한다. 살해의 경우에는 망자의 친지가 한다. 선고는 개인들 사이에서 진행되는 배상 절차라는 기반 위에서 장소를 갖는다. 선고는 배상을 정당화하고 한정지으며 조직한다. 선고는 범죄가 적절하게 벌충되도록 애쓴다. 우리의 형법 전체를 곤경에 빠뜨리는 커다란 물음(피고는 죄인인가?)은 희랍 법에는 낯설다. 법에서는 사실상 범죄가 제대로 배상됐는가라는 물음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데모스테네스와 그 후대까지 유효하게 지속되는 드라콘의 입법은 배상에 관한 입법인 것이다.

드라콘의 입법은 배상을 요구할 권리, 배상이 충분하다고 선언하거나 배상을 중단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지 자세하게 명시한다. 드라콘의 입법은 언제 배상의 직접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지 명시한다. 드라콘의 입법은 또한 죄인이 추방됐을 때나 피해자가 노예인 경우 배상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명시한다. 반대로 범죄의 성질과 관련해, 범죄가 그 자체로 무엇인지에 대해 드라콘의 입법은 초보적이다. 정당방위에 의한 살인, 살해, 비고의적 살인 등. 범죄사건에서 재판관이 선고를 내리는 주요 목적은 배상의 지불명령을 주재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민사소송은 어떠한가? 역설적이지만 선고의 역할은 동일하다. 계약 관련 소송에서 계약 불이행은 항상 피해로 간주된다. 선고의 역할은 하나의 권리가 한 주체에게 귀속된다고 선언하는 데 있지 않다. 선고는 주체적 권리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 그것은 권리의 주체를 인정하는 것과 무관하다. 중요한 것은 귀속, 보상, 배상의 게임이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이뤄지느냐이다. 희랍의 사법 실천은 자신의 진실 속에 있는 주체의 권리들에 의거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사물의 귀속과 유통에 부합하며, 사물의 공정한 순환에 부합하는 분배와 배상에 의거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krinein의 정의와 상관적으로 dikaion(공정한 것)이라는 새로운 관념이 출현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일과 날>에서 도시국가의 행복과 불행을 논하는 중요한 대목이 나온다. 이 유명한 대목에서, 왕이 dikaion의 원리에 따라 심판을 하지 않으면 일련의 온갖 불행이 뒤따름을 볼 수 있다. 무엇이 그런 불행이며 불행은 어떻게 분배되는가?

그리고 인과성 자체가 변경된다. 호메로스의 pre jure(-)에서는 제우스의 의지가 직접적으로 간청됐다. 헤시오도스에게서는 dike가 매개자 노릇을 한다. 왕이 판결을 잘 내리지 못할 때에는 dike가 대지를 잠시 떠나 제우스의 복수를 간청한다.

불공정의 효과는 정의의 부재다. 현전하는 정의는 도시의 행복의 징표인 동시에 보증이다. 이와 동일한 뜻에서 아라토스는 세 시대를 묘사한다. 첫째, 황금 시대. 정의가 공공장소와 네거리에 현전하는 시대. 둘째, 은의 시대. 정의가 산등성이로 물러났다가 해질녘에 불타오르는 시대. 셋째, 청동 시대. 정의가 천공으로 물러나 밤에만 반짝이는 시대.

dikaion은 세계의 질서와 연결된다. 세계에 현전하는 dike는 인간의 행복이 공정한 판결과 호응하도록 보장한다.

로마의 법사상 범주에서 공정은 주체의 진정한 권리와 관련되고, 로마 재판관의 공정한 선고는 정말로 참된 법을 이야기해야 하지만,

- 왜 판결은 권리를 선언하거나 구성하는 기능을 갖지 않고 오히려 배상, 재분배, 보상 같이 몫을 배분하는 회로 안에 스스로를 집어넣는가.

- 참과 거짓은 판결 안에서 어떻게 분배되고 기능하는가. 참과 거짓은 소송인들의 맹세와 관련해, 재판관의 맹세와 관련해, 공정과 불공정과 관련해 어떤 역할을 하는가.

- 재판은 어째서 직접적으로 정당한 권리로서 정치적인가. 재판은 도시에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 가운데 하나이다. 도시의 유대를 적절히 묶고, 각자의 자리가 다른 자들의 자리와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도록 신경을 쓰는 것이다.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a) 재판을 맡는 것은 바로 정치적 권위라는 것. (b) 재판을 맡는 인간이라면 누구든 그 사실로 인해 도시의 정치에 종사한다는 것이다.

사법 담론은 직접적으로 정치 담론으로 인정받는다.

결국 왜 공정한 것(dikaion)을 이야기하고, 동시에 사물의 질서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는가? 법을 만드는 자는 동시에 세계의 배열을 이야기하는 자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노래나 지식과 자신의 명령과 최고권을 연동함으로써 세계를 돌본다. 거꾸로 세계의 질서를 인식하는 자는 인간과 도시에 가장 좋은 것과 가장 공정한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할 것이다. 법이라는 개념은 중심적이며 애매한 것이 된다. krinein의 법적 형태로부터 dikaion, , 세계의 질서, 도시의 배열과 연관된 독특한 유형의 참된 담론이 출현한다. 그 담론은 여전히 우리의 참된 담론과는 거리가 멀지만 우리의 것은 그것으로부터 다양한 변환을 거쳐 파생된다.

 

결론

krinein과 더불어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진실 언명이 사법적 담론 및 실천 속에서 구성된다. 이 진실 언명은 재판 담론이 최고권이 행사되는 곳인 정치 담론과 소통하게 만들고, 세계의 질서가 언표되는 곳인 지식 담론과 소통하게 만든다. 바로 이 담론은 솔론과 엠페도클레스, 즉 정의의 왕, 성문법의 시인, 진리의 대가에게서 가장 수준 높게 정식화된다. 이런 유형의 언명은 소피스트들과 함께 사라진다. 아니 차라리, 소피스트에게서 발견된다. 자연에 대립되는 법의 언명, 진실이 없고 모든 담론이 참이라는 언명, 보편적 지식의 언명, 지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언명, 재판을 가르칠 때 쓰는 언명, 모든 소송에서 승리하게 만들어주는 언명. 희랍의 낡은 진실은 넋을 잃고 삼분오열됐다.

헤시오도스가 뇌물을 먹는 왕들의 dikaion에 대립시켰던 krinein에서부터, 고르튄 법에 의해 제도화된 이 krinein에서 상대를 쓰러뜨리는 담론과 논변을 판매하는 상인들에 이르기까지, 여정은 길었는데 크게 세 단계를 거쳤다.

1) 고정된 성문법의 확립, 즉 어느 정도 공정과 사법 실천을 규제하는 법의 확립. 이는 소송을 좌우하는 결정적 계기에 입각해 내려지던 귀족적, 전사적 심판이 처음으로 대패했음을 나타낸다. 승리하는 사법적 발언은 이제 무게가 더 나가는 저주의 발언이 아니라 법에 부합하는 발언이다. 이것이 Eunomia(조화, 좋은 행정)이다.

2) 정치-사법 권력의 수립. 이 권력은 도시의 형태를 띠고, 부와 출생의 불평등과 관계없이 원리상 모든 시민에게 동일하게 행사된다. 이것이 솔론의 시대이다. 이것이 Isomonia(법 앞에서의 평등)이다.

3) 마지막으로 몇몇 도시에서 일어난 인민의 권력 장악. 이는 참주정을 통해서 또는 참주정에도 불구하고 또는 참주정에 이어서 일어났다. 하지만 지금 되새겨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krinein의 출현, 즉 공정하고 참된 담론의 사법적 제도 및 실천을 통해 확립된 krinein의 출현을 설명할 수 있는 정치사이다. 그리고 krinein의 변환을 설명할 수 있는 정치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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