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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역사 2부 1장 발제.hwp

광기의 역사21종들의 정원에서의 광인발제

 

알료샤

 

18세기의 이성인들 사이에서 수수께끼 같은 광기를 지니고 있는 광인이란 무엇일까? 다양한 모습을 획일적 가면으로 가리게 되어 있는 광인을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 어떻게 실수하지 않고 광인을 가려낼 것인가? 이것들은 학자보다는 현자가, 의사보다는 철학자가, 비평가, 회의주의자 등 주의 깊은 무리 전체가 자문하는 문제이다.

이성의 견지에서 본성을 문제삼고 본성을 가로질러 이성을 검토하는 두 가지 방식. 만일 이것들을 번갈아 시도하다가 우연히 이것들의 차이 자체에서 동일한 대답이 솟아오른다면, 그 구조는 아마 고전주의 시대가 광기에 대해 할 수 있었던 경험에 들어 있는 본질적이고 일반적인 것과 아주 가까울 것이고, 우리는 비이성이라는 말이 뜻하게 되어 있는 바의 한계 자체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307~308

 

17세기부터 광기는 서서히 이성의 영역으로 옮아갔다. 마침내 광기의 본질은 광기가 은밀한 이성이라는 점, 적어도 광기가 이성에 의해, 이성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이성에 의해 사전에 관리되고 이성 속에서 이미 소외된 상태로만 세계에 현존한다는 점이다.

정신착란자, 미치광이, 조광증에 시달리는 자가 곧장 식별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식별이 가능해지는 것은 그들이 광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정신 장애에 고유한 징표가 모든 광기의 지각되지 않는 본질에 덧붙여지는 특별한 방식으로 그들의 망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의사이면서도 동시에 박물학자인 부아시에 드 소바주는 먼 나중에 광기가 결코 즉각적으로 자명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18세기가 더 이상 광기를 정의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시기에 광인이 식별될 수 있는 그토록 성급하고 그토록 오만한 확실성, 바로 여기에 아마 중요한 구조가 있을 것이다. 광인의 즉각적으로 구체적이고 명백하며 뚜렷한 성격, 광기의 막연하고 아련하며 거의 인식할 수 없는 윤곽, 여기에는 결코 역설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상보 관계가 놓여 있다. 광인은 너무나 직접적으로 그에게서 광기의 일반적 담론을 알아보기는 어렵다. 광인은 정확한 삶의 모습, 이를테면 광인이 그야말로 정확하게 지칭되는, 개인적이고 동시에 익명성을 띠며 감지되기가 무섭게 사라지는 광기의 한 모습으로만 나타날 뿐이다. 308~315

 

광인은 존재양태가 분명하지 않으나 다르기때문에 의심의 여지없이 식별된다. 18세기에 타자성에 대한 이와 같은 의식은 명백한 동일성 아래 전혀 다른 구조를 감추고 있고, 확실성이 아니라 일반 규칙에 따라 표명되며, 주체가 위태롭게 되지도 명증한 것의 형태로 불려나오지도 않는 대면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서 광인인 그 특이한 타자로 나아가면서 외적인 관계를 내토한다.

광인의 모습은 외부공간에 뚜렷이 부각되고 광인을 규정하는 관계는 전적으로 합리적 주체의 견지에서 객관적 비교작용을 통해 광인을 드러나게 한다. 광인은 저 사람은 광인이다라고 선언하는 주체 사이에 거리가 넓어지는데, 이것은 더 이상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의 데카르트적 공백이 아니라, 이중의 충만한 타자성 체계에 의해 점유되어 있는 것이다. 광인은 어느 정도 보편적인 다른 사람들의 집단 내에서 다소간 다른 사람이다. 광인은 상대적이게 되지만, 이로 인해 위험한 힘을 더 많이 박탈당할 뿐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유에서 이성과의 내적 유사성이 이성의 중심부에 지나치게 가까이 위험스럽게 실재함을 형상화하는 인물이었던 광인은 이제 다른 사람들의 외부에서 타자의 차이를나타내므로, 이중의 안전장치에 의해 세계의 다른 극단으로 떠밀리고 따로 놓이며 걱정하지 않아도 될 상태로 유지한다. 광기는 다른 편에 있으면서 동시에 이성의 시선아래에 있다. 다른 편에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명증성 속에서 광기가 즉각적으로 파악되는 차이, 순수한 부정성, 비존재로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광기는 이성의 완전한 부재인데, 사람들은 광기를 이성적인 것의 구조라는 바탕 위에서 그러한 것으로 곧장 인식한다.

광기에 대한 이중의 이해, 즉 이성적인 것에 바탕을 둔 도덕적 이해와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객관적이고 의학적인 이해는 어느 시대에나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했다고들 서슴없이 반박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광기라는 커다란 문제를 따로 제쳐놓는다면, 적어도 라틴 시대부터는 광기에 대한 의식이 이러한 의원성에 따라 나누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18세기에 일어난 것은 관점의 점진적 변화로서, 이 변화에 힘입어 이성적인 것의 구조와 합리적인 것의 구조는 서로 달라붙어 마침내 구별하기가 오랫동안 불가능하게 되는 매우 치밀한 조직을 형성했다. 과인은 순수한 차이, 전형적 이방인, 이중의 위력을 지닌 타자로서 이러한 거리두기 자체를 통해 곧바로 합리적 분석, 풍부한 인식, 명백한 지각의 대상이 될 것이고, 정확히 저것임에 따라 이것일 것이다. 광인은 이성에서 멀어지지만, 이성인에게서 본래의 모습대로 재발견되는 이미지, 신앙, 추론을 문제삼게 하면서 멀어진다. 그러므로 광인은 자기 자신을 미친 사람으로 생각할 수가 없다. 광인은 다만 이성의 행사를 이성 자체와 구별할 수 있는 제3자의 눈에만 미친 사람일 수 있다.

따라서 18세기에 생겨나는 광인인식에는 가장 실증적인 것과 가장 부정적인 것이 착잡하게 뒤섞여 있다. 실증적인 것은 비록 이성이 엉뚱한 모습을 보일지라도, 이성 자체와 다른 것이 아니고, 부정적인 것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광기가 기껏해야 이성의 허황된 모사물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광기는 이성에 부정적인 일정 부분을 약간 더 한 것이고, 이성에 가장 가깝고 가장 확고부동한 것이며, 지울 수 없는 지표가 달린 이성이다. , 비이성이다. 315~321

고전주의적 사유는 광기가 무엇이냐라는 측면에서 검토하고자 할 때, 광인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에서 검토를 시작한다. 18세기에 분류학자들의 커다란 관심은 신화적 폭과 끈기를 갖는 지속적 은유에 의해 고조되는데, 그것은 질병의 무질서에서 식물의 질서로의 전이이다. 사이든햄은 식물학자들이 식물론에석 기울인 세심한 주의와 정확성을 그대로 본받아 인간의 수많은 질병을 체계적인 질서 속으로집어넣기를 권고했다. 식물학자들의 영역은 병리학의 세계 전체를 조직화하게 되고, 질병들은 이성 자체의 질서 및 공간에 따라 분리된다.

질병은 아무리 하찮은 발현에서도 신의 지혜를 부여받게 되고, 전능한 이성의 예지력을 현상의 표면에 펼치게 된다. 질병은 이성의 활동이자 활동 중인 이성이다. 질병은 질서를 따르게 되고, 질서는 각 증후의 조직화 원리로서 은밀히 현존하게 된다.

16세기의 의학이 증거하는 첫 번째 자연화에 비해 이 두 번째 자연화는 새로운 요구를 내보인다.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아직도 비현실, 환상, 상상적인 것으로 온통 물들은 준자연, 환각과 속임수의 자연이 아니라, 이성의 완전하고 확고한 충만함인 자연이다. 이것은 광기가 질병으로서 이제 편입되어야 하는 새로운 공간이다. 322~328

 

광기가 의학 이론의 이 새로운 규범에 뚜렷한 어려움 없이 통합되었다는 것은 역설이 결코 없지 않은 이 역사에서 또 하나의 역설이다.

광기의 분류에 관한 몇 가지 사례를 대조해보자. 파라켈수스는 원인이 달에 있고 행동이 겉보기에는 명백히 불규칙적인 듯하지만 내밀하게 달의 상과 움직임에 따라 결정되는 질병 루나티키(달의 영향을 받아 주기적으로 광기가 발작하는 사람들)., 출생하기 직전에 어머니의 가슴에서 병을 얻지 않았다면 유전 때문에 병이 생긴 인사니, 과음과 음식물 오용으로 인해 감각과 이성을 잃은 베사니, 내적 본질의 어떤 결함 때문에 광기의 성향이 있는 멜란콜리기를 구별했다. 이것은 원인들의 순서가 우선 외부세계에서, 다음으로는 유전과 출생, 영양의 결핍을 거쳐, 마지막으로 내부의 장애로 유기적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전체적으로 논리를 갖추고 있고 일관성을 부인할 수 없는 분류이다.

그러나 고전주의는 이러한 종류의 분류법을 거부한다. 분류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우선 각 질병의 형태가 무엇보다도 다른 질병들의 형태 전체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고, 다음으로 질병 자체가 외부의 결정요소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체의 다양한 양상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질병이 철저하게 인식될 수 없다면 적어도 자체의 고유한 표시들로부터 확실하게 식별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이상을 향한 진전은 플라테르에서 린네나 바이크하르트까지 추적할 수 있고 광기는 광기의 본질이자 동시에 가능한 모든 질병의 완전한 본질인 것으로부터만 확실히 분류될 수 있다고 간주되었다. 328~331

 

광기의 형태들을 증세와 징후에 따라 분류하는 계획 자체에 일종의 모순이 내포되어 있는 듯이, 마치 광기가 스스로 내보일 수 있는 것에 대한 광기의 관계가 본질적 관계도 진실관계도 아닌 듯이, 분류활동은 심한 저항에 부딪혔다. 광기는 홀로 자체의 발현에 책임을 질 수 없고, 인식 가능성의 논리적 영역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가능한 빈 공간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이 영역의 기원과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은 바로 광기의 바깥에서이다.

원칙적으로 광기의 분류는 인간의 정신에 고유한 무질서의 견지에서 인간의 정신적 역량만을 검토하는 것이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아놀드는 정신의 두 가지 주요한 능력에 따라 광기의 가능성을 인식한다. 관념에, 표상적 요소의 특성과 그것이 나타낼 수 있는 진실의 내용에 영향을 미치는 광기가 있고, 개념의 진실이 갖는 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광기가 있다는 것이다. 관념적 정신이상은 열광, 비논리성, 강박관념을 내보이는 정신착란을 포함한다. 반대로 광기로 인해 개념들 사이에서 무질서가 초래될 때에는, 광기가 환각, 환상, 엉뚱함, 충동, 음모 등등 아홉 가지 서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정념의 광기는 사랑, 질투, 인색, 인간 혐오, 노파심, 열광 등 16가지 변종이 있다. 이 대목에서 점진적 변화가 눈에 띈다. 광기가 나누어지는 구체적 다양성에 접근함에 따라, 광기가 실제적 인간의 특성을 띠는 그 표면에 다다름에 따라, 광기가 그만큼 많은 성격으로 다양화되고 질병학이 도덕적 인물묘사의 진열실처럼 보이거나 거의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기가 구체적 인간과 합류하고자 할 때, 광기의 경험은 도덕과 마주친다.

정신질환의 체계화 작업은 결코 광기 자체의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광기는 자체의 진실을 입증할 수 없다. 도덕적 판단이건, 물리적 원인의 분석이건 다른 어떤 것이 개입해야 한다. 방종의 측면을 포함하는 정념이나 과오가 개입하거나, 동물 정기와 신경계의 엄밀하게 결정된 역학이 개입하거나 해야 한다. 고전주의적 사유에는 도덕과 역학, 방종과 육체, 정념과 병리학이 통일성과 동시에 기준을 갖게 되는 영역이 있다. 그것은 오류, 망상, 추정이 깃들여 있고 육체의 모든 메커니즘이 요약되어 있는 상상력이다. 오류 및 과오와 다른 한편으로는 육체의 장애 사이에서 중간에 위치한 이와 같은 상상력에 고전주의 시대의 의사와 철학자는 정신착란이라는 명칭을 부여하기로 합의하는 것이다. 334~340

 

19세기부터 그토록 폄하되고 웃음거리로 변하게 되는 새로운 병리학의 세계에서 중요한 어떤 일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아마 의학의 역사에서 최초로 생겨난 현상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환자에 의해 악이 제시되고 의사에 의해 악의 제거가 제안되는 이중의 투사와 이론적 설명이 일치하게 된 것이다. 신경질환이 치료의 복잡성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때 탄생하는 것은 의사와 환자가 최초의 대화를 시작하게 되는 상징과 이미지의 세계 전체이다.

그때부터 18세기를 따라 의학이 발전하는 가운데 의사 환자의 짝패는 의학의 핵심적 요소가 되어 간다. 광기의 세계를 새로운 방식에 따라 조직하는 것은 바로 상상적 형상을 통해 소통이 이루어지는 이 짝패이다. 데우기나 식히기, 강장이나 긴장해소의 치료법, 의사와 환자에게 공통된 상상적 실현의 노력 전체는 분류법에 점점 더 동화될 수 없게 될 병적 형태들을 드러나 보이게 한다. 이러한 병적 형태들도 역시 사라졌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앎의 진정한 작업이 실행된 것은 바로 이 형태들 안에서이다.

 

출발점을 다시 떠올려보자. 한편에는 광기에 대한 추론적 인식이 될지도 모르는, 매개과정 없이 광인을 직접적으로 식별한다고 주장하는 의식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광기를 나타내는 모든 징후와 함께 광기의 모든 형태를 잠재성에 입각하여 펼쳐 보일 수 있다고 자처하는 과학이 있다. 이 둘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공백이 있을 뿐이다.

만일 정신병을 정신이상자의 자연적 모태, 인식되는 광인과 분석되는 정신장애 사이의 매개물, 요컨대 광기와 광인의 관련성으로 이해한다면, 고전주의 시대에는 정신병이 실재하지 않은 셈이다. 광인과 광기는 서로 무관하며, 광인과 광기의 진실은 각각에 별도로 간직되어 있고 광인과 광기 안에 몰수되어 있는 듯하다.

비이성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것, 즉 오성의 시대에 속하고 광인과 그의 광기를 서로 무관한 것으로 만들면서 서로 소외시키는 그러한 깊은 균열이다.

비이성은 비이성이 어렴풋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이러한 공백 이상의 것이다. 광인의 인식은 결국 이성 자체만을 내용으로 갖는 것이었고, 질병의 종류들 사이에서 광기의 분석은 천부적 지혜의 올바른 명령을 원리로 했으며, 그래서 광기의 충만한 실증성이 탐색되는 바로 거기에서 이성만이 재발견되었고, 이런 식으로 광기는 역설적이게도 광기의 부재 겸 이성의 보편적 현존이 되었다. 광기의 광기는 은밀하게 이성이라는 것이다. 비이성은 광기의 진실이 이성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준이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 장들에서 철저한 해명이 시도될 세 번째 근본적 특징이다.

우리는 질병과 식물의 역사라는 방식을 통한 광기의 자연화 계획이 어떤 장애에 부딪혔는지 살펴보았다. 그토록 많은 반복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광기는 종들의 합리적인 질서 속으로 결코 완전히 편입되지는 않았다. 심층에서 다른 힘들, 개념들의 이론적 차원과 무관하고 이론을 마침내 뒤엎을 정도로 이론에 저항하는 다른 힘들이 계속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서 작용하는 그러한 힘들은 도대체 무엇일까? 여기저기에서, 광기의 인식과 광인의 식별에서 은밀히 전개되는 동일한 원리가 이성을 농락하는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비이성의 본질과 생생한 힘을 고전주의 시대에 이루어진 광기의 경험의 은밀한 중심으로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천천히 세부사항별로 논의를 진행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 다시 말해서 광기의 자연화와 합리적 차원으로의 광기의 투사에서 마주치게 된 장애로부터 역사가의 경건한 태도로 나아가야 한다. 우선 광기의 형태로 간주되는 정념과 상상력과 정신착란의 선험성, 다음으로 고전주의 시대에 광기의 영역을 유기적으로 구성하고 생성시키는 전통적 형상들, 마지막으로 치료술의 상상계에서 일어나는 의사와 환자의 대면을 하나씩 분석해야 한다. 비이성의 실증적 힘들, 비이성이라는 비존재, 광기의 그 공백, 부재의 상관항이자 동시에 보상인 변화는 아마 거기에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 이 변화에 활기를 불어넣는 힘들을 우리는 인식의 표면에서 이론적 개념들의 진전으로 묘사하지 않으려고 애쓸 것이고, 경험의 두터운 역사를 뚜렷이 드러냄으로써 광기의 인식, 즉 우리의 인식이자 프로이트 학설조차도 그런 용도로 생겨난 것은 아니기에 우리로부터 떼어놓지 못한 그러한 인식이 마침내 가능하게 된 동향을 다시 파악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필연적으로 지식, 의학, 의사를 수반하는 광기, 비장감을 주는 정신병에 완전히 포함된 광기의 그 끈질기게 되풀이된 현존이 근대 세계에서 정말로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를 자문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아니지만, 그러한 인식 속에서 광기는 마침내 현존하고, 비이성은 저절로 사라졌다. 34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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