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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역사 / 미셸푸코 / 2부 서론 / 2018.04.08.() / 닥홍

 

180408 광기의역사 2부 서론 닥홍.hwp

이제 재론할 때가 된 사소한 진실은 광기에 대한 의식이 적어도 유럽문화에서는 덩어리를 형성하고 균질적 전체로서 변모하는 무더기 상태의 현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서양의 의식에서, 광기는 조금씩 이동하고 윤곽이 변하며 형상이 아마 진실의 수수께끼를 담고 있을 성좌를 형성하면서, 다수의 지점에서 동시적으로 솟아오른다. 언제나 부서지는 의미.

어떤 비일관성은 아마 광기의 경험에 가장 본질적인 것이고, 발전적 도식을 환기시킬만한 그 어떤 다양한 구상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비일관성의 분산상태가 아마 광기의 경험에서 본래적 여건에 가장 가깝고 가장 근본적인 것과 관련될 것이다. 근대 세계는 정신병의 차분하고 객관적인 용어들로만 광기에 관해 말하고 병리학과 박애의 혼합된 의미를 통해 광기의 비장한 가치들을 말소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 시대를 비롯하여 어느 특정한 시대에 광기가 갖는 의미는 기획의 적어도 구상된 통일성에서가 아니라 그러한 파열된 현존에서 찾아야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러한 논쟁은 끈질기게 다시 일어난다. 다시 말해서 언제까지나 축소될 수 없는 동일한 의식형태들을 변함없는 화해의 어려움 속에서 다양한 형식으로 끈기 있게 다시 문제 삼는다.

(1) 광기에 대한 비판적 의식은 합리적인 것, 반성적인 것, 도덕적으로 현명한 것을 바탕으로 광기를 알아보고 가리킨다. 이것은 개념이 고안되기도 전에 전적으로 판단에 몰입하식 의식, 정의하지 않고 규탄하는 의식이다. 이것은 결코 미치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2) 광기에 대한 실천적 의식. 이 의식은 사회적이고 규범적이며 처음부터 견고하게 뒷받침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극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며, 집단의 연대성을 함축한다 해도 분할의 긴급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분할 속에서 언제나 위태로운 대화의 자유는 소멸되었고, 광기를 침묵으로 몰아넣어야 한다는 확고한 믿음만이 남아 있다. 진실을 보유한다고 확신하므로 차분하지만 광기의 수상한 힘을 알아보고는 불안해하는 애매모호한 의식. 이제 광기는 이성에 대해 무장이 해제된 것으로 보이지만, 질서에 대해서는, 사물과 사람의 규칙 속에서 이성이 스스로 드러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상한 잠재력을 발휘한다.

적어도 근대의 수용시설을 정당화하고 그것의 필요성을 밑받침하는 모호한 의식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나환자 수용소의 유산이 전혀 없지는 않다. 광기에 대한 실천적 의식은 오직 그 투명한 궁극적 목적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듯한 것으로서, 아마 도식적 의례의 면에서 가장 조밀하고 옛 비극적 사건들로 가득 찬 의식일 것이다.

 

(3) ‘광기에 대한 언술적 의식저 사람은 광인이다라고 당장, 그리고 앎에 의한 어떤 우회도 없이 말할 가능성을 낳는다. 여기에서는 광기를 규정짓거나 실격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실생활에서 광기를 가리키는 것이 문제이고, 반론의 여지없이 미친 어떤 사람, 분명히 미친 어떤 사람, 이를테면 모든 자질과 모든 판단 이전에 광기인 단순하고 완강한 부동의 삶이 사람들의 시선 앞에 놓여 있다.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요컨대 단순한 지각적 이해일 뿐이므로 광기에 대한 모든 의식 중에서 가장 차분한 의식이다.

 

(4) 광기에 대한 분석적 의식, 광기의 형태와 현상, 그리고 출현방식에 대해 전개되는 의식. 아마 그러한 형태와 현상 전체가 이 의식에 현존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오랫동안, 어쩌면 영원히 광기의 힘과 진실은 핵심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 속에 감춰질 것이지만, 광기가 잘 알려져 있는 것의 평온함과 합류하는 것은 바로 이 분석적 의식 속에서 이다.

 

광기에 대한 네 가지 형태의 의식은 각각 변함없는 준거나 정당화 또는 전제의 구실을 하는 한 가지 또는 여러 가지 다른 의식형태를 보여준다. 그러나 어떤 형태도 다른 형태에 전적으로 흡수되지 않는다. 네 가지 형태의 관계가 아무리 밀접하다 해도, 그것들은 결코 전제적이고 결정적이며 획일적인 형태의 의식 속에서 통일적인 어떤 것으로 축소 될 수 없다. 이 네 가지 형태 각각은 본질, 의미 토대의 측면에서 자율성을 갖는 것이다.

 

* p299

 

르네상스 시대와 함께 미치광이의 비극적 경험이 사라진 이래, 광기의 모든 역사적 형상은 이 네 가지 의식형태의 동시성, 이것들 사이의 모호한 알력과 동시에 끊임없이 매듭이 풀리는 통일성을 내포하고 광기의 경험에서 변증법적 의식, 의례적 분할, 서정적 인정, 마지막으로 앎의 영역에 속하는 것의 균형은 매 순간 이루어지고 흐트러진다. 근대 세계에서 광기가 띠는 연속적 모습들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이 네 가지 주요한 요소 사이에 확립되는 비례와 관계의 특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어떤 요소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고, 다만 언어의 차원 아래에서 지배하는 긴장과 갈등이 생겨나는 준 모호성에 다른 요소들을 묶어둘 정도로, 네 가지 요소 가운데 어느 하나가 특권적 위치를 점하는 일이 일어난다. 또한 이 의식형태들 중의 이런저런 것들이 결합되어 나름대로의 자율성과 고유한 구조를 갖는 넓은 경험영역을 구성하는 일도 일어난다.

르네상스 시대에서 오늘날까지 긴 연대기를 생각할 때, 비판적 의식 형태에서 분석적 의식형태에서 분석적 의식형태까지 광기의 경험을 굴절시키는 광범위한 동향을 필시 재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는 광기에 대한 변증법적 경험에 특권적 자리를 부여했다.

고전주의 시대에 광기의 경험은 광기의 두 가지 자율적 영역을 규정하는 분할에서 균형을 취한다. 한편에는 비판적 의식과 실천적 의식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인식과 식별의 형태가 있다. 하나의 영역이 따로 떨어져 나와, 광기를 비난하고 배제하는 관행과 판단 전체가 거기에 모아질 뿐만 아니라, 이성에 가까운, 너무 가까운 것, 우스꽝스러운 닮음으로 이성을 위협하는 모든 것은 폭력의 방식으로 분리되고 엄격한 침묵으로 내몰리며, 수용의 행위가 은폐하는 것은 바로 합리적 의식의 이 변증법적 위험이자 구세주 격인 이 분할이다. 수용의 중요성은 수용이 새로운 형태의 제도라는 점이 아니라 수용이 광기에 대한 고전주의 시대의 경험의 절반, 즉 의식의 변증법적 불안과 관례적 분할의 반족이 실천의 일관성으로 조직되는 형상을 요약하고 드러낸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다른 영역에서는 이와 반대로 광기가 표면화 된다. 광기는 존재하는 바로 거기에서 자체의 진실을 말하고 스스로를 규탄하는 경향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현상 정체로 펼쳐지는 경향을 내보이며, 세계 안에서 본성과 실증적인 현존 방식을 획득하려고 한다.

고전주의 시대를 특징짓는 것은 거북함도 통일성을 향한 갈망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한 세기 반 동안 광기는 엄밀하게 분할된 상태에 처해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자명해지는 증거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수용이 결코 의료실천이지 않았다는 점, 수용을 통해 실행되는 배제의 의례가 실증적 인식의 공간으로 통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수용시설로 의료영역이 도입되기 위해서, 수용자에 대해 그가 광인인지 아닌지를 알아내는 것이 문제로 제기되기 위해서는 의회의 한 법령을 기다려야 했다.

광기는 한편으로는 완전히 배제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히 객관화되어, 스스로나 광기에 고유할 언어를 통해서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광기 안에 모순이 살아 있다기보다는, 광기가 모순의 항목들 사이에서 분할된 채로 존속하는 셈이다. 서양 세계가 이성의 시대에 내맡겨져 있는 동안, 광기는 오성의 분열에 종속되어 있다.

 

* p303

 

수용의 실천에 의해 유발된 광기의 후퇴, 친숙한 사회유형으로서의 광인이라는 인물의 소멸, 앞으로 이어질 장들에서 우리는 이러한 현상들의 결과나 원인을, 더 객관적이고 더 정확한 방식으로 말하자면 광기에 관한 이론적이고 과학적인 성찰들 중에서 이러한 현상들과 상응하는 형태를 아주 쉽게 알아볼 것이다.

고전주의 시대에 광기에 대한 의식형태들 사이에서 실행된 분할은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의 구분과 일치하는 것이 아닌 듯하다. 광기에 대한 과학 또는 의료의식은 비록 치료의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의식이라 해도, 틀림없이 광기의 징후를 없애거나 광기의 원인을 제어하게 해줄 활동체계에 사실상 진입하게 마련이며, 다른 한편으로 광인을 분리키시고 단죄하며 사라지게 하는 실천적 의식은 당연히 사회 안의 개인에 대한 어떤 정치적, 법률적, 경제적 이해방식과 뒤섞여 있는 법이다.

수용이라는 광범위한 관행 아래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분할의 실천적이고 또한 이론적인 계기이고, 배제라는 오래된 참극의 반복이며, 광기제거의 동향에 입각하여 광기를 평가하는 형식이다. 우리가 곧 마주치게 되는 것은 광기의 가장 명백한 징표들에 비추어 보건대 광기가 오류, 환상, 환각, 허망하고 내용이 없는 언어로만 나타나므로 비존재라고 할 수 있는 존재로부터 광기의 진실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전개되는 현상이다. 이제는 광기의 본질이 비본성으로부터 광기를 본성으로 구성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무로 앞에서 문제되었던 것은 존재의 삶을 폭력적으로 말살함으로써 존재를 구성하는 것이었으나, 이제 문제되는 것은 차분한 앎을 통해 비존재의 폭로로부터 본성을 구성하는 것이다.

고전주의 시대에 비이성은 그 자체로 통일이자 동시에 분열이다.

고전주의 시대의 문화에 의해 광기에 내포되어 있다고 인정된 최대 및 최소의 위험은 바로 비이성이라는 용어가 표현하는 것이다. 단순하고 직접적이며 곧장 마주치게 되는 이성의 이면이자, 조금 전에 사라졌지만 비이성에 대해서는 언제나 현재적 모습의 존재 이유인 이성의 자국만이 나타나 있을 뿐인, 내용도 가치도 없고 순수하게 부정적인 그 텅 빈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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