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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역사 / 미셸푸코 / 14장 광기의 경험 / 2018.04.01.() / 닥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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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빈원이 창설되고 독일과 영국에서 최초의 교도소가 개설된 시기에서 18세기 말까지 고전주의 시대는 감금의 시대이다. 이 고전주의 시대에는 방탕한 사람, 낭비벽이 심한 아버지, 탕아, 신성모독자, 자살하려고 애쓰는 사람, 자유사상가가 감금당한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결합과 기이한 연계성을 가로질러 고전주의 시대에 특유한 비이성의 경험이 윤곽을 드러낸다.

광포함은 행동과 감성의 무질서, 품행과 정신의 무질서를 가리키는데 어떤 사람에 대해 광포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환자인지 범죄자 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고 그를 감금하는 것은 고전주의적 이성에 의해 비이성의 경험 속에서 고전주의적 이성에 부여된 권한의 하나이다. 이 권한에는 실증적 의미가 있다. 광기가 감금될 때 광기를 질병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광기가 다른 지평 위에서 인식된다는 것이다.

 

 

광인이 완전히 치안사범으로 취급되었다고 하는 주장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완전히 옳은 말도 아니다. 한편 구빈원에 의사가 한 사람 배치된 것은 그곳에 환자들을 수용한다는 것을 위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수용된 이들이 병에 걸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광기의 경험은 역설적으로 광기가 수용, 징벌, 교정의 영역에 속하게 되는 다른 경험과 동시적이다. 문젯거리가 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병렬현상이다. 고전주의 세계에서 광인의 지위가 무엇이었는가를 이해하고 사람들이 광인에 대해 가졌던 이해방식을 규정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마 이와 같은 병렬현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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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되는 정신병자들에게는 정신병의 이름만이 결여되어 있었던 셈이다. 정신병자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들과 가장 잘 식별되는 이들에게 의학적 지위가 부여되지 않았을 뿐이다. 불행하게도 상황은 더 복잡해지게 되었다. 광기가 가능한 의학적이거나 준의학적 광기인식을 통해 완전히 밝혀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 수용의 현상은 그 자체로 광기의 의학적 예속을 밝혀주는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7세기 이전에 광인이란 인물이 무엇일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로 잠시 되돌아가면 광인은 실증주의에 의해 의학적 지위를 부여받기 훨씬 이전인 중세에 이미 개인으로서 충분히 독립적인 존재였다.

그러다가 의사들이 치료를 주도하는 구빈원이 15세기 초 무렵 에스파냐에서 설립된다. 중세의 일상생활에 현존하고 중세의 사회 지평에서 친숙한 인물로 떠오르는 광인은 르네상스 시대에 다른 방식으로 인식되고, 이를테면 새롭고 특별한 단위로 재편된다. 광인은 정확히 의학적 지위를 부여받지 못한 상태에서 세계로부터 고립되면서 모호한 실천의 대상이 된다. 광인은 다른 부류가 아니라 정확히 광인에게만 관련되는 염려와 구호의 대상이 된다. 17세기에 이르러 광인은 이를테면 미분화된 무리 속으로 흡수되었고, 여러 세기 전부터 이미 개별화되어 있던 얼굴의 윤곽선이 희미해졌다. 성병환자, 방탕자, 자유사상가, 동성연애자와 함께 감금된 고전주의 시대의 광인은 개체성의 표지를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고전주의 시대의 광인은 비이성의 일반적 이해 속으로 사라진다. 르네상스 시대의 말기와 고전주의 시대의 절정기 사이에 제도의 변화뿐만 아니라 광기에 대한 의식의 변질이 일어난 것이다. 이제 이러한 의식을 보여주는 것은 수용시설, 징역 및 교정시설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광인을 분명하게 특징짓던 개체성과 중요성을 광인에게서 빼앗음으로써 광인을 새로운 경험 속으로 밀어 넣고 우리의 통상적 경험 영역을 넘어 광인의 새로운 얼굴, 우리가 순진한 실증주의에 입각하여 모든 광기의 본질을 알아본다고 믿는 얼굴 자체를 준비하는 경험에 대한 여전히 전적으로 외적인 접근방식이다.

 

p233

 

수용과 입원이 병행하는 현상 때문에 우리는 틀림없이 이 두 가지 제도적 형태의 고유한 연대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고 병원이 사실은 교도소와 직접적 관련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하려고 애쓸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역시 고전주의 시대의 전체적 비이성의 경험에서 이 두 구조가 나란히 유지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하나가 더 새롭고 더 활기에 차 있다 해도, 다른 하나가 완전히 위축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광기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서나 광기를 이해하는 공시적 의식에서 이러한 이원성, 곧 단절과 동시에 균형은 재발견될 것임이 틀림없다.

결정의 권한은 의학적 판단에 맡겨진다. 의학적 판단만이 광기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의학적 판단에 근거해서만 정상인과 정신이상자, 범죄자와 책임을 질 수 없는 정신병자를 구별할 수 있다. 그런데 수용의 실천은 전혀 다른 유형으로 구조화되고, 어떤 식으로도 의학적 판단에 종속되지 않으며, 다른 의식의 영역에 속한다. 17세기에 광기는 사회적 감성의 문제가 되었음이 사실이다. 광기는 범죄, 무질서, 추문과 가까워지면서 이것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감성의 가장 자연발생적이고 가장 원시적인 형태들에 의해 판단되기에 이른다. 광기의 사실여부를 결정하고 광인을 격리시킬 수 있는 것은 의료과학일기보다는 오히려 추문에 민감한 의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대표자는 국가의 대표자보다 광기에 대해 판단을 내릴 권한을 훨씬 더 많이 갖고 있다.

결과론적으로 상황을 고찰하면, 의학의 도움을 받아 광기의 한계와 형태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공들여 구상된 법적 광기론, 그리고 광기를 거칠게 이해하고 탄압을 위해 이미 준비된 수용형태를 이용할 뿐만 아니라 사법적 중재를 위해, 그리고 사법적 중재에 의해 마련된 구별방식을 충실하게 준수하려고 하지 않는 사회적이고 거의 공안적인 실천, 이 양자 사이의 괴리만이 있는 듯하다. 언뜻 보아 이 괴리는 정상적인 듯하다. 그러나 수용의 실천이 성립되기 전에,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오래 지속되는 로마법을 통해 성립된 법적 광기의 의식은 그후로도 오랫동안 치밀하게 가다듬어졌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괴리는 결정적 중요성과 특별한 가치를 갖는 것이다. 이 의식과 수용의 실천은 서로 다른 두 세계에 속한다.

하나는 형식과 의무가 분석되는 법적 주체로서의 인격과 관련된 어떤 경험의 영역에 속하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과 관련된 어떤 경험에 속한다. 전자의 경우에서는 광기가 어김없이 의무 체계에 야기할 수 있는 변모에 입각해서 광기를 분석해야 하고, 후자의 경우에서는 광기의 배제를 정당화하는 도덕과의 모든 연관성을 감안하면서 광기를 고찰해야 한다. 법적 주체로서 인간은 정신이 이상함에 따라 책임을 면제받지만,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광기로 인해 죄의식의 인접부로 끌려들어간다. 그러므로 광기의 분석은 법에 의해 한없이 섬세해질 것이고,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정신이상의 법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정신질환의 의학이 성립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다. 17세기에 표명된 법 해성에서 이미 정신병리학의 몇 가지 섬세한 구조가 나타나게 된다. 법학 개념의 압력 아래, 그리고 법인격을 명확하게 규정할 필요 때문에, 정신이상의 분석은 끊임없이 섬세해지고, 말리에서 뒤따르는 의학이론을 예고한다.

19세기의 정신병리학은 자연인 혹은 모든 질병 경험 이전의 정상인을 기준으로 하여 설정되고 평가된다. 사실 이러한 정상인의 개념은 창안물이고, 정상인을 위치시켜야 하는 곳은 자연의 공간이 아니라 사회인을 법적 주체와 동일시하는 체계이며, 따라서 광인이 광인으로 인정되는 것은 광인이 질병으로 인해 정상상태의 가장자리 쪽으로 옮겨졌기 때문이 아니라 광인이 우리 문화의 의해 수용의 사회적 명령과 권리주체의 능력을 판별하는 법률적 인식 사이의 접점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정신병에 관한 실증과학, 그리고 광인을 인간의 반열로 올려놓은 그 인도주의적 감정은 일단 이러한 종합이 이룩되고 나서야 가능했다. 이 종합은 이를테면 과학적이라고 자처하는 우리의 정신병리학 전체의 선험적 가설을 형성한다.

 

p245

 

두 가지의 정신이상이 있다. 하나는 주체성의 제한 같은 것으로, 개인이 지닌 능력의 한계를 정하고 개인의 무책임 영역을 획정하는 선으로 파악된다. 광기의 자연적 움직임과 주체를 후견인으로 대표되는 일반적 타자의 권력에 종속시키는 금치산 선고의 법적 움직임에 의해 주체의 자유가 박탈되는 과정을 나타낸다. 정신이상의 다른 형태는 이와 반대로 광인이 사회에 의해 이방인으로 인식되는 의식화를 가리킨다. 이 경우에 광인은 책임을 면제받지 못하고 적어도 친족과 이웃사람 사이의 공모 아래 도덕적 죄의식을 뒤집어쓰며 타자로, 국외자로, 배제된 자로 지칭된다. 심리학적 정신이상이라는 몹시 기이한 개념, 다른 성찰영역에서라면 애매한 요소들로 풍요롭게 될수 있을 터인데도 그 불확실한 요소들로부터 득을 보지 못하고 그저 정신병리학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평가될 이 개념은 사실상 정신이상에 대한 이 두 가지 경험, 다시 말해서 타자의 권능 아래로 떨어지고 타자의 자유에 얽매인 존재와 관련되는 첫 번째 경험과 타자가 되고 사람들 사이의 다정한 유사성과 무관하게 된 개인과 관련되는 두 번째 경험의 인간학적 혼동일 따름이다. 하나는 질병의 결정론에 가깝고 다른 하나는 오히려 윤리적 정죄의 모습을 띈다.

19세기가 비이성적 인간을 병원에 보내기로 결정하게 되고 이와 동시에 수용이 환자의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치료행위로 전환되기에 이르는 것은, 고전주의 시대의 합리주의가 언제나 출현가능성으로 남겨두었던 정신이상의 이 다양한 주제와 광기의 이 잡다한 얼굴을 혼란스럽고 우리로서는 분간하기 어려운 단일성으로 축소시키는 폭력적 술책에 의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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